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배달국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북두칠성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변천도
연 1 : BC 1,046 ~ BC 770년경 연 2 : BC 675 ~ BC 530년경 연 3 : BC 530 ~ BC 414년경 연 4 : BC 414 ~ BC 300년경 연 5 : BC 300 ~ BC 222년경 연 6 : 한나라 시대 |
우리는 흔히 연나라 하면 북경지역을 떠올리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북경유역은 우리 상고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고조선의 범위가 난하까지만 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 800여 년 동안 연나라가 북경유역을 점유한 기간은 80년 미만에 불과하다. 즉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연나라가 진시황에게 멸망당하는 기원전 222년경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주어도 80년을 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다.
그 나머지 수많은 세월 동안 북경유역은 변함없이 고조선의 중심 강역이었다.
앞으로 갈석산이 이를 웅변해줄 것이다.
연나라는 유사 이래로 중화족의 동․북단에 위치하여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면서 흥망을 거듭하였는데 먼저 연나라 강역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연나라는 기원전 1,046년경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고 소공 석奭을 북연北燕에 봉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의 연나라 위치는 하남성 낙양 서쪽의 섬陝 지역으로 파악된다. 『춘추좌전』과『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770년경 견융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도읍을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자, 연나라는 낙양부근에서 차츰 황하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이로부터 연나라는 계속 고조선 세력과 충돌하면서 흥망성쇠를 반복하게 된다. 기원전 675년경에는 하북성 순덕부(邢, 한단邯鄲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고조선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북상하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기원전 663년 제환공이 연나라와 더불어 산융을 정벌하고 고죽국孤竹國까지 이르렀다는 『사기』 ‘제세가’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나라가 일시적으로는 하북성 중부 호타하 부근까지도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530년 연나라는 내부반란을 계기로 하북성에서 산서성 중부의 당唐(태원 남부)으로 이동하였고, 삼진三晋과 그 뒤를 이은 조나라의 강력한 북진정책에 밀려 연나라는 차츰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기원전 414년 태행산맥의 서쪽 산서성 중․북부를 지배하던 백적 선우부鮮虞部가 연나라 등에 의하여 태행산맥 동쪽의 하북성으로 밀려난 후 중산국中山國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기』‘조세가’는 “BC 414년 중산국 무공(武公)이 초립(初立)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연나라가 산서성 중부의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414년경이다. 이때로부터 진시황에 의하여 연나라가 멸망하는 기원전 222년까지 대략 200년 간 연나라와 고조선은 산서성과 하북성의 북부지역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북경을 중심으로 한 하북성 북부지역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북경지역을 점유했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전 222년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주어도 80년을 넘지 못한다.
그 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연나라는 위만조선과 흉노족에 의하여 산서성 중부의 만리장성 이남지역으로 밀려나게 된다.
본 글은 연나라가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했던 기원전 414년 무렵부터 연나라가 멸망한 기원전 222년까지 약 200년 동안의 연나라 강역의 변화, 그 중에서도 특히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한 시기의 연나라 강역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2)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 강역
연나라가 산서성 북부지역으로 진출한 기원전 414년경부터 기원전 300년경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전 연나라의 강역을 중화족의 사서들을 통해 살펴보자. 모두 약방의 감초처럼 갈석산이 등장한다. 이 갈석산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상고사의 영원한 방랑자가 되고 만다.
이 갈석산이 바로 중국의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①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중략...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전국책』‘연책燕策’
② “연나라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중략...(이것으로) 나라를 굳게 지킬 수 있으니 산천은 나라의 보배이다.(燕塞碣石 絶邪谷 繞援遼...中略...邦國之固 而山川社稷之寶也)” 『염철론』‘험고險固’
③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東,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時則訓’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의 위치 |
위의 ①은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한 말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이므로 윗 구절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 강역을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와 역수가 있고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 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하였고, 역수는 오늘날의 거마하이다.
그러므로 ①의 기록을 통하여 연나라 남부는 대략 안문에서 갈석산(백석산)에 이르는 장성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②의 『염철론』은 전한 소제昭帝 6년(BC 81),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할 것인지 폐지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진 저명한 논쟁을 환관桓官이라는 사람이 정리하여 완성한 문헌이다. 연나라가 갈석산에 의하여 막히고 요수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또 ③의 『회남자』‘시칙훈時則訓’에서 갈석산을 지나면 조선이라고 하였다.
