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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은11기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베토벤
제1대 : 태조 [太祖, 877~943]
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 궁예의 휘하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고려를 세운 후,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았으며 신라와 후백제를 합병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제2대 : 혜종 [惠宗, 912~945]
고려의 제2대 왕(재위 943∼945). 태조 왕건의 맏아들로 즉위 후, 이복동생 요·소와 왕규의 왕권 다툼 속에서 곤란을 겪었다.
자는 승건(承乾), 휘(諱)는 무(武),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태조는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나주 오씨 집안의 세력은 권력이나 군사력을 갖지 못했으며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921년 박술희(朴述熙) 등의 도움으로 태자로 책봉된 뒤,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공을 세웠다. 943년 태조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이복동생인 요(堯 : 뒤의 정종)와 소(昭 : 뒤의 광종)가 왕위를 엿보았다. 이 둘은 태조의 제3비 신명순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충주 지역 호족이었던 유경달(劉兢達)의 외손이었으며 충주 유씨는 혼인을 통해 여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요와 소가 왕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눈치챈 왕규는 945년(혜종 2)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으나 혜종은 요·소를 벌하지 않았다. 혜종이 요·소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러한 왕권다툼 속에서 혜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
이어 이복동생 요가 왕위에 올랐는데, 혜종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사료에는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어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살해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젊어서부터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고 한다. 능은 개성(開城)의 순릉(順陵)이다.
제3대 : 정종 [定宗, 923~949]
고려 시대의 제3대 왕(재위 945~949). 정적을 제거하며 왕위에 올랐다. 서경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개경 세력의 반발과 백성의 원성으로 실패하였다. 거란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광군을 조직했으며 불교 중흥에 힘썼다.
자는 의천(義天), 이름은 요(堯),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태조(太祖)의 둘째 아들로, 923년(태조 6)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으며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 양곡 7만 석을 내어 여러 사원(寺院)에 불명경보(佛名經寶)·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는 등 불교 중흥에 힘썼고, 947년에는 서경성(西京城:평양성)을 쌓고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그곳으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경천도 계획에 개경의 호족들이 반발하였으며 역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도 컸다. 947년 후진에 유학하다 거란에 붙잡혀 그곳에서 벼슬하던 최광윤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보고를 듣고 광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948년 9월, 동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 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이후 계속 병석에 있다가 이듬해 3월에 죽었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제4대 : 광종 [光宗, 925~975]
고려 제4대 왕(재위 949∼975). 태조의 넷째 아들이며 정종의 친동생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개혁정책을 통해 많은 치적을 쌓았으나 왕권강화에 장애가 되는 호족들을 숙청하여 사회적 불안을 일으켰다.
자는 일화(日華), 휘는 소(昭), 시호는 대성(大成)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넷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함을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즉위한 후, 국초에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공역자를 정해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950년(광종 1)에는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951년(광종 2)에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후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연호를 다시 정하여 ‘준풍(峻豊)'이라 하였다가(960~963), 송나라와 국교를 연 후에는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乾德)'을 사용하였다(963~968).
956년에는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다.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선별하여 노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것은 호족에게 귀속되던 세(稅)를 국가에 환원시키고 호족의 사병(私兵)을 감소시킴으로써 호족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958년에는 후주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는 능력을 갖춘 새로운 관료층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하여 관료의 서열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960년에는 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광종은 이들을 귀양 보냈으며 이때부터 참소하는 사람이 많아 옥이 가득차 임시 감옥을 두었으며 죄없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 시기부터 호족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숙청으로 광종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까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위화(威化)·무주(撫州)·안삭(安朔)·습홀(濕忽)·송성(松城)·낙릉(樂陵)·운주(雲州)·신도(信都)·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박평(博平)·고주(高州)·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축성하였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제5대 : 경종 [景宗, 955~981]
고려의 제5대 왕(재위 975∼981). 광종의 장남. 어머니는 대목왕후 황보씨. 비는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두 자매. 즉위해 전시과를 제정했다. 뒤에 정치를 등한히 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소인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군자를 멀리하였다.
휘(諱) 유(伷). 자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비(妃)는 대종(戴宗) 욱(旭)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 두 자매이다.
955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즉위하여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였다. 뒤에 정치를 등한히 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소인(小人)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군자(君子)를 멀리하였다.
