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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송년 특강
5대 제사의 예수 그리스도
- 제사는 이스라엘의 예배인가 하나님의 계시인가 -
이스라엘이 출애굽은 자체적인 힘이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편에서 조건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 6:18, 9:9, 15, 17:2, 4, 7, 9, 10, 13, 14, 21, 출 19:5, 레 26:9, 15, 42, 신 31:20 등).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가나안 땅에 대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주도권도 애굽에서 건져내신 분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나라로 세우시면서 왜 이방에서 객이 되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였을까? 아브라함 이후에 약속의 땅에 계속 거하게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 아니 애굽에서 종이 되었다 하더라도 주종관계를 바꾸어 애굽을 다스리도록 체제를 전복시키면 되지 않았을까? 왜 종이 되었다가 그 나라를 응징하며 탈출시키는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셔야만 하였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답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동기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언약을 담고 있는 이스라엘 됨이며 이를 통해 언약이 지향하고 있는바 곧 언약의 실체요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 대신 자신의 힘을 의지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비웃으며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을 힘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서 어린 양의 희생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은총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철저히 폭로되는 나라이다. 그 증거물로 주어진 것이 증거궤, 곧 언약궤이다.
증거궤에는 증거판이 들어 있다(출 25:16). 무엇을 증거하는 판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돌판(십계명/약속의 말씀)이 깨어지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졌지만 그 증거판을 담고 있는 언약궤의 뚜껑에 발라지는 희생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끝까지 어린 양의 희생(피)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출 19:5)요 “제사장 나라”(출 19:6)이며, “군대”(출 7:4, 12:41)이고 또한 “장자”(아들)(출 4:22)로서 언약의 취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공동체여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이 이삭에게 그리고 야곱에게 주어졌다. 소위 말하는 ‘아들 낳는 역사’(톨레도트)를 통해 한 후손을 향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한 후손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결국 언약의 인물, 출애굽을 통해 주신 제도, 절기, 규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해 주신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마음 곧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를 걷는 동안 원망과 반역의 연속이었다. 급기야는 애굽에서 자신들을 탈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광야 길을 인도하는 주도권을 금송아지로 인정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출애굽기에서 반역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금송아지 사건을 말씀한다.
그렇다고 해서 금송아지 사건이 이스라엘의 반역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졌지만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소멸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귀하거나 소멸시키기 아까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계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의 실체에 대한 의미를 확고히 하시는 사건으로 만드셨다. 즉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모세 언약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밝히신 것이었다. 그 모세 언약 속에는 한 사람이 성막의 위치에 점하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 40:34-38)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임재하여 동행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행이란 화목이 되어야 가능하다.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동행할 수 없다. 이것이 언약이고 성경은 이 언약을 결혼으로 비유한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집이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다. 언약의 책(언약서)이 이혼의 책(이혼서)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렘 3:8). 이 긴장을 해결하는 요소로 제사 제도를 제시한다. 거룩하지 못한 자가 거룩한 자가 됨에 대한 확인 작업이 제사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신랑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제사 제도이다. 제사 안에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거룩하게 되었는가 하는 답을 담고 있다. 레위기가 모세오경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레위기는 성막, 즉 하나님의 집과 관련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레위기이다. 레위기의 시작은 이렇게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레 1:1)
히브리어 제목의 ‘봐이크라’(그가 부르셨다)는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에 근접할 수 없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언약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제사 제도는 이렇게 제사를 잘 지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든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를 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제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언약 관계를 확인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제사를 오늘날의 예배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제사 제도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 편에서 제사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시려고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제사 제도 안에서 무엇을 확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어린 양의 희생이다. 즉 누군가 언약의 실체로 오셔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린 양의 피로 표현되는 것이다. 피를 뿌림으로써 희생을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 쪽에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다 이루신다. 언약 백성이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약속을 제사를 통해 신부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 때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막연한 제사의 반복이 아니라 레위기 1:1에서 말씀하듯이 여호와께서 주신 계시대로 준행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사의 희생물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고 언급한다(레 1:9, 13, 17, 2:2, 10, 3:5, 16). 이런 점에서 구원은 실로 여호와의 말씀에 의한 약속에 있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노아에게 방주에 대한 치수까지 정확하게 주셨듯이 제사 역시 인간이 임의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결국 레위기는 아브라함 언약의 준수와 성취에 인간이 제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제사 안에 어린 양의 희생을 담아 두시고 그것을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다는 목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약속된 후손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모습과 같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 희생은 피로 표현되며 이스라엘에 있는 성막 안에서 매일 매일의 제사를 통해 비쳐진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물을 여호와 앞에 가지고 와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신부된 자가 신랑이신 하나님께서대신 죽음을 이루어 내시는 것을 번제단에서 희생되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제사는 이방인들에게도 있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나타내는 도구로 주셨던 것이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했는데 이 제사 제도는 성전에서 제사장이 제사하는 자가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절기와 관련된 제사이기 때문에 이러한 다섯 가지 요소가 필요하였다. 그러면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몇 가지 제사 제도에 관계된 용어들을 정리함으로 시작하자.
