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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천지창조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일곱 번씩이나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둘째 날과 일곱째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언급이 일체 없다. 그럼에도 셋째 날과 여섯째 날에는 두 번씩이나 “보시기에 좋았다”고 언급해, 결국 총 일곱번 나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1:6~8) 이렇게만 쓰여 있다.
일곱째 날에 언급이 없는 것은 누구나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둘째 날에 없는 이유는 성서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 어떤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대답이 없다. 어느 신학자의 주석이 있었으나, 뭔가 설명이 궁색하고 미흡해 보였다.
그러면 왜 유독 둘째 날 창조에서만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성경말씀 한글자 한글자가 그냥 되는대로 막 쓰여지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왜 그럴까? 무슨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신학적 탐구심과 영적인 호기심이 발동해, 한땀 한땀 바늘로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천착을 거듭하게 된다.
하버드大, 프리스턴大, 예일大, 웨스트민스터 大, 옥스퍼드大, 총신大, 장신大, 백석大 등의 조직 신학자, 목회자, 성서 관련서적 및 영상들을 몇 달이 지나도록 골고루 뒤져 본다. 그러다가 놀라운 단초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번 경우에도 다행히 단초를 발견했다.
첫 번째 단초이다.
둘째 날 “보시기에 좋았다”는 언급이 일체 없었던 이유는 우선 히브리어 [토브], [바달], [라키야] 라는 3개의 단어를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⑴ [토브] 라는 단어는 “좋았더라”라는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토브]는 복합적 의미를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좋다, 아름답다, 선하다, 의롭다, 복되다, 행복하다, 기쁘다, 은혜롭다 등 풍부한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고 한다.
영어로는 Good 이다.
구약성경에서 오바댜, 하박국, 학개를 제외하고 모든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를 가장 깊고, 풍부하게 표현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토브]라는 단어는 우리 교회 어느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토브의 강가 팬션'을 떠오르게 한다. 참 잘지은 탁월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영감이 있는 이름이다.
⑵ [바달] 이라는 단어는 “나뉘라”라는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바달]의 의미는 '나누다, 분리하다, 구별하다'의 뜻이다. 영어로는 Separate 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2회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6~7)
①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창 1:4), 주야를 나누고(창1:14), 궁창으로 물을 나뉘게 하였다고 한다(창1:7) 성소와 지성소 두 영역을 나누어 구별한다(출 26:33)
②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들에서부터 분리시키었으며(레20:24, 레20:26),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해야 한다(레20:25)
⑶ [라키야] 라는 단어는 “궁창”이라는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궁창(라키야)의 의미로 하늘, 열린공간, 펼쳐진 것, 확장된 것의 뜻이 있다. 영어로는 firmament, Heaven 이다.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 이라 부르시니라”(창1:6~7)
첫째 하늘(궁창)은 새들, 구름이 거하는 곳이고, 둘째 하늘(궁창)은 해, 달, 별들이 있는 곳이고, 첫째와 둘째 하늘(궁창)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셋째 하늘(궁창)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노니,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 왕상8:27, 30 비교)
바로 이곳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실제의 셋째 하늘(궁창)이다.
수 천년의 노력 끝에 사람들은 첫째 하늘(궁창)에서 둘째 하늘(궁창)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리 우주 공학이 발달해도 둘째 하늘(궁창)에서 셋째 하늘(궁창)로 사람을 데려다 줄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여행은 ‘뇌’에 의해 가능하지 않고, 오직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하늘에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하늘은 셋째 하늘, 하늘의 하늘, 가장 높은 하늘 등으로 불리며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이 여기에 거한다(마6: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하늘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자신의 백성이 와서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엡4:10; 히8:1; 9:24~28)
선지자들이 본 것은 생물들의 머리위에 있는 맑고 투명한 창공과 같은 것, 전지 전능한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봤다.