제6대 : 성종 [成宗, 960~997]
고려 제6대 왕(재위 981∼997). 내치·외교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내치 중에서는 관제개혁을 들 수 있고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했다. 요나라 군대가 침입하자 서희를 요군의 진영에 보내서 외교담판으로 물러가게 했다.
휘(諱) 치(治). 자 온고(溫古). 시호 문의(文懿). 태조의 손자. 어머니는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 981년(경종 6)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고려시대 역대의 왕 중 드물게 보는 명군(明君)으로서 내치·외교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종의 내치 중에서는 관제개혁을 들 수 있는데, 거유(巨儒) 최승로(崔承老)의 자문을 받아,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를 확립하였다. 관제개혁에 있어 중앙에 3성(省)과 6부(部)를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分掌)한 7시(寺)를 설치하였다. 또 언론(言論)을 맡은 사헌부(司憲府), 군국(軍國)의 기밀기관인 중추원(中樞院) 등을 두었다.
한편 지방에는 처음에 12목(牧)을 설치하였으나 후에 10도(道)·12주(州)로 나누어 다스렸다. 또 권농정책에 힘썼다. 993년(성종 12)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遼)나라의 군대가 고려에 침입하자 서희(徐熙)를 요군(遼軍)의 진영에 보내서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후에 여진족(女眞族)이 차지하고 있던 지금의 평북 일대, 즉 장흥(長興)·귀화(歸化)·곽주(郭州)·구주(龜州)·안의(安義)·흥화(興化)·선주(宣州) 등에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능은 개성의 강릉(康陵)이다.
제7대 : 목종 [穆宗, 980~1009]
고려 제7대 왕(재위 997∼1009). 경종의 맏아들. 관리 봉급제도인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다.
이름 송(誦). 자 효신(孝伸). 시호 선양(宣讓). 경종(景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는데, 997년에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모후(母后)를 천추태후(千秋太后)로 존칭했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김치양과 함께 음모, 후계자인 왕의 당숙(堂叔)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승려로 만들어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간파한 목종은 서경(西京)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조에 의해 폐위되어 충주(忠州)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즉 제8대 왕 현종(顯宗)이다. 능은 공릉(恭陵)이다.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문헌에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와 있다.
제8대 : 현종 [顯宗, 992~1031]
고려의 제8대 왕(재위 1009∼1031). 거란 성종의 침입에 참패하였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고, 6성 요구도 거절하였다. 다시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침입하자, 강감찬장군이 이를 섬멸하여 물리쳤다. 이후 거란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으며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대장경의 제작에도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자 안세(安世). 휘(諱) 순(詢). 시호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구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지방 관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 12주의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5도호부(都護府) 75도(道)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이를 폐하여 4도호부 ·8목(牧) ·56지주(知州) ·56군사(郡事) ·1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사심관(事審官)의 선출을 엄격히 하였다. 능은 경기 개풍군의 선릉(宣陵)이다.
제9대 : 덕종 [德宗, 1016~1034]
고려 제9대 왕(재위 1031∼1034). 압록강구부터 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축성하게 하여 동여진인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국자감시를 실시하고 현종 때 시작한 국자 원량(元良). 시호 경강(敬康). 이름 흠(欽). 현종(顯宗)의 장남으로 모후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1022년(현종 13) 태자로 책봉되고, 1031년에 즉위하였다. 그후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浮橋) 및 보성(保城)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에 축성하였다.
이듬해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압록강구로부터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汝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능은 숙릉(肅陵)으로 개성(開城)에 있다.
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제10대 : 정종 [靖宗, 1018~1046]
고려 시대 제10대 왕(재위 1034~1046). 거란 침입 이후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시켰다.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자 신조(申照). 휘(諱) 형(亨). 시호 용혜(容惠). 현종(顯宗)의 둘째 아들. 덕종(德宗)의 동생.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김씨(金氏). 비(妃)는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韓氏),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李氏). 1022년(현종 13) 내사령(內史令)에 올라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1027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1034년(덕종 3) 덕종이 죽자 즉위하여 명주성(溟州城)을 수축, 이듬해 북계(北界)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을 수축하고, 또 창주(昌州:平北 昌城)에도 성을 쌓았다. 1036년 각 도의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衛)의 군인 중 경전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公田)을 더 주었다. 1037년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고 다음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시켰다. 또 예성강(禮成江)의 병선(兵船)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州鎭)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비서성(??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1046년 장자상속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능은 개성(開城)의 주릉(周陵)이다.
