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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학문탐구는 현재 고도로 정보화, 산업화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확장과 평행선상에 있어야 한다. 학문도 우리 삶의 형태의 변화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시대의 인문학은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너무 확실히 해버려 인간의 삶을 떠나버리는 학문이 되고 있다는 반성이 있다. 삶과 학문의 괴리 속에서 왜 학문을 하는가, 혹은 왜 철학을 하는가하는 것을 되묻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서구의 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이 더 이상 죽은 학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학문에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사회현상이나 문화예술사조 혹은 사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접목시킨다. 아울러 이들은 타학문과의 간단없는 교류로 자신의 학문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 나간다. 즉 현재 서구의 학문 추구방식은 범학문적(interdisciplinary)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현대사회의 일상적 흐름과 연동되지 않거나 분과학문과의 교류가 없는 학문은 화석처럼 고체화되어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즉, 철학자 이남인이 자신의 학문 철학을 예를 들어 말한 듯이, ‘분과학문과의 소통이 결여된 철학은 공허와 자폐의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철학과 소통이 결여된 분과학문은 맹목적인 독단의 위험에 빠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나라 무용학(Dance Studies) 연구는 왜소하기만 하다. 외부학문의 적극적인 도입이 없는 무용연구는 수분을 섭취하지 못하는 식물처럼 시들어 갈 것이다.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예술의 내용을 학문적으로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면 그 예술은 사회와 학문세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사실 무용처럼 사회의 편견을 받는 예술은 없다. 무용은 물질적으로 사회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또한 미학적으로도 강력한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있으면서, 일반대중에게 무용의 중요성을 인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무용수, 무용교육자, 무용학생 스스로도 자신이 없다. 이는 여러 가지 사회요인 때문에 누적되어 온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무용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그리고 학문적 의미를 사회에 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용의 사회적, 학문적 중요성을 사회에 알리려고 한다면, 무용수 신체 움직임으로는 되지 않는다. 타학문과의 적극적인 교류로 스스로의 학문적 중요성을 강화하고 난 다음에 학문적 토론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무용학 연구는 관련 학문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즉 무용의 학문적, 혹은 인문학적 접근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기위주의 교육이 무용학 연구의 범학문적이며, 인문학적 탐구를 어렵게 만들어 온 것이다. 현재 서구의 무용학자들은 무용학 연구를 철학, 미학, 사회학, 인류학, 예술사상사,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등 타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내고 있다.
이들은 학문과 학문과의 만남은 기존학문에 새로운 힘과 원동력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자신의 학문을 죽이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무용과 철학의 만남을 통해 철학이 살아서 숨쉬는 학문이 되고, 무용이 지성미 넘치는 논리를 가지는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천착하다. 즉 왜 무용의 인문학적 접근이 무용과 인접학문을 살리는 것이 되며, 왜 이런 학문적 교류가 필요한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첫째로, 그동안 왜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무용을 경시해왔는지 살펴본다. 그 다음 전통 철학의 인간 신체에 대한 사유방식을 살펴보고, 이에 대응하는 현대 철학자의 견해도 조사한다.
그 다음 무용의 언어적 의미와 표현적 특성을 살펴 무용의 학문적 의미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무용수들은 자신들의 신체를 통해 어떤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탐구를 해나가는지 보면서, 21세기 무용학의 인문학적인 접근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왜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무용을 경시해 왔는가?
서구의 무용 역사학자들은 무용과 건축을 가장 본질적이며 오래된 예술로 생각한다. 건축이 인간 외부적인 상태에서 모든 예술의 시초가 된다면, 무용은 인간 그 자체의 표현으로서 다른 예술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무용과 건축은, 음악, 연극, 시, 조각, 회화 등 모든 예술의 근원이 되며 이 두 개의 예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오래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새들이 집을 짓는데서 건축의 기원을 찾았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행성의 규칙적인 운행모습에서 무용의 기원을 파고든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예술인 무용이 과연 인문학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는가?
