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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름부음의 의미 (왕하 9:1-10)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찌니라 그 소년 곧 소년 선지자가 드디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저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았는지라 소년이 가로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나이다 예후가 가로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뉘게 하려느냐 가로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찌라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열왕기하 9:1-10)
『하나님, 주님의 형상을 본받게 해달라고 저희들이 찬양에 동참했습니다. 주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되는 것이 주의 형상인지 말씀을 통해서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경을 통해서 보시면 여러 가지 우리 한국 문화와 정서에 맞지 않는 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어떤 선지자 무리에서 선지자 하나가 기름병에 기름을 채워 넣고 특정인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하나님께서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노라' 이렇게 선포를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망을 치라고 하지요. 여기 두 가지 사실이 나오는데 하나는 특정인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체하지 말고 도망하라는 이상한 행동, 이 두 가지를 지시합니다.
여러분 왕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데 그것을 알려주면서 왜 꼭 도망을 쳐야 됩니까. 그리고 말로 통보하면 될 터인데 기름을 머리에 왜 붓는 걸까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 인간들이 접근을 못할 정도로 너무나 난해합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가지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하나는 기름을 부었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왜 통보해 주는 선지자가 도망을 쳐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름 부었다' 이 말은 하나님 쪽에서 구원해 내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접근하고 지목해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방식입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 인간이 살 때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자유로 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먹지 말아야 되는 것을 먹고 말았어요. 일종의 사람을 죽이는 독약 같은 것인데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인간은 하나님과 완전히 갈라서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흙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그런 운명이지요. 심지어 영생의 나무를 따먹고 영생을 얻어야 될텐데 생명나무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가고 싶어도 두루 도는 화염검, 즉 천사로 말미암아 에덴동산 동쪽으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절대 접근 금지입니다. 어떤 인간도 영생이라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즉 '너는 영생을 꿈도 꾸지 말아라!' 영생 얻는다, 천국 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는 해당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무도 영생되지도 못하고 천국 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흙이 되고 그리고 나중에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그 죄책으로서 영원한 지옥 불을 감당해야 될, 너나 나나 다같이 그러한 공통적인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 그것이 막혀 있다는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가 출발을 해줘야 성경이 비로소 무엇을, 어떤 뜻을 나타내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어느 정도이냐 하면 낙타가 그 좁은 바늘구멍 속으로 통과할 수 있으면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면 천국에 못 가는 것이다. 즉 끝난 이야기라는 것이다.' 더 간단히 말씀드려서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못 간다는 이야기에 제자들이 그 취지를 알아듣고 하는 말이 그러면 누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 하며 놀라서 묻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인간은 아무도 못한다. 인간은 못 한다 를 하시고서 똑같은 뜻으로 다른 말을 연이어 덧붙이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하신다"입니다.
'인간은 못한다'는 이야기와 '하나님은 하신다'는 이 두 가지 말씀은 똑같은 말씀입니다. 이 둘 다 다 받아 들여야 할텐데 사람들은 자꾸 앞의 이야기, 즉 '인간은 못한다'는 안들은 것으로 여기려고 하고 '하나님은 하신다'에만 자꾸 집중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께서 귀여워하실 만한 모션을 취하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 안 하면 못 배길 정도로 종교적 열성을 내면 설마 하나님께서도 저를 외면하지 않겠지 라는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사람은 못 한다 를 못들은 걸로 여기고서는 다른 한편, 이렇게 내가 겸손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도 양심이 있으면 이런 나를 아마 구원해 주실 거야 라고 편하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일방적인 해석이요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못한다'. '하나님이 하신다'란 말은 글자 그대로 간단한 취지의 말씀입니다. 네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네가 어떤 노력을 해도 구원이 안 된다. 다만 하나님 쪽에서 접근해서 이미 찍어놓은 사람만이 천국 갈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 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네가 믿는 순간에 비로소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이미 잡혀져 있는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구원의 일을 진행시키다보니 저나 여러분도 구원받은 것입니다. 창세 전에 스케줄대로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만 구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65절에 '아버지가 보내지 않으면 나한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갈 사람은 가버려라 라는 말이죠. 어설프게 날 알아본다고 하는 사람은 다 가거라 라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붙여 준 자만 나는 건지려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회 방침입니다.