제11대 : 문종 [文宗, 1019~1083]
고려의 제11대 왕(재위 1046∼1083). 법률 제정으로 내치에 힘썼다. 불교를 신봉했고, 유학도 장려하였다. 동여진의 침입을 토벌했고, 송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입했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했다.
자 촉유(燭幽). 시호 인효(仁孝). 이름 휘(徽). 초명 서(緖). 현종(顯宗)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의 셋째 아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崔冲)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 ·3원신수법(三員訊囚法)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였다.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녹봉제(祿俸制)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하였다.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
이처럼 내치에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北邊)을 침노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후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 수입에 힘썼다. 이와 같은 현명한 정책이 큰 효과를 나타내며,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하였다. 유교 ·불교를 비롯한 제도 ·시설 ·무역,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한 수준을 나타냈다. 인재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 ·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비문을 친필하였다. 능은 장단의 경릉(景陵)이다.
제12대 : 순종 [順宗, 1046~1083]
고려 제12대 왕. 자 의공(義恭). 휘 훈(勳). 시호 선혜(宣惠). 문종(文宗)의 장자.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 소생. 1054년(문종 8) 왕태자에 책립되었고, 1083년 문종이 죽자 즉위하였으나 그해에 죽었다. 능은 성릉(成陵)이다.
제13대 : 선종 [宣宗, 1049~1094]
선종(宣宗, 1049년~1094년)은 고려 제13대 군주(재위: 1083년~1094년)이다. 휘는 운(運), 자는 계천(繼天), 시호는 선종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宣宗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아들이다.
제14대 : 헌종 [獻宗, 1084~1097]
고려시대의 제14대왕(재위 1094∼1095). 즉위 후 이자의의 난이 있었으나 곧 평정하였다. 신병으로 왕위를 숙부 계림공(鷄林公) 희(熙:숙종)에게 물려준 뒤, 후궁에서 지내다가 14세에 요절하였다.
휘(諱) 욱(昱). 시호 회상(懷殤). 선종(宣宗)의 원자(元子). 어머니는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에 서화(書畵)를 잘하였다.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이 있었으나 곧 평정하였다. 다음해 신병으로 왕위를 숙부 계림공(鷄林公) 희(熙:숙종)에게 물려준 뒤, 후궁에서 지내다가 14세에 요절하였다. 능은 개성(開城)의 온릉(穩陵)이다.
제15대 : 숙종 [肅宗, 1054~1105]
고려 제15대 왕(재위 1095~1105).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했다. 불교를 신봉하여 많은 불회를 열었으며 평양에 기자의 무덤을 만들고 묘사를 세웠다.
자 천상(天常). 초명(初名) 희(熙). 휘 옹(顒). 시호 명효(明孝). 문종(文宗)의 3남. 순종의 아우. 비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 문종 때 계림공(鷄林公)에 봉해졌고, 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 즉위하였다. 1096년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鑄貨)인 은병(銀甁)을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2년에는 해동통보(海東通寶)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했다. 남경(南京)을 양주(楊州)에 세우려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또한 불교를 신봉하여 많은 불회(佛會)를 열었으며, 평양에 기자(箕子)의 무덤을 만들고 묘사(廟祠)를 세웠다.
1104년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우야슈[烏雅束]가 침입했을 때, 임간(林幹)을 보내어 방어하게 했으나 이를 막아 내지 못하자, 다시 윤관(尹瓘)을 보내어 화약을 체결하였다. 이로부터 정주장성(定州長城) 밖에 있는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비확장에 착수하려던 즈음, 서경(西京)으로 행차 도중 병을 얻어 죽었다. 능은 영릉(英陵)이다.
제16대 : 예종 [睿宗, 1079~1122]
고려 제16대 왕(재위 1105∼1122). 윤관(尹瓘)에게 여진(女眞)을 경략하게 하여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았다. 학교를 세우고 국학(國學)에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학문을 진흥시켰다.