미국의 여성철학자 수잔 랭거는 그의 책 「느낌과 형식(Feeling and Form)」에서, ‘무용만큼 잘못 평가되고, 오해되고, 엉뚱한 해석을 받은 예술은 없다’고 했다. 이런 무용에 대한 오해를 캐나다의 철학자 프란시스 스파숏은 그의 논문 「왜 철학은 무용을 경시하는가(Why Philosophy Negelects the Dance)」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비록 1981년에 쓰여진 글이라서 현시대 무용의 각도에서 보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는 그 동안 인문학과 철학이 무용을 오해해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첫째, 무용은 여성적 예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두번째, 무용은 다른 예술에 비해서 타 인문학자들이 접근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번째, 무용이 육체적인 것(corporeal)이어서 철학자들이 이유 없이 학문적 접근을 두려워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파숏이 지적한 바로 이 세 번째 요인은 그 동안 서양의 학문적 사유에서 가장 아킬레스건이 되어온 소위 말하는 이분법 논리의 산물이 된다. 즉, 근거 없이 정신을 우위에 둔 신체/정신 이분법 논리가 무용의 건전한 사회적 수용과 학문적 탐구를 방해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무용의 인문학적 접근을 막아온 많은 요소 중 하나는 서양의 지식이나 학문적인 폭을 스스로 좁혀왔던 이분법에서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방금 앞에서 거론했던 정신을 우위에 둔 정신/신체 이분법을 포함하는, 문자를 우위에 둔 문자/영상 이분법, 이성을 우위에 둔 이성/감성 이분법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근대적 학문은 이성적인 방법에 따라 세워진 객관적인 지식의 체계만을 학문으로 간주해왔다. 즉, 학문이 거의 과학의 경지가 되어왔다. 그런데 근대 이후 모든 학문에서 객관적 과학이기를 과도하게 요구함으로서 삶의 어떤 부분,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학문의 영역에서 소외된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학문에서 삶의 가장 절실한 부분이 되는 감성적 언어가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서양 학문의 이런 전통은 일찍이 칸트가 이성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지성이지만, 감성은 동물과도 공유되는 본능이라고 하면서 감성을 폄하시키면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이전에 플라톤은 감성은 개인의 합리성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합리성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즉, 서양의 사유의 전통은 최근에까지도 이성을 우위에 둔 감성/이성 이분법이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이분법의 바탕 위에서 인간의 신체로 이루어지는 무용은 지성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온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분법은 문자를 우위에 둔 문자/영상 이분법이 된다. 이들은 영상으로 나타나는 무용과 영화 같은 예술은 글과 달리 한정된 철자적 요소를 갖지 못하고, 그 요소들의 결합 방식도 정형화될 수 없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무용, 영화 등의 회화적 상상력은 글의 기술적 상상력과는 엄청난 지성적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중적 감각과 비선형적 사유 양상을 띠고 있는 무용 같은 영상예술은, 결코 시각적 감각과 선형적 양상의 사유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활자매체의 이성을 대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로 이런 철저한 전통적 이분법의 논리들이 무용 같은 예술의 인문학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재의 인문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생각은 어떤지 살펴보도록 하자.
현대 인문학자들의 전통적 이분법에 대한 생각
영화이론 철학자인 그레그 스미스는 1999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국지적 감성, 총체적 무드와 영화구조(Local Emotions, Global Moods and Film Structure)」에서 ‘로맨틱 사상(romantic notions) 이후 오랫동안 서양의 학문은 감성(emotions)과 인지(cognition)를 아무런 근거 없이 서로 반대의 개념으로 두는 이분법에 빠져 있었다’라고 했다.
즉, 전통적 인지론자(cognitivism)들은 이성적 절차(rational process)만 중요시하여 인간 삶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인(어떻게 보면 훨씬 빈도가 높은) 비이성적인 세계(irrational world)를 무시해왔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감성은 그들의 이성적 목적을 더욱 빠르게 움직이는 결정적 동기를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면 감성은, 갑자기 사자가 나타났을 때 재빨리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심사숙고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효과적인 충격을 준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감성은 이성을 방해하는 방해자가 아니라 효과적인 기능자로 보았다.