더 나아가, 궁창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시19:1). 시인은 권능의 궁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시150:1) 궁창은 수정 같고(겔1:22), 궁창 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겔1:23, 겔1:25, 겔1:26, 겔10:1)
최근에 신학자들이 통전적인 관점으로 신학토크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창세기 1장 6절의 궁창이 하늘이고,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영(르하흐)이 수면 위에 운행’도 삼위일체이신 예수님를 예표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성경구절을 들어 포괄적으로 설명할 때 어느정도 이해가 됐다(창1:6, 창1:8, 8:5, 창7:11~12, 고후5:1,8, 눅8:55, 마27:50, 롬6:2~3, 레 11:45, 레20:26, 갈6:14, 벝전1:14, 벹전2:9, 마27:50~51, 출26:6, 26, 33, 마27:51, 출26:31~33, 레16:13, 시69:14, 마8:26, 마3:16, 롬6:1~9, 요20:8, 롬6:1~9, 창7:1)
두 번째 단초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언급이 일체 없었던 이유는 성막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성막를 통해 바달, separate 나누다, 분리하다, 구별하다'의 뜻으로 유추해 보면 좀 더 분명해 지는 것 같다.
번제단에서도 칼로 제물을 분리하고, 나눈다. 이 제물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육체를 예표한다.
또한 훗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유월절 오후 3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쭉 찢어지며 나뉜다. 이 휘장은 예수님 육체를 예표한다(마 27:51, 막15:38)
성소에는 이러한 휘장(veil)이 두 개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 하는 것이며(출26:31-35절), 다른 하나는 성소의 문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출36, 3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와같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뉜 둘째 날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예표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 날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 입장에서는 독생자 예수의 희생에 대하여 엉엉 울며, 통곡해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티내지 않으시고 감추셨다고 생각해 봤다.
세 번째 단초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언급이 일체 없었던 또하나의 이유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성경을 신학의 틀로 분석해보면, 성경전체의 주제는 공통적으로 예수에 대한 증언이며(요5:39), 성경기록 목적도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요20:31) 이고, 성경 전체의 내용조차도 모두가 예수에 대한 것(눅24:27)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말은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창조 첫째 날부터 일곱째날 까지도, 더 좁게는 성경의 모든 단어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있음을 말한다.
좀 더 실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나뉘는 고난 받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애써 외면하신 사건이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셨을 때, 예수님은 오로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죄인일 뿐이었다(고후5:1)
하나님의 진노의 잔(마26:39)이 부어졌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음과 절망을 체험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흉악스런 죄를 더 이상 목도하실 수 없어 일순간 십자가에서 고개를 돌리시고(외면하심) 온전히 죗값을 다 치르도록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몸으로 자발적으로 처절한 그 길을 가셨다.
그래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만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애쓰시면서 기도하신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성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은 그 길이 힘들어도 주저 없이 거침없이, 눈물없이는 볼 수없는 그길을 스스로 가신 것이다. 강제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는 사악한 인간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하나님의 독생자(예수)를 채찍과 못과 창으로 둘로 나누는 사건이다. 이는 삶과 죽음, 영혼과 몸, 빛과 어두움, 바다와 땅,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는 사건이였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신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죄인화된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일순간 분리, 유기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물이 되기 위하여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일순간 분리되는 것은 예수님께는 가장 큰 고통이셨다. 히브리어 바달(separate) '나누다, 분리하다, 구별하다'의 의미가 가슴에 크게 와 닿는다.
가죽이 벗겨진 아담때의 짐승, 홍수후에 드렸던 제물, 아브라함에게 꽁꽁 묶이던 이삭, 문설주에 발라진 유월절 어린양의 피,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 그리고 그의 피와 살, 번제단 제물, 지성소의 찢어진 휘장 등이 중첩되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 세상 역사속에서 실제로 사셨던 예수님! BC와 AD를 나누는(Separate) 역사 분기점의 주인공이시다. 그런데 어리석기만 한 인간들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하나님을 공개 처형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뉜 둘째 날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예표일진데 어찌 둘째 날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이셨다면 땅을 치며, 울부짖어야 할 날인 것이다. 그렇지만 벌레 같은 인간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둘째날도 기쁜 날, 감사한 날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성자 예수님의 나뉨과 분리(Separate)가 오히려 인간들에게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Combine)할 수 있는 은혜가 되기 때문이리라.
그 어떤 성경구절도 그 의미들을 찾아보면, 탄복할 정도로 정교하게 배치되고 빈틈이 없어, 놀랍고 경이롭고 신비롭기만 할 따름이다.
※본 자료는 신학자들이 다룰 영역이나,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한 열망만으로 성경적 관점 속에서 개인적 소견을 피력해 보았습니다. 다소 복잡하지만 가볍게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김종오 집사 올림.
첫댓글 아~~
과연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