휘(諱) 우(俁). 자 세민(世民). 시호 문효(文孝). 숙종의 태자, 명의왕후(明懿王后)의 소생. 1100년 왕태자에 책봉되고, 1105년에 즉위하였다. 1108년(예종 3) 윤관(尹瓘)에게 여진(女眞)을 경략하게 하여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았다. 1119년 이후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고 국학(國學)에 양현고(養賢庫:학생후생재단)를 설치하는 등 학문을 진흥시켰다. 능은 개성의 유릉(裕陵)이다.
제17대 : 인종 [仁宗, 1109~1146]
고려 제17대 왕(재위 1122~1146).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반란을 평정하고 이자겸을 귀양보냈다. 서경에서 묘청이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을 서경 정토대장으로 삼아 이를 평정했다. 주 · 현에 학교를 세웠으며, 서적소를 설치했다. 김부식에게 명하여《삼국사기》50권을 편찬하게 했다.
자 인표(仁表). 휘(諱) 해(楷). 예종의 맏아들. 어머니 순덕왕후(順德王后).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제3녀 폐비(廢妃) 이씨와 제4녀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예(金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122년 이자겸에게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최사전(崔思全) ·척준경(拓俊京) 등을 시켜 반란을 평정하고 이자겸을 귀양보냈으며, 그의 딸들인 왕비들을 폐출(廢出)하였다. 또 1135년 서경(西京)에서 묘청(妙淸)이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金富軾)을 서경 정토대장(征討大將)으로 삼아 이를 평정하였다.
2차례의 내란으로 정국(政局)이 불안한 중에도 1127년 주(州) ·현(縣)에 학교를 세웠으며, 1129년에는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였다. 한편 금(金) ·송(宋)나라 등과 사신 왕래를 자주 하였으며, 1145년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의 장릉(長陵)이다.
제18대 : 의종 [毅宗, 1127~1173]
고려의 제18대 왕(재위 1146~1170). 1170년 정중부 ·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켜 폐위되었으며, 거제도로 쫓겨났다. 1173년(명종 3) 김보당의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계림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었다.
휘 현(晛). 자 일승(日升). 시호 장효(莊孝). 초명 철(徹). 인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 비는 강릉공(江陵公) 온(溫)의 딸 장경왕후(莊敬王后). 계비는 참정(參政)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
l146년 인종의 뒤를 이어서 즉위, 방종했으나 문학을 좋아하고 문신들을 우대하는 반면, 무신들은 천대하였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일으켜 폐위되었으며, 거제도(巨濟島)로 쫓겨났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의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계림(鷄林:慶州)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제19대 : 명종 [明宗, 1131~1202]
고려 제19대 왕(재위 1170∼1197). 의종을 몰아낸 정중부 등의 추대로 즉위하였으나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었다.
자 지단(之旦). 초명 흔(昕). 이름 호(晧). 시호 광효(光孝). 인종의 셋째아들, 의종의 동생. 비(妃)는 김온(金溫)의 딸 의정왕후(義靜王后). 1148년(의종 2) 익양후(翼陽侯)에 책봉되고, 1170년 의종을 몰아낸 정중부(鄭仲夫) 등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무신의 집권 뒤 그들의 횡포가 과거의 문신보다 더 심하여, 사회질서 혼란을 초래하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김보당(金甫當) ·조위총(趙位寵) 등이 무신 제거를 위한 난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197년(명종 27) 실권자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다. 능은 지릉(知陵)이다.
제20대 : 신종 [神宗, 1144~1204]
고려 제20대 왕(재위 1197~1204). 1154년 평량후에 책봉되었다가 1197년 최충헌이 명종을 폐함으로써 뒤를 이어 옹립되었다.
휘 탁(晫). 초명 민(旼). 자 지화(至華). 시호 정효(靖孝). 인종의 다섯째 아들. 명종의 친동생. 1154년(의종 8) 평량후(平凉侯)에 책봉되었다가 1197년(명종 27) 최충헌(崔忠獻)이 명종을 폐함으로써 뒤를 이어 옹립되었다.
즉위년에 만적(萬積)의 난을 비롯하여, 이듬해 강원도 명주(溟州)의 난, 진주(晉州)·금주(金州: 김해)·합천(陜川)·경주(慶州)·광주(廣州) 등지에서 잇달아 민란이 일어났다. 국권은 실제로 최충헌이 전단하여 왕은 실권이 없었으며, 1204년 병이 심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능은 양릉(陽陵)이다.