(1) 거룩(히, ‘카도쉬, 코데쉬’)
레위기 10:10에 보면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라고 하였다. 즉 성-속, 부정-정함을 구분하였다.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 ‘하기오스’인데 세속과 분리된 신적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인간과 근원적 간격을 두시는 하나님의 본질이다. 따라서 거룩은 ‘분리, 구별, 온전함, 흠이 없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과 죄된 인간의 속된 상태를 구분한 것이다.
(2) 정(성)결/부정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은 속된 것 안에서의 구분이다. 즉 죄악된 인간은 속된 상태에 있는데 그 속된 것 안에서 정한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알고 부정한 것을 통해 인간의 속된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구분으로 주신 것이다.
(3) 제물
제물은 흠 없는 것이어야 하며 대체로 수컷으로 하였다. 화목제의 제물과 비둘기 제물은 암수 구별이 없었는데 아마 비둘기는 암수 확인을 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물은 제사하는 자가 잡는다.
(4) 화제(히, ‘이셰’)
불이라는 히브리어 ‘에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헌물, 음식 제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레위기 2:10, 6:17, 24:6-7, 9에 보면 불에 태우지 않는 제물이나 술을 붓는 전제를 ‘이셰’라고 칭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민 15:10).
(5) 거제(히, ‘테루마’)
문자적 의미는 ‘올려 바쳐진 것’으로 ‘성전에 바쳐진 제물’을 의미한다. “자원하여 가져온 것”(출 25:2), “봉헌물”(말 3:8)이 ‘테루마’이다.
(6) 요제(히, ‘테누파’)
제단 앞에서 두 손으로 제물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가리키는 용어이다(참고 레 8:25-27, 출 29:22-24).
(7) 전제/관제(히, ‘네세크’)
붓는 제사로 주로 포도주나 독주 혹은 기름을 제단에 부었다(출 29:40, 레 23:13, 민 28:7).
(8) 고르반(히, ‘코르반’)
‘카라브’(가지고 오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가져온 것’, ‘바쳐진 것’이라는 뜻이다. 희생 제물 외에도 성전에 바쳐지는 모든 예물은 ‘코르반’이라 부른다. 제단 위에 올리는 것과 성전에 바치는 것으로 두 종류의 코르반이 있다.
(9) 안수(히, ‘사마크’)
‘손으로 누르다’라는 표현인데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① 죄의 전가 : 안수하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된다는 주장, ② 동일시 : 제물이 곧 제사자라는 주장, ③ 대체 : 제물이 나를 대신한다는 주장, ④ 소유권의 확인 : 많은 제물 중에서 자신의 것임을 확인한다는 주장. 레위기 1:4에 의하면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라고 한 것을 보면 제사하는 자와 제물은 연결되어 안수를 통해 제사자의 죄가 전가되어 제물로 대체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1. 번제(히, ‘올라’)
번제에 대해서는 레위기 1:1-17에서 제사의 절차를 기록한 다음 6:8-13에서 번제를 드리는 방법과 태우고 남은 재의 처리 등을 추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사 ‘알라’(올라가다)에서 온 제사 용어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번제는 제물이 제단 위에서 불에 타 연기가 되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9장에 보면 아론이 처음으로 제사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에 불을 내리셨다. 그래서 이 불은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여야 했다(레 6:12-13). 그런데 레위기 10:1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라고 하였는데 우리 성경에는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을 이미 한 것처럼 보이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분향하려고 하였더니’라는 말이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이스라엘이 번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단에 피가 뿌려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언약에 의한 희생을 피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온전한 헌신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제물을 전체 다 태워드리는 제사라는 점 때문에 흔히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여 드린다는 기본 제사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우는 불은 하나님의 불로 심판을 나타낸다. 제사자의 안수에 의해 대신 번제단에서 전체로 태워지는 제물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제물로 제물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하나님 편에서 제물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제사였다. 이런 점에서 번제는 하나님 편에서 속죄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제사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번제를 드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온전한 희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피가 뿌려지는 것을 통해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실로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이며 그것은 곧 내가 주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신 그 죽음에 함께 죽은 자로 제사에 참여된 자이다.
