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7월2일 논산 제2훈련소 입소
7월9일 논산 26연대 배출 (군번:7101****)지원군번임
9월2일 대전 육군통신학교 입소
11월20일 대전 육군통신학교 R/C 167기 수료
11월20일 강원도 양구 육군 제21사단 자대배치
74년 7월 초순 그해 여름은 배고프고 고된 훈련병 들에게 더위는 가혹 하게도 기승을 부리며 우리를 괴롭혔다.지금도 잊지 못하는건 더위가 아니라 배고픔 이였다.피엑스 에서 10짜리 크림방(그때당시 삼립빵) 하나 사들고 변소 안에서 한쪽 손은 코를 막고 빵조각을 입안으로 우겨 넣던 빵맛.꿀맛이 따로 없더라.미군의 M1 소총은 무겁고 길고 참으로 대한민국 병사들 에겐 어울리지 않은 총이였다.
하필이면 그해 8.15광복절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땜에 온 사단이 비상 걸렸지.
통신학교 8주 교육은 참으로 혹독했다.젠장 군기는 얼마나 센지 오리도 지각보행을 한다는 그 악명높은 통신학교다.취사장 갈때면 4열로 줄을 지어 그놈의 군가는 목이 터져라 불러대고 매일 점호시간은 구대장이 무슨 핑게를 대드라도 줄빳다 안맞는 날이 없으니
엉덩이에 살이라곤 없는 나에겐 사람 죽는 날이지 맞고나면 호~호~36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 조차 하기싫은 추억 들이다.그리고 취사장 배식 하는놈 지금도 이가 갈린다.식기 라곤 양푼이 두개 들고 하나는 밥. 한쪽에국.깍두기2개 밥그릇에 얹어 주면 끝이다.얼마 안 있으니 평식기는 나왔지만 아마 우리시대 사병들이 두그릇 식기가 마지막 세대 인것같다.참재미 있는건 식기를 배식놈 한테 갖다대면 밥을 공처럼 둥그스럼 하게 한그릇 퍼준다.돌아서면 공처럼 생긴 밥안에서 공기가 빠져나가 가라앉아 버린다 서너 숫가락 뜨면 없다.밥을 가지고 국자 주걱으로 공을 만들어 퍼주니 그럴수밖에...정말이지 얼마나 배 고팠는지 그배고픈 에피소드는 여기에서 글로 다 적자면 끝이없어 요정도만 얘기할께.잠잘때는 우리 막사 앞에 여군 막사가 있는데구대장은 왜 하필이면 여군 막사쪽을 향하게 하여 그놈의 구호삼창을 부르게 하는지? 지금 생각하니 개살스런 구대장의 농간 이였다.
혹독한 통신학교 수료후 자대배치 되고보니 최전방 북한군의 삐라와 귀가 따갑도록 들려오는 대남방송 내가슴 까지 쌓인눈 따뜻한 남쪽 에서 올라온 나에겐 생에 처음 맛보는 혹독한 맹 추위였다.매일같이 제설작업! 눈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보이질 않고... 어쩌다 소고기국이 나오는 날이면 그날은 죽는날!소가 목욕을 하고 갔는지? 고기는 하나도 없고 멀건 국물 밖에 없다.고참들 식사후 식기를 개울가 얼음을 돌로 깨고 씻느라면 그놈의 소고기 국물 씻고나면 허연 버터 같은 기름 빨래비누로 얼음물에 아무리 씻어도 미끌미끌 그날 저녁은 고참들 에게 원산폭격에 좌로굴러 우로굴러 통신학교때 맞던 줄빳다는 연습용 이였다.내엉덩이는 온정한 날이 없었고 피멍은 항상 달고 다녔다.취침시간 에는 모포를 뒤집어 쓰고 말없이 흐르는 눈물 고향 방어진 생각 많이 나더라...친구들은 지금쯤 따뜻한 부모님이 해주신 밥먹고 학업에 열중 일텐데 내가 미쳤다고 어린나이에 지원해서 이 생고생을 하노 탈영을 수 도 없이 생각 해 보았지만 그래도 생각 관념이 밝았는지 포기했다.지금 생각 해도 참 잘 참았구나 싶다. 목욕은 한달에 두번.그것도 5리나 구보해서 한 사람당 물 두어 바가치 덮어쓰면 목욕끝.추운겨울 이라 동내의에 야전잠바 입고 아무리 겹쳐 입어도 추운건 매 한가지 지금 곰곰히 생각 해 보니 마음이 추워서 그랬는가 싶다.조금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는 목욕을 못해 이 가 얼마나 많든지 사병들 전부 양 겨드랑이,빤스 불알밑에 이약(디디피 가루약) 주머니를 달고 점호를 받았다.주말이면 빤스벗어 내무반 에서 이 잡는게 하루 일과였다.배 고픈건 통신학교나 자대나 매 한가지 였다.정량 600그램을 못 찿아 먹으니 어찌 살겠노?70년도 그시절 에는 부사관 놈 들이 사병들의 정량을 급탈했다.그러니 배 고픈 소유자는 불쌍한 사병들의 몫이지.그때 병장 봉급이 760원 이였으니 배고픈 병사 몇명모아 피엑스 사다리 타기 몇번 하고나면 없다.
