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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적어도 서양 사회에서는 젊음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삶의 모든 차원에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면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당연한 귀결로, 인간이 젊음에서 멀어짐에 따라 생일은 더 이상 축하할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수치스럽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물어 보는 것이 실례가 되고, 흰 머리를 물들이고 치아는 덧씌우거나 통째로 갈아치우고
쭈글쭈글해진 가슴과 얼굴은 펴고 배는 팽팽하게 하고 확장된 정맥을 치료합니다
물론 몰래 말입니다. 나이대로 보인다고 하면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험으론 나이를 먹을수록 한 해 한 해가 더 좋아집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래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이먹는 것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나이먹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그대의 질문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 서양의 마음에는 사람에게는 70년의 한 생애밖에 없으며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개념이 입력되어 있다.
서양에는 봄이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가능하면 젊음을 오래 붙들고 싶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이 젊은 것처럼 가장하려는 깊은 욕구가 생겨난다.
동양에서는 늙은 사람일수록 가치를 인정하고 존경해 왔다.
노인들은 더 많은 경험을 했고, 많고 많은 계절이 오고 가는 걸 지켜보았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는 숙련되었고, 더 이상 미숙하지 않다. 그에게는 연륜해야지만 올 수 있는 어떤 고결함이 있다.
그는 유치하게 곰인형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는 젊지도 않아서 '이게 사랑이야' 하며 헤매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는 이 모든 경험들을 지나왔고, 아름다움이 시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모든 것이 종말에 이르고 모든 것이 무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요람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는 한 가지 길밖에 없다.
그것이 요랑에서 무덤까지이다. 그대는 다른 데로 갈 수 없다. 애를 써도 딴 길로 갈 수 없다.
어찌됐든 그대는 무덤에 이를 것이다.
동양의 노인들은 존경받고 사랑받는다. 그들은 가슴의 어떤 순결함을 성취했다.
욕망 한가운데를 살면서 모든 욕망이 좌절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온갖 관계를 맺고 살면서 모든 관계는 지옥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영혼의 어두운 밤들을 지나왔다.
그는 어떤 초연함에, 관찰자의 순수함에 도달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축구 경기에 참가하는 데 흥미를 갖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면서 초월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존경받았고, 그의 지혜는 존경받았다.
동양의 관념은, 삶은 젊음이 한 번밖에 없는 70년이란 작은 단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관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히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고, 겨울이 오고, 다시 여름이 온다.
모든 것은 수레바퀴처럼 움직인다. 삶도 예외가 아니다. 죽음은 수레바퀴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다시 그대는 아이가 되고 다시 젊어지고 다시 늙을 것이다. 그것은 시작부터 그러했고 종국에도 그럴 것이다.
그대가 깨달아서 그 악순환에서 뛰쳐나와 완전히 다른 법칙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대는 그대의 개별성으로부터
우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서두름이 없었고 집착이 없었다.
서양은 일회적인 생을 믿는 유태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독교는 유태교의 가지일 뿐이다.
예수는 유태인이었고, 유태인으로 태어나 유태인으로 살다가 유태인으로 죽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만일 그대가 어딘가에서 그를 만나 "안녕하세요? 예수 그리스도" 하고
인사하면 그는 자기 이름이 예수고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걸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대가 누구에게 인사했는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조슈아(Joshua)라는 히브리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의 메신져였지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다 이슬람교도 동일한 전통인 유태교의 산물이다.
이 세 종교는 일회적인 생을 믿는다.
일회적인 생을 믿는 것은 그대에게 실수할 기회를 주지 않고
어떤 것을 충분히 체험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그대는 늘 서두르게 된다.
서양의 마음은 3주 비자밖에 못 받아서 두세 개의 카메라를 들고서는 모든 것을 다 찍으려고 쫓아다니는
여행자의 마음이 되었다. 3주 안에 나라 전체를, 위대한 유적들을 다 돌아야 한다.
그것들을 똑바로 쳐다 볼 시간이 없다. 집에 가서야 편안하게 앨범 안에서 보게 될 것이다.
여행자를 생각할 때면 나는 인생은 짧다며 아잔타에서 엘로라로, 타즈마할에서 캐시미르로
허겁지겁 쫓아다니는 노인네들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서양의 마음이다. 동양에서는 모든 일이 천천히 흘러간다. 서두름이란 없다.
사람들은 영원을 통째로 갖고 있다. 내가 이곳에 있어 왔고 다시 이곳에 있게 될 텐데 왜 서두른단 말인가?
모든 것을 강렬하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즐기라.
그래서 일회적인 생이라는 관념 때문에 서양은 젊어지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되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젊음을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은 강박관념을 만들어내고 올바른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노년에 정말 지혜로워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이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노년은 죽음말고는 상기시키는 게 없다.
노년은 종지부를 찍는 날이 머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그대는 종착역에 도착했다.
경적이 한 번만 더 울리면 기차는 멈출 것이다.
내가 우리 할아버지와 협정을 맺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분은 내가 발을 안마해 드리는 걸 좋아했다.
하루는 내가 말했다.