갈석산(백석산)은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를 가르는 험준한 산맥으로 저 유명한 자형관紫荊關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다. 위의 ①, ②, ③의 기록들을 종합하고, 갈석산 주변의 지형들을 참조하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나라는 동남쪽은 갈석산(백석산)에 의하여 막히고, 동북쪽은 영정하에 의하여 둘러싸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연5군을 설치하였고, 상곡군의 위치가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기 때문에 고조선 침략전 연나라의 강역이 절대로 영정하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러므로 갈석산(백석산) 동쪽이 조선이고, 영정하가 요수遼水이며 그 동쪽이 요동이다. 그리고 서쪽과 북쪽은 장성을 경계로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의 연나라 위치는 대략 위의 지도처럼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지도의 갈석산(백석산) 동쪽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였고, 낙랑군의 치소였던 왕검성이 위치하였다.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다.
만성현滿城縣 주변에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의 지명도 지금까지 버젓이 남아있다.
참고로 위 지도에 표기한 난하 부근의 갈석산은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 갈석산이다.
위의 ① 소진의 말에서 보는바와 같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의 남쪽에 갈석산이 있었는데, 만약 난하 부근의 갈석산이 진짜 갈석산이라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후 설치한 상곡군 등 연5군이 모두 난하 동쪽으로 가야만 하는 엉터리 결과가 되고 만다. 아마 상곡군을 난하 동쪽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본다.
(3)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연나라 강역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은 연나라 소왕(昭王, 재위 BC 312~BC 279) 때의 일이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에 대한 기록은 단 몇 구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몇 구절이 우리 상고사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한반도로 축소되기도 하고 중국 북경근처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단 몇 구절에 의하여 고조선의 강역이 수 천리씩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관련 기록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사기』의 ‘조선열전’과 ‘흉노열전’그리고『삼국지』‘위지 동이전’을 통해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①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사기』‘흉노열전’
②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ㆍ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사기』‘조선열전’
③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삼국지』 ‘위지 동이전’
위 ①에서 보듯이 사마천은 『사기』‘흉노열전’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쳤다고 하였다. 그런데 ③의 『삼국지』‘위지 동이전’은 진개가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동호東胡와 조선이 같은가? 그리고 진개의 침략이 천여 리 인가? 혹은 2천여 리 인가? 많은 논란이 있다.
동호라는 명칭은 예맥, 조선, 진번, 부여, 오환, 선비 등 흉노족의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는 의미로 쓰였다. 동호 속에 조선도 자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진개의 고조선 침략 당시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있었다. 위의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글을 보더라도 역시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하여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의‘흉노열전’과 ‘조선열전’에서 진개가 침략한 동호는 바로 진번과 조선을 말한다.
진개가 동호 즉 진번과 조선을 천 여리 물리치고 장성을 쌓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남쪽이 바로 진번과 조선이 있던 곳이다. 후일 이곳은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이 되며, 한나라의 낙랑군과 초기 현토군이 설치된 지역이며, 고구려 초기의 중심 강역이 된다.
그런데 사마천은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천여 리라고 하였는데, 위략은 2천여 리라고 기록하여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위의 지도에서 갈석산(백석산)의 위치와 조선의 위치를 보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성을 중심으로 진개의 침략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동서간의 거리인 천 여리로 기록하였다. 반면 위략은 영정하 남쪽의 조선지역 천 여리와 영정하 동쪽 요동지역 천 여리를 합하여 2천 여리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연나라의 강역은 대략 난하 유역까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주류사학계는 진개가 1차로 동호를 천 여리 공략하여 난하까지 영토를 넓힌 후 2차로 고조선을 천여 리 공략하여 현재의 요동반도까지 영토을 넓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조선의 수도를 한반도 평양으로 보는데서 오는 무리수이다.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진개의 고조선 침략을 전후하여 연나라의 동쪽에는 고조선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동호와 조선을 별개로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면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설치한 연5군의 구체적인 위치는 어디일까?
중국지도집(1975년 작) 및 기주협우갈석도(남송, 1177년 작) |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지도인 남송시대(1177년 작)의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http://blog.daum.net/sabul358/9263034 참조)는 우리 상고사의 핵심인 갈석산을 중심으로 연5군의 위치 및 요수의 위치와 요택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옮겨놓은 것이 위의 지도이다. 참고로 『기주협우갈석도』는 좌우가 남북으로 그려진 것이므로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보아야 필자가 현대지도에 옮긴 것과 같아진다.
진개의 고조선 침략 후 설치한 연장성은 위의 지도에서 붉은색 점선으로 표시하였으며 대략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계현(薊縣)까지이다. 연5군은 그 연장성 아래 위치하였다. 그리고 위의 지도로부터 진개의 침략 후에 요수遼水가 영정하에서 조백신하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주협우갈석도』의 대요수大遼水가 난하일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고지도(청조일통지도 등)에 현재의 강물 흐름과 달리 난하의 하류가 조백신하와 연결되는 것도 보인다. 이 경우 소요수는 조백신하이고, 대요수는 난하가 된다.
