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런데 더더군다나 양넘들이 우리애를 키운다니. 우리의 강한 혈연주의와 폐쇄적 사고로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조국"이 버린 애들. 그래서 우리는 해외로 입양된 아이가 어른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졸라 미안해하고, 맛있는 거나 많이 먹고 가라는 동정적 태도로 바라보고, 생부모와 만나는 장면이라도 볼라치면 눈물을 흘려댄다.
해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로 그 똑같은 이유로 우리는 다른 아이를 내 자식으로 입양하기를 꺼린다. "조국(조상의 나라)"이 내쳤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강한 혈통주의의 소산이며, 우리가 그것을 창피해하면 할수록, "핏줄"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책하면 할수록, 고아들의 국내 입양의 길은 더더욱 멀어진다. "조국"을 강조하는 것과 국내 입양이 되지 않는 것은 혈통주의와 폐쇄성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해외 입양을 수치스러워 하는 것과 국내 고아들이 점점 갈 곳 없어지는 것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이다. 국내에서 수용하지 못하니 해외로 입양시키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면 더 바람직한 해결의 길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고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한 우리나라에 살기보다, 그런 것 없는 나라에 가서 사는 게 그 개인에게는 오히려 축복인지도 모른다. 특히 장애아동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우리나라 어디가서 그런 따뜻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해외입양아는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다. 불행하게 태어난 아이들이 좋은 환경을 찾아 떠난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비난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다니... 해외 입양아가 많다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휴머니즘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고아에 대한 잔인무쌍한 태도일 뿐이다. 그 알량한 휴머니즘 덕에 고아의 설 땅은 점점 좁아지고 해외입양은 점점 늘어간다. 불쌍하고 측은하게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입양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다.
프랑스 사람 미셸 시만스키
"We are French! We are not Korean."
|
이넘 이름이 |
미셸 시만스키는 프랑스 사람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는 프랑스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그의 몸에 익은 문화도, 그의 부모도, 언어도, 친구도, 생활 터전도, 이름도, 모두 프랑스식이다. 다만 한국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거울 안에 보이는 동양혈통의 한 사람을 보면서도 자기가 프랑스 사람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셸은 프랑스 사람이다.
그는 재불 입양인 협회 <한국의 뿌리>에서 활동했다. 그 덕분에 한국에 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가 경험한 한국은 한바탕의 꿈 같기만 했다. 좋은 식당에서 먹고 비싼 호텔에서 자고 높은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해주고... 해외 입양인이라는 그 사실만으로 너무나 좋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물론 그건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한국이 자신의 생활 터전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는 한국에서는 손님이었다. 미안함의 대상이 되고, 대접 받고 돌아가야 하는 이방인.
|
95년 한국에서 열린 홀트 써머 수련회에서 |
한국서 미셸이 만난 사람들이 그에게 했던 수많은 말들을 단 몇 마디로 압축하면 이렇다.
"너 입양됐구나. 고생 많았지? 내가 밥 사줄께. 근데 너 왜 한국말 못해? 한국말 공부 해야지. 한국 사람이라는 뿌리를 잊지 말아야 되는 거야."
그는 이렇게 동정과 구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다. 그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한국을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친근하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국말이 서툴다는 이유 때문에 보호와 교육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싫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 한국은 그의 생모가 사는 곳이다. 곧 결혼할 여자친구도 한국인이다. 어쨌거나 한국은 그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곳인 것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돌아오고 싶다. 단지 몸이 돌아오는 것이 아닌, 손님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입양<아>가 아닌 30세의 <성인>으로, 부모의 땅 한국에 당당하게 돌아오고 싶다.
그래서 미셸은 뭔가 거창한 계획 하나를 세웠다. 남들이 들으면 황당할지도 모르고, 돈도 부족한 한 젊은이가 하기엔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충분히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게 무슨 계획인지는.. 잠깐만 더 읽어보시라.
기나긴 여행
- 한국인 혁이에서 프랑스인 미셸로
그는 71년생이다. 어릴때 그의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미셸과 그의 여동생은 안동 근처의 외가집에 살게 되었다. 그가 열두살이던 해 가을 어느날, 두 남매 혁이와 란이는 아빠를 만나러 무조건 서울행 버스를 탔다. 서울 강남 고속버스 터미날에 내린 것은 늦은 밤. 그런데 조금 있으니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거리는 통제되고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통금이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곳에도 갈 수가 없었다. 남매는 어느 포장마차 옆에 쭈그리고 잠을 청했고, 잠시 후 경찰에 발견되어 미아보호소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커다란 고아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사실 이런 얘기 하는 건 처음이에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지만 어릴 때 얘기는 한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
고아원에서 선생님, 친구들과... |
그곳에서 그들은 한달을 지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문은 잠겨있고 창문마다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고 아빠를 찾으러 왔다고, 집은 어디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 줘도 집과 부모를 찾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미셸은 순전히 기억에만 의존해서 안동 근방의 그때 그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엔... 왜 그랬을까?)