"잘 들으세요. 제가 '쉼표' 하고 말하면 '세미콜론이 가까워졌구나' 하고 알고 계셔요.
제가 '세미콜론' 하고 말하면,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마칠 때가 다됐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마침표' 하고 말하면 끝내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분은 '쉼표'를 아주 겁냈다. 내가 '쉼표' 하고 말하면 그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알았다. 하지만 세미콜론을 좀더 길게 하자. 너무 짧게 하지마."
서양에서 노년은 단순히 종지부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세미콜론이 연장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대는 누구를 속이려는가?
만일 그대가 이제 젊음이 끝났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면, 그대가 온 세상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대는 젊지 않으며 속이려는 노력은 우스운 짓일 뿐이다.
사람들은 젊음을 붙들려고 애쓰지만, 젊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바로 그 두려움이
그대가 전체적으로 사는 걸 막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또 두번째로, 젊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그대가 노년을 고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다.
그대는 젊음의 기쁨과 강렬함을 잃을 뿐만 아니라, 노년이 가져다 주는 고상함과 지혜, 평화를 잃는다.
모든 것은 삶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양이 한 생밖에 없다는 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이 강박관념, 이 집착, 이 두려움은 바뀔 수가 없다.
실제로 한 생이 다가 아니다. 그대는 수많은 생을 살았고 수많은 생을 더 살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을 최대한 전체적으로 살라. 성급하게 다음 순간으로 건너뛸 필요가 없다. 시간은 돈이 아니다.
시간은 무진장한 것이다. 부자건 빈자건 똑같이 쓸 수 있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에 관한 한 부자라고 더 풍족하지 않고 빈자라고 부족하지 않다. 삶은 영원한 윤회다
일회적인 삶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종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야박하게도 70년밖에 주지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 봐야 인생의 3분의 1은 잠으로 소비하고 3분의 1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소비한다.
조금 남은 것을 학교 교육과 축구시합, 영화구경, 멍청한 말다툼, 싸움에 할애해야 한다.
그대가 70년 동안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7분만이라도 건진다면 나는 그대를 현명한 사람이라고 꼽겠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 7분을 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을 발견하겠는가, 어떻게 그대의 존재와 삶에 깃든 신비를 알겠는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대는 삶 자체의 체험을 놓쳤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위대한 체험도 놓칠 것이다 안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할 게 없다.
그것은 아름다운 잠, 꿈 없는 잠이고 그대가 고요히 평화롭게 다른 몸으로 움직여 가는 데 필요한 잠이다.
그것은 외과적(外科的) 현상이다 그것은 거의 마취와 같다. 죽음은 적이 아니라 친구다
일단 죽음을 친구로 이해하게 되면 그대는 70년이라는 짧은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두려움 없이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대의 시야가 삶이 영원하다는 쪽으로 열리면, 그러면 모든 것이 느려진다. 그러면 속도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서두른다.
나는 가방을 챙겨 물건을 집어넣고 그 여자가 자기 마누란지 아닌지 보지도 않고 키스하고
아이들에게 '안녕' 하고 달려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그 속력으로 어디를 가려는가?
젊은 부부가 새 차를 몰았다. 그들은 전 속력으로 달렸다. 부인은 남편에게 자꾸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여자들은 아직도 낡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남자가 말했다.
"귀찮게 묻지 말고 그냥 속도를 즐겨. 진짜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른 속력으로 달리느냐 하는 거야."
속도가 행선지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삶이 짧기에 속도가 중요하게 되었다
그대는 속도를 내서 하지 않으면 처리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해야 한다. 단 몇 분도 고요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그 몇 분이면 다만 몇 달러라도 더 벌 수 있다.
눈을 감고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다고?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그대가 정말로 보고 싶다면 병원에 가서 뼈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이 그대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왜 몸 안을 들여다보면서 문제를 만드는가?
안을 들여다보면 그대는 뼈를 발견할 것이다. 일단 뼈를 보고 나면 삶은 더 어려워진다.
마누라에게 키스하면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두 뼈가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가 X레이 안경을 발명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x레이 안경을 쓰고 주위를 둘러보며 뼈들이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거의가 안경을 벗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수많은 뼈다귀들이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을 멍추게 하기엔 충분하다.
"맙소사, 이게 실체라니! 이것이 모든 신비가들이 내면을 보라'고 말해 오던 것이란 말이냐! 그자들을 피해야 돼!"
서양은 신비주의의 전통이 없다. 그들은 외향적이다. 바깥에는 볼 것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내면에 뼈다귀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그대의 의식이다.
눈을 감음으로써 그대는 뼈가 아니라 바로 그 생명의 근원을 마주치게 된다.
서양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서두르지 않게 된다.
사랑들은 젊어서도 즐길 것이고 늙어서도 즐길 것이고 죽을 때도 즐길 것이다.
사람들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즐기고 그것을 축제로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축제로, 노래로, 춤으로 변형시키는 예술을 나는 참된 종교라고 부른다.
노인이 건강 클리닉을 찾아가 의사에게 말했다.
"내 정력을 떨어뜨려 줘야겠소."
