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FTA 뜯어보기 20] 협상의 원리에 비춰보면 (3) | ||
2006-03-23 오전 9:49:32 |
포트먼 대사가 한미 FTA 협상 개시 의사를 하원의원들에게 통지한 편지에는 그가 이 협상을 하원과 긴밀하게 의논해 가면서 진행하겠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온다.
김현종 본부장을 대리해 3월 6일 서울 예비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한 김종훈 대표는 협상의 내용을 국민들이 자세히 아는 것은 협상 진행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관계부처와 의논해서 알려줄 것은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 분이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과 숨겨야 할 것을 가르는 기준은 협정의 신속한 체결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이지 협정의 내용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냐 아니냐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정부의 주장 두 가지를 더 따져보면
한국의 협상 주도자들이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협정을 빨리 체결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른 주장 두 가지에 대해서도 믿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 협상이 우리 측의 요구로 시작됐다는 주장에 대해.
김현종 본부장은 올해 3월 8일 국정리포트에 쓴 글에서 한미 FTA 협상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미국 행정부와 의회, 그리고 업계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만들어낸 작품"이며 "미국은 지난해 자국과 FTA 체결 추진을 희망한 25개 후보국가 중에서 결국 한국만을 협상 파트너로 선정"했으며 "그 결정과정에 우리의 주도면밀한 설득 노력이 매우 유효하게 작용해 이러한 결실을 이뤄낸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가 미국 의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미국 산업계에서는 지속적으로 한국을 잠재적 FTA 상대국으로 지목해 왔다. 왜냐하면 FTA가 미국의 새로운 공산품 수출에 중요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포트먼 무역대표는 또 2월 2일 워싱턴에서 한 연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은 내가 9개월 전에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된 이래 첫 번째 작품이다. 나는 내 첫 번째 작품의 상대역으로 대한민국보다 더 나은 나라를 생각할 수가 없다.… 미국의 수출업자에게 이 협정이 가져다 줄 분명한 이익이 (오늘 저녁 내가 나눠드린 자료를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 … 이 협정은 미국의 노동자들, 농민들, 서비스 제공자들, 그리고 사업체들에게 미국 국경 바깥에서 경제적 호기를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협정이다."
포트만이 한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김현종 장관이 설득해서 그가 믿도록 한 것들의 표현인가, 아니면 그런 이익을 알고 있는 포트먼 무역대표가 김현종 본부장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설득한 것일까?
둘째, 협상 시작을 위해 한국이 양보한 것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역시 국정리포트에 실린 글(2월 24일자 게재)부터 보자. "외교통상부는 서울경제신문이 22일 '한미 FTA와 관련해 스크린쿼터 축소, 쇠고기 시장 재개방 등 미국의 4대 요구조건을 미리 들어준 것으로 확인되면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퍼주기를 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보도한 기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습니다."
그 아래에 '외교통상부 입장'이라는 제목 아래 이런 글이 실려 있다. "한미 FTA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한미 FTA 교섭 개시와 관련한 설명자료(2006년 2월 USTR 웹사이트에 게재)에서 지난 수년 간 한미 양국이 통상이슈들을 협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과시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현안 해결이 한미 FTA 협상 출범의 전제조건이라고 설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교통상부의 입장에서 인용된 미국 무역대표부의 설명자료는 2월 2일에 포트먼 무역대표가 행한 연설 중 일부다. 해당 부분을 직접 번역해보면 아래와 같다.
"지난 6개월에서 8개월 간 우리는 대한민국과 아주 집중적으로 협상을 했다. 오늘을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통상안건을 놓고 아주 치밀하게 의논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성과를 올렸다는 것을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어 행복하다. 지적소유권 보호 분야에서 시작해 자동차 표준화 문제의 해결까지, 그리고 의약품과 그밖의 분야에서 시장접근권과 관련된 안건들까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바로 몇 주 전에 남한은 더 많은 미국영화를 극장에서 더 많은 상영일수에 상영하기로 동의했고, 미국이 수출하는 쇠고기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는 데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위의 글들을 비교해보면 누가 맞는가? 서울경제신문이 맞고 외교통상부는 틀렸다.
