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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 (1756 잘츠부르크-1791 빈)
독일의 작곡가.
모짜르트는 레오폴드 모짜르트(1719-87)와 안나 마리아 페르틀 Anna Maria Pertl (1720-78) 사이의 아들로 태어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스 테오필루스 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s Theophilu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테오필루스라는 곧 독일식인 고틀리프 Gottlief로 바뀌고, 고틀리프는 다시 이탈리아어 번역인 아마데우스로 바뀌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부친의 가계에 따라, 모짜르트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제본업자 요한 게오르크 모짜르트 Johann Georg M.(1679-1736)의 피를 잇는다. 어머니쪽의 조부는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수학한 후 공무원이 되었으나 음악을 사랑하고 성악을 가르쳤고 성가대원으로도 있었던 볼프강 니콜라우스 페르틀 Wolfgang Nicolaus Pertl(1724 사망)이다.
1749년부터 1756년에 걸쳐서 태어난 레오폴드 모짜르트와 안나 마리아 페르틀의 7명의 아이 중 5명은 어렸을 때 죽고,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Maria Anna Walburga Ignatia(1751~1829)라는 딸과 막내 볼프강 아마데우스만이 살아남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는 세 살 때부터 음악에 대한 흥미와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부친으로부터 처음으로 쳄발로 연주의 기초를 지도 받은 것은 네 살 때의 일이다.
신동의 여행
1762년 뮌헨을 목적지로 한 여행을 시작으로 레오폴트는 그 후 수년에 걸쳐서 행해진 자녀들을 대동한 일련의 놀라운 유럽 연주여행을 개시했다. 카니발 중인 뮌헨의 체재 중에 누나와 남동생은 바이에른 선제후(選帝侯)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앞에서 연주를 했다. 이 무렵 볼프강은 몇 개의 소품(미뉴에트 K 2, 4, 5, 알레그로 K 3)을 이미 작곡하고 있었고, 부친이 그것을 기보(記譜)했다. 1762년 9월 18일 일가는 빈으로 떠나 10월 6일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초연의 이튿날에 도착하여 12월 10일까지 체재했다. 볼프강과 그 누이 난네를 Nannerl(아명)은 툰 Thun 공작부인과 프랑스 대사에게 초대되었고, 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로부터는 쇤브룬 궁에 초대되었다.
1763년 초, 잘츠부르크 대주교 지그문트 폰 슈라텐바흐 Siegmund von Schrattenbach는 궁정악단의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1762년 6월 21일에 서거한 요한 에른스트 에베를린 JohannErnst Eberlin 대신 주제페 프란체스코 롤리 GiuseppeFrancesco Lolli를 궁정악장으로 임명하고, 레오폴드 모짜르트에게 부 궁정악장의 지위를 주었다. 이보다도 좋은 지위를 기대하고 있던 레오폴드는 휴가를 청하여 허락을 얻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 제국을 도는 3년의 긴 여행을 떠났다. 1763년 6월 9일, 잘츠부르크를 출발한 일가족은 우선 뮌헨에 들러 요제프 하이든의 친구이며 아이젠슈타트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의 콘체르트마이스터로 있던 루이지 토마지니와 알게 되었다. 이어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아이들이 세 번의 콘서트를 한 뒤 7월 6일에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만하임에서 가까운 슈베징겐에서, 볼프강은 팔라티나 선제후 칼 테오도르의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처음으로 접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괴테와 모짜르트의 단 한 번의 만남이 있었다. 10월 4일 브뤼셀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당시 황제 프란츠 1세의 동생 샤를르 드 로렌의 통치하에 있었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수도였다.
1763년 11월 18일 모짜르트 일가는 파리에 도착하여 5개월간 체류했는데, 여기서 난네를의 쳄발로 주자로서의 재능, 그리고 특히 볼프강의 신동적인 재능 덕택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이어서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안 되어 이 모짜르트 일가에 관하여, 1748년 이래 프랑스의 수도에 체재하면서 오를레앙 공의 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멜히오르 그림이 문예통신 Correspondance littéraire(1763년 12월 1일호)에 기사를 발표함으로써 오늘날이라면 효과적인 선전 작전이라고 불릴 만한 것에 몰두한 것은 사실이다. 파리의 모짜르트 일가는 명사들, 그 중에서도 그들이 그 저택에 체재하게 된 바이에른 대사, 반 아이크 공작이나 퐁파두르 부인 등에 의해 초대되고 환대받았다. 일가는 베르사이유 궁정에 초대되는 명예도 누려, 거기에서 어린 볼프강은 마치 재주를 잘 부리는 귀여운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 파리 체재 중에 에카르트 Eckard, 르 그랑 Le Grand, 호흐브루커 Hochbrucker, 그리고 특히 콘티 공의 쳄발로 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슈베르트와 서로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미래의 돈 조반니의 작곡가의 형성이 어려웠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루이 15세의 딸 빅투와르 드 프랑스 왕녀에게 바쳐진 클라비어 또는 클라비어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2곡(K 6, 7)과 같은 편성으로 테세 Tesse´ 부인에게 헌정된 소나타 2곡(K 8, 9)이 작곡되었다. 1764년 4월 10일 모짜르트 일가는 칼레를 경유하여 런던으로 향했다. 4월 23일에 도착, 27일에 국왕 및 왕비에 의해 세인트 제임즈 파크에 영접되었다. 일가는 16개월 동안 런던에 머물렀고, 볼프강은 여기서 라이프찌히의 칸토르의 막내아들이며 칼 프리드리히 아벨과 함께 유명한 바흐 아벨 콘서트를 창시한 요한 크리스찬 바흐를 자신의 친구겸 충고자로 삼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자기에게는 새로운 장르인 심포니에 손을 대게 된다. 그는 요한 크리스찬 바흐의 예약 콘서트에 참가했고, 1764년 11월에는 왕비 샤를로트에게 바쳐진 쳄발로, 바이올린, 피리를 위한 6개의 소나타 K 1015를 작곡했다.
