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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동쪽, 우암산 자락의 학교를 어슬렁거리다 | ||||||
대성학원·주성중·중앙초교 잇는 교복의 거리 ‘대성로’ 청주여고·교동초교 외곽 이전, 일제 때 뜯긴 망선루 복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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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야 진천군 광혜원까지 승용차로 30분이면 가는 거리이지만 50년 전엔 그렇지 않았다. 신작로는 온통 흙먼지 자욱한 비포장 도로 인데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많았고, 시외버스는 마을마다 가다서다하며 청주까지는 두시간 넘게 걸리던 멀미나는 멀고 먼 나라였다. 나는 시골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열세살 빡빡이 촌놈으로 청주주성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그야말로 우물안개구리가 대처로 나온 것이었다.
개울은 남쪽 공고 앞쪽으로부터 주성초등학교를 지나 청주중학교 서쪽으로 한참을 흘러갔다. 무심천과 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사천동에서 무심천으로 합해져 까치내로 흘러갔다 . 물론 공고 앞에도 다리가 있었고 홍와촌에서 청주중학교 정문를 가기위해서도 작은 다리를 건너가야 했다. 이 작은 개울에는 왕잠자리들이 많아 미끼로 쓸 왕잠자리 한마리를 미리 잡아 다리를 실로 묶어 날리면 다른 녀석이 따라붙기 때문에 싫증 안나는 재미난 놀이였다. 한여름 내 왕잠자리를 잡던 기억이 새롭다. 우암산자락에는 역사 깊은 학교들이 깃들어 있다. 1924년 청주대학교가 청주상과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은 후 김원근·영근 두 형제 사업가들은 대성학원 안에 청주상고와 중학교 초등학교를 잇달아 세워 한수이남 명문사학으로 키워갔다. 청주상고 아래엔 1951년 설립된 대성중학교가 1971년까지 대성학원의 상징이 된 붉은 벽돌교사에서 수업을 받다 신봉동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했다. 수동 수암골 아래에는 대성학원의 여학교인 대성여상과 대성여중이 한 울타리 안에 있다. 청주대학교와 교명이 바뀌어 대성고등학교가 된 청주상고 대성여상 대성여중이 우암산 자락에 연달아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청주대학교 정문에서 수동을 지나며 도청과 중앙초등학교를 지나는 길의 이름이 대성로로 불린다. 대성여중고도 역시 붉은 벽돌집으로 고풍스럽다. 대성여중을 지나면 1951년 개교한 주성중학교가 이어지는데 주성중학교도 학생수가 현저하게 줄어 머지않아 이전한다는 얘기가 떠도는 걸 보면 구시가지의 공동화 현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근의 충북교육과학교육원과 한국은행청주지점은 더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90년대 교동초등학교가 신흥택지였던 용암동으로 옮겨가고 1934년 개교한 청주여고마저 1981년엔 인구가 늘어나는 청주의 북쪽 변두리인 율량동으로 이전했다. 상당공원과 이웃한 청주여고 부지에는 태양생명(교원공제회)과 한국은행청주지점이 세워졌다. 머지않아 한국은행청주지점도 대전지점과 합병하여 사라진하다 하니 도시의 변화가 참으로 무쌍하다. 청주제일교회인데 이곳에는 2000년까지 교회의 부속건물로 쓰이던 망선루가 있었다. 망선루는 본래 읍성안인 주네쓰 건물 부지에 세워져있던 건물이었다. 2층 누각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망선루는 그저그런 ‘오래된 문화유산’이 아니다. 왜냐하면 망선루가 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닌 역사를 찾다보면 청주교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 공민왕(1361)때 세워진 이 건물은 왕이 누각에 올라 시를 짓고 과거시험을 치러 방을 내 걸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제시대인 1914년 청주보통학교의 부속 건물로써 1921년까지 주로 여학생 교실로 사용되다가 일본경찰의 체력단련장인 무덕관을 짓기위해 철거했는데 이를 제일교회 청년교인인 김태희 선생등이 매입운동을 벌여 1923년 제일교회자리로 옮겨 짓게 된다. 