오늘 본문에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후라는 자가 자기는 왕이 되려고 애쓴 적도 없고 왕이 되려고 마음 준비를 한 적도 없었습니다. 예후가 스스로 심심한데 왕이나 되어 볼까 라면서 생각할 때에 소년 선지자가 마침 온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은 신하로서 다른 군대 장관들과 함께 있는 중, 여호와의 지시가 예후에게 먼저 떨어진 것이 아니고 우선 선지자 그룹에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졌지요. 즉 엘리사에게 먼저 떨어진 것이죠. 엘리사야 네가 저 생도 중 하나를 예후에게 보내어 왕이 되게 해라라고 하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엘리사에게 먼저 지시하시고 그 지시에 따라서 자기 종에게 지시를 하니 종이 그 예후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후에게 당신이 왕이 될 것이다라고 기름을 붓고는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름병에 기름을 넣어서 기름을 붓는다는 이 말은 결국 무엇을 뜻이냐 하면, 당신이 왕 된 것은 당신의 포부도 아니고 당신의 비젼도 아니고 당신의 인생 스케줄도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정된 사항을 당신에게 통보한 것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든지 선지자가 된다든지 왕이 될 때에는 반드시 기름을 붓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히브리말로 메시야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메시야나 그리스도나 다 같은 말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나 기름발린 자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야라는 말이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는가 하면, 이 지상에서 메시야가 결정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사전에 결정 된 게 있어 메시야가 되었다는 어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들은 세상사람들의 반응이나 세상사람들의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2장 2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될까요? 이해가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를 믿어도 내가 믿고 교회 나와도 내가 발걸음을 옮겨 내가 온 것이고 결정을 해도 내가 한 것이며 교회 안 나오는 것도 내가 안 나오는 것이지 라고 우리는 이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하잖아요. 우리는 이런 상식에서 기독교를 해석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복음을 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방금 본문에 보니 기름부음이 너를 장악하고 너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너희가 천당 갈 사람인지 지옥 갈 사람인지 결단 낼 것이다 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요한일서 본문에서 기름부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데에 여러분들이 어디 곗돈을 부었습니까, 어디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 했나하면 기름부음이 너에게 임했다고 했거든요. 기름부음이란 것은 여기서 제가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름부음이란 네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결정한 사항을 그 다음에 너에게 통보한다는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당첨이네요. 이런 뜻입니다.
우리 한국에서 보통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은 우선 예배당을 작정 헌금해서 지어 놓고 그 다음 지붕꼭대기에 십자가 하나 네온해서 걸어 놓고 그 위에 벼락 맞으면 안 되니까 피뢰침을 걸고, 입구에다가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걸지요. 장로교라고 해야 오다가다 사람들이 올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예배당 안에 성경 말씀으로 크게 써 붙이고 손님이 오면 심방 가서 교회스티커를 대문에다가 붙여주지요. 남의 교회 교인들이 뺏어 가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그 교인들을 위하여 세월이 좀 지나면 장립 집사, 장로 등 차례로 시켜주어서 그 교회 못 떠나게 하지요. 그 와중에 교인들도 그 교회에 돈을 많이 바치게 되니까 교회로서 수입이 들어와서 좋고 또한 자기가 헌신 한 교회라 어지간하면 다른 교회로 적을 옮길 가능성이 줄여드는 것 때문에 좋지요. 그래서 자꾸 교회에다 뭘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한번 발을 들여놓은 손님을 다른 교회 못 가게 하는 전략, 이것을 가지고 목회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그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그리고 교인들은 교회에다 이런 지사충성을 했으니 스스로 안심을 하는 차원에서라도 이 교회에 나와 학습 받고 세례 받았으니 구원도 받고 천당 가겠지 라는 자기 최면을 반복하게 됩니다. 물론 이 점도 목회 오래한 노련한 목회자들은 다 알고 자기 수법에 이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실제로 이들이 천국가게 될까요? 아니, 성경에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하고 믿으면 천당 간다고 되어 있던가요? 성경 내용이 그러하던가요? 자기가 천당 가고 싶으면 천당 가고, 지옥 가고 싶어 환장한 사람만 지옥 가고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즉 내가 천국 가고 싶어서 환장한다고 천국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그 사람을 천국 보내고 싶어 열심일 때만 그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평소에 자기는 안가고 싶은데. 자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도 뚝 인데, 자기는 예수 사랑하고 싶지도 않은데, 자기는 농사짓는 것이나 자기 가족이나 자기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데 자기 직장이 아니면 된 되는 줄로만 아는 그런 인식으로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답답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기뻐하셔서 그래서 하늘의 명단을 알려주면서 '너 명단 여기 있어, 너 마음대로 못살아, 이제 너 마음속에 기름부음이 들어 있어, 이건 네가 결정한 사랑이 아니야 오해하지마. 천국에서 너를 천당 데려가기로 결정해 버렸어. 이리와' 이렇게 해서 교회에 오게 되고 그렇게 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만이 진정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서 저도 무슨 이야기인줄 모르겠어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다음의 이 두 가지를 다 증거합니다. 즉 나는 예수도 싫고 교회도 싫고, 나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믿던 절이 친근하지 예수쟁이는 서양식이라서 싫고, 나는 조상제사도 지내야 하며, 시집살이를 수월하게 하고 싶고, 술 담배도 해가면서 남과 어울리며 살고 싶으며, 직장에서 따돌리기도 받기도 싫고, 술로 사람을 사귀고 싶은 그런 인간이었었습니다.