의사가 쇠약한 노인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노인어른, 지금 어르신의 정력은 머리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은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젊은이."
노인이 말했다.
"그걸 약간 아래로 떨어뜨려야겠어 ."
이 노인조차 플레이보이가 되길 원하고 있다.
이로써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젊음을 전체적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젊음을 놓쳐서 여태껏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제대로 살지 못했던 젊은 날들에, 허둥지둥 살았던 시절에 가 있다
젊은 시절을 제대로 살았다면 노년에 모든 억압과 성(性)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이고,
성적 본능을 떨쳐 버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을 제대로 살면 성적 본능은 사라진다. 삶 속에서 증발한다.
종교나 성직자들로부터 제한받거나 간섭받지 않고 살아야만 사라진다.
안 그러면 젊었을 때 교회를 다닌 사람은 늙으면 성경책 뒤에 플레이보이를 숨겨 두고 보게 된다.
모든 성경책이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를 숨기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야만 자식들에게 들켜 부끄러운 꼴을 당하지 않는다.
세 노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한 사람은 일흔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여든, 또 하나는 아흔이었다.
그들은 오랜 친구고 다 퇴직해서 함께 산책을 하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온갖 잡담을 하곤 했다.
어느 날 그들 중에 제일 젊은, 칠십 먹은 노인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팔십 먹은 노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안돼 보이는구만."
그가 말했다. "죄책감을 느껴요. 말을 하면 짐이 덜어질 것 같군요, 예쁜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 온 손님이었죠. 그걸 열쇠 구멍으로 훔쳐보다가 우리 어머니한테 들켰지 뭐요."
늙은 친구 둘이 웃더니 말했다. "답답한 친구, 누구나 어릴적엔 그런다네."
"어린 시절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일어난 일이에요."
두번째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로구먼. 헌데 요 사흘 동안 나한테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지.
이 일 때문에 정말 마음이 무겁네. 사흘 동안 계속 마누라한테 사랑을 거절당했거든."
첫번째 노인이 받았다. "그거 정말 안됐군요."
그런데 세번째 가장 늙은 노인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이 친구가 말하는 사랑이 뭔지부터 물어야 할걸세."
그래서 물으니 두번째 노인이 말했다.
"별거 아니야. 왜 사람을 쑥스럽게 만드나? 간단해. 내가 마누라의 손을 잡고 세 번 누르면
마누라는 자러 가고 나도 자러 가지. 헌데 요 사흘 동안 내가 마누라의 손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마누라는 '오늘은 안 돼요. 오늘은 안 돼요! 부끄러울 줄 아세요, 당신은 너무 늙었어요. 오늘은 안 돼요' 그러더라구요."
세번째 노인이 말했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내 얘기를 들어 볼 텐가? 자네들은 젊으니 들어 두면 도움이 될게야.
어젯밤 날이 거의 샐 무렵이었네. 마누라를 사랑해 주려고 막 준비하는데, 마누라가 그러는 거야.
"뭐 하는 거예요? 정신나갔어요?"
그래 내가 그랬지. "뭘 하다니? 당신을 사랑해 주려고 그러지."
그러자 마누라가 그러더군.
"오늘 밤에 벌써 세번째예요. 잠이나 주무시든지 아니면 날 좀 자게 내버려두세요. 어휴~ 그저 사랑, 사랑, 사랑!"
내가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애. 자네들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난 기억력이 깜빡깜빡하고 있다구."
늙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놀라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어야 했던 일들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게 됐을 땐 이미 때가 지나 버렸다. 젊은 시절에 그들은 성경을 읽고 성직자들의 말을 들었다.
그 성직자들과 성스런 경전들은 사람들을 오염시켰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연성에 어긋나는 관념을 심어 주어 그들이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성(人性)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전 과거를 지우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 첫번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어떤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성에 따라 살고,
아무 두려움 없이 전체적이고 열정적으로 살도록 허용하고 돕고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린이들은 유년 시절을 즐길 것이고 젊은이들은 젊음을 즐길 것이고 나이든 사람들은 자연스레 찾아오는,
일생을 자연스럽게 산 결과로 찾아오는 고상함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대의 노년이 고상하고 지혜롭고 빛과 환희와 만족과 충만과 지복으로 가득 차지 않으면‥‥‥
바로 그대의 현존 속에 꽃들이 피어나지 않고 영원의 향기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땐 제대로 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대가 어딘가에서 옆길로 샜다는 것을, 그대가 어딘가에서 오염원이자
범죄자들인 성직자들의 말을 들었다는 것을, 그대가 어딘가에서 자연을 거슬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자연이 복수를 한다. 그 복수란 그대의 노년을 파괴해서 타인들에게도 추하고 자기 눈으로 봐도 추하게 만든다.
그러지 않으면 노년은 젊음도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개 된다.
젊음은 지혜롭지 못하다. 젊음에는 너무나 많은 어리석음이 있다.
젊음은 미숙하다. 노년은 일생의 그림에 마지막 터치를 가한다.
그렇게 마지막 터치를 하면 그는 즐겁게 춤추며 죽을 준비가 된 것이다. 죽음을 환영할 준비가 된 것이다.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