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실린 곳: 한국일보 1997. 9. 29일자 문화특집
글을 쓴 분: 박태근 교수
최부의 표해록〈3〉
왜구로 오인당해 온갖 수모
최부 일행은 추풍낙엽처럼 망망대해의 파도에 휩쓸려 끝모를 표류를 계속했다.
너나 할 것없이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표류 9일째,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하던 일행에게 삶의 의지를 되살리는 징조가 나타났다.
1488년 윤 1월11일. 두 길이 넘는 석벽이 둘러쳐진 섬 하나가 눈앞에 들어왔다.
키를 잡은 권산은 울부짖으며 죽을 힘을 다해 배를 저었다.
배를 대기 힘들 정도의 바위섬에는 인적은 없었으나 골짜기에는 물이 있었다. 생명수였다.
실같은 존재의 희망이 피어 올랐다.
앞다퉈 물을 마시며 밥을 지으려 하는 일행에게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갑자기 배부르게 먹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네. 먼저 마음을 끓여 마시거나 죽을 쑤어 먹게"
기쁨도 잠시, 비바람을 피할 곳이 없는 이 섬도 오래 머물 장소는 못되었다.
다시 배를 저어나간 일행은 이튿날 비로소 사람을 만난다.
큰 섬이 보이는가하자 중선(中船)두 척이 최부의 배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이것이 표류의 고난보다 더 혹독한 시련의 시작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최부는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글로써 표류하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인지 물었다.
"여기는 대당국(大唐國) 저장(浙江) 닝보(寧波)부 지방"이라는 것이었다. 현재 닝보 앞바다의 1,239개 섬이 몰려있는 저우산(舟山)군도의 어느 한 섬에 닿은 것이었다. 이 중의 하나인 푸토우(普陀)섬은 관음보살의 성지로 중국불교 4대 순례지의 하나.
최부 일행은 중국인의 말대로 바닷가 초가집 아래쪽에 배를 매어두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아까 만났던 중국인 일행의 두목 린따(林大)가 수하 20여명과 함께 창과 작두를 들고 들이닥쳤다.
관음불을 자칭하는 그들은 최부일행에게 남아 있는 모든 물건을 몽땅 약탈해갔다.
마지막으로 인신과 마패마저 빼앗으려하자 이것에는 최부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칼을 들어 최부의 목을 베려 덤볐다.
놀란 김중과 최거이산이 무릎꿇고 싹싹 빌자 그들도 충정어린 선비의 의연한 기개에 눌렸던지 마지못한채 배의 돛과 노를 부러뜨린 다음 사라졌다.
삶의 희망을 잡는 순간 처음 만난 무리가 도적이었던 것이다.
다시 바다로 내쫓긴 최부일행의 배는 강한 서북쪽에 정처없이 떠밀려갔다.
도적떼를 만난 뒤로 최부 일행의 삶의 의지는 오히려 그나마 엷어져 갔다.
배는 온통 구멍이 나고 배안으로 밀려오는 물은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았다.
그러기 닷새만인 윤 1월16일. 일행은 남으로 남으로 표류해 마침내 육지에 다달았다.
타이저우(台州)부 린하이(臨海)현. 6척의 배가 최부의 배를 포위하고 후추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있을리 없는 일, 그들은 최부의 배를 다시 유린했다.
최부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빗속을 뚫고 육지로 상륙해 달아났다.
최부는 이에 앞서 일행에게 "해적에게 당했으니 주민을 만날 경우에는 위계질서와 예의를 지키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육지의 마을이 센옌리(仙岩里)였던 것이다.
이곳 해안일대는 왜구의 피해가 심한 곳이었다.
왜구로 오해를 당한 최부 일행은 마을 주민들에게 구타당하고 끌려다니며 말할 수 없는 수모와 학대를 받았다.
지난 5월18일 최부의 여로를 답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린하이 땅을 밟았다.
지금 이 마을 이름은 산먼(三門)현 리푸(浬浦)진 센옌촌.
주민들에게 혹시나 하고 최부가 묵었다는 절을 아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주민들은 "절이 있다"며 마을 뒷길로 안내했다.
하지만 우리는 실망했다.
옛모습 그대로의 절을 보리라 생각했던 기대와는 달리 절은 새로 지은 건물에「노인정」이란 팻말을 붙이고 있었다.
내부 양쪽에 긴 회랑이 있고 안마당은 100여명이 앉을 정도로 넓었다.
본전에는 얼굴이 쪼개지고 팔다리가 잘린 무수한 신상이 마치 한때 유행했던 홍콩영화의 「강시」처럼 도열해
대낮인데도 소름이 돋았다.
비석이 하나 눈에 띄었다.
「중수선암우민전기(重修仙岩佑民殿記)」(센옌리를 수호하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이고 이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었다. 중수시기는 93년.
비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환호했다.
창건연대는 명을 거쳐 송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최부의 기록은 정확했다.
바로 이 절이 509년 전 최부가 머물렀던 곳이었다.(중국 린하이에서)
※台州의 신라방※
최부가 표착한 닝보와 타이저우는 매우 대조적인 곳으로 마치「빛과 그림자」와 같다.
닝보는 강남의 대도시 항저우(杭州)의 외항으로 일찍부터 번영을 누렸지만,
그 남쪽 지역인 타이저우는 그야말로 시골에 불과했다.
오히려 16세기(명나라)에는 일본 왜구의 침략으로 항왜 전쟁의 주전장이 됐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국제 교류권에서 소외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 지방의 가장 오래된 지방지인「가정적성지(嘉定赤城志·1223, 송나라때 편찬)」에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즉 타이저우에도「신라방」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 신라와 당의 동아시아 지방체제에서 수 많은 신라인이 중국 각처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신라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곳이 바로「신라방」이다.
신라인의 활동범위는 수도 서안이외에 주로 산동반도에서 닝보에 이르는 연안과 대운하지역이다.
중국 기록은 신라인의 다양한 활동을 이머저모 적고 있지만 신라방에 관한 기사는 거의 없고 9세기 일본 스님 옌닌(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만이 신라방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덩저우(登州·산둥성)의 적산촌(赤山村), 추저우(楚州·강소성)의 연수현등이다.
국제항 닝보지역에서도 신라인이 활동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신라인의 기록은 없고 고려인의 기록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타이저우 지역에 신라인이 살았다는 사실은 신라인의 활동공간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다.
이번 중국여행에서 발굴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1076년 북송(北宋)의 타이저우부(台州府) 황암(黃岩)현령인 범세문(范世文)이 현 동리 1리되는 곳에 오대(五代)(당이 멸망하고 송이 통일되기까지의 분열시기, 907-960년. 이때 지방의 정권인 오월국이 저장일대를 지배)때에 신라인이 살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신라방(新羅坊·우리나라 정문 같은 기념문)을 세웠다" 그밖에 린하이현에는 신라상인의 항구였던 신라섬, 고려로 가는 고려두산 등이 있었다.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구체적인 기사로 저장 동남부 지역인 타이저우에도 신라인이 살았다는 것은 신라인의 대외활동의 광역성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