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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집결장소 : 2018년 9월 30일(일) / 8호선 산성역 1번출구 (10시30분)
◈ 참석자 : 18명
◈ 산행코스 : 산성역-성남누비길(1구간)-불망비-남문-솔밮 옆-행궁-남문-남한산성공원-뒤풀이장소
◈ 동반시 :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 뒤풀이 : 감자탕, 닭조림에 맥주·막걸리 / "연놀부 감자탕"<(031) 747-6904>
시산회 344회 남한산성(행궁) 산행날이다. 집결지인 산성역에 도착하니 많은 산우들이 모여 있다. 총 18명 참석으로 금년도 산행에는 많은 산우들이 참석한 것 같다. 참석을 잘 하지 못했던 산우들도 몇몇이 보인다. 반가운 일이다. 나도 2개월 만에 처음 참석을 하였다. 산성역 1번출구에서 '성남누비길' 1구간을 따라 산성폭포 방향으로 출발이다.
그동안 남한산성의 산행은 2008. 4. 6일 시산회 82회(기자 김정남)때 처음으로 하였었고, 2011년 이후 매년 1회씩 9회(169회, 2011. 10. 3일, 위윤환/196회, 2012. 10. 20일, 박형채/218회, 2013. 9. 21일, 임삼환/232회, 2014. 4. 13일, 김진오/264회, 2015. 7. 12일, 김진오/286회, 2016. 5. 29일, 김종화/295회, 2016. 10. 9일, 남기인/305회, 2017. 3. 11일, 김종화/344회, 2018. 9. 30일, 기자 조문형)의 산행을 하여 왔다.
과거에는 마천역에서 출발,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쪽으로 올랐는데, 근년에는 산성역에서 출발,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쪽으로 오르고 있다. 이곳에는 최근에 개발을 하였는지 소나무 등의 숲을 조성해 피촌치드와 함께하는 힐링숲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쉼터엔 평상이나 안락의자를 설치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 같았다.
윤환 친구의 안내로 한참을 오르는 도중 '불망비(不忘碑)'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불망비란 어떠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본 바위 위에 새겨진 불망비는 조선 후기 문신인 수어사 서명응(徐命應), 부윤 홍익필(洪益弼)과 이명중(李明中) 세 사람이 백성을 사랑한 공적을 잊지 말자(不忘)는 뜻을 새긴 것으로 하나의 비석에 3기의 비(碑) 형태로 되어 있으며, 백색 파도무늬가 수려하게 돋보인다고 쓰여 있었다.
약 1시간 40여 분쯤 걸어서 남한산성 남문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성남누비길 1구간이 끝난 지점이다. 산우들과 단체로 증명사진을 촬영한 후 남문을 지나 만해 한용운 선생의 기념관이 있는 쪽으로 갔다. 우측엔 소나무·잣나무 숲이 잘 조성되어 있다. 산우들은 돗자리를 깔고 간식타임을 조성한다. 한 회장님은 오늘의 동반시부터 낭송하잔다. 정남이가 올려놓은 동반시는 로버트프로스트의 '자작나무'이다. 오늘의 기자인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시를 낭송하였으나 주위가 산만하였다.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시골 구석에 살기 때문에 야구도 못 배우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휠 때까지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 오르내리며 정복하는 소년
그리하여 그는 나무에 성급히 기어오르지 않는 법을
그래서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가고 싶다
하늘을 향해 설백의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에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 끝을 늘어뜨려 다시 땅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 흔드는 이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
모처럼 참석한 산우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남한산성 행궁(行宮)을 구경하였다. 행궁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남한산성 주변에 있는 조선왕조의 행궁이며,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어 있다. 1624년 조선 16대 인조의 어명 하에 착공, 2년 후인 1626년에 완공하였으나, 한때 불에 타 소실되어서 행궁지로 남아 있다가 2011년 행궁전체를 복원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이 역사적으로 가장 주목받던 시기는 병자호란 때였다. 병자호란 때 원래 강화도로 피난을 시도하려던 인조가 강화도 피난이 좌절되면서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이곳에서 임시 궁궐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지리적으로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17대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는 여주시와 근접하여서 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등이 영녕릉 참배를 위해 이 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단다. 행궁은 상궐(上闕)과 하궐(下闕)로 나뉘어졌으며, 한때 불에 타 소실되어서 행궁지(行宮址)로만 남아있다 2011년 행궁 전체가 복원되었으며 2012년에 일반에 개방되었다. 행궁에는 외행전과 임금의 처소인 내행전, 좌전 등이 있으며 후원에는 이위정(以威亭)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고, 그 외에 경기도 광주 유수의 집무사(集務舍) 등이 있다.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에서 주최하고 공동연구소탐구생활에서 주관, 남한산성 주말 상설공연은 세계유산인 남한산성의 문화재를 배경으로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전통문화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을 내어서 한 번씩 관람하는 것도 뜻 깊은 공연일 것 같았기에 산우들과 함께 행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기념으로 또 증명사진을 촬영하였다.