제21대 : 희종 [熙宗, 1181~1237]
고려 제21대 왕(재위 1204∼1211). 왕 즉위의 공으로 권신(權臣) 최충헌을 문하시중(門下侍中)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에 봉했으나 횡포가 심하자 그를 죽이려다 실패, 폐위되어 강화(江華)로 쫓겨났다. 이후 복위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유배되어 죽었다.
이름 영(韺). 초명 연(淵) ·덕(悳). 자 불피(不陂). 시호 성효(誠孝). 신종(神宗)의 장자로, 어머니는 선정태후(宣靖太后) 김씨(金氏)이고 비는 영인후(寧仁侯) 진(稹)의 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왕 즉위의 공으로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을 문하시중(門下侍中)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에 봉했으나 횡포가 심하자, 1211년(희종7) 내시(內侍)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그를 죽이려 하다가 성사하지 못하고 폐위되어 강화(江華)로 쫓겨났다. 이어 자연도(紫燕島:永宗島)로 옮겨지고, 1215년(고종2)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1219년 봉영(奉迎)되어 서울에 살다가 1227년 복위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교동에 유배되어 죽었다. 능은 강화의 석릉(碩陵)이다.
제22대 : 강종 [康宗, 1152~1213]
고려 제22대 왕(재위 1211∼1213). 1197년 최충헌에게 쫓겨 강화도로 갔다. 소환된 후 희종(熙宗)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자 대수(大菙). 이름 숙(璹)·정(貞)·오(). 시호 원효(元孝). 명종(明宗)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광정태후(光靖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이다. 1171년(명종1) 관례(冠禮)를 올리고, 1173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197년 최충헌에게 쫓기어 부왕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 1210년(희종 6)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봉해졌으며, 희종(熙宗)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능은 후릉(厚陵:황해북도 개풍군 현화리)이다.
제23대 : 고종 [高宗, 1192~1259]
고려의 제23대 왕(재위 1213∼1259). 재위 기간에 거란·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에 천도, 28년간 항쟁했다. 팔만대장경 조판, 유학 장려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이름 철(), 초명 진(瞋)·질(晊). 자 대명(大明)·천우(天祐). 시호 안효(安孝). 강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 비(妃)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최씨(崔氏)의 무단(武斷)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1258년 최의(崔竩)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재위 기간에 거란·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고 강화(江華)에 천도하여, 28년간 항쟁하였다. 왕의 친조(親朝)와 태자 전(倎)의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元)나라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까지 굴욕을 겪었다.
그동안 황룡사탑(皇龍寺塔) 등 많은 문화재를 소실하였으나,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彫板)하게 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능은 강화의 홍릉(洪陵)이다.
제24대 : 원종 [元宗, 1219~1274]
고려 제24대 왕(재위 1259∼1274). 개경 황도를 선언하자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으며 여원(麗元)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원나라에서 매빙사(妹聘使)가 오자 결혼도감을 설치, 원성을 샀다.
자 일신(日新). 휘(諱) 정(禎). 이름 식(). 초명 전(倎). 시호 순효(順孝). 고종의 맏아들. 비(妃)는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1235년(고종 22)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표(表)를 가지고 몽골에 갔다. 고종이 죽자 1260년 귀국 즉위하였다. 개경으로 환도하려다가, 1269년 임연(林衍)에 의해 폐위되었고 원나라의 문책으로 다시 복위되었다.
최탄(崔坦) 등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었다. 그 해 몽골에 갔다가, 1270년 귀국하여 개경 환도를 선언하자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이 일어났으며, 1273년 여원(麗元)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摠管府]를 둔 원나라로부터 일본정벌을 위한 전함 300척을 만들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매빙사(妹聘使)가 오자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 원성을 샀다. 능은 소릉(韶陵)이다.
제25대 : 충렬왕 [忠烈王, 1236~1308]
고려 제 25대 왕(재위 1274~1308).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을 2차례에 걸쳐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원의 지나친 간섭과 왕비의 죽음 등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왕위를 선위했으나 7개월 만에 복위해야 했다. 음주 가무와 사냥으로 소일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재위 34년 만인 1308년 죽었다.
초명 심(諶) ·춘(冲). 휘(諱) 거(昛). 원종(元宗)의 맏아들.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나라 세조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구비(舊妃)는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 및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이다. 1260년(원종 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1년(원종 12) 6월 원나라에 가서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 1274년 원종이 죽은 뒤 고려에 돌아와 그 해 8월 왕위에 올랐다.