1765년 7월 24일 모짜르트 일가는 런던에서 네덜란드로 향하였다. 도버, 칼레, 릴, 겐트, 로테르담을 거쳐 9월 11일에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여기서 난네를에 이어 볼프강이 중병으로 쓰러진다. 1765년 말부터 1766년 초쯤에 겨우 회복되었다. 일종의 열병인 이 병은 경제적인 곤궁 때문에 10세가 채 안 된 아이에게 강제로 맡겨진 과도한 일 때문이었다. 교육자로서의 재능을 틀림없이 가지고 있던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전기작가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둔하고 편협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된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어쨌든 겨우 회복되자 곧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볼프강은 여전히 가족과 함께 파리로 돌아와(1766년 5월 10일에 도착), 콩티 공의 리셉션에 참석하여 필리도르 Philidor, 라우파흐 Raupach, 호나우어 Honauer, 베케 Becke, 칸나비히와 같은 독일인 음악가와 알게 되었다. 이 두 번째의 파리 체재는 7월 9일까지로, 그동안 키리에 F장조 K 33(1766, 6, 12)이 작곡되었다. 파리를 떠난 후 디종에서 드 브로스 de Brosses 고등법원 원장을 만나고, 리용, 제네바, 로잔느, 베른, 쮜리히, 빈터투르, 울름, 딜링겐,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모짜르트 일가는 이 대주교의 도시에 9개월밖에 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볼프강은 푹스, 에베를린을 연구하고, 종교적 오페레타 제1계율의 책무 Die Schudilgkeit des ersten Gebotes K 35와 라틴어 희극 아폴로와 히아킨토스 또는 변신한 히아킨투스 Apollo et Hyacinthus seu Hyacinthi Metamorphosis K 38, 그리고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라우파흐, 슈베르트, 호나우어, 에카르트 Eckard의 작품을 사용하여 4곡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K 37, 39, 40, 41을 작곡했다.
1768년은 1월 10일부터 두 번째의 빈 체재의 해가 되었다. 또 이 해는, 마르코 콜텔리니 Marco Coltellini(이탈리아의 작가로서 5년 후에는 요제프 하이든이 그의 작품 <보상된 진실>을 작곡하게 된다)의 대본에 의한 3막의 오페라 부파 <바보 아가씨>K 51 및 안톤 메스머 Anton Mesmer 박사의 의뢰로 박사의 자택에서 10월 1일에 상연된 1막의 징슈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 K 50이 작곡된 해이기도 하다. 레오폴트 모짜르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바보 아가씨>는 빈에서는 상연되지 않고, 이듬해 5월 1일 잘츠부르크에서 상연되었다. 1769년 1월 5일 모짜르트 일가는 다시 대주교의 도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볼프강은 거기서, 디베르티멘토에 속하는 몇 개의 기악곡(카사치온 제1번 K 63, 카사치온 제2번 K 99, 세레나데 D장조 K 100)과 미사곡 C장조 K 66, 테 데움 K 141을 작곡했다.
이탈리아 일주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슈라텐바흐의 호의로 다시 휴가를 얻은 레오폴트는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기로 한다. 1769년 12월 11일에 시작되어 약 15개월 동안 계속된 이 여행에서, 볼프강은 음악계의 주요 인물들과 친교를 맺을 기회를 얻었다. 그 가운데에는 모짜르트 부자가 밀라노의 피르미안 백작의 저택에서 만난 잠바티스타 삼마르티니와 특히 1770년 3월 말에 볼로냐에서 알게 된 마르티니 스승의 이름을 들 수 있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로 여행을 계속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온 레오폴드와 볼프강은 7월 8일 교황 클레멘스 14세에게 초대되었다. 또 볼로냐에서는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K 87의 대본(비토리오 치냐 산티 Vittorio Cigna-Santi 작)이 볼프강에게 제공되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작곡가 요제프 미슬리베체크와도 알고 지내게 된 이 도시를 뒤로 하고 모짜르트 부자는 <미트리다테> 초연을 위해 밀라노로 향하였다. 그 초연은 1770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다. 이 공연은 레오폴드가 마르티니 스승에게 보낸 편지(1771년 1월 2일자)에 의하면 "더없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771년 2월 두 사람은 밀라노에 도착했고, 3월에는 파도바에 이르렀다. 여기서 볼프강은 2부 구성의 오라토리오 <풀려난 베툴리아>의 의뢰를 받았는데, 이 작품은 헨델과 하이든이 개척하여 훌륭한 성과를 남긴 오라토리오 분야에서 모짜르트의 유일한 공헌이 된다.