2. 소제(히, ‘민하’)
레위기 2:1-16에 소제의 규정들이 기록되어 있고 제사장과 관련된 추가적 지침은 6:14-23에 주어진다. 피 없는 유일한 제사인데 곡식을 비롯한 농산물로 행하는 제사로 주로 번제나 화목제와 더불어 하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다. 속죄제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이 있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농부나 동물을 준비하기 어려운 가난한 자들이 번제 대용으로 소제를 바쳤을 것이다.
소제는 따로 드리기도 하였지만 다른 동물 제사에 수반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특이한 것은 추수를 감사하기 위해(레 2:12, 14) 칠칠절(오순절)에는 백성들이 새 소제, 즉 새로 거둔 첫 수확물을 소제로 바쳤다(레 23:16). 첫 수확물이란 단순히 시상적인 의미에서 처음 것이 아니라 맏물을 의미한다. 이는 애굽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할 때 이스라엘의 장자는 어린 양의 피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은혜가 주어진 것에 근거한다. 그러기에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은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난 것(대표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장자 대신 레위를 선택하셨다.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민 3:12-13)
레위 지파의 희생의 모습은 땅이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나머지 다른 모든 지파의 사람들은 레위 지파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표현이 바로 십일조이다. 그러나 이 레위 지파도 완전한 제사장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즉 유다 지파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마치 멜기세덱이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즉 구약의 제사장은 레위라고 하는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는데 멜기세덱은 레위 족속, 즉 레위 혈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으로 등장하고 있다.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한 인물(제사장적 왕)로서, 레위의 혈통이 아니라 유다의 혈통을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예수님은 제사장직의 승계가 필요 없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시 110:4).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하여 모든 소제물에 누룩을 금하며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되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말씀하셨다(에스겔 43:24을 통해 보건대 당시 제사에 바쳐지는 모든 동물에게도 소금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소금은 정결, 거룩의 필수품이었고 이는 곧 영원한 언약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소금이 거룩하고 영원한 언약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거룩하시고 변함없이 영원하신 분은 누룩 없는 떡이며 하나님께 향기로운 유향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소제에서 나타내주는 장자요 맏물로서 십자가에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소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소제의 제물이 맏물이 되실 메시아, 소금으로 보여주는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 편에서 성취하실 메시아를 확인하고 기다리는 제사여야 했다.
3. 화목제(히, ‘슐라밈’)
화목제에 대해서는 레위기 3:1-17에 나와 있으며 7:11-36에서 화목제의 고기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규례가 주어진다. 히브리어 ‘슐라밈’은 ‘샬롬’(평화, 화목, 안전, 완전)에서 파생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 이유는 감사제/찬양제(히, ‘토다’), 서원제(히, ‘네데르’), 낙헌제/자원제(히, ‘네다바’)의 세 가지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만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가가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이다.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되어 하나님의 식사에 참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된 자는 자기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죽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드려질 때 하나님의 약속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제물에 안수함으로 표시한다.
