|
흙에서 구리빛이 나서 동재기라고 했다.한양도성에서 경상 충청 전라도를 급하게 가려면 동재기나루를 이용했다.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되자 숭례문을 빠져나와 동재기나루를 건넜다.그리고 춘향이 있는 남원으로 달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당을 찾아낸 뒤 배봉산에서 신음하고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 수은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길 때고 이 길을 밟았다.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를 청주에서 체포해 창덕궁에 있는 영조에게 급하게
달려갈 때도 동작나루를 이용해야 했다.세째 아우 충령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효령군도 연주대에 오르기 위해서 동재기나루를
건넜다.태조 이성계의 청을 뿌리친 처남 강득용이 한양을 떠날 때 동재기나루를 건너 과천 땅으로 갔다.그도 공민왕이 그리워
그 높은 연주대를 올라 '님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랬다.
한강공원 반포안내센터 옆에 설치한 동재기나루터 표석이다.
동재기는 흑석동에서 현재 국립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銅)색을 띤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거기서 유래되어 붙어진 이름 동재기이다. 이 나루는 조선시대 서울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든가,
또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다.
동작진은 문헌상과 천현 북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동작역이 있는 이수천 입구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수심이 깊어 나루 위쪽에는 모노리탄(毛 老里灘)이란 여울이 있었다.
호남·호서지방의 과객과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나 사선 몇 척만이 운용되어 교통이 불편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변장이 파견되었다.
영조 22년(1746)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 받음으로써 나루터로써의 면모를 갖추었다.
<춘향전>에 이몽룡이 성춘향을 찾아가는 장면에 ‘역졸을 거느리고 가만히 숭례문을 내달아
칠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을 지나고 동작강 얼른 건너 남태령 뛰어넘어 과천에 이르니…’라고 쓰여있어
동작나루가 과천가는 지름길임을 암시했다.
동작나루는 근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한강인도교의 건설로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동작대교가 건설 되어 옛 지명을 재현하게 되었다.
한강에서는 동작나루에서 부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연산군 때 부교에 관련 기사가 크게 늘어난다.
<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이 한강 남쪽의 청계산(淸溪山)으로 왕래하며 사냥하기를 낙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백성들의 배 800척을 취해서 큰 다리를 엮어 한강에 가로질러 놓고 항상 내관 수십기와 더불어 청계산을 왕래하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王取民船八百艘結爲大橋橫跨漢江每與內官數十騎往來淸溪山射獵爲樂)”
“한강 부교의 배는 비록 해빙이 되더라도 철거해서는 아니 되니 선박을 많이 준비하여훼손되는 대로 보완하여 견고하게 하라!"
(漢江浮橋船雖解氷不可撤去多備舟船隨毁隨補使之牢緻)”-실록 연산군 11년(1505) 11월 19일자 기사에서-
사냥을 좋아하는 연산군이다.그는 왕실의 사냥터가 있는 청계산으로 가는 길목에 동작강이 있다.
그 남쪽에 있는 청계산에 사냥을 나갈 때마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배를 타는 일이 번거롭고 위험하였다.
그는 보다 안전한 '물 위에 뜬 다리' 부교(浮橋)를 건설하라는 영을 내렸다.
물 위에 뜨는 다리는 배를 이용하여 건설하였다. 그래서 주교(舟橋) 배다리로 불렸다.
배다리는 한 번 건설될 때마다 배가 약 8백 척씩 동원되었다.포졸들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면서 배를 끌고 갔다.
거역하는 자나 배를 가지고 멀리 떠난 자들은 잡아들여 곤장을 때렸다.마침내 용산과 노량진 한강변 일대에 약 8백 척의 배가
모여 들어 장관을 이루었다.배다리 건설은 배만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배와 배를 묶고 그 위에 커다란 목재를 엮고
다시 판자를 깐 뒤에 떼를 놓는 다.목재를 운반하는 일도 엄청난 공사였고, 떼를 실어 나르는 일도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한강에 배다리를 건설할 때마다 수천명의 역부가 동원되고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배다리가 완성되면 마침내 연산군이 사냥을 나갔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배를 동원하여 부교를 만들고도 철거하지 못하게 하고 배다리를 건너 매양 수십 명의 내시와 함께 청계산을
왕래하면서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한강 일대에서 배로 생업을 이어가던 사람들은 이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 꿩 한 마리였다 / 상감마마께오서 슬쩍 비아냥대었다
정승의 위엄에다 / 5만 군사의 위엄에다 / 고작 한 마리 까투리라
이런 세월 있었다 있다 있으리라”
고은 시인이 23여년 만에 탈고한 시집 <만인보>의 마지막 시 ‘한강 배다리’의 일부다.