레오폴드와 볼프강은 비첸차, 베로나를 경유하여 1771년 3월 28일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8월 13일에는 거기에서 두 번째의, 이번에는 4개월만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두 사람이 머문 밀라노에서는 페르디난트 대공(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자)과 모데나 공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의 혼례를 위해 최초의 극적 세레나데 <알바의 아스카니오> K 111이 상연되었다. 12월 16일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지그문트 폰 슈라텐바흐가 서거한 날, 모짜르트 부자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있었다. 1772년 3월 14일에 선임되어 4월 14일에 성대한 의식에 의해 즉위한 신임대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1732-1812)는 그 전임자에 비해서 고용인들에 대해 훨씬 이해심이 없고 소탈하지도 않았다. 그는 궁정악장에 도메니코 피스키에티 Domenico Fischietti를 임명했는데, 이 지위야말로 레오폴드가 오랫동안 헛되이 열망하고 있던 것이었다. 8월 15일 볼프강은 150플로린의 사례금이 주어지는 정식 콘체르트마이스터가 되었다. 이 해에는 <교향곡 제15번> K 124, <제16번> K 128, <제17번> K 129, <제18번> K 130, <제19번. K 132, <제20번> K 133, <제21번> K 134가 작곡되었다. 이 해는 1772년 10월 24일부터 1773년 3월 13일에 걸친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탈리아 여행의 해이기도 하며, 또한 12월 28일에 오페라 세리아 <루치오 실라> K 135가 밀라노에서 초연된 해이기도 하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모짜르트의 전기를 엄밀히 구체적인 사실에만 한정하면, 브람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여행을 열거하게 된다. 1773년부터 1777년까지는 그래도 차분한 상태에 있었지만, 적어도 두 번의 작은 여행이 있었다. 1773년 7월부터 9월 말까지 빈에 갔었고, 1774년 12월부터 1775년 3월까지는 뮌헨에 갔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머물면서 모짜르트가 작곡한 것 중에서는, 잘츠부르크의 군사기밀 고문관 에른스트 안트레터의 아들의 결혼식을 위한 대작 세레나데 K 185와 요제프 하이든의 새로운 기악형식의 영향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빈 4중주곡'이라고 불리는 <현악4중주곡> 6곡 K 168-173(일반적 분류에 따르면 제8번에서 제13번) 등 2개가 특히 중요하다. 이 시기에 에스터하자의 궁정악장 내지 하이든 -이미 op. 17(1771)과 op. 20(1772)이라는 2개의 훌륭한 연작 4중주곡을 쓰고 있었다-은, 그 작품의 대부분에서 정열적이고 애조를 띠며 형식적으로는 대담한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tang>(질풍노도)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모짜르트의 경우, 이와 같은 전(前)낭만주의 미학의 기본적 특징은 1773년 10월에 작곡된 <교향곡 제25번> g단조 K 183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된다.
1774년의 작품 중에서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매우 중요한 <교향곡 제29번> A장조 K 201, <바순 협주곡> B♭장조 K 191, <세레나데 D장조> K 203, <피아노 소나타>의 처음 5곡 K 279-283이다. 역시 전과 마찬가지로 부친을 동반한 볼프강은 뮌헨으로 갔고, 그곳에서 1775년 1월 13일에 <가짜 여자 정원사>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그는 3월 6일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이 도시에 1777년 9월까지 머물게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아들로, 나중에 베토벤의 후원자가 되는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이 잘츠부르크 방문에 즈음하여, 콜로레도는 모짜르트에게 축전극 목인(牧人)의 왕(메타스타지오의 대본)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1775년 4월 23일 단 한 번 상연되었을 뿐이다.