10월 원(元)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으나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으며, 1281년(충렬왕 7)에도 김방경(金方慶) 등이 원나라 병사와 더불어 제2차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1290년(충렬왕 16)에는 합단(合丹)의 내침으로 12월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1292년(충렬왕 18) 1월에 환도하였다.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과 왕비의 죽음 등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1298년(충렬왕 24)에 세자(충선왕)에게 선위(禪位)한 뒤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나 원나라에 갔는데,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충선왕의 妃)의 무고로 충선왕이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등의 음모사건이 발생하자 선위 7개월 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은 그 후 음주 가무와 사냥으로 소일,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다가 1308년(충렬왕 34) 7월, 재위 34년 만에 죽었다. 원나라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훈고사장(訓古詞章)의 학을 경사(經史)로 전향시키는 등의 치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 때문에 자주성을 잃기도 하였다. 능은 경릉(慶陵:개성)이다.
제26대 : 충선왕 [忠宣王, 1275~1325]
고려 제 26대 왕(재위 1308~1313). 1298년 왕위에 오르자 정방을 폐지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들의 토지를 몰수하였으며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7개월 만에 폐위되었다가 1308년 충렬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정치에 싫증을 느껴 원나라로 가 전지(傳旨)로써 국정을 처리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각염법을 제정하여 사원과 권문세가의 소금 독점에 의한 폭리를 막았다.
초명 원(謜), 휘 장(璋). 자 중앙(仲昻). 충렬왕의 아들. 어머니는 원나라 세조(世祖: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비는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薊 國大長公主), 조인규(趙仁規)의 딸 조비(趙妃),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딸 정비(精妃),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 등이었다.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 원나라로부터 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特進上柱國高麗國王世子)의 호(號)를 받았다.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의 총애를 빙자, 횡포가 심하던 궁인 무비(無比)와 환관(宦官) 도성기(陶成器)·최세연(崔世延) 등 40여 명을 죽여 궁중의 기강확립을 기도했다.
이 때 충렬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있었으므로, 무비 등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12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 정방(政房)을 폐하는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제(軍制)·세제(稅制)를 정비하고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가 원만치 못하였고, 곧 이어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선위 7개월 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소환되었는데, 이 때 간신 왕유소(王維紹) 등이 충선왕을 아주 폐하고, 그 대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그 후사(後嗣)로 삼으려는 공작을 했다.
1305년(충렬왕 31)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고, 그 후 황위(皇位)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武宗)을 도왔으므로 그 세력의 힘으로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등을 제거하였다.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고, 같은 해에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 후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과 공신자제(功臣子弟)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억제 등 과단성 있는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껴, 제안대군(齊安大君) 숙(淑)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원나라로 가 전지(傳旨)로써 국정을 처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염법(榷 鹽法)을 제정하여 소금의 전매를 단행하여, 그때까지 사원(寺院)과 권문세가(權門勢家)에서 소금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았다.
1313년(충선왕 5) 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충숙왕)에게 전위하고 계속해서 연경(燕京)에 머물러 만권당(萬卷堂)을 지은 뒤 내외의 고금서적을 수집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고려인) ·조맹부(趙孟 :원나라 사람) 등 대학자를 초빙하여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1320년(충숙왕 7) 원나라의 환관 임파이엔토그스[任伯顔禿古思]와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갔다가 이제현 등의 간절한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1325년(충숙왕 12) 5월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능은 덕릉(德陵:開城)이다.
제27대 : 충숙왕 [忠肅王, 1294~1339]
고려 제 27대 왕. 1313년 왕위에 올랐으나 심양왕 고(暠)가 왕위를 노리고 그를 헐뜯어, 5년간 연경에 체류해야 했다. 1325년 귀국하였으나 눈과 귀가 멀어 정사를 못 돌본다는 조적 일당의 거짓 고발 때문에 정사에 더 염증을 느껴 1330년 태자 정에게 왕위를 넘기고 원나라에 갔다. 충혜왕이 폐위되자 1332년 복위하였으나 정사는 잘 돌보지 않았다.