어릴적 청주경찰서 부속건물이던 무덕관에서 경찰이나 일반인들이 이상하게 생긴 철망을 쓰고 검도를 연습하는 것을 구경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제일교회 구내로 옮겨 지어진 후 청주유일의 사립초등학교인 청남학교교사로 쓰이기도 하고 청신여학교, 고등성경학교,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하교, 청신고등공민학교 등의 교사로 사용되어 충북근대교육의 요람이 되었던 것. 참으로 중요하고도 역사적 건물임에 틀림없다. 이곳에서 출발한 세광학원은 대성동 시대를 거쳐 미평동에 신축 이전하며 고교평준화정책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충북의 명문사학으로 커나가게 된다. 기억과 기록을 들추다보노라면 50년 세월은 많은 학교들의 건립과 소멸, 이전 등의 급변하는 역사를 간직한 시간이다. 그 변화는 멈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합집산에 따라 변화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충북도청 옆 오래 묵은 중앙초등학교 건물도 머지않아 역사의 뒷길로 사라진다고 한다. 일제시대 주로 일본인들이 다녔던 중앙초등학교를 일본사람들은 ‘동정학교’라 불렀다. 어느 핸가 1960년대 후반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배가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동정학교 출신’이라며 일본인졸업생들이 거창한 축하연을 해주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학교운동장 한 켠에 서 있던 서양식 목조 강당이 헐려 사라질 때 아쉬운 마음이 컸었다. 일제 때 사진에도 남아있는 이 건물은 초대 충청북도의회 건물로 쓰이기도했고 디자인도 훌륭하여 없애지 말고 잘 보존하면 문화유산이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산책하며 느끼는 마음은 주로 옛것들이 사라지는데 대한 아쉬움이다. 나이가 드는 확실한 증거인가보다. / 윤석위 본사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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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그땐(1960년대 초반) 나하고 한 학년이 두학급 뿐이었던 진천군 작은시골에 있던 만승국민학교를 다녔었는데...
운동화신고, 책가방을 메고 다니던 니가 그리 부러웠었단다. (석위 선친께선 당시 저수지를 축조하시던 수리조합장님)
늙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과학교육원(교동초) 청주여고 자리, 대성여상 ,육군병원, 태양연탄공장, 청주역, 우암산 용화사, 성공회, 당산 청주 향교 내 파운드리 였는데 석위 건강하시게 잘 읽고 가오
나도 가끔 청주 시내의 옛모습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석교동에서 부터 한국은행을지나 오정목 까지의 본정통이라고 불리던 길이 기억에 남아.
지금에 비하면 너무 좁은 길이지만 그게 중심가였으니.
시내를 통과하던 기차길, 북문로에 있었던 버스터미널. 에전엔 차부 라고 불렀고.
중앙공원으로 들어가는 골목의 감천당 아이스케키. 청주여고 앞 호떡집...
청주경찰서 삼무관 자리에 있던 망선루 이것이 돌고 돌아 이젠 중앙공원에 복원된 것을 올 봄에 보니, 그 건물이 공북루와 동명이 아닌가 궁금하네? 동헌인 청원군청 후관과 직선거리는 수 백미터인 상무관이니, 청주목 관아 일 것이고 중앙공원은 청주병사의 진영일 테니 중심부는 거의 관아와 병영 그리고 성밖의 옥과 일부 상인의 상가 민가 그리고 아전의 집이 전부인 읍성내의 풍경일 듯!
망선루는 고려때 이름이 취경루였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명회가 망선루로 고쳐 부르게했다는군. 한명회의 사당이 고속도로변인 천안 수신면에 있는데 벼슬하면서 청주에 내려와 누각에 올랐다고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