이 1775년에 작곡된 모짜르트의 작품으로는 <목인의 왕> 이외에도 몇 개의 걸작의 이름을 들어 두기로 하겠다. <뒤르니츠 Durnitz 소나타>라고 불리는 <소나타 제6번> K 284, <세레나데 D장조> K 204, 그리고 4월부터 12월에 걸쳐서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 5곡 K 207, 211, 216, 218, 219 등이다. 볼프강이 잘츠부르크에 1년 내내 머물렀던 1776년에는, 몇 개의 디베르티멘토와 세레나데(감미로운 <세레나타 노투르나> K 239와 압도적인 <하프너 세레나데> K 250을 포함한다), <피아노 협주곡 제6번> K 238, <제7번> K 242(피아노 3대), <제8번> K 246, <미사 롱가> K 262, 힘찬 <크레도> 미사 K 257, <미사 브레비스 "슈파우르 미사"> K 258이 작곡되었다. 그때까지 모짜르트가 마침내 그 정상을 이룩하게 되는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분야는 그에게 진정으로 결정적인 작품에 대한 영감을 주지 않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혹은 오히려 당시 잘츠부르크 체류 중이던 프랑스인 피아니스트 죈놈 Jeunehomme 양을 위해 1777년 1월에 완성한 이색적인 걸작 <피아노 협주곡 제9번 E♭장조> K 271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기악음악의 역사 속에서, 이 선구적 작품은 하이든의 <4중주곡> op. 20이나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과 같은 정도로 기본적인 전환점을 이룬 곡이다. 이 곡에 의하여 그 감정적 내용이나,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의 관계를 이룩한 '근대적 대협주곡'의 시대가 열렸다.
만하임과 파리
1777년 3월, 레오폴트는 아들과 자기 자신을 위한 휴가를 청원하지만 추기경 콜로레도는 이를 거절한다. 8월 1일 볼프강이 사표를 내자 몹시 화가 난 대주교는 비서를 통하여 부자에게, 다른 곳에 가서 자신들의 운명을 시험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대답을 전한다. 레오폴드는 이에 꺾여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볼프강 쪽은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이용하여 9월 23일에 잘츠부르크를 떠나 모친을 동반하고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만하임, 그리고 파리로 가는 여행을 감행했다. 그가 될 수 있으면 직업을 얻고 싶어했던 바이에른 선제후에게는 공석이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하나의 자리도 제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10월 22일에 꼭 한 번 콘서트를 열었다(특히 <3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뒤르니츠> 소나타 등을 연주했다). 이 도시에서는 1763년에 만난 적이 있는 오르간과 피아노 제작자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 Johann Andreas Stein과도 재회했다. 10월 30일 만하임에 도착하여 1778년 3월 14일까지 체재했는데, 그 동안 키르하임 볼란트의 오랑주 공 부인의 집에 단기간 머물렀다(1778. 1). 이 시기에, 그는 젊은 여가수 알로이지아 베버 Aloysia Weber와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지지만, 요제프 하이든이 범한 과오를 되풀이하듯이 수년 후에 그녀의 동생과 결혼하게 된다.
1778년 3월 23일 12년만에 모짜르트는 다시 파리의 땅을 밟았다. 특히 그림의 연줄로 종교 음악회의 지배인 장 르 그로 Jean Le Gros와 오페라 극장 발레단 단장 장 조르주 노베르 JeanGeorges Noverre와 알게 된 그는, 그로를 위해서 <교향곡 제31번> K 297과 <협주교향곡> K 297b를, 노베르를 위해서는 발레곡 <레 프티 리엥 Les Petits Riens> K 299b를 작곡했다. 파리에서 작곡된 모짜르트의 주요 작품 중에는 이밖에도 드 기뉴 de Guisnes 공작의 의뢰를 받은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K 299, 비장한 <피아노 소나타 a단조> K 310(가장 긴장감이 있고 비통한 작품의 하나), 마지막의 터키 행진곡에 의해 매우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A장조> K 331 등이 있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짜르트는 1778년 7월 3일에 사망했다. 이후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게 된 모짜르트는 9월 26일, 결국은 좋아지지 못했던 파리를 떠났다. 이 젊은 작곡가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낭시를 경유하여 스트라스부르에 들러, 여기서 1개월 가까이 체류하면서 만하임 악파를 대표하는 대음악가의 한 사람인 프란츠 크사버 리히터와 만날 수 있었다.
모짜르트의 생애의 기록에서 꼭 이야기되어야 할 사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여기에 적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그가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1779. 1. 7)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볼프강은 매우 싫어하던-여기에는 이유없는 것이 아니었다-주인을 다시 섬기게 되는데, 어쨌든 조만간 이 주인과의 관계에 파국이 찾아들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었다. 추기경인 콜로레도는 전기 작가들이 비난하는 결점이 모두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제프 하이든이 별다른 문제도 없이 30년 가까이나 섬기고 있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와 같은 인물에 비하면, 콜로레도는 지식, 교양, 수완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콜로레도와의 단절
1780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모짜르트는 선제후 칼 테오도르로부터 뮌헨의 사육제를 위한 오페라 세리아 작곡의 의뢰를 받았다. 이것이 1781년 1월 29일에 초연된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 K 366을 작곡하게 된 계기엿다. 이때 작곡자는 당연히 다시 뮌헨으로 가야만 했다. 1780년 11월에 접어들자 곧 그곳으로 갔으나, 1781년 3월에는 명령에 의해 콜로레도를 만나기 위해 빈으로 향하였다. 5월과 6월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 이미 긴박해 있던 고용자와 피고용자와의 관계는 한층 심각하게 된다. 이리하여 모짜르트는 콜로레도 밑에서의 일에서 결정적으로 물러나 독립한 음악가로서 빈에 머무르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체재한 베버 미망인의 집에는 알로이지아-그녀는 배우 요제프 랑게 Joseph Lange와 결혼하여 여러 가지 있었던 결혼의 계획에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의 누이동생 콘스탄체 Constance가 있었다. 모짜르트는 곧 그녀에게 빠져 1782년 8월 4일에 결혼했다. 콘스탄체는 좋은 아가씨였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렇게 재치가 있는 편도 아니었고 낭비가 심했기 때문에 재정과 가정 관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한 실무적 감각을 구비한 남편에게 엄격하게 이끌릴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모짜르트의 사후 18년이 지난 후 콘스탄체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그녀를 모범적인 아내로 만든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니센 Georg Nikolaus Nissen과는 반대로, 모짜르트에게는 이런 성질이 없었다.
