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에 나오면서 부터 이미 아버지는 세상에 있었다, 물론 어머니도 형이나 누나가 있는
사람들은 형과 누나도 이미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싫든 좋든, 누구에게나 또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자든 여자든, 아버지는 반드시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되고 싶으면 될 수가 있고, 아버지가 되기 싫으면 안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
불가의 인연설을 빌리자면 우리가 길을 가다 서로 부지불식간에 옷깃만 스쳐도 크나큰 인연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버지의 살을 빌리고 뼈를 빌려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 난 것이 얼마나 큰 인연이 있다는 것일까?
이제 내 나이도 벌써 지천명이라는 (知天命)50세를 지나고 이순(耳順)60세도 지나
이제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逾矩)70세를 바라다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별로 유식하지도 않은 내가 위에 문자를 좀 쓴 거 같은 데~
풀이 하자면
동양의 성인으로 칭송받는 공자님이 자신의 삶에 있어 좌우명으로 실천하고 말씀하셨다는 인생사란다.
남자란.
1. 지우학(知于學)15세 - 배움에 뜻을 두고 학문을 하다.
2. 약관(弱冠) 20세 - 어른이 된 거 같지만 나약한 존재
3. 이립(而立) 30세 - 살아가는 이유와 세상에 대한 가치관을 세우다.
4. 불혹(不惑) 40세 - 세상 유혹에 흔들리 않았다.
5. 지천명(知天命) 50세 - 하늘이 내게 명한 것을 알았다.
6. 이순(耳順) 60세 - 누가 내게 어떤 거슬리는 말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 다.
7.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欲不逾矩) 70세 -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 여기서 공자님이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세상법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은
공자가 70세가 되니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일 게다.
공자인생살이 애기는 그렇다 치고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 왔을까?
내 자신을 돌이 켜 보니 보잘 것 없는 무식한 놈이 참 오래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 갈 수록 나는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고 요즘들어 부쩍 생각케하는 것이
아버지의 삶이 참 힘들고 고달프게 살다 가셨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마음이 저리고 가슴한구석이 쓰리고 아파 온다,
물론 그런 아버님과 같이 평생을 사신 어머님들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사셨기에 같은 마음이다.
우리 아버님은 1914년에 태어나셔서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사시다 1994년도에 운명을 하셨으니
어쩌면 살만큼 사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더 사셨을 텐데 지병이 있어 돌아 가셨다.
그 것 지병도 운명이라면 명줄이 그만큼이셨을까?
우리 아버님은 시골에 태어 나셔서 아버님이 9살에 돌아 가시고 작은 아버지 댁에서 사셨다고 한다.
그 당시 일제시대이니 농촌을 피폐함은 우리가 배우고 전해 들어서 백성의 고단한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힘들었는 지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어릴적 10대 시절 가끔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 하셨지 만
그저 흘러 들었을 뿐 어떻게 제대로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어린시절 내 아버지의 기억은 주변사람들이 법없이도 살수 있다는 소릴 자주 했었다.
아마도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무보수로 도와주시곤 했다.
그런 아버지의 성품이 우리 가정의 곤궁한 삶에 일조 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천성이 선한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도 별로 말이 없으셨고 잘못이 있어도 매를 들지 않으셨다.
머리가 아프다고 누워 있으면 아버지가 이마를 짚어주시고 많이 아프니 하고 물으시고 찬손으로
이마를 짚어 열을 내리게 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남자들은 집안일은 하지 않던 시절이였는 데
아버지는 겨울이면 아침일찍 일어나셔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다가 가마솥에 덮혀놓고 우리에게
세수하라 하셨고 엄마를 위하여 장도 담그시고 절구방아도 찧어 주시곤 하셨다.
그시절 고춧가루도 가끔 벼도 절구로 찧어서 쌀을 만들곤 하셨다.
그리고 쌀을 빻아 떡을 할 때도 한참을 절구공이로 찧어 대야 만 했다.