한국 문학사 최대의 연작시로 일컬어지는 <만인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의 여러 인간상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만인보는 제30권까지 약 3천800여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만인보의 대미를 장식한 시 ‘한강 배다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시에서의 상감마마는 바로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사냥을 위해 도성 30리 내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고
짐승을 풀어놓을 만큼 광적으로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이 사냥하러 간 곳은 과천쪽 청계산이다. 이때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으로 거둥하였다.
동작나루를 건널 때 백성들의 배를 강제로 징발해서 배다리를 놓았다,
동작나루에 기이한 섬 바둑섬 기도(棋島)이 있었다.
바로 바둑섬 기도(棋島)다.이 바둑섬에서는 흰돌(白石)이 많이 나왔다.바둑의 흰돌로는 마땅한 돌이다.
원래는 반포섬(盤浦島)로 불렀다,바둑돌이 많아 나온다고 해서 기도(棋島)로 바꿔서 불렀다고 전한다.
“…서빙고 말 무덤 지나 놓고…동작소 흘러내려 바둑 섬을 건너서서 흑석이며 노들이요…”
-서울 무속인 성주풀이에서-
바둑을 좋아하는 관리들이 일과 중에 바둑을 두다
들키면 이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이 섬에서는 바둑의 흰돌이 나왔다고 한다.
검은 바둑돌은 흑석동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이 바둑섬 기도는 반포섬으로도 불리웠다.
잇단 한강개발로 반포섬은 없어졌다.
1984년 한강종합개발사업 때 서래섬으로 다시 태여났다.
봄철 서래섬은 유채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오는 5월 13일부터는 유채꽃이 절정을 이룬다.
이때부터 이곳 유채꽃 단지에서 유채꽃 축제가 벌어진다.1년 내내 각종 꽃과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사진 촬영은 물론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시민들에게 단연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허파'기능을 하는 서래섬이다.
관악산의 봉우리 중에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다.
그 위에 석축을 쌓고 자리잡은
암자를 연주대(戀主臺)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6년 만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종을 거쳐 태종이 집권을 한다.
그리고 그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세자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를 원치 않았다.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해 경거망동한 행동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며 자신의 뜻대로 폐세자가 됐다.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폐한 태종은 총명한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양녕은 언제나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 인물로
정치적 분란의 가능성을 우려한 신하들의 감시와 난언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조금만 잘못을 해도 격렬하게 탄핵했다.
세종은 '양녕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도 종종 들었지만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고
단 한 번도 민감하게 반응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1년에 한 번 정도 형 양녕대군을 불러 우애를 나눴다.
세종 20년(1438) 1월에는 양녕대군을 서울에서 살도록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서울과 이천을 오가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을 감쌌고, 양녕대군 역시 동생의 믿음에 보답해 오해받을 행동을 결코 하지 않았다.
항상 한강 남쪽에서 지내며 한강을 넘지 않았다. 그 시절 도성은 한강 이북이었다.
양녕대군은 도성을 떠나기 전 한강 남쪽 강둑에 서서 한양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북악을 향해 절을 했다.
“나의 동생 충녕아. 네가 내 대신 임금이 되어서 고생을 많이 하는구나.
…우리 형제 중 나나 효령대군은 장수할 것이다마는 너는 온 정력을 쏟아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니 우리만큼 장수를 하랴? 미안하오 상감마마.”
이제 영원히 한강 쪽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가 살 것이며, 한강을 절대 넘지 않겠다는 약조의 의미였다.
임금의 형인 양녕대군은 그의 처신을 잘 알고 방배하고 떠났으니 양녕대군이 ‘등지고 떠난 동네’라 해서
그 곳의 이름은 오늘날 방배동이 되었다.
-2013년 서울스토리텔링 관광명소화 프로젝트 <한강이야기자료집>에서-
정조는 생애 세 번이나 크게 울었다.첫째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크게 울었다.