자신의 희생 그것은 철저한 죄에 대한 대가이다. 그 대가는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대신 희생 제물이 되셔서 언약을 성취하시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언약 백성이란, 예수님께서 희생되신 십자가의 자리에 내가 희생되어 있음을 믿고 또한 그것을 날마다 보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장면을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의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출 24:8). 그리고 언약이 체결된 장면을 이렇게 그린다.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 24:9-11)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5-20)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0-21)
출애굽기에서 보여준 언약 체결을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실 것을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통해 보여주셨고 그 성취된 언약에 참여된 자가 교회이다.
4. 속죄제(히, ‘하타트’)
레위기 4:1-5:13에 규정되어 있다. 속죄제는 부지불식간에 행한 죄나 실제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한 구체적인 죄를 위해 언제든지 행해지는 제사였다. 또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임직이나 나실인의 서원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이나 절기 때마다 행해졌다.
이 제사의 특이점은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분향단 뿔에 바른 후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는다. 성소에 피가 뿌려지는 것은 인간의 죄가 성소를 날마다 더럽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름과 내장은 번제단에 태우고 제물의 나머지 모든 것은 진영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불사르게 되어 있다(레 4:1-12). 이 말씀의 성취를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렇게 밝힌다.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1-13)
히브리서 기록자가 밝히고 있는 것은 대속의 죽음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며 율법을 고수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종교 기득권자들에 의해 밀쳐냄을 당하신 십자가의 자리라는 의미이다. 그곳이 바로 영문 밖이다. 이런 점에서 영문 밖이란 마태의 입장에서는 당시 유대인들 입장에서 이방 땅과 같이 여기는 갈릴리로 이미 밝혔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2-16)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이미 성취되었고 그 말씀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이방을 비추는 빛(눅 2:32)으로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참고 사 9:1-2, 49:6, 행 13:47).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여기서 화목 제물의 ‘힐라스모스’는 ‘화해의 제물’로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
5. 속건제(히, ‘아샴’)
속건제에 대해서는 레위기 5:14-6:7에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 ‘아샴’이 동사로 쓰일 때는 ‘죄책을 깨닫다’, ‘최책을 지다’라는 뜻이지만 명사로는 ‘죄 또는 죄에 대한 책임과 배상’을 뜻한다. 우리 성경의 번역에서 ‘속건’이라고 할 때에 ‘건’(愆)은 허물로 벗겨내는 과실을 의미한다. 속건제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를 염두에 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재산과 사람의 재산을 나누어 배상하지만 모든 죄가 궁극적으로 여호와 앞에 저지른 죄로 표현된다. 그러기 때문에 속건제는 죄인의 자백이 요구된다.
15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7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18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레 5:15-18)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제사를 통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속죄제는 원죄와 관련되어 있고 속건제는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범하는 자범죄와 관련되어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문제는 성경이 말씀하는 죄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의 개념이지 결코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냥 죄에 대한 대속의 개념이 아니라 그 죄가 내 속에서 말씀에 의해 확연히 드러나는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 느끼고 그것을 자책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 자책을 벌물로 대체하지만 언약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 벌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해소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죄의 자책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선포하였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4-16)
결국 하나님은 5대 제사를 통해 5개의 의미를 달리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속죄의 의미를 다섯 번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다섯으로 율법에 속한 것이지만 그것은 곧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계시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6. 피와 기름
레위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제사 제물은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있고 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소제물의 남은 가루는 제사장의 몫이다(레 2:10). 또 소제물로 드려지는 곡식 가루도 남는 것은 제사장이 먹는다(레 5:13, 6:18). 그리고 피와 분리되지 않은 채 바쳐지는 동물성 속죄 제물도 제사장이 먹을 수 있다(레 6:2, 6, 20). 그리고 속건제에서 내장을 제외한 모든 고기도 역시 제사장의 몫이다(레 7:6). 또 화목제의 고기도 제사장의 영원한 소득이라고 말씀한다(레 7:34, 36).