예배당도 싫고 목사도 싫은데 오늘 성경을 보니까 그 예수라는 분이 기름 부은 자이고 뿐만 아니라 요한1서 2장에 보니까 예수만 기름 부음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들도 성령으로 부어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야 부음 받았다고 불러주어서 너는 네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다라고 통보를 해 주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천당 가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이고 성령의 능력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이지 내가 남보다 착하고 훌륭하고 교회 열심히 다녀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올시다 라는 고백을 거듭난 사람 성령이 임한 사람만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아이고 길어라∼
여러분 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곳이 아니라 내 보내는 곳입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 나가 달라는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 말씀이 너무 신비롭고 납득하려 해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만이 고집스럽게 기어이 구원해 내어서 생긴 것이 바로 참된 교회일 뿐입니다. 제가 여기서 요1장11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워낙 핑계를 대면서 성경을 안 보는 분이 많기 때문에 이 성경 구절을 읽어드립니다. 제가 찾아드리는 구절은 희한하게도 사람이 자기가 알아서 믿은 것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긴 그런 성경 구절을 찾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자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는 것이 여러분 부담이 되십니까? 즐거움이 되십니까? 잘... 한번쯤 심사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는 것이 여러분 부담이 되십니까? 즐거움이 되십니까? 너는 안동 권씨, 나는 경주 이씨, 그런 혈통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야. 혈통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혈통은 육적으로, 아버지가 목사라든지 엄마가 권사라든지 이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혈통이나 육적이나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난 자들이란 말입니다. 목사로 말미암아 난 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직접 난 자 말입니다.
자 오늘 본문처럼 예후가 자기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누가 찾아와서 "예후입니까? 왕이네요. 저는 튈랍니다" 라고 가 버린 것입니다. 정말로 천사가 찾아왔던지 사실 성령이 찾아왔지만 쉽게 말해서 천사가 찾아왔다고 가정해 봐도 천사가 가만히 있는 여러분들을 왜 찾아옵니까? 매주 교회 와서 목사 쳐다보고 집사를 쳐다보고 해도 천국은 그것과 상관없으니 결국 교회란 친목단체이고요, 계모임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사가 찾아들고 성령이 찾아 들어서 너는 창세 전에 이미 찍혔어 라는 이야기를 내가 그것을 믿게 될 때 그것이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구원되었다는 것은 노벨 평화상 타는 것보다 더 한 것입니다. 노벨 평화상 10개하고라도 바꾸지 마세요. 바로 로마서 9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소상하게 나와있습니다. 로마서 9장 20-21절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0,21)
여러분, 토기장이가 진흙 가지고 하나는 천히 쓸 것을 하나는 귀히 쓸 것을 자기는 원대로 만드는데 누가 토기장이에게 시비 걸 자가 있겠느냐 라는 말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단지 그 그릇에 불과한데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고 세상만사 인간종족들이 다 그러한데 어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세상의 그 더러운 것과 노벨 평화상과 바꿔치기를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22절 23절에 보면 "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 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더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누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세상에, 어느 인간이 먼저 주님께 바치니까 주님께서 그 바친 뇌물을 받으시고 하는 말씀이 오냐 먼저 네가 나에게 무언가 바쳤구나 그 대가로 내가 너를 구원해줄게 라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누가 먼저 뇌물 바쳐서 뇌물 바친 이유 때문에 구원시켜주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구원하셨지요. 받으신 것 없이 하나님께서 먼저 구원하셨다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 11장에 보니까,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저로 말미암고 저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세상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나 안 받았나의 차이점을 무엇으로 두느냐 하면 재미나게도 기쁨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기쁘나? 아니요. 기쁜 것 없나? 없는데요. 이렇게 되면서도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고 여기면 뭔가 이상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기쁨...기쁨....기쁨으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여기서 누가복음을 잠시 설명하면, 2장 25절부터 쭉 보면 어떤 한 사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자가 뭔가 계시를 받은 것이 있어요. 네가 메시야를 보고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살 동안에 메시야 만날 날을 고대했지요. 그리고 어느 날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업고 오니까 그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하는 말이 주여 이 가슴 응어리 진 것이 이제 다 풀립니다. 종을 편안하게 놓아주는군요 라고 했습니다. 이 시므온이라는 분의 기쁨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어요. 주를 본다는 것, 자기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서 본다는 것, 우리는 마지막 재림 때에 주를 보게 되잖아요. 시므온은 이 기쁨으로 버티면서 한평생을 줄기차게 살아 온 것입니다.