1781년의 작품으로는 <바이올린을 위한 론도> K 373(아마 바이올린 주자 브루네티 Brunetti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생각된다), 4곡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K 376, 377, 379, 380,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대규모의 <소나타 D장조> K 448이 있다. 같은 해 후반에는 황제 요제프 2세의 의뢰를 받아, 동생 슈테파니라고 불린 고틀리프 슈테파니 Gottlieb Stephanie의 대본에 의한 독일어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K 384를 위한 최초의 작업이 행해졌다.
<유괴>의 초연은 1782년 7월 16일 부르크 극장에서 행해져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요제프 2세는 곡 속에 음표를 너무 많이 썼다고 모짜르트를 비난했던 것일까? 크라머 Cramer의 음악 잡지가 이 작품이 미(美)에 넘쳐 있다고 말한 것(이것은 옳다)에 비해, 칼 친첸도르프 Karl Zinzendorf에게 이 곡은 <훔친 음악을 단순히 긁어모은 것>이었다.
빈에서의 성공
1782년 모짜르트는 빈의 판 스비텐 남작의 저택을 드나들게 되었다. 남작은 나중에 하이든의 마지막 오라토리오 2곡(<천지창조>와 <사계>)의 대본을 쓴 인물이며, 대부분의 동시대인과는 달리 바흐와 헨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밑에서 볼프강은 '엠마누엘이나 프리데만 뿐만 아니라 세바스찬'의 것도 포함한 바흐 일가의 푸가를 발견했다. 바로 이 1782년 초에 <피아노를 위한 서곡과 푸가> c단조 K 394가 작곡된다. 12월 31일에는 푸가토에 의한 훌륭한 피날레를 가진, 요제프 하이든에게 바쳐진 6곡의 <현악4중주곡 G장조> K 387 중 제1곡이 완성되었다. 이 두 주요 작품 사이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세레나데 c단조> K 388, <교향곡 제35번> "하프너", <피아노 협주곡 제11번> K 413, <제12번> K 414, <제13번> K 415 등을 작곡하고 있어었다.
여기서는 1780년대에 요제프 하이든과 모짜르트 사이에 이루어진 특별한 관계에 대해 살펴 보자. 본질적으로는 이질적이지만, 똑같이 위대한 이 두 천재가 언제 처음으로 만났는지 그 정확한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 알려져 있는 것은 그들이 각자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서로 느끼고 있던 타의 없는 우정과 존경이 음악사 속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모범적인 한 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짜르트는 이 에스터하자 궁정악장(하이든)의 <현악4중주곡> op. 20의 '표현의 밀도'에 대단히 감동했다. 나중에 그는 1781년의 현악4중주곡 op. 33의 근대성에, 그 이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역시 감동하게 된다. 또, 6개의 <현악4중주곡> K 387, 421, 428, 458, 464, 465의 헌사에 나타나 있는 선배에 대한 극진한 찬사는, 존경의 표시와 함께 자신에게 던져진 '예술적 도전'에의 해답이 되고 있다. 이들 4중주곡은 시간을 두고 꼼꼼히 다듬어 만들어진 것이다. 완성하는 데 2년 이상을 요했는데, 그 동안 모짜르트의 생애에 있어서의 많은 걸작이 탄생했다. <미사 c단조> K 427, <교향곡 제36번 "린츠">,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푸가> K 426(1783),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제14번> K 449, 제15번 K 450, 제16번 K 451, 제17번 K 453, 제18번 K 456, 제19번 K 459,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K 454,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K 457[1784],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K 475[1785] 등이다.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모짜르트는 수업이나 연주회(당시 '아카데미'라고 불렸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의 수에 따랐기 때문에 레슨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782년 1월에는 그의 학생으로 룸베크 공작부인, 폰 트라트너 von Trattner 부인, 치히 Zichy 공작 부인 등 3명의 이름이 보인다. '아카데미'는 1783년 3월 23일에, 프로그램이 풍성(전10곡 중에는 새로운 <교향곡 "하프너">, <피아노 협주곡> 2곡, <포스트호른 세레나데>로 부터의 발췌 등도 있었다)했던 콘서트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업보다 연주회가 더 실속 있는 것이었다. 피아노의 명수(빈 사람들이 가장 평가하고 있던 그의 재능은 이런 면의 것이었다)로서 등장하기 위해, 모짜르트는 1784년 2월부터 1786년 12월까지 훌륭한 <피아노 협주곡> 12곡(일반적인 분류로는 제14번에서 제25번)을 작곡했다. 그 중 <제14번> K 449는 1791년 11월 15일까지의 모짜르트 자신이 적은 작품 목록의 <제1번>(1784년 2월 9일자)에 위치하는 것이다.