이보다 약 30여 년 전인 1976년에 그의 책 「예술의 언어(Language of Art)」에서 ‘전 세계의 공용어가 없듯이 세계 각 국의 무용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라고 하면서 무용의 언어적 성질을 강조했던 영국의 언어철학자 넬슨 굳맨은 지금까지 철학에서 인지/정서 이분법이 많은 성가신 문제들을 야기시켰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모든 미학적인 경험(aesthetic experience)은 ‘인지적으로 작용하는 감성의 흐름’에 의해 유지된다고 했다. 즉, 인간의 인지 경험과 감성 경험은 서로가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가 서로 상호교환하고 결합하여 복합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칸트를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이 감성과 이성의 기능을 칸막이가 된 독립된 전달기능으로 분리하는데 비해 현대 철학자들은 감성, 이성의 기능을 나누지 않는다. 특히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베스트는 그의 책 「움직임과 예술의 표현에 대한 철학적 탐구(Expression in Movement & the Arts: A Philosophical Enquiry)」에서 ‘마음은 신체로부터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신체의 기관들 중의 하나’라고 했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몸과 마음을 나누어 보는 것이 큰 문제였다고 하면서 정신/신체 이분법과 감성/이성 이분법을 한꺼번에 타파한다. 즉, 왜 정신의 반대말이 신체냐는 것이다.
더 더욱이나 20세기 후반 서양의 미학자들은 모든 미학적 판단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이성(reason)이나 논리(rationality)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들은 미학 판단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이성이나 논리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객관성의 개념에는 느낌(feelings), 감정(emotions), 상상력(imagination), 창조성(creativity) 등의 개념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감성이라는 것도 설명될 수 있고 스스로 논리를 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는 이들은 철학의 논쟁에서도, 어떤 논쟁은 필연적으로 이성적인 행위(rational activity)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는 결코 뭔가 그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강력한 느낌, 즉 감성(emotions)을 수반해야 된다고 본다. 즉, 이들은 철학자라는 단어도 지혜(wisdom)를 ‘사랑하는 사람(lover)’이라는 어원을 가지는 데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후반의 철학자들은 그 동안 철학이 너무 진리만 찾는(truth-claims) 좁은 학문이 아니었는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 동안 철학이 어떤 사유에 의한 판단, 즉 어떤 ‘인상(impression)’에 의한 주관적 이야기가 위주였다고 본 것이다. 그 이후 20세기 초반 언어철학은 근대철학을 완성시키면서, 어떤 명제(proposition)의 추구에서 ‘표현(expression)’에 의한 객관적 진리추구로 나갔다. 그런데 근래에는 다시 콰인이나 데리다 등이 명제나 의미추구라는 것이나, 객관적인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해체(deconstruction)시키는 상황이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이끌고 가는 해체주의는 그 이전의 모더니즘의 절대주의를 타파하면서, 이성 못지않게 감성을 중요시하는 계기를 만든다. 현대 철학자들은 정신보다는 신체, 물질보다는 자연, 동일성보다는 서로 다름, 연속보다는 단절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데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상황들이 근래 무용의 인문학적 접근의 필요성을 더욱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무용의 언어적 성질
현대 철학자 및 미학자인 그래함 맥피는 그의 저서, 「무용의 이해(Understanding Dance)」에서 ‘무용의 이해는 언어의 이해와 유사성을 띤다’라고 했다. 그는 무용이 진실로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이해의 대상이 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무용에서 언어적 의미를 찾아야 된다고 했다.