초명 도(燾). 휘 만(卍). 자 의효(宜孝). 시호 의효(懿孝). 충선왕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몽골 출생의 의비(懿妃). 비는 원나라 영왕(營王)의 딸 복국공주(濮國公主),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및 바이앤후두[伯顔忽頭]의 딸 경화공주(慶華公主). 1299년(충렬왕 25)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 왕위를 물려받고 돌아와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를 소홀히 하여 혼란이 오자 이 기회를 틈타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왕위 찬탈을 꾀하여 원나라에 무고, 1321년 연경(燕京)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고 5년간 체류하였다.
1325년에 귀국, 이듬해 심양왕에게 선위할 계획을 세웠으나 한종유(韓宗愈) 등 충신들의 반대로 취소했다. 그 후 눈 ·귀가 멀어 정사를 못 돌본다는 조적(曹頔) 일당의 무고를 받고 정사에 더욱 염증을 느껴, 1330년 태자 정(禎:忠惠王)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그러나 아들 충혜왕을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폐위하자 1332년에 자신이 복위, 그 뒤 원나라의 무리한 세공(歲貢)을 삭감하고, 공녀(貢女) ·환자(宦者)의 선발 등을 중지하도록 청원한 사실 등 업적을 세웠으나, 여전히 연락(宴樂)과 사냥에 몰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글씨를 잘 써 예서(隸書)에 능했다. 능은 의릉(毅陵:開城)이다.
제28대 : 충혜왕 [忠惠王, 1315~1344]
고려 제 28대 왕. 1330년 왕위에 올랐으나 방탕하고 주색을 일삼아 왕위를 다시 부왕 충숙왕에게 넘긴 뒤, 원나라로 돌아가야 했다. 1339년 복위하였으나 방탕한 짓을 일삼았다. 이운 등이 원에 상소를 올린 끝에 1343년 게양으로 귀양을 떠나 그곳에서 죽었다.
휘 정(禎). 충숙왕의 아들. 어머니는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 덕녕공주(德寧公主). 1328년(충숙왕 15) 세자로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이듬해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를 원하여, 원(元)나라 문종(文宗)이 왕으로 책봉하여 1330년에 귀국하여 즉위했다. 본성이 호협(豪俠)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원나라에 국새(國璽)를 빼앗기고 부왕 충숙왕에게 양위한 뒤, 다시 원나라에 가서도 황음광포(荒淫狂暴)한 짓을 계속하였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복위하였으나 방탕함은 여전하여 서모인 경화공주(慶華公主)와 수비(壽妃) 권씨(權氏)를 욕보이고, 미녀가 있으면 귀천을 불구하고 농락하였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그에게 욕을 본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曺頔) 등 심양왕(瀋陽王)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형부(刑部)에 투옥되어 경화공주의 사건을 심양왕 일당들의 증언과 대질하게 되었으나 그를 미워하던 백안(伯顔)의 실각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여전히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화를 탕진함으로써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이운(李雲) 등의 상소로 횡포가 원나라에 알려지자 1343년 원나라 사신들이 그를 게양(揭陽:山東省)에 귀양보냈는데, 이듬해 죽었다.
제29대 : 충목왕 [忠穆王, 1337~1348]
고려 제 29대 왕(재위 1344~1348). 1344년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정을 했다. 보흥고 · 내승 · 응방 등을 철폐하고 서연(書筵)을 열었다. 또한 권신들이 독점하였던 녹과전(祿科田)을 소유자들에게 반환하였다.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각 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진제도감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휘(諱) 흔(昕). 충혜왕(忠惠王)의 아들. 어머니는 덕녕공주(德寧公主).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1344년(충혜왕 복위 5) 선왕이 죽자 원나라에서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덕녕공주가 섭정을 했다. 보흥고(寶興庫) ·내승(內乘) ·응방(鷹坊) 등을 철폐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서연(書筵)을 열었으며, 권신들이 독점하였던 녹과전(祿科田)을 본래의 소유자들에게 반환하였다.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각 도(道)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이어 충렬왕 ·충선왕 ·충혜왕 등 3조실록(三朝實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1348년 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등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나 재위 4년 만에 죽었다. 능은 명릉(明陵:開城)이다.
제30대 : 충정왕 [忠定王, 1337~1352]
고려 제 30대 왕(재위 1349~1351). 1349년 충목왕을 이어 왕으로 책봉되었다. 외척들의 세도 정치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충목왕의 후계자로 함께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에게 민심이 쏠렸다. 1351년 윤택, 이승로 등은 충정왕 폐위를 원나라에 요청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는 강화도로 추방되었다가 다음해 독살되었다.