친구들과의 사적 실내악 연주회도 열렸다. 어떤 때에는 이 모임에서 디터스도르프가 제1바이올린, 요제프 하이든이 제2바이올린, 모짜르트는 비올라, 그리고 반할이 첼로를 담당하여 하이든에게 바쳐진 새로운 4중주곡 중의 3곡이 연주된 일도 있었다. 1785년 2월에 아들을 방문했을 때 마침 이 연주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은 레오폴드 모짜르트는, 아들 볼프강에 대한 하이든의 찬사를 자랑스럽게 난네를에게 써보내고 있다(2월 14일자 편지) "토요일 밤, 요제프 하이든과 두 틴티 남작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새로운 4중주곡이 연주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전에 만들어진 다른 3곡에 볼프강이 덧붙인 새로운 3곡만이 연주되었다. 이들 곡은 평이하기는 하지만 훌륭하게 작곡되었다. 하이든씨는 '신께 맹세코 성실한 인간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당신의 자제분은 내가 직접적으로도, 또 간접적으로도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미적 감각에 더하여 작곡의 훌륭한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스터하자의 궁정악장 하이든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당시의 많은 교양인과 마찬가지로 모짜르트는 비밀 결사단인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가입한 다음 해인 1785년에 그는 <프리메이슨 장송음악> K 477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철학적 선택에서 태어난 수많은 제1급의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이 철학적 선택은 모짜르트에게 있어서 하이든의 경우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786년 초, 모짜르트는 <피가로의 결혼>(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발췌한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에 의했다)에 착수하였다. 이때 요제프 2세로부터 네덜란드 총독인 작센 공 알베르트를 위해 개최되는 축제 때 상연하기 위한 1막의 음악이 있는 극을 의뢰받았다. 이 <극장 지배인> K 486은 슈테파니(동생)가 대본을 썼고, 1786년 2월 7일 쇤브룬 궁의 오랑주리에서 상연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도 지나지 않은 5월 1일, 부르크 극장에서 <피가로의 결혼>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비교적 호평을 받아 1786년 빈에서 9회나 상연된 이 걸작은, 이듬해 프라하에서 상연되어 훨씬 뚜렷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로 이 프라하를 위해서, 모짜르트는 오페라 중의 오페라라고 간주할 수 있는 불멸의 돈 조반니를 작곡한다.
모짜르트는 1786년 말부터 프라하에 초대되었다. 그는 이듬해 1월 11일에 도착하여 1월 17일에 피가로의 결혼의 재연에 입회했다. 그는 2월 10일 빈으로 돌아와 돈 조반니의 작곡에 착수하여 7월과 8월에는 완전히 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사이 5월 28일에 레오폴드 모짜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급사하였다. 향년 68세였다.
돈 조반니가 1787년 10월 29일에 프라하에서 초연되었기 때문에 모짜르트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와 같은 시기의 작품인 유명한 <소야곡>(녹턴) K 525는 작곡가의 카탈로그에는 8월 10일에 작곡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짜르트는 그 9개월 전(1786, 12)에 프라하의 음악애호가에게 갓 만들어진 기념할 만한 <교향곡 제38번> K 504를 보냈다. 이 작품은 하이든이 같은 해에 작곡한 <교향곡 제86번>과 나란히 베토벤 이전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하여 교향악 예술의 하나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1787년에는 이밖에도 <현악5중주곡 C장조> K 515, <현악5중주곡 g단조> K 516, <피아노 연탄 소나타> K 521(이 장르로서는 모짜르트 최후의 곡),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제42번> K 526이 만들어졌다.