국민을 위해서 협상을 한다는 사람들이 국민에게 정보를 숨기거나 틀린 정보를 제공할 때 그들을 고용한 국민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한국에는 한미 FTA 협상 내용을 보고받고 감독하는 국회의 위원회가 없다. 신문보도를 보면 경제부총리가 지휘나 감독을 하는 것 같지 않고, 외교통상부 장관이 그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 김현종 본부장은 누구에게 보고하고 결정을 내리나? "반대와 저항 때문에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조기 체결이 좌절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신 노무현 대통령 한 분인가? 청와대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 대책반이 구성된 것 같지 않은데,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라는 현안과 그 함축을 자세하고 알고 있는 전문가인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실은 김현종 장관 혼자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기 판단으로 결정을 내리고 합의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난 몇 년 동안 뉴질랜드에는 자녀를 먼저 이 나라에 유학 보내 놓고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이민 온 한국인 부모들이 많았다. 그 분들이 여기에서 생업수단으로 사업체를 많이 구입했는데, 그들이 그런 사업체를 구입할 때 영어가 안 되니까 여기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부모들이 보기에는 그 아이들이 대단히 영어를 잘하니까.
그렇게 해서 체결해 가지고 오는 계약서를 보면 대부분 엄청나게 불리하게 돼 있다. 아이는 아이다. 고등학생인 아이가 영어를 조금 한다고 해서 나면서부터 영어를 사용해 온, 경험 많은 현지인 비즈니스맨과 대등한 협상을 할 수 있겠는가? 김현종 본부장더러 포트먼 대사를 상대해서 협정을 체결하라고 맡긴 것은 뉴질랜드에 갓 이민 온 부모가 자기들보다 먼저 와서 2~3년 공부한 고등학생 자녀에게 "네가 알아서 사업체를 구입하라"고 시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협상을 제대로 하려면
한미 FTA 협상이 정부의 주장대로 미국의 압력을 받지 않은 우리의 자발적 작품이라면, 그리고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시늉만 하는 협상이 아니라면 협상전략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짜야 한다.
첫째, 노 대통령이 협상대표단에 내린 지침이 바뀌어야 한다.
노 대통령은 "반대나 저항으로 인해서 협정이 체결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선포했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한국 언론에 보도가 됐다면 미국 대사관이나 미국 중앙정보국 또는 미국 무역대표부의 서울 파견 직원을 통해 미국 측 협상담당자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집을 사러 갔다. 가족들을 데리고 갔는데, 아내는 부엌이 낡았다고 불만, 아이들은 학교에서 멀어서 불만이고, 어머니는 동네에 노인들이 없어 적적할 것 같다고 걱정이시다. 그런데 가장이 중개인에게 말한다. "우리 가족들이 불만을 가진 것은 그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고, 나는 그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꿈쩍할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집을 사기로 결심을 했으니까 최대한 빨리 입주할 수 있도록 계약을 체결하게 해달라." 처음에 가족들이 반대하는 것을 보고 '잘못하면 이 집을 이 가족에게 팔지 못할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고 가격을 깎아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집주인도 "가장이 무조건 살 테니 계약을 성립시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중개인으로부터 듣는다면 어떻게 할까? 깎아주기는커녕 원래 예정했던 가격보다 더 올려 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한국 정부는 영화배우들의 시위를 묵살하고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신속하게,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수차례 표현했다. 정책결정권자의 이런 확고한 의지를 알게 되면 미국의 협상전문가들이 그들이 애초에 내건 조건에서 얼마나 양보를 하려고 할까?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하도 통상교섭본부장이 한미 FTA를 체결하면 좋다고 하고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해서 해보라고 허락은 했는데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우리 경제도 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급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조건이 좋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다. 협상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협정을 체결하라는 법은 없으니, 협상이 진행되어가는 모양을 보고 국민여론과 국회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가면서 우리가 만족하는 조건으로 합의가 되면 협정을 체결하겠다"라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통령이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협상대표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켜준다. 무조건적인 성원이 좋은 곳이 있고 나쁜 곳이 있다. 조속하게 협정을 체결하라고 시그널을 보내는 것은 상대방의 입지만 강화시켜줄 뿐이다. 협정을 체결하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내용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지금이라도 노 대통령이 협상대표단에 내린 '신속체결 제일'이라는 지침을 '성공적인 협상과 만족한 조건일 때에만 협정 체결'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지침이 이렇게 바뀐 것을 한국 국민과 미국 정부가 모두 알 수 있도록 선포해야 한다.