우리에게도 마당쓸기와 걸래를 빨아다 방청소를 하라곤 하셨다.
요즘애들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 만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해야 만 했다.
우리집 만 그랬는 지 모를 일이지 만 말이다.
그 시절 대다수의 농촌 어르신들은 일상생활에서도 한복으로 바지 저고리를 입고 생활하셨고
잔치나 경조사 등 행사에 가실때에는 흰색이나 회색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들 가셨다.
우리 아버지는 갈색가죽 중절모에 회색두루마기를 입으셨다.
모자래야 가죽으로 만든 중절모 하나였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검정고무신이나 흰고무신을 신었지 만
검정고무신은 일할 때나 일상에서 신고 잔치나 무슨 행사 나들이 때면 흰고무신을 신으셨다.
아이들도 검정고무신을 신고 간혹 부잣집 자식들이나 운동화를 신고
우리는 운동화는 못신어 보고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검정고무신이 여름에는 땀이차고 덥고 겨울에는 발이 엄청시려웠다.
그 것 검정고무신도 달아 떨어질까봐 새고무신을 사면 한참을 벗어서 들고 맨발로 다니곤 했다.
학교에서 가끔은 새신발을 사서 신고왔다가 잃어버리고 우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누군가가 헌신발을 놔두고 새신발을 신고 가버리는 바람에
신발위쪽이나 뒷쪽에 구멍을 내든지 실로 꿰매어 표시를 해두었지 만 다 소용없는 일이 었다.
실은 뜯어 내 버리고 구멍은 한두개를 더 뚫어서 구별을 못하게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신발종류도 동양고무에서 나온 기차표 검정고무신뿐이어서
너도 나도 다 같은 신발이라 그게 가능했으리라.
그런 유년시절 무섭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와 같이 모처럼 형들과 국민학교 3학년이던 해
4월 초파일에 부처님 오신날 휴일이라고 부여 고란사라는 절이 있고 백제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빠져 죽었다는
낙화암으로 김밥을 싸들고 구경을 가자는 아버님 말씀에 얼씨구나 좋다 하고 형들 둘하고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고 흰고무신을 신고 말없이 터벅터벅 걸어가시는
아버님을 따라 나섰다가 너무나 먼 길을 걷는 바람에 다리가 무척아파 고생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버스타기도 힘들뿐더러 돈도 들고 하니 웬만한 길은 모두들 두다리로 걸어 다녀야 했다.
그런데 집에서 낙화암까지 거리가 50리가 족히 더 되는 길이 였다.
가는 길에 금강을 건너야 했고 강은 어쩔수없이 20원인가를 주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나는 강을 첨보았고 강물이 참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부여에 도착하여 낙화암 절벽을 무서워하면서 내려다 보고 고란사에 들러 고란초가 살고 있다는
샘에서 물을 마시고 나서 큰 다리 구경한다고 금강을 가로질러 세운 커다란 규암다리까지 걸어 돌아 다니며
구경하다가 밤10시가 되어서 집에 도착한 기억이 새롭다.
몇해전 차를가지고 어린시절 추억을 회상하고자 낙화암으로 돌아 구경하면서 그 당시 10세 어린 내가
이먼길을 걸어 와서 부여 이넓은 곳을 걸어다니며 구경을 했다는 것이 새람 내자신이였다는 것이
대단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새삼 아버지가 그리워 지는 것이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서글픔이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 했다.
아버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끼는 중절모를 벽에 못걸이에 고이 모셔 걸어 두고는
어디를 가시면 흰두루마기에 중절모를 꼭 쓰고 나가셨다가는
돌아 오셔서 먼지를 툭툭 털어서 다시 걸어 두곤 하셨다.
아마도 그시절 중년 남성의 상징처럼 쓰고 다녔던 중절모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이 만
그래서 요즘 나이 드신 분들이 중절모를 쓰신 걸 보면 내겐 아버님의 낭만과 추억이 깃들어 진 모자이다.