그리고 위의 『기주협우갈석도』에서 갈석산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지도의 발해 가운데 갈석을 설명한 다음의 글을 보면 갈석산이 역수(오늘날의 거마하) 하류의 서쪽에 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역수․탁수․요수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 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또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아래와 같이 어양군 옹노현雍奴縣에서 시작하는 늪지대를 설명한 구절이 있는데 이 늪지대가 고당전쟁에 나오는 저 유명한 요택遼澤이다. 이 일대는 황하에 의해 떠내려 온 황토들이 수 백리 늪지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도 문안와文安窪의 너른 늪지대가 존재한다.
“기주 북쪽의 모든 물은 이곳에 모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범람하지 않을 때는 물웅덩이들이 나누어진다. 물이 불어 범람하면 하나가 되므로, 물이 이곳에 이르면 어느 강물인지 알 수 없다. 통합하여 구십구 물웅덩이라 한다.(冀北諸水聚此入海 水若不漲時每澱猶有分域 至水盛時成漲爲一故 水經至此不能分別其爲何水총曰九十九澱)”
우리 상고사에 자주 등장하는 요수, 요택, 요동 등의 지명들은 모두 이곳에서 찾아야한다. 오늘날의 요하는 조선중기까지도 압록강으로 불린 곳이다.
3. 제비도 알고 있는 갈석산
우리에게 익숙한 판소리 흥부가는 제비의 노정路程에 빗대어 우리 민족의 일부가 중국 사천성 파촉 땅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으로 노래하였다.
가야의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도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판소리 흥부가 중 제비가 박씨를 물고 중국 사천성 파촉 땅으로부터 경상도 함양과 전라도 운봉의 경계에 사는 흥부집으로 오는 노정을 노래한 ‘제비노정기’의 일부를 살펴본다.
갈석산, 요동, 압록강 등의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흥보씨 제비가 보은표 박씨를 입에다 물고 만 리 조선을 나오넌디, 경치가 장히 좋든가 보더라. 흑운을 박차고, 백운 무릅씨고, 거중으 둥둥 높이 떠 두루 사면을 살펴보니, 서촉 지척이요, 동해 창망허구나.......중략....... 연조지간을 지내여, 장성을 지내여, 갈석산을 넘어 연경을 들어서서, 황극전에 올라 앉어 만호 장안을 구경하고 경양문 내달라, 장달문 지녀여, 동간을 들어가니 산 미륵이 백이로구나. 요동 칠백 리를 순숙히 지내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다달아, 영고탑․통군정을 올라앉어....... 중략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이라. 운봉․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 저 제비 거동을 봐라. 박씨를 입에다 가로 물고, 남대문 밖 썩 내달라 칠패․팔패․배다리지나 아야고개 얼른 넘어 월강, 승방을 지내였구나. 남타령 고개를 넘어, 두 쭉지 옆에 끼고 수루루루 펄펄.”
제비노정 및 갈석산 부근 상세도
(아세아동부여지도, http://blog.daum.net/sabul358/18321787 참조) |
<낱말풀이>
① 연조지간을 지내여 : 연조지간은 연나라와 조나라의 사이를 말한다. 이때는 한나라 이후로 연나라는 산서성 태원부근이며 조나라는 하북성 한단부근이다.
② 장성을 지내여 : 산서성 중부의 만리장성을 말한다. 평형관平型關을 지난다.
③ 갈석산을 넘어 연경을 들어서서 :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백석산의 자형관紫荊關을 넘어 연경(북경)으로 들어선다.
④ 요동 칠백 리 : 연경(북경)에서 산해관까지 거리가 700리 이다. 그러므로 요동 땅은 대흥안령산맥 동쪽으로 영정하 또는 조백신하로부터 난하 동쪽의 칠로도산까지 이다.
⑤ 압록강을 건너 : 압록강은 현재의 요하遼河이다.
⑥ 의주를 다달아 영고탑․통군정을 올라 앉어 : 의주는 현재의 요동반도이고, 영고탑은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에 있으며, 통군정은 현재의 압록강변에 있는 옛정자이다.
4. 맺는말
갈석산(백석산)은 고조선 역사의 산 증인이다. 갈석산(백석산)의 자형관을 넘어서면 조선과 요동이 나온다.
조선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갈석산과 발해만, 남북으로는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요동은 북경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영정하와 칠로도산, 남북으로는 대흥안령산맥(또는 장성)과 발해만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 지역이 고조선의 핵심지역이며, 중화족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연5군이 설치되었고, 낙랑군과 초기 현토군 등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갈석산(백석산)을 알아야 상고사의 진실을 알 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