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움직임의 어휘(movement vocabularies), 혹은 무용언어(language of dance)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사실 정말로 다양한 형태의 무용들이 엄격한 의미에서 ‘언어’의 형식을 가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물론 우리가 언어(language)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데 달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놀랍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동안― 주로 지난 100여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예술, 특히 무용의 언어적 특성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해왔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태리의 철학자 크로체였다. 그는 언어의 철학은 예술의 철학과 똑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술은 모호하고 순간적이고, 단순히 느껴져 왔던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인지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예술은 일종의 언어라고 했다. 또한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무용은 음성언어(verbal language)보다 더 확실한 감정/인지 전달 언어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영국의 언어철학자 콜링우드는 그의 저서 「예술의 원리(The Principles of Arts)」에서 모든 음성언어를 포함하는 신체를 통해 의식적으로 표현되는 동작은 언어라고 하면서, ‘무용이 모든 언어의 어머니’라고 했다. 또한 앞에서 거론되었던 수잔 랭거는 무용의 제스추어는 콘트롤될 수 있고 섬세한 감성까지 전달할 수 있는 거의 완벽한 언어라고 했다.
가장 최근에는 미국의 현대 철학자 노엘 캐롤이 그의 논문 「포스트모던무용과 표현(Postmodern Dance and Expression)」에서, ‘무용은 결코 말(words)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라고 하면서 무용의 언어적, 표현적 특성을 강조했다. 그는 무용이라는 예술이 만약 정녕 이런 기능이 없다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철학자들은 무용의 언어적 의미(linguistic meaning)를 넓혀 왔다. 좁은 의미에서 언어의 개념은 소위 말하는 합리주의의 감성과 이성의 이분법적인 구조 속에서만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흔히 그 동안 전통적으로 언어는 한국어, 영어 같은 자연 언어를 지칭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언어의 개념이 이론, 체계, 이데올로기, 패러다임, 구조 등과 같은 명제들의 논리적 체계가 되고 있다. 모든 세계관을 구성하는 개념활동이 언어의 단위가 되고, 신체언어, 예술언어도 마땅히 이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표현인문학으로서의 무용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무용의 표현적 성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중요한 표현을 몸짓, 눈짓, 움직임 등으로 전하고 있다. 사실 말이나 글은 인간의 일상 전체 중 대단히 적은 부분의 세밀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표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인간의 몸짓에 의한 표현을 아무런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표현방식의 대부분의 것을 학문적 대상에서 놓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신체의 표현은 말이나 글의 표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다. 결코 말이나 글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표현을 인간의 감성 혹은 본능으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사실은 다른 어떤 표현방식보다 지성적일 수도 있다. 이는 논어에서 예절을 의미하는 ‘예(禮)’와 인간의 신체를 의미하는 ‘체(體)’가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는데서도 유추될 수 있다. 즉, 인간의 예절의 근본은 바로 그 사람의 몸가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몸짓은 인간의 다른 어떤 특성보다 그 사람의 지성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용수들은 이런 지성적인 신체 움직임을 통해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표현한다. 미국의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은 자신의 춤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인 풍경을 관객들에게 가시적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또한 미국의 현대무용을 글을 통해 세계적인 예술의 반열에 올린 평론가 존 마틴(John Martin)은 ‘무용은 인간의 내부경험을 밖으로 표현하고 대화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스파숏은, ‘다른 예술은 몰라도 무용은 표현적이어야 한다. 설령 표현이 없는 무용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자체가 가장 표현력 있는 무용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노엘 캐롤은 앞에서 말한 그의 논문에서, ‘무용은 표현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체는 본질적으로 표현적(expressive)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무용의 표현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근래 인문학의 흐름은 ‘이해 인문학’에서 ‘표현 인문학’으로 가고 있다. 표현 인문학은 이해 인문학보다 넓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표현은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이해는 표현을 함축하지 않는다. 표현 인문학은 이해 인문학이 확장된 개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표현 인문학’으로서의 무용은 안무, 창작, 움직임 창조, 비평 등을 그 구성적 활동으로 요구하면서 그러한 활동을 위한 이론적 작업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된다.