늘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 어느 날인가는 일하시다가 들어 오셔서 어느 동네 누군가 돌아 가셔서 문상을
가야 한다고 어머니께 두루마기를 꺼내 달라 하시고 중절모를 쓰시고 잘닦아 두었던 흰고무신을 신고
슬픈 표정으로 말없이 길을 나서던 아버지의 축처진 어깨가 어린 내눈에 슬프고 안쓰러워 보였다.
내 나이 6살 때인가는 봄이 시작되는 4월달 쯤 세상천지가 연두빛으로 파릇파릇해지던 시기에
난 나무하러가시는 아버지를 쫄랑쫄랑 쫒아갔다.
아버지가 나무를 한짐다 해서 지게를 지고 오시고, 나는 뒤를 따라 오다가 냇가에 다다랐을 때
물에서 어미 오리와 놀고 있는 오리새끼가 있었다.
참으로 이뻐보여서 아버지 보고 잡아 달라 했는 데, 아버지가 두마리를 잡아 주셔서
집에 가지고 와 미꾸리 등 물고기를 잡아다 주어 키우다 한마리는 죽고
한마리는 비오는 날 비맞으면 죽는 다고 비안맞는 곳으로 옳기다 도망가 버렸다.
그 시절 아버지는 산에서 꿩알을 발견해도 다가져 오면 안된다고 하시고
오리 새끼도 다 잡으면 안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도 아버지는 자연을 해치지 않으시려고 하신 게 아닌가 생각 된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아주 좋으셔서 지게도 만들고 겨울이면 밤에 짚으로 멍석과 메꾸리 삼태기도 만들고
여름이면 산에서 싸리나무를 잘라 껍질을 벗겨 말려 두었다가 광주리 채반 등 못만드는 게 없으셨다.
그걸 만들어 팔면 돈이 되었을 텐데 아버지는 집에 쓰는 것과 누군가 요청하면 한두개 주시고는
많이 만들지는 않으셨다. 뿐만아니라 가마니도 짜시고 왕골을 구해서 왕골 돗자리도 짜셨다.
그런 아버지의 손재주를 부러워 하신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버지 처럼 무엇을 잘만들고
하는 손재주가 있다.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된다.
나 어린시절 우리집에는 서울에 나가 있던 큰 형님이 사오신 큰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4개를 하나로 묶어 놓은 건전지를 매달아 사용하는 라디오 였다.
내가 8살 때이니까 아마도 1968년도인가 그때 저녁 6시45분이면 라디오에서 어린이 극장 손오공이 흘러 나왔다.
성우들이 손오공. 저팔게. 사오정 삼장법사. 요괴목소리를 내곤 하여 들려 주었는 데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 나는 라디오에 귀를 바짝대고 듣곤 하였다.
당시에 손오공의 인기는 아이들 세계에서 대단했었다.
시골에서는 석유를 넣은 등잔불을 켜고 살던 때라 겨울철이면 5시가 넘으면 어두웠다.
방안에 등잔불 켜고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고단한 몸으로 일찍 주무시다 깨신 아버지가 석유닳는 다고
등잔불끄고 얼른 자라고 하셨던 목소리가 귓전에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밤새도록 불켜고 탤레비전을 보아도 불끄고 자라는 사람이 없으니
저녁이면 가끔 그 시절이 그립고 새삼 아버지 그리워진다.
내 나이도 서러운 아버지의 나이가 된지 오래,
우리 아들을 보면서 우리 아들은 나처럼 내가 늙어 죽은 후에
내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무엇이 있기나 한 걸까???
고단하고 힘들었던 유년시절 내게 내 아버지의 고달픈 삶이 쌓여 있던
그 시절의 추억과 아련함이
이 겨울에 더욱 그립고 간절하게 그리워 지는 건 내 마음이 늙어 가고 있다는 건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심사가 어지러운 겨울밤이 깊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네 삶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