또 한 사람 나오지요. 안나라는 여자 선지자인데 그 여자는 36절부터 보니까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라고 되어 있군요.
결혼해서 7년 동안 살았으니까, 예를 들어서 27살에 과부 되었다고 한다면 과부가 된지 84년이니까 나이가 도대체 몇 살입니까? 111살입니까? 어쨌든 110살쯤 되는 늙은 여인이 주야로 기도하고 금식하고 할 그 때에 아기 예수를 보면서 기뻐하면서 찬양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시므온이라는 자가 왜 등장합니까? 안나라는 늙은 과부가 왜 등장합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설립해놓고 등록하면 구원받는다는 이런 말은 말도 안 되는 장사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교회 문제도 아니요 ,남의 문제도 아니요, 바로 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과 재회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가 예후를 찾아온 은 이미 하늘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결정된 사항.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 신비로움을 나의 신비로움으로 받아들이신다면 여러분들은 앞으로 어떤 직장. 어떤 도시에 가서 산다해도 오직 주만 생각 할 겁니다.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만 생각할 거예요. 돈 벌었다고 동창생들에게, 친척들에게 자기 자랑하지 않을 겁니다. 직장 좋다고 직장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쁜 아내 만났다고 너 결혼했니 하며 남 약올리지 않을 겁니다.
이 안나라는 할머니 선지자는 남편하고 산지 불과 7년 밖에 되지 않았어요. 84년 동안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84년 동안 기다린 사람은 남편도 아니고 누구입니까? 예수님 즉 아기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왜냐? 자기 인생의 기쁨은 바로 그 기쁨이기 때문이기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문제점은 교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교인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많은데 그 많은 교인들을 붙잡아두는데 치중해서 목회를 하다보니까 가짜만이 모였고 진짜는 목사가 모두 이단으로 몰아서 교회 밖으로 내 쫓고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갈 곳 없다고 난리입니다. 제가 서글픈 전화를 받곤 합니다.
"저요 박사교회 가까운데 이사가면 안됩니까?" "어딘 데요?" "목포입니다." 제가 이야기합니다. "목포에서 여기 왜 여기까지 옵니까?" 그리고 군산까지 가서 교회를 찾았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복음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늘나라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느냐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까? 왜 오늘날 교회가 이런 하늘 나라 이야기를 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태만하고 안일한 교인들은 말합니다. "이 사람이 미쳤나 하늘나라는 뭐하려고 찾노. 땅의 일도 골치 아파 다 생각 못하는데…. 미쳤지. 하늘나라는 왜 궁금해 하노. 교회 대충 다니다 보면 늙어 죽고, 죽다보면 천국 가겠지. 벌써부터 천국 왜 챙기노"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 목포에 있는 사람은 생각하기를 "하늘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어서 인간도 아닌 내가 이렇게 기쁘게도 구원되었을까? 나를 누가 구원했습니까? 그 분이 나에게 어떤 사랑을 베풀었습니까? 그것이 궁금하다 이 말입니다."
바로 구원이라는 것은 이처럼 창세 전에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졌기에 그런 자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상하고 특이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기름부음에 따르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자의 특징은 두 번째로 이 세상에 서 핍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도망을 하게 되어 있지요. 내 빼야 되요.
오늘 본문인 3절에 봅시다.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찌니라" 도망을 쳐야 됩니다.
그리고 11절-12절에 보니까 어떻습니까?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무리가 가로되 당치 않은 말이라 그대는 우리에게 이르라 대답하되 저가 이리 이리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는다 하셨다 하더라" 라고 되어 있군요.