9~10월엔 매주 일요일마다 수어청 군사들의 연무의식인 남한시재(南漢試才)가 펼쳐진다고 한다. 시재란 무사들의 무예를 시험하고 포상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무예의식이다. 조선조 수어청 소속 군사들은 남한산성에서 자신들이 연마한 무예를 선 보였는데, 이것을 재현한 공연이 남한시재이다. 9~10월의 공연은 매주 일요일마다 2회(13시와 15시), 남한산성 行宮(외행전)에서 펼쳐진다고 한다.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이 주관하는 농악공연도 매주 일요일 오후에 펼쳐진다. 광지원농악단은 광주시 남한산성면 광지원리에 내려오는 전통농악으로 남한산성 축성 및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희를 펼쳐 왔다. 특히 매월 마지막 일요일에는 줄타기 공연이 탐방객의 발길을 사로 잡았다고 한다.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줄타기, 줄광대의 신예 남창동(17세, 고딩생)군이 줄 하나에 몸을 실어 국립창극단 남행웅 명창의 익살스러운 재담과 함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기예를 선보였다. 줄광대 창동군은 외줄위에서 놀치뛰기와 아장아장 걷기, 한 바퀴 돌기, 국내 유일의 백덤블링 등의 기예를 흥겨운 농악에 맞춰 줄을 타며 다양한 재능을 선 보였다.
흥에 겨운 농악단의 농악을 구경한 후 남한산성 남문을 빠져나와 남한삼성공원쪽으로 내려왔다. 윤환이는 을지대학교(성남캠퍼스)의 옆에 연놀부감자탕집을 뒤풀이 식당으로 추천한다. 산우들이 모두 뒤풀이식당에 자리에 앉자 한 회장님은 남기인 산우가 코이카(KOICA) 해외봉사단원으로 2년 동안 캄보디아에 가게 됨을 건강과 함께 잘 다녀오시기를 참석 회원들과 함께 건배하였으며, 기인 친구는 시산회의 발전을 위해 재건배 하였다.
마지막으로 시산회원으로서 느낀 점을 간단히 제언한다면, 시산회는 우리 참석회원 전체를 위한 모임이므로 위계와 질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참석자가 많으면 질서유지가 잘 않되고, 동반시를 낭송할 때에 함께 심취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참석자가 18명으로 많이 참석하였고, 출발시간을 정확히 10시 30분으로 맞출 수 있었으며, 특히 남한산성을 매년 1회씩 9회에 걸쳐 산행을 하였었지만, 금년이 남한산성에 참석자가 제일 많은 것으로 기억된다.
앞으로도 오늘같이 시간을 잘 지켜 주시고 참석자도 많았으면 즐거울 것이다. 아울러 기자로써 건의사항은 참석자가 많으면 통제가 잘 안될 뿐만아니라 질서 유지가 잘 안되므로 아쉬웠는데, 앞으로는 집행부(회장. 총무)가 약간의 강제성을 가지고 통제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이번에 느낀 점은 기자로 지명받고서 시산회의 주연인 기자에게 시를 낭독하라고 하였는데, 막상 시를 낭송하려고 하니 시에 대한 관심은 없고, 딴 짓을 하는걸 보면서 나 자신도 지난 과거엔 그러지 않았는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산행기 기록을 남기도록 한 것도 스트레스를 부여받는 의무가 아닌지? 앞으로는 기자가 시를 낭독 할 땐 주의를 집중하여 낭독하는 기자가 자부심을 갖도록 배려해 줬으면 좋을 것이다.
산행 중에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것도 참 좋은 일이지만, 말이 너무 많고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상하는 말은 삼가해 주시기를 바라며, 또 가능하면 언어도 부드럽게 순화했으면 좋겠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오죽했으면 언어 총량제를 도입하자는 얘기가 나왔겠는가...
지금 우리는 누구를 위한 시산회가 아니고 우리 모두를 위한 시산회인 만큼 너 나를 떠나 우리 스스로가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노력해야 되지 않을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노년이 되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이 되돌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 다면 쓸데없는 고집은 버리고, 양보와 배려를 베풀었으면 하는 의견을 개진해 본다.
지금까지 제가 느끼고 본 내용을 올렸는데, 너무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혹시 잘못이 있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옵고, 아무쪼록 우리 시산회원 모두가 건강하시고 시산회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적극 참석해 주시길 바라며, 가능한 쓸데없는 고집은 버리시고 항상 양보와 배려를 베푸시길 바라면서 산행기를 맺는다.
2018년 10월 2일 조문형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