그곳 고아원의 아이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입양되겠는가 남겠는가의 선택. 그때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연히 거의 전부가 입양을 원했다. 거기서 단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그들 남매는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한국인 혁이와 란이는 미셸과 스테파니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세월이 흘러 1990년, 프랑스인 부모와 함께 미셸과 스테파니는 한국을 방문한다. 옛 집과 생부모를 만나기 위해서. 그들은 차를 타고 안동 근방을 하루종일 맴돌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가 기억하는 옛 동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저녁이 되고 이제 그만 포기하자고 할 무렵, 이쪽으로 한번만 더 가 보자며 간 그곳에... 그곳에 있었다. 기억에 생생한 어릴적 동네가. 커다란 나무가 가운데 서 있던 그 마을이. 낯익은 친척들의 얼굴이 보이는, 여전히 똑같은 그 동네가.
그래서 그는 그날 엄마를 만나고 감격적인 상봉을 했을까?
"아니요. 갑자기 나타나면 너무 충격을 받으실까봐 차마 아는 척을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때는 그냥 차를 타고 지나가기만 했어요. 멀리서 바라보면서.. 나중에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으니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엄마는 두 아이들이 집을 나간 이후에 하루도 편하게 지낸 날이 없었다. 처음엔 경찰에 신고도 해 보고 여기저기 미아보호 시설에 알아보기도 했지만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갓난 아기들도 아니고 열두 살 열살짜리 아이들이면 어딘가 살아있다면 찾아오기라도 할 텐데... 몇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그녀는 '해외로 입양되었겠거니' 하는 위안 아닌 위안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95년. 미셸과 여동생은 프랑스 부모와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때도 다시 차를 타고 동네를 지나가기만 했다. 차마 불쑥 나타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은 일인지 판단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96년. 마침내 생모와 만났다.
"어머니를 만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늘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죄책감에 시달릴 그분께 위안을 드리기 위해서... 잘 살고 있고 좋은 부모를 만나서 훌륭하게 컸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그러면 안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머니를 만나서, 그 2년전인 94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면, 조금만 일찍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더라면... 서울에 있는 아빠를 찾기 위해서 열두 살 꼬마가 집을 나선 날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는데, 결국 아빠는 찾을 수 없었다. 고아원으로 프랑스로 다시 한국으로 15년간의 긴긴 여행 끝에 돌아왔을 때, 한국인 혁이가 프랑스인 미셸이 되어 돌아왔을 때, 아빠는 그곳에 안 계셨다.
|
본지 사무실에서.. |
"지금도 어머니와는 연락을 자주 하고 있죠. 저는 부모님이 네명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 좋은 분들이고, 그래서 행복합니다."
만일 그때로 돌아가서 해외 입양과 국내 입양 둘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그럼 당연히 해외로 갈 겁니다. 해외에 입양된 것에 후회는 없어요. 그때 고아원에서 부모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면 모르지만, 이왕 입양될 거라면 차별이 심한 한국보다는 프랑스에서 살고 싶어요."
파리-서울 2002 랠리
그는 내년에 커다란 행사를 계획중이다. 월드컵을 맞아서 프랑스 파리에서 서울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자동차 랠리가 그것이다. 지난번 월드컵 우승국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이번 개최국 수도 서울까지, 먼 길을 달려와 <평화의 공>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이벤트이다. 이벤트 부족으로 고민하는 내년 월드컵에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다.
|
<파리-서울 2002> 로고 |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차를 몰고 오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인 해외 입양자들이라는 게 중요하다. 해외 입양자 45명과 기타 15명 총 60명이 20여대의 차를 몰고 오는 것이 미셸의 계획이다. 파리 에펠탑 광장 앞 평화의 벽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벨기에,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카자흐스탄, 중국, 북한(잠정), 한국을 거치는 1만 2천 킬로미터 고난의 길을 통해....
그는 부모의 땅 한국에 그렇게 돌아오기를 원한다. 더이상 동정과 보호와 미안함과 수치의 대상이 아닌, 한국출신 프랑스인 미셸 시만스키로 당당하게 돌아오고 싶어 한다.
프랑스 <파리-서울 2002> 협회도 만들었고 사람도 꽤 모았다. 몇 개의 단체들과 프랑스 및 한국의 정치인들, 저명인사들이 호의를 가지고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돈도 사람도 아직은 벅차기만 하다. 이왕이면 한국차를 타고 오기를 원하지만 그것도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에서 도와줄 개인이나 단체의 힘이 당장 절실하게 필요하다.
미셸의 거창한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그건 아직은 미지수이다. 하지만 본지는 그의 활동을 앞으로 전폭적으로 밀어줄 것이며 진행상황을 계속 독자 여러분께 알려 드리겠다.
한국을 떠날 때는 입양아였지만 그는 이제 더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는 의사이며 어른이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성인이다. 조국은 그에게 더 이상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진정 그를 위하는 길이다. 그의 지금 모습 그대로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그가 부모의 땅 한국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할 것이다.
파리-서울 2002 밀어주기 딴지우원회
(paris-seoul2002@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