이 예후의 답변이 무슨 차원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이 그 때부터 좋든 싫든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에 선택이 자기 속에 입력이 돼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 무엇과 연관짓는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는 사실과 연관을 짓는 것입니다.
결혼하려고 선보는 자리에 나가도 "저 사람은 혹시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일까"라고 생각하게 되고 반면에 교회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는 사람 같으면 "혹시 저 사람과 내가 혼인하면 사주팔자가 맞을 까 궁합을 한번 볼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이 운명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것과 연관지어서 모든 세상을 재해석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런 안목을 갖추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재수 좋아라고 혹은 자기가 부자가 되고 싶어 교회 온 사람 같으면 "내가 교회 다섯 번 나가서 돈을 이만큼 벌었나 그런데 내가 두 번 예배에 빠지니 돈이 이만큼이나 빠져나갔네"라고 항상 모든 것을 돈과 연관시킬 것이고 또 몸이 안 좋아서 교회 나온 사람 같으면 "내가 교회 나오니까 내 몸이 안 아프더라"라고 연관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참 신앙심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사태가 있더라도 "주여 내가 이 불신앙의 세상에서 구원받았기에, 어떻게 하면 이 어두운 세상에서 계속 주만 의지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이 나오게 됩니다. 믿는 신자가 안 믿는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된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불신 처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 어쩔 수 없습니다. 안 믿는데 오니까 이제 교회도 못 오겠네요. 말씀을 끊어야겠습니다. 혹시 나중에 내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늙어서 교회 그 때 다닐게요"라고 이렇게 얘기할텐데. 반대로 신자 처녀가 시집가면, " 하나님 내가 선교사로 이 가정에 시집을 왔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자로서 이 집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합니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선택받은 것과 연관지어서 상황을 해석을 하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그런 능력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더라 말입니다. 특별히 더 착하고 봉사하고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선택해 주어서 조성하신 상황이라고 연관지어서 생각하고 행동하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어떤 대우를 받겠습니까? 이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고 가까웠던 친구로부터 떨어지고 사랑했던 일가 친척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고 가장 가깝게 애정을 쏟던 사람들도 냉정하게 돌아서는 핍박과 어려움과 괴로움과 이러한 수모를 당하게 받는 운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서러움을 받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퍼붓는 낯선 인식 때문에, 그리고 본인의 낯선 태도 때문에 그때부터 남하고 화합하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그런 외롭고 외로운 길을 가게 되는데 마태복음 7장에 보니까 그 길을 무슨 길이라 했어요? 유명한 말씀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좁은 길로 가거라 넓은 길을 찾는 자는 멸망으로 가고 좁은 길로 가는 자는 영생이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핍박을 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핍박을 하리라!'
여러분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환란이 결국 소망을 낳습니다. 환란 가운데 인내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이 주일성경 여러분 보았지요. 환란 가운데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환란과 고난을 받는 이유는 이 자체가 어울릴 수 없는 세상 나의 세상이 아니라는 이야기잖아요.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 잖아요. 유황 불. 지옥 불에 갈 사람들과 천국 갈 사람과 지금부터 표가 나고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지진에서 땅이 갈라지듯이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 노력과 자기 선행과 자기 힘으로 자기 종교적인 노력으로 구원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필히 구원해 주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이미 선택된 자들만 결국 천국을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다들 하나님의 성령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 세상에서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운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대받고 구박받는 서러운 인생을 보내고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인생길이 무슨 길이다고 했습니까? 곧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영원히 사는 방법은 그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 예수 때문에 욕을 받는 자는 천국이 저의 것이요.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고 예수님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남에게 서러움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천사와 같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후라는 사람은 무서운 일을 하기 위해 선택을 받았거든요. 그러기에 기름부음을 행한 소년 선지자는 옆에 있지 못하고 부리나케 도망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그 어떤 경우라도 그 사람의 자질이나 포부와 상관없이 성취되고야 맙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선지자와 주의 종들은 이 땅에서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되 그 복음이 돈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명예와 존경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다시 한번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구원이란 교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내가 어쩔 수 없이 내 운명도 내가 거역할 수 없는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된 그 자체에서 여러분 남은 인생을 기쁨으로 다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가 하나가 있든 열 개 있든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그 어떤 인간들이 방해하고 핍박을 해도 여전하시면서 택함을 받은 자만 건진 줄 압니다. 구원받을 자격은 없지만 선택된 자로서 어쩔 수 없이 구원되었기에 이제 남은 생애를 구원해 주신 그 기쁨으로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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