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황씨의 연원(봉산,충주지씨에서 갈려져 성씨)
장수황씨는 3개설이 있습니다.
첫번째 경순왕의 부마 황경을 시조로 설과 봉산지씨의 시조 고려의 명장 지채문을 시조로 설과 고려의 대학자 충주지씨의 시조 선의공 지경을 시조로 설입니다. 정확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다.
장수황씨는 신라말 경순왕의 부마인 황경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지만 충주지씨 시조 선의공 지경와 봉산지씨의 선조의 후손 황경입니다. 황경은 본래 성은 지씨이지만 어떤 지씨인지 모르며 정확한 보면은 충주지씨 지경과 황경은 동일인물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정확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지만 어떠문헌은 보면 충주지씨의 시조 지경의 후손 중에 고려왕에게 성인 황씨를 하사하였다. 또 방촌 황희 선생은 선의공 지경의 17대손이라고 설과 봉산지씨 시조 지채문의 16대손 설도 있습니다. 고려초에 중국로부터 귀화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현재 정확한 아직까지 기록이 없습니다.
모든 황씨은 황락의 후손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나 기록이 없으며 신빙성이 고증하기가 상고할수없다.
황씨의 도시조인 황락은 장수황씨와 황락 사이에 세계실전이지만 그사이에 모르나요 황락의 후손 대를 끊기수도 있지만 황락의 후손 모든 황씨와 장수황씨와 황락사이에 정확한 문헌이나 기록이 고증하기가 상고할수없다.
조선 시대 4대 명상(名相)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방촌(?村) 황희(黃喜) 정승의 증조 석부(石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본관은 경(鏡)의 후손(9세손) 공유(公有)께서 고려 명종 때 벼슬이 전중감(殿中監)에 이르
렀는데 이의방(李義方)의 난을 당해 고향인 장수(長水)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비추어 조상이
세거한 장수(長水)를 본관으로 하였다.
장수 황씨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전반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으로서 황희(黃喜) . 황수
신(黃守身)의 부자(父子) 영의정과, 황정욱(黃廷彧) . 황경원(黃景源) 두 명의 대제학을 비롯
하여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와 풍신수길이 우리 나라를 침범할 것이라
고 예고했던 황윤길(黃允吉), 임진왜란 때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晉
州城)에서 전사한 황진(黃進), 한말 야사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엮은 황현(黃玹) 등 많은
인사와 급제자 40 여 명을 배출하였다.
첫댓글 족보간행을 고증하고 밝히는 일은 어려움이 많습니다만 종친님은 일게 설을 가지고 지금까지 면면히 전해내려오는 족보서문을 반증할 자료도 없이 위와같이 적어서는 안됩니다. 좀더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