선수 배치를 다시 해야 한다
협상은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 대고 하는 일이다. 몇 날 며칠씩,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협상 상대방과 인간적인 관계가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상대방과의 인간관계 때문에 때로는 상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핑계를 댈 사람이 따로 있어야 한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보스가 깐깐한 사람이라서…." 우리가 가게에서 흔히 듣는 이런 수법이 국가 대 국가의 협상에서도 통한다. 상대방도 그것이 곤란한 것을 피하는 수법임을 뻔히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인간적으로 본인은 동의하고 싶지만 한국 정치상황에 신경 쓰는 보스가 안 된다고 한다는데 어쩔 것인가? 그렇게 핑계를 댐으로써 협상을 깨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김현종 미국 변호사는 고등학교 또는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니까 한국 협상대표팀에서는 가장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일 것이다. 통상법 전문가이고 영어도 잘하고 해서 협상 책임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능을 가진 사람에게는 협상의 전면에 나서서 대화를 하기는 해도 결정은 내릴 수 없는 자리를 맡겨야 한다. 결정권자는 국내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형편을 깊이 있게 알고, 협상구절 하나하나가 어떤 정치적,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지를 아는 사람이라야 한다. 결정을 하는 자리는 경제전문 고위관료나 노련한 정치인이 맡아야 하는 자리다. 그 사람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몰라도 된다. 자기의 의사를 협상 담당자를 통해 전달하면 되니까.
김현종 본부장은 자신이 협상의 전면에 서고 있고, 자신이 결정의 전권도 가지고 있다. 설마 김종훈 수석대표가 협상의 전면에 나서고 김현종 본부장이 뒤에서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보스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용병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것이다. 앞서 본 대로 김종훈 수석대표는 미국인을 상대로 영어로 협상을 해서 상대를 양보시키거나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김현종 본부장은 국내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는 김종훈 수석대표보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했다. 지금 선수 배치는 김종훈 수석대표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고 김현종 본부장이 수석대표를 맡는 것보다도 더 이상한 배치다.
뉴질랜드에 와서 10년 넘게 살아본 결과 고등학교 때부터 이곳에서 공부한 아이들도 영어가 아주 편안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곳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해도 영어는 여전히 외국어다. 그런 영어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영어를 외국어로 배운 사람과 대화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네이티브 스피커와 대화를 할 때는 위축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협상개시 선언을 한 날 김현종 본부장의 연설과 질의응답(그 전문이 미국 무역대표부의 웹사이트에 게시돼 있다)을 보면 이 분의 영어가 제3국인과는 편안하지만 원어민들과의 대화에서는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수준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영어로 원어민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모든 대화를 감당하는 것은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본인이 할 말을 미리 생각하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역습을 하고 하는 일을 외국어로 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모국어로 하는데. 그 차이가 얼마나 큰 지는 그 회담을 모두 한국어로 한다고 상상하면 약간 짐작이 갈 것이다.
실화를 예로 들겠다. 뉴질랜드에 있는 한국교민 중 보험대리인 일을 하는 분이 있다. 이 분이 자기 고객과 약간의 분쟁이 생겼는데, 한국인인 그 고객이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 변호사는 현지인이었다. 그는 한국 여성과 결혼해서 연세대학교 외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뉴질랜드 현지인인데다 한국어도 할 줄 아니까 유능하고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국인 고객이 그를 찾아간 것이다. 한국인 고객의 의뢰를 받은 그 뉴질랜드인 변호사가 한국인 보험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의뢰인이 제기한 문제를 전했다. 백인들이 분쟁 시에 한국인에게 일반적으로 그러듯이 아주 위압적인 태도로.
한국인 보험대리인이 "그 내용을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 내가 알기에 그 고객은 영어를 못 하는데"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백인 변호사가 자기는 한국말을 잘 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한국말로 듣고 이해했다고 뽐내면서 답변했다. 그러자 그 보험대리인이 "그래? 당신이 한국말을 잘 하면 나는 영어를 잘 못하니까 지금부터 한국말로 이야기하자." 그러고는 자기의 주장을 한국말로 펴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인 변호사와 한국인 보험대리인의 뉴질랜드 보험법률 관련 분쟁은 한국인 보험대리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한국어로 대결을 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분쟁 해결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이냐는 그 결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한국과 칠레 간의 자유무역협정은 양자가 모두 외국어를 사용한다는 면에서 동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협상이었다. 한미 간 협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상대방은 긴 칼을 휘두르는데 우리는 단검 하나로 대결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런 불리함을 피해가는 방법은 (직접 한국말로 협상하자고 할 배짱을 없을 테니까) 우리도 긴 칼을 휘두르는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다. 한국말을 배운 미국인 변호사가 제일 좋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인 변호사도 좋다. 그 사람은 한국말은 할 수 있으되 한국말보다 미국말이 더 편안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이야기하기 편안한 상대를 더 쉽게 설득한다.
