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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현손 세온(世溫)이 가저 온 고지의 내용을 상고하면 아래 와 같다. “나의 고조부 엽(曄)은 임진란 중에 전라좌병(사)의 우후(虞侯)로서 한산도 싸움에서 패하여 왜장 가등청정에게 잡히니 청정이 항복하라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니 관백(關伯)에게 압송하여 대장의 집에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상으로 비단등을 많이 주었다. 공은 함께 잡혀온 우리 백성 수십여인과 약속하고 선물을 흩어 팔아서 그 돈으로 배를 구입 고국으로 가고자 배를 타고 도망치는데 지키던 왜군들이 이를 발각하고 뒤 딸아 양면으로 협공하며 오는 지라 미리 차고 있던 칼을 뽑아내어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바다에 스스로 뛰어 들어 자결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왜놈들은 다시 공의 시신을 바다에서 끌어내어 환열(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형벌)한 뒤에 거리에 걸었다“고 하였다. 충무공 이순신도 그의 정유일기 7월16일조에 "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 여 갔다고 하니, 더 더욱 원통하다."고 기록하였다. 그날의 전황을 보면 이렇하다 7월 16일 [양력 8월 28일]<을미> 비오다 걷혔다 하면서 종일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손응남(孫應男)을 중군(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좌병사의 긴급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갖추 다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탄식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변의정(卞義禎)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꼬락서니가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두멧골에 묻혀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 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보다. 이 역시 거짓없 고 인정이 두터운 태도이다. 이 날 낮에 이희남(李喜男)에게 칼을 갈게 했더니, 너무 잘 들어 괴수 맨머리로 깎을만 했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아들 열이 가는 길을 많이 생각하니 씁쓰레하 다. 마음 속으로만 빌 뿐이다.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世男)이 서생포에 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에 전 병마사 의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에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 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 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려는데,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 라 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 내어 불 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일천 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 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 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 (世男)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모두 살륙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世男)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 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 군마자 이와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으니,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 여 갔다고 하니, 더 더욱 원통하다. 손응남(孫應男)이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숙종때 상소하여 추증으로 증병조참의를 받았다. 공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제를 지내고 묘단을 세월는데 우치는 용인시 이동면 내곡리에 있다. 그러나 이 행정국역은 여러차래 변경되어 이동의 내곡이 어는지역인지 알 수 없어 이장군의 묘비를 찾지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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