한번은 빼치카 담당을 하고 있는데 사단장 행정실 에서 호출이 왔다.군기가 바짝들어 참모앞에 부동자세로 서니 나의 신상 명세서를 보이면서 자네가 쓴 글이냐며 한번 쓰 보란다.원래 필체와 미술에 소질이 있는 나 였기에 시키는 대로 쓰 내려 가니까 내일부터 행정실 에서 챠트병 으로 근무 하라고 하신다.정말이지 그때의 기분은 이루 다 글로 표현을 못할 정도로 하늘을 나는것 같았다.감히 내가 행정실 근무라니?그곳은 모두 엘리트 사병들만 근무 하는 곳이 아니던가 고대,연대,서울대 출신들이다 나와는 대화 자체가 먼 이국땅 에서 온 분위기 였다.주말이면 대학가의 캠퍼스 얘기로 꽃을 피우면 괜시리 나도 장단 맞혀야 되고,알아 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통신장비 어쩌구 저쩌구 하면 난감하고 곤혹 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배우지 못한걸 그때 절실히 느꼈다.하지만 나는 챠트병 으로서 나의 임무를 충실히 했고,나의 끝발은 사단 내 에서 하늘을 찔렸다.감히 사단장 찦차를 타고 미군 야전잠바 입고 외출 나가는 사병은 육군병장 김병장 말고는 없었으니까 주말이면 양구시내 젓가락 두드리는 술집은 휩쓸고 나녔으니까.그때, 순자,키큰 달숙이 젖통큰 명숙이 모두들 지금쯤 어느 하늘아래 살고들 있는지?많이 보고싶구나.헌병들은 나를 아예 열외 시켰지.군대 끝발이 좋긴 좋더라.우리나라 에는 나지않는 그놈의 휘발유는 주말이면 전부 나의 술값에 충당 했으니 수송부 얘들 나땜에 줄빳다 무지 맞았지.그렇게 나의 파란만장한 나의 군생활도 흐르는 세월 앞 에는 어쩔수 없는지 삼년육개월은 막을 내리더라.지급받은 개구리복을 입고 고향 으로 달려 온지가 벌서 36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구나.강원도 그곳 지금쯤 옛모습은 없고 많이 변했겠지?그리고 그때 배고픔과 매일 밥먹듯 맞는 줄빳다를 같이 공유한 그리운 전우들 어느하늘 아래서 아들,딸 낳아 잘 살고 있는지 그립다. 안녕~~
그리움을 달래는 육군병장 김병장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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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말이지 쫄병때는 진짜진짜
배 고팠다. 요즘은 하얀 쌀밥이
남아 돈다지?ㅎㅎㅎ
그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켜주어 우리는 무사했구나^^
고생했다 친구야^^
고맙다 친구야^^
마리아님 그렇게 생각하면 고맙고, 대한민국
남자들 한테 다 고맙다고 인사 해야지.
지역 방위출신은 빼고.ㅋㅋㅋ
평소에 대한의 아들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안녕을 지켜주어,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인사한단다^^군대간 아들들에게!
622방공포 빵구는 할 말이 없다
윤빨이는 자동차 포부대 술사수 였다.
천날 만날 술에 째려...군기가 영 엉망진창
이더라.우리부대 왔으면 줄빳다에,원산폭격에
완전군장 구보에 군기가 팍~팍~ 들었을 텐데.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