즉, 무용학의 실천적 학문의 틀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론적 학문의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표현 인문학이 이해 인문학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무용학 연구도 수많은 고전 읽기를 전제하면서, 풍부한 지적 유산과 이해의 바탕 위에서 출발해야 된다. 표현 없는 이해가 맹목이라면, 이해 없는 표현은 공허한 것이다. 따라서 무용학은 이해와 표현의 통합적 학문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무용수들의 지성적 신체탐구방식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무용수들의 무용작업은 신체에 대한 모든 전통적 논리의 모순(특히 신체/정신 이분법이라는 근거 없는 전통적 사유)에 대해 완벽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들은 썩은 정신보다 진솔하고 깨끗한 인간의 신체가 훨씬 더 지성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정신의 반대말이 신체가 될 수 있는가 하면서, 만약 정녕 신체와 정신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정신이라는 것은 인간 신체의 수많은 생체기관 중의 하나에 속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실험 안무가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는 그의 작품의 제목을 『마음은 하나의 근육(The Mind is a Muscle)』이라고 하면서, 정신은 수많은 신체근육의 하나라는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지금까지 이유 없이 지켜져 오던 정신을 우위에 둔 신체/정신 이분법을 타파한다.
또한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나 피나 바우쉬(Pina Bausch)같은 현시대의 무용가들은 무용이라는 언어신체(speech-endowded body)는 신체를 정신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본다. 이들은 신체는 개인의 이야기(individual stories) 뿐만 아니라, 문화의 역사(cultural history)까지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들은 신체 움직임은 가독가능한(readable) 지성적 언어로서, 신체 그 자체가 자신들의 모든 사상을 표현하는 텍스트가 된다고 했다.
이들의 무용은 더 이상 단순한 포즈나 제스추어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의 무용은 심오한 사상과 진리와 철학을 전달한다. 이제 이들의 신체는 투명한 지성으로 변하고 있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신체는 더욱 이성화 되면서 사회화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신체는 각각의 개인에 대한 사회규범의 척도가 되고 표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무용은 신체를 하나의 완벽한 주관적인 주체로 본다. 포스트모던 무용안무가들은 신체 스스로의 창의성과 미학적인 완결성을 존중한다. 그리고 현 사회 일부에서의 신체의 도구화(instrumentalization of the body) 분위기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들은 신체가 단순히 정신의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고, 신체 그 자체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주관적인 인격체라는 확신을 가진다. 신체는 모든 종류의 지식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며 필수적인 인간의 주관적인 근원이 된다.
이렇게 이성화되고 주관화된 신체를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새로운 무용은 인간 신체의 가장 중요한 대화방식이 된다. 무용을 통해 신체는 그의 아픔을 말하고, 그의 억압된 고통을 표현하고, 그의 꿈과 이상을 전달하게 된다. 무용을 통해 신체는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바로 현재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용을 통해 신체와 영혼을 묶어 자유의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무용이 신체의 이성화와 주관적인 지혜를 축복하면서 신체 해방의 최선봉에 서있는 것이다.
결론
현대사회는 하나의 학문분야만으로 설명하기는 너무나도 복잡하다. 빠르고 긴장감 넘치게 변화해 가는 21세기 사회의 디지털적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모든 학문이나 예술, 사상들은 자기 분야에만 안주해 있을 수 없다. 지식사회의 칸막이 현상은 학문과 사상, 문화예술 모두를 극도로 좁혀서 왜소화시킬 수 있다.
현시대를 영위하고 있는 무용도 마찬가지다. 무용이 중요한 문화로서 사회적 기능을 다하려고 한다면, 우선 무엇보다 인간의 신체로 표현되고 있는 무용에 대해 놀라기만 하고 있는 사회의 다른 구성요원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무용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꾸어나가야 하고, 무용이 인간의 표현방식 중 다른 어떤 표현방식 못지않은 지성적이며 함축적인 표현방식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용의 학문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 타학문과의 깊이 있는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며, 학문적 연구와 탐구를 통해 무용의 움직임은 감성과 이성을 함께 아우르는 객관적인 판단(objective judgement)이 가능한 인간표현임을 밝혀야 한다. 무용은 우리가 언어를 이해하듯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임을 확신하고 있어야 하며, 무용의 이해의 중요성을 직시하면서 무용학연구의 정확성을 강화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들은 무용의 인문학적 접근의 당위성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