고난의 시대
모짜르트는 1787년 11월 중순에 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7일에 요제프 2세는 800플로린의 연봉으로 그를 왕실 궁정 작곡가로 임명했는데, 같은 지위라도 글룩은 2000플로린을 받고 있었다. 점차 빈 사람들의 몰이해에 괴로워하고 금전 문제에 시달리는 일이 많아진 모짜르트는 1788년에는 줄곧 이 오스트리아의 수도에서 생활했다. 생활을 위해 돈버는 일, 즉 판 스비텐 남작을 위해 헨델의 <아시스와 갈라테아> 및 <메시아>의 편곡에 손을 대기도 했으며(메시아는 1789년 3월에 완성), 6월, 7월, 8월에는 사실은 연주될 희망도 없는 마지막 3개의 교향곡 제39번 K 543, 제40번 K 550, 제41번 <주피터> K 551을 작곡했다. 이와 같은 제1급의 천재를 변덕스러운 사회가 버리고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음악사상 가장 슬프고도 의미 심장한 에피소드이다. 그는 정신적인 면에서 그가 살아온 세기를 영광그럽게 만든 사람이었다. 요제프 하이든이 오페라를 부탁하러 온 프란츠 로트 Franz Rott에 대한 답신(1787년 12월에 서한)에서, 의뢰받아야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고 모짜르트라고 단언했듯이 그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하이든은 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친구의 마음에, 특히 이곳 군주들의 마음에 모짜르트의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작품을 새겨 놓아, 그들에게 그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동과 음악적 이해를 줄 수가 있다면, 수많은 나라들이 이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 싸우게 될 것입니다. 이 유일무이한 인물 모짜르트가 군주의 것이든 황제의 것이든, 어느 궁정에서도 지위를 얻지 않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 내가 흥분하고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결국 나는 너무나 이 인물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1789년 4월 8일 모짜르트는 제자였던 칼 폰 리히노프스키 공의 마차로 다시 여행을 떠나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찌히, 포츠담을 돌았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오랜 세월 동안 살았던 라이프찌히에서, 모짜르트는 토마스 교회의 오르간을 무료로 연주했고, 많은 청중 앞에서 선의와 기교로 가득 찬 연주를 한 시간 동안 했다고 한다. 포츠담에서는 훌륭한 아마추어 첼로 주자이기도 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환대를 받아, 그를 위해 1789년 6월 및 1790년의 5월과 6월에 <현악4중주곡> 3곡 K 575, 589, 590을 작곡했다(이 프로이센 왕을 위해서는 하이든도 <4중주곡> op. 50을 작곡했었다).
1789년 6월 4일 빈으로 돌아온 후 모짜르트는 왕실로부터 다음 사육제를 위한 새로운 오페라의 의뢰를 받았다. 당시 그는 다음의 비통한 편지(7월 12일자, 미하엘 푸흐베르크 Michael Puchberg에게 보냄)가 보여주고 있듯이 생활이 매우 궁핍했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도움을 청할 정도로 안 좋은 상태에 있습니다! 좋은 친구, 형제인 당신이 나를 버린다면, '불행하고 죄 없는' 나와 가련한 병든 아내 그리고 아이도 파멸해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혼란에서 낭만파적인 작곡가라면 끌어낼 법한 자기만족적인 노출에 속하는 감정을 그가 지녔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짜르트에 있어서는 18세기 말의 모든 교양있는 인사가 그러했듯이 개인적인 문제를 공개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어려움 주에서도 그는 신선함과 상냥함에 찬 <코지 판 투테>를 작곡할 수 있었다. 이 곡의 비극적 측면(다 폰테에 의한 줄거리에는 그것이 존재한다)은 결코 노골적으로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오케스트라에 의한 <코지 판 투테>의 최초의 리허설은 푸흐베르크와 요제프 하이든이 지켜보는 가운데 1790년 1월 21일에 이루어졌다. 5일 후에는 초연이 행해져 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7년 반 전에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를 평가하지 않았던 친첸도르프 백작은, 이번에는 일기에 음악은 매력적이고,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었다고 적고 있다.
최후의 해
그리고 1791년이 찾아왔다. 이 해 모짜르트는 아주 많은 걸작을 작곡했다. 새로 무한한 창작력을 받은 것 같았지만 그는 그 해를 넘기지 못했다. <피아노 협주곡> K 595, <현악5중주곡 B♭장조> K 64, <아베 베룸> K 619, <티토 황제의 자비>, <마적>, <클라리넷 협주곡> K 622, <미완성 레퀴엠> K 626이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던 모짜르트가 할 수 있었던 최후의 단계에서 자곡했던 곡들이다. 봄에 모짜르트는 아우프 데어 비덴 극장 지배인 엠마누엘 시카네더가 대본을 쓴 <마적>의 작곡에 착수했다. 8월 초, 프라하 국립극장이 레오폴드 2세의 보헤미아 왕 즉위를 기념하는 축전을 위해 <티토 황제의 자비>(메타스타지오의 대본)를 제재로 정하여 오페라 세리아의 작곡을 의뢰해 왔다. 아무래도 9월 6일에 초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짧은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가 레치타티보의 창작에 협력했다. 이 제자가 수개월 후 모짜르트가 미완으로 남겨 놓은 레퀴엠의 뒷 부분을 완성한다. 모짜르트는 그를 데리고 프라하로 가서 잠시 동안 여기에 체류했다. 일화에 의하면, 프라하 출발에 즈음하여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얼마 전에 의뢰한 레퀴엠 미사의 진척 상황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레퀴엠의 기원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는 전설이며, 이 작품의 의뢰(발제크 Walsegg 백작에 의한)가 공증인의 입회 아래 작성된 정식 계약에 의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알려졌다.