휘 저(胝). 시호 충정(忠定). 충혜왕의 서자이다. 어머니는 찬성(贊成)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禧妃). 1348년(충목왕 4)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책봉되고, 같은 해에 충목왕(忠穆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1349년 원(元)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어 7월에 즉위하였다. 외척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이 세도를 부려 기강이 해이해지고, 밖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국정이 문란하였다.
이때 충정왕과 함께 충목왕의 후계자로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江陵大君:恭愍王)에게로 민심이 쏠리자, 1351년 윤택(尹澤)·이승로(李承老) 등이, “충정왕은 나이 어려 국정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위시켜 달라”고 원나라에 요청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그는 강화도로 추방되었다가 다음해에 독살되었다. 능은 총릉(聰陵:開城)이다.
제31대 : 공민왕 [恭愍王, 1330~1374]
고려 제31대 왕(재위 1351∼1374). 원나라 배척운동을 통해 몽골풍, 몽골 연호·관제를 폐지했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영토를 회복했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 정치를 펼쳤다.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 전(顓). 초명 기(祺).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辮髮) ·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골 연호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다. 내정에서는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였다.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치가 문란해졌으며,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풍기도 문란해졌다. 특히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홍륜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능은 현릉(玄陵)이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노국대장공주진(眞)》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제32대 : 우왕 [禑王, 1365~1389]
고려 제32대 왕(재위 1374∼1388).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 이인임(李仁任)의 유배로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자 강릉에 유배된 후,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아명 모니노(牟尼奴).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하여 낳은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된 다음 궁중에 들어가, 1373년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때를 같이 하여 명덕태후(明德太后)의 명으로 궁인(宮人)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으로 10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명덕태후가 죽은 다음 사냥 ·음주가무 ·엽색 등 방탕에 빠져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여기에다 국왕을 믿고 권력을 휘두른 이인임이 최영(崔塋) ·이성계(李成桂) 등으로부터 미움받아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됨에 따라,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었다. 1388년 6월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되었다. 강릉(江陵)으로 옮겨져, 1389년 12월 그의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왕 ·창왕은 모두 폐위되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왕으로서의 시호를 받지 못하여 폐왕 우, 폐왕 창으로 기록되었다.
제33대 : 창왕 [昌王, 1380~1389]
고려의 제33대 왕(재위 1388~1389).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아버지인 우왕이 강화도로 추방되자 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토지제도를 바로 잡고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기도 했다.본관은 개성, 이름은 창(昌)이다. 우왕(禑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侍中)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아버지인 우왕이 강화도로 추방되자 조민수(曹敏修)와 이색(李穡) 등의 추천으로 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에게 권문세가에 의해 크게 무너진 토지제도를 바로 잡는 방법을 강구토록 하였다. 또한 문란했던 공부(貢賦)의 법을 바로잡기 위해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安廉使) 등이 군민(軍民)으부터 받았던 사선(私膳)을 금지시켰다.
또한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를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에서 관장하게 했다. 또한 아버지인 우왕을 강화에서 여흥군(지금의 여주)로 옮겼다가 다시 강릉부로 옮겼다.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이어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설치하였으며, 성석린(成石璘)의 청에 따라 주군(州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이후 이성계 등에 의해 우왕과 더불어 왕씨가 아니라 신씨(辛氏)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가 강화도에서 죽었다.
이성계에 의해 폐위된 후 강화도에서 죽었다.
제34대 : 공양왕 [恭讓王, 1345~1394]
고려시대 최후의 임금(재위 1389∼1392). 조정은 친원파와 친명파 대립했다. 친명파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정몽주 중심의 구세력에 이어 이성계에게 실권을 빼앗겼고, 폐위당했다.
이름 요(瑤). 신종(神宗)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다. 비(妃)는 창성군(昌城君) 진(稹)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元)나라에서 명(明)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의 대립이 격심했으며, 친명파의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뒤에 창왕(昌王)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1389년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왕은 과단성이 없는 성품으로 정몽주(鄭夢周)를 중심으로 한 구세력(舊勢力)에 이어 새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완전히 실권을 빼앗겼다가,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