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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 한 균
아주 옛날부터 많이 사용하는 말 중 하나로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차 마시는 상 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나, 실제로는 밥 먹듯이 늘 하는 일상적인 일을 의미한다. 또 한반도의 지명에는 예부터 차를 재배했던 지역을 의미하는 다전동, 다촌, 다동, 다곡, 다리, 차밭골, 차골 등 차에 관련된 지명이 무수히도 많다. 이렇듯 우리 한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차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우리 차나무의 분포
우리나라에서 차가 자라는 지역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해안지방과 전라북도 일부 지방 그리고 남쪽 섬인 제주도를 비롯하여 대부분 따뜻한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륙성 기후이기에 차나무가 자연 상태로 자랄 수 있는 북방 한계선은 위도가 북위 약 33˚~3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남쪽에 위치한 전라도, 경상도의 일부 지역에만 차가 자라고 있다.
그러나 경향신문 1988, 3월 10일과 동아일보 88년 3월 16일자의 기사에 의하면, 추운지방인 북한 지역의 강원도 고성군의 삼일포 기슭에서 차나무를 재배하고 있다 한다. 수만 그루로 숲을 이루고 있으며 또 이 차나무를 북한의 서해안 지대인 배천, 장경, 옹진 지역으로도 이식하여 재배를 시도하고 있다고. 이 기사로 보아 북한에서 냉해에 강한 차나무 품종을 개발했다고 여겨진다.
우리 차나무의 특성
예부터 한반도에 자생된 차나무는 대엽종인(Thea Si Nesis Linne Var Bohea)와 소엽종인(Thea Sinensis Linner Var Macrophyla) 및 변종이 있다. 도입종으로는 일본식민지 시절(1910~1945) 일본인이 전남 무안에 재배한 것이 한반도 최초의 차나무 도입종이다. 그 이후에도 일본인에 의해 한반도 남쪽에 여러 종류의 차나무가 도입되어 현재에도 재배되고 있다.
해방 후 여러 종류의 차나무가 해외에서 들어왔으며, 1970년에는 일본의 개량종인 야브기다가 도입되기도 했다 그러면 한민족의 가장 친근한 기호품이었던 '차'는 언제부터 한반도와 언제부터 '연'을 맺었을까?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 즉 삼국시대가 형성되기 이전 AD 48년 가야국 수로왕비 허씨(가야국을 세운 수로왕의 부인. 인도여인으로 알려져 있다)가 인도에서 중국(中國)을 경유하여 가야국으로 건너올 때, 다나무 종자를 가져와서 김해의 백월산에 심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생산된 차를 작설차(竹露茶)라 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은 근거가 미약해 그냥 설화로 취급되고 있다(출처는 이능화(李能和),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현재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차를 마시는 토기다완이 발굴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AD 4세기경 가야는 신라에 편입되고 한반도는 삼국시대를 맞는다.
고구려
삼국 중 고구려의 차문화를 살펴보면, 중국의 오대시절 모문석(毛文錫)이 지은 다보(茶譜)의 역주에서 '나는 고구려의 옛무덤에서 출토된 모양이 작고 얇은 조각의 떡차를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지름 4cm 남짓의 엽전 모양으로서 무게는 닷푼 가량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마치 불교가 중국을 통해 고구려에 들어왔듯, 차문화도 흘러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
백제땅의 남쪽은 차가 자라는 지역이고, 신라에 비하면 중국과의 거리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차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차를 마시던 중국과 외교관계가 있었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차를 마셨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신라
AD 676년 신라는 중국의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통일한 국가이다. 한국 민족의 차문화 기록은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료가 등장한다. 한국의 역사서를 대표하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632~647) 편에 이런 기록이 있다. '茶自善德王時有之' 차는 선덕여왕 시절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보아 선덕여왕 재위 시절에는 차문화가 한반도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차가 성행한 시기는 삼국사기의 흥덕왕조 편에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 3년(828)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大廉)이 차 씨앗을 가져와 왕의 지시로 지리산에 심었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 성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지리산 일대는 한반도의 유명한 차생산지이다.
그리고 중국의 다경의 저자인 육우보다 반세기 앞선 신라의 유명한 다인인 설총(薛聰)이 '茶酒以凊神 차와 술로서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라고 신라의 신문왕에게 권한 글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차를 도를 닦는 수양음료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는 7세기경 제사상이나 상례, 제례 등에 이미 쓰여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여기 주목할 것은 한반도에서 제사상이나 상례 제례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최하 100년 이상 걸린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래서 필자는 6세기에 이미 차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인이 마신 차는 녹차일까? 말차(가루차)일까?
앞에서 언급한 고구려 차문화 편에서 지름 4cm 남짓의 엽전 모양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차라고 언급한 차는 돈차이다. 꼭 옛날 엽전을 닮아서 생긴 이름이다. 이것을 전차라 부르기도 하며 다엽을 시루에 쪄 절구로 찧은 후 주물러 다엽을 동전처럼 만든 후 중간에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두었다가 구워 갈아 마시는 차를 말한다. 말차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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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차의 모습 |
ⓒ 신한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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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찻잔을 든 경주석굴암의 문수보살상 |
ⓒ 신한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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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의 찻잔으로서 言 貞 茶 가 새겨져 있다 |
ⓒ 신한균 |
덧붙이는 글 | 한국 전통 도예가 신정희옹의 장남이며 양산 통도사 부근에서 작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사발이야기' '산도둑놈의 산사랑이야기' 가 있다.
참고문헌
우리차문화 김대철 다의세계
한국의 다문화 정영선
다도학 김명배
삼국사기, 삼국유사, 경향신문, 동아일보, 다심문화연구회
조선 중기부터 우리 민족의 곁을 떠났던 차문화는 1970년대부터 억센 커피 문화의 홍수 속에서도 조금씩 재부흥의 걸음마를 시작하여 조금 자리를 잡는 듯 하더니 언제부터인지 같은 차인 중국차에 무수히 두드려 맞고 있다.
사실 중국차는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 중국인을 위해 만들어진 차이고 우리의 차는 우리 한민족에 맞는다는 사실은 많은 전문가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이런 말이 있다.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이다.
필자도 여기서 한마디 하고 싶다. “차를 마시면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 자, 이번에는 고려의 옛 기록을 통해 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고려는 신라의 차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한반도에 차문화를 가장 꽃피운 나라이다. 왕실 뿐만 아니라 귀족 및 일반 백성들까지 차를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있다.
또한 중국과의 교류에 차를 예물로서 주고받기도 했으며 좋은 차를 직접 수입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차 모임에 초대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차를 마시는 행위에는 예절이 존재했다. 마치 수행(修行)하는 선승의 모습처럼 차를 통해 도(道)의 길을 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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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나무 |
ⓒ 신한균 |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한국사통론> 변태섭 지음, <한국차문화> 정영선 지음, <다도학> 김명배 지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도경>, <세종실록지리지>
한국 전통 도예가 신정희옹의 장남이며 양산 통도사 부근에서 작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기장 신한균의 <우리사발이야기> <산도둑놈의 산사랑이야기> 가 있다.
첫댓글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잘 봤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모든 유래가 명확해 지는데... 우리 한민족의 이동을 알아야만 올바른 역사가 정립되고 문화의 바탕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