1791년 9월 30일 빈에서 <마적>이 초연되었다. 특히 주목할 배역으로서 시카네더가 파파게노로 출연하였다. 제1막은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했으나 제2막부터는 크게 환영 받았다. 그러나 베를린 음악신문 Berliner Musikalische Zeitung(1793)은 이렇게 쓰고 있다. "모짜르트의 훌륭한 음악은, 불쾌감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어질 정도로 거칠게 연주되었다. 노래하는 사람 가운데 남자도 여자도 평범함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공연의 이러한 유감스러운 상황은(정말로 그렇게 나빴다고 가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공연의 분명한 성공에 나쁜 영향을 주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모짜르트는 자기의 인생을 다시 고쳐 세울 수 있었을 이 성공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었다.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보(訃報)는 거의 화제에 오르지 않았고 매장도 극히 간소한 것이었다. 일기가 나빠 관을 따라간 것은 단 몇 사람의 친구뿐이었으며, 이 뛰어난 인물의 유해는 공동묘지에 묻혀 이름도 확인되지 못한 채 소재 불명이 되어 버렸다. 하이든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런던에서였다. 그는 곧바로 인류가 입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1792년 1월의 편지에 미하엘 푸흐베르크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내고 있다. "그의 부고를 듣고 나는 한참 동안 망연자실해 있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물의 생명을 신이 이렇게도 빨리 불러가신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날마다 영국인들에게 말해 준 것을 깨닫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유감천만입니다. 그들은 이 일에 관해서는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벗이여, 부디 이곳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작품 리스트를 보내주십시오. 그의 미망인을 위해 그 보급에 나는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3주일 전, 나는 이 가엾은 여성에게 편지를 써보내어, 그가 귀여워하고 있던 아들이 적당한 나이에 도달하면, 내가 무료로 작곡을 가르치고 어떠한 형태로든 부친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청했습니다."
콘스탄체 베버와 모짜르트의 사이에는 네 아들과 두 딸 등 6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 중 라이몬트 레오폴드 Raymond Leopold, 토마스 요한 토마스 레오폴드 Thomas Johann Thomas Leopold, 테레지아 Theresia, 안나 마리아 Anna Maria는 어려서 죽었다. 당시의 가공할 유아 사망율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볼프강이 세상을 떠나자, 콘스탄체는 일곱살난 칼 토마스 Karl Thomas와 1791년 7월 26일에 갓 태어난 어린 아들 프란츠 크사버 Franz Xaver와 함께 남게 되었다. 그 후 큰 아이는 밀라노에서 공무원이 되었고, 1858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프란츠(하이든이 푸흐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마 이 아이일 것이다)는 노이콤, 훔멜(아버지의 옛 제자), 알브레히츠베르거, 포글러, 살리에리를 스승으로 하여 프로 음악가(피아니스트, 작곡가)가 되었으며, 1844년 7월 29일 칼스바트에서 그 생애를 마쳤다. 그는 평가받을 만한 작곡가였던 것 같다. 천재적인 아버지에 의한 커다란 핸디캡이 없었다면 아마 후세에 보다 더 인정받았을 것이다.
음악에 있어서 모짜르트는 하이든과 같은 실험자가 아니었다. 몇 년 후의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선인이나 동시대인에 의해 만들어진 형식이나 구성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서법의 완벽함, 착상의 풍부함, 독창성, 끊임없는 갱신, 항상 각성하는 감수성의 날카로움 등에 의하여 그는 모든 도식, 자신이 그 내부에 살아 있는 모든 구조를 초월하고 있었다. 기악음악의 위대한 마술사 요제프 하이든과는 반대로, 그는 노래가 들어 있는 극 속에서 그의 극음악의 재능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표현을 발견해냈다. 그러나 그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손을 댄 모든 장르에 있어서 훌륭하게 성공시킨다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가령 교향곡은, 사실은 그의 관심의 중심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대의 에스터하자의 궁정악장(하이든)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던 훌륭한 교향곡을 몇 곡 작곡했다.
그는 하이든의 논증적인 동시에 시적인 사고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는데, 이 하이든으로부터는 주제의 전개와 논리적이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화음의 연쇄에 대한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웅대한 구성을 조립하기 위해 하나의 주제, 때로는 평범한 하나의 모티브로 끝내는 일도 있었던 하이든에 비해, 모짜르트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아름다운 노래, 부드럽고 풍부한 칸타빌레의 표현력, 매혹의 힘을 더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한 크리스찬 바흐(런던의 바흐)와 그의 섬세하고 갈랑 스타일(stil galant) 음악에 큰 경의를 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 단점이 있다면 참다운 후계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요제프 하이든과 그에 의한 훌륭한 음악미적 발전이 없다면, 베토벤과 낭만주의의는 설명도 이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모짜르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오랫동안 우아함, 세련성, 아름다움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는 특이한 그리고 분류를 거부하는 존재다. 그래서 더욱 우리들에게 그가 그렇게 귀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참고: 모짜르트의 작품에는 쾨헬 Koechel의 작품목록 번호(K)로 표시된다. 1937년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이 붙인 작품번호는 KE로 표시된다. KE의 연대가 보다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