둘째는 큰아버지 효장세자에게로 입적되었을 때도 그렇게 울었다.세째는 경기도 양주 땅 배봉산 기슭
수은묘를 이장하기 위해 무덤을 열었을 때 더 크게 울었다.그 광중에 물이 석자나 고여있기에 그렇게 울었다.
사도세자의 시신을 거둬 수원 화산으로 가는 길이었다.관악산 동쪽 기슭 여우고개 쉰고개에 도착했다.
예전에 남태령은 수목이 울창하고 후미진 곳이 많았다고 한다.
여우가 많이 나타났다 하여 여우고개라고 불렀다.
정조 큰 임금이 수원 화산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찾아가는 길에
남태령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잠시 쉬어가게 하였다.
"이 고개가 무슨 고개인가?"
한 시골 노인에게 고개의 이름을 물었다.
"예, 남태령이라 하옵니다"
그 노인은 임금에게 남녘에 있는 큰 고개 남태령이라고 아뢰었다.
이때 옆에 있던 과천현 이방이 나섰다.
"상감마마,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남태령이 아니라 여우(여시)고개라고 합니다."
정조도 이 고개가 여우고개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자한 정조임금도 크게 꾸짖으셨다.
"네가 어찌 짐에게 거짓 이름을 고하느냐?"
한 노인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 시골 노인은 고개 이름을 다르게 고한 사유를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해명을 하였다.
"본시 여우라는 동물은 인간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동물이 아닙니다.
흔히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얕은 꾀를 부리고 잔재주를 부리는
사람을 여우같은 놈이라고 말합니다.
성스러운 상감마마께 쌍스럽고 하잖은 여우고개라는 이름을 감히 말씀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름대로 한양에서 남쪽으로 가다 만나는 첫번째로 큰 고개라는 뜻으로
남태령(南泰嶺)이라고 아뢴 것이라고 했다.
정조는 촌노인이 자기를 생각한 마음에 감동되어 오히려 옆에서 고자질한 과천현의
이방에게 곤장 10대를 치게 하였다.
정조는 잠시의 노여움을 풀고, 시골 노인을 오히려 가상히 여겼다.
그에게 주지(周知)란 벼슬을 내리고 후로는 이 고개를 남태령이라 부르도록 했다.
그 촌로는 과천에 살던 과천 변씨(邊氏)로 현재까지 자손 8대에 걸처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남태령의 옛길을 지나 언덕을 숨가쁘게 오르면 큰길을 만난다.
그 길 가운데 '남태령(南泰嶺)'이라는 큰 돌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비석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集子)하여 조각한 것이라 한다.
추사 김정희와 과천은 인연이 깊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추사의 선친 김노경이 회갑연을 앞두고
과천에 별서(別墅)인 과지초당(瓜地草堂)을 지으면서 과천과 추사 김정희의 인연이 시작된다.
충청남도 논산 조선 후기 소론 영수 명재 윤증(1629~1714) 고택이다.
그의 사랑채는 대문이 없다. 솟을대문은 사대부 집 상징이다. 그런데 이 집에는 대문이 없다.
대문이 없으니 담장도 없다. 뚫린 길에서 곧장 마당이 나오고 그 고택의 사랑채가 노출돼 있다.
가을 추수를 하고 곡식을 마당에 쌓아 놓았다.마을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는 곡식이다.
그 집주인 명재 윤증은 참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조정의 벼슬 부름에 20번이나 수락하지 않았다.
그의 벼슬 거부이력은 다음과 같다.
38세에 공조 좌랑, 39세에 세자익위, 40세에 전라도사, 41세에 사헌부 지평, 44세에 사헌부 장령, 45세에 집의,
53세에 성균관 사예, 54세에 경연관, 55세에 장악원정과 호조참의, 57세에 이조참판, 68세에 공조판서와 우참찬,
69세에 제주, 70세에 이조판서, 73세에 좌참판, 74세에 좌찬성, 81세에 우의정, 83세에 판중추부사 등이다.
우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는 열여덟 번이었고, 판중추부사 사임 상소는 아홉 번이었다.
우의정 자리도 거부하는 그를 보고 당시의 인심은 ‘백의 정승’이라는 칭호를 붙일 정도였다.