협상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설득하는 대상은 둘이다. 협상 상대방과 자신을 고용한 사람, 즉 보스다. 이 둘 중에서 협상전문가에게 설득을 더 많이 당하는 사람이 더 많이 양보한다. 한국말이 더 편한 협상전문가는 보스를 더 많이 설득할 것이요, 미국말이 더 편안 협상전문가는 대화가 불편한 자기 보스보다는 말하기가 더 편안한 상대방 협상가를 더 많이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한미 FTA 협상의 미국 측 수석대표가 여성이니 우리도 비슷한 연배의 여성을 내세우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을 협상의 전면에 내세우면 게임이 좀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어쩌다가 통상교섭본부에서 일하는 분들이 외교부 출신으로 채워졌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웬디의 예에서 보듯 미국은 상무부 출신들이 그 일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산업통상부라고 하는 부서를 중심으로 경제관료들이 맡아서 하던 일이다. 지금 부총리를 하고 있는 한덕수 씨가 1998년에는 통상교섭본부장이었다. 정치인 출신으로 적임자를 찾을 수 없고 정부관료가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아서 해야 한다면 당연히 외교부 출신보다는 경제관료 출신이 하는 것이 맞다.
협정체결 안 할 수도 있다는 태도로 협상해야
한국경제로 봐서는 내년 중순까지 한미 FTA가 반드시 체결돼야 할 이유가 없다. 미국은 서둘러야 할 이유가 많이 있다. 나라는 쌍둥이 적자에 허덕이고, 부시 대통령은 신속협상권 만료시한을 앞두고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것 같고, 포트먼은 그런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협상은 서두르는 사람이 양보를 많이 하게 되어 있다. 한국은 지금부터라도 미국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고 협상을 만만디로 진행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어차피 미국 대통령이 신속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나 마나 미국 측의 협상진행 방법이 다를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오히려 신속협상권이 만료될 시점이 임박하면 미국이 서두르면서 양보를 하기 시작할 것이다. 양보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러면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안에서 교역을 하면 되니 더 나빠질 것도 없다. 일본은 그렇게 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FTA도 추진하지 않고 있다. 일본뿐만이 아니다. 선진공업국 중에서 현재 미국과 FTA를 추진하고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한국이 지금까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대상은 두 개의 국가와 한 개의 경제권이다. 모두 한국보다 경제수준이 낮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모두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과 협상을 했다. 이런 나라들과 협상을 한 경험만을 가지고 바로 미국과의 협상에 뛰어든 것은 무모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다.
3라운드 게임을 두어 번 이긴 밴텀급 권투선수가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게 도전했다가는 묵사발이 된다. 동네 기원의 개인전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전 재산 걸고 이창호에게 덤볐다가는 패가망신이 확실히 보장된다. 영어를 사용하는 한두 개 나라들과 협상을 더 해보고, 그 경험을 갖고 미국에게 덤볐어도 될까 말까 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 미국과 협정을 맺은 호주 같은 나라가 좋은 스파링 파트너가 되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영어를 상용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협상대표단이 겪을 어려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협상과 관련해 한국에 가할 압력수단이 미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하기 때문에 농산물 같은 민감한 부분에 대해 우리의 주장을 더 강하게 관철시킬 수 있다. 일단 이런 전례를 만들어 놓으면 미국에 대해 호주와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의 양보 폭을 좁힐 수 있다. 호주는 최근에 미국과 협상을 해본 경험이 있으니 호주와 협상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미국의 협상전력을 탐지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미국과의 협상을 서두르지 않기로 결정만 한다면 호주와의 협상을 동시에 혹은 먼저 진행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협상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없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합의를 하지 않는다는 자세만 견지하고 있다면 그렇다. 우리 국민이 걱정하는 것은 우리 정부에서 "협정을 반드시 체결하겠다, 금년 말까지 체결하겠다,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엄청난 양보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협상대표단으로 나선 분들을 살펴보면 대등하게 협상을 진행할 만한 능력이 안 되는 분들이고, 협상의 총책임자는 경제를 잘 모르거나 거꾸로 알고 있고, 협상단에 대해 국민은커녕 국회나 경제부서에서도 보고를 받거나 감독을 하지 못하는 채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팔짱을 끼고 협상결과를 지켜보고만 있다가는 "어어어…"하다가 "악!" 소리도 내보지 못하고 우리의 자손 대대로 미국의 경제노예로 만드는 협정에 조인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협상의 책임자들을 교체하고, 속도를 늦추고, 미국 측이 하듯이 국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수렴해 가면서 협상을 진행하고, 조건이 맞으면 합의를 하되 그렇지 않으면 WTO에서 만나자는 태도로 나간다면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고 정부의 협상과정을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권태욱/뉴질랜드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