그런데 제사장도 먹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피와 기름과 내장과 그리고 피와 분리된 고기와 번제에 쓰인 제물은 제사장도 먹지 못하게 되어 있다(레 1:9, 3:17, 4:12 등). 기름은 하늘로 올라가는 향기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맡을 수 있는 요소이다(레 3:3-5, 4:26 등). 또한 제물의 피는 제단에 뿌려질 뿐만 아니라 제단과 성막을 거룩하게 하는 데 쓰인다(출 29:10-21, 30:10).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 제물은 대체로 피, 기름, 내장과 근육질 고기가 분리되어 다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분리된 고기가 제사장의 식사로 제공되어 생존에 도움이 된다. 제사장들이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 안에 거룩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피를 철저하게 분리함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은 생명이다.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에서 죽은 존재나 다름없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계속해서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길은 피를 따로 분리해서 다루게 하는 것이었다.
10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0-11)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피가 제단에서 소멸됨으로 그 피(생명) 때문에 거룩이 제공되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제공되는 거룩이란 희생 제물의 생명 위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 희생 제물의 죽음에 참여한 자에게는 공동의 거룩과 의를 누리게 된다. 마치 처음 유월절 때에 고기를 집 안에 모여 있는 자들이 나누어 먹음으로써 양의 죽음과 장자의 죽음이 일치된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말씀하셨다(출 13:2). 애굽에서 죽지 않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장자를 대표하여 레위인을 선택하셨다. 이렇게 장자를 대표하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서 어떻게 계속 거룩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렇다면 기름을 구분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창세기 4:4에 보면 아벨의 제사를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양의 첫 새끼란 아벨의 생업에서 나온 소산물이다. 그러나 아벨이 기름을 따로 구분하여 드렸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4에서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아벨의 믿음이란 앞으로 오게 될 여자의 후손이 기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아벨의 믿음의 증거로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눈여겨 보셨던 것이다.
따라서 기름은 오직 하늘로부터 가치가 제공된 것에만 부어지게 된다.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이라 여겨질 때 기름을 발라 거기에 상응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야곱이 사닥다리의 꿈을 꾸고 난 뒤 자기가 베었던 돌을 취하여 기름을 부은 행위는 그 자리를 거룩한 자리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창 28:18). 제사장에게 기름을 바르라는 하나님의 지시는 바로 이런 점에 근거하고 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출 30:30)
따라서 제사장에게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이다. 땅에 있지만 하늘의 것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소유를 인간이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제물의 기름을 따로 구분하여 연기가 되어 하늘로 향하게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것이다. 피는 생명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피가 다 영원한 생명으로 효용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기름이 하늘로 상달되는 제물의 피만이 대속의 가치가 있는 생명이다.
기름이 태워져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면 피는 소모되어 심판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기 때문에 기름과 피는 제사 제도에 있어서 거룩을 확증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 기름과 피는 함께 발라지고 또 함께 쓰인다(레 14:17). 성막을 거룩하게 하는 데에도 기름이 동원된다(민 7:1). 어느 누구도 기름과 피는 먹지 못한다(레 3:17).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히 1: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름 부음을 받은 분으로서 피를 흘리시는 대속의 죽음을 이루셨다면 그것은 완전한 대속이다. 더 이상 다른 속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제사 제도를 반복하는 것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것을 통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제사장을 통해서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대제사장으로서 친히 완전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이다. 희생 제물의 죽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들이 같은 희생 제물과의 일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해서나 오늘날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된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면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신 것처럼 구원하신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신다는 약속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름 부음이 성도 안에 거한다고 선언하면서 성령께서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적그리스도를 경계할 것을 전하였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이를 바울 사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 기름 부음을 받은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 장로만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아마도 이들에게만 안수로 교회의 직분에 세워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실상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져 연합된 자는 십자가 죽음에 동참된 자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말씀한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6-22)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성령을 받은 자가 되었고 곧 교회가 되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신부 된 자는 비록 이 땅의 역사 속에 살지만 본질은 하늘에 속한 자로 묵시를 사는 자이다.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3-6)
(202512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예수님을 성전이라 하신것에 대해...막연하게 믿어왔던 것을, 하나님과 동행할 집으로 설명해주시니, 모호한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예전 모임에서 출애굽기의 혼인식과 피로연 혼인서약서 얘기를 하고 엄청 기뻤는데, 이번 특강으로 더 명료해지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주성의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평안을 바라고, 26년에도 은혜의 나눔이 지속되길 소망합니다. ^^
말씀으로 인도받는 은혜가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이지요
함께 가는 십자가의 길이기에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