조선 숙종은 서인과 남인의 끊임없는 당쟁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묘안을 짜냈다.
숙종은 한 마디로 당대의 명망 있는 정계 원로 3인을 초빙해 정치권의 변화와 혁신을 도모하겠다는
획기적인 정치실험의 모험을 한 것이다.숙종이 염두에 둔 원로 3인은 우암 송시열, 남계 박세채, 명재 윤증이었다.
이른바 숙종의 ‘삼인동사’(三人同事)이다. 이들 중 주목해야 할 두 인물은 남계 박세채와 윤증 명재다.
두 사람은 재야에 머물면서 정치권을 멀리한 존경받던 학자들이다.
특히 명재 윤증은 조정의 꾸준한 입각요청에도 변함없이 거부해왔던 지조 높은 선비였다.
1680년 경신년 남인에게 넘어갔던 정권이 서인에게 돌아왔다. 정국은 여전히 혼란했다.
3년 뒤 숙종은 정계를 떠나 있던 서인 지도자 3인을 불렀다. 송시열, 박세채, 윤증이다.
박세채에 이어 송시열이 입경했다. 과천에서 대기 중인 윤증에게 박세채가 가서 복귀를 청했다.
여기서 과천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자리한 곳에서 삼풍아파트 근처를 말한다.
1914년 측정한 지도에 나오는 이곳 명달리다. 명덕리 명월동 명촌리라고도 한다.
이 일대는 안정(安定) 나씨 집안의 세거지다.
우암 송시열은 도성으로 들어갈 때 나씨의 별서에 묵었고 명재 윤증도 가끔 이 집에서 유숙하였다.
그때 윤증과 박세채와의 대화다.
"(그릇되게) 추록한 공신을 삭제해야만 일을 할 수 있는데, 형이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외척의 당파를 물리칠 수 있는가?" "
할 수 없다."
"지금 (송시열이 지배하는) 세상이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를 두둔하니 이런 풍습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윤증이 박세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조정에) 들어갈 길이 없다."
윤증은 고향 논산으로 돌아갔다.('연려실기술', '강상문답')
명재 윤증은 조정 입각을 심각히 고민하던 차에 최후의 결단에 앞서
남계 박세채와 과천에서 만나 입각의 전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첫째, 정권을 빼앗긴 남인의 한(恨)을 풀어줘야 한다.
둘째, 숙종의 외척들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
셋째, 당파가 다른 이를 배척하고, 자기 당에만 복종하는 자만을 등용하는 잘못된 정치풍토를 쇄신해야 한다.
남계 박세채는 명재의 제안을 고심하더니 세 조건 모두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명재 윤증은 “이 세 가지 조건이 불가능하다면 입각할 수 없다”며 출사를 포기하고 낙향했다.
남계 박세채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두 사람의 회동 결과를 기다리던 우암 송시열도 화양동 계곡으로 낙향했다.
결국 숙종의 야심찬 정치실험인 ‘삼인동사’는 실패로 끝난다.
1970년대 서울시는 영동(永東)지구를 집중 개발한다. 그 永東은 영등포 동쪽의 부심권을 말하는 신조어이다.
반포동은 과거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흘렀다고 해서 서릿개, 반포(蟠浦: 뱀처럼 휘감는 물가라는 뜻)라고 했다고 한다.
그 뒤 뜻이 변해 반포(盤浦)로 부르게 됐다. 이곳이 상습 홍수피해 지역이어서 반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1752년(영조 28)부터 1910년까지 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인 『일성록』에 1790년(정조 14년)
“반포리 옆의 강가에 둑을 쌓아 막았다”고 쓰여 있다. 어쨌든 한강 옆이어서 물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서울시는 1970년대 이곳 늪지대 반포의 공유수면을 매립해 대단위 택지를 조성한다.
새로 조성한 땅에 대한주택공사가 AID차관을 끌여들여 중대형 고급아파트를 건립한다.
1972년5월25일 남서울아파트(구반포주공1단지) 분양을 시작한다.
일반주택에서 아파트로 특히 중대형 고급아파트로 관심을 끈 것이 반포아파트다.
구반포에서 시작한 아파트건설은 잠원동까지 반포일대로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