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경작 단속현장 가보니
병원·약국 한 번 가려면 배 타고 몇시간 나가야… 배탈약·진통제 등으로 써
한해 수백명 입건 되풀이 "섬지역 순환진료 늘려야"
지난 8일 오전 11시, 전남 목포에서 배로 3시간 걸리는 신안군 어의도(島) 선착장에 목포해양경찰서
마약 단속선이 닿았다. 배가 채 멎기도 전에 다부진 체격의 경찰관 5명이 뱃전에서 뭍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흐린 하늘 아래 거친 파도를 헤치고 온 사람들답지 않게, 경찰관들은 잠깐 숨 돌릴 새도 없이
잰걸음으로 마을에 들어섰다. 멀찌감치 떨어진 산비탈에서 밭을 일구던 노인들이 단속반이 다가오는 걸 보고
부랴부랴 각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단속반원들도 각자 흩어져서 뛰었다.
어의도에 뜬 경찰관들은 양귀비꽃 밀경작 단속반이다. 김채담(46) 계장이 허름한 초가집 문 앞에 도착하자,
주인 A(76) 할머니가 뛰어나와 얼른 문 앞을 가로막았다.
"우째서 왔소?"
"(양귀비)꽃 보러 왔소."
"아, 없당게롱!"
김 계장이 집을 뒤졌다. 헛간에 1m 길이의 무 줄기처럼 생긴 양귀비 아홉 줄기가 걸려 있었다.
줄기마다 눈깔사탕만 한 열매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김 계장이 눈을 부릅떴다.
"으메, 이렇게 큰 다래(양귀비 열매)는 처음 봤네.
(열매에) 칼집도 다 냈구만요.
즙도 벌써 다 묵어 부렀소?"
집주인 A 할머니가 그제야 울상을 지었다.
"실은 우리 영감이 무릎이 아파서 좀 메겼소.
한 번만 봐 주쇼잉.
섬에 약이 워디 있소."
단속반은 양귀비만 압수하고 김씨를 훈방조치 했다.
현행법은 양귀비를 단 한 주만 심어도 처벌하게 돼 있다.
그러나 대검찰청은 별도의 단속지침을 만들어 20주 미만을 재배한 경우는 훈방조치 한다.
시골 노인들을 너무 가혹하게 처벌해선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이날 단속반 경찰관들이 섬 안쪽으로 2㎞가량 더 들어가자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축사가 있는 농가 뒤뜰에 들어서자 한구석에 보라색 양귀비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었다.
집주인 B(63) 할머니가 쏜살같이 경찰관들을 밀치고 뛰어가서 양귀비를 뽑으며 목청껏 '딴청'을 피웠다.
"워따메!
저것이 워째 저그 있디야!"
B 할머니가 재빨리 뽑아낸 양귀비는 빼고 경찰관이 적발한 양귀비만 헤아려도 20주가 넘었다.
김 계장이 "아지매는 형사입건 대상이오" 하며 진술서를 받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우리 소가 요즘 설사를 자주 해서….
나가 잘못 했소."
- ▲ 8일 전라남도 신안군 일대 섬 지역에 양귀비 단속을 나온 목포해경 단속반이 한 개인 주택 앞마당에 자란 양귀비를 수거하고 있다./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양귀비꽃이 만개하는 5~6월을 맞아 밀경작 단속이 한창이다.
해양경찰청은 지난달 전국 규모의 집중단속을 벌여 밀경작 사범 102명을 검거하고 양귀비 4700주를 압수했다.
이달 들어서도 단속은 계속되고 있다. 목포해경 단속반이 이날 어의도에서 압수한 양귀비만 50여 주다.
양귀비는 아편과 헤로인 등을 만드는 원료다.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는 곳은 전남 목포 앞바다의 조그만 섬들이다.
지난달 전국 전체 적발 건수 중 31%(103건)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경찰은 "외딴 섬마을 어르신들이 상비약 삼아 인적이 드문 뒤뜰이나 산밑 텃밭에
양귀비를 몰래 심어 기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날 생선을 먹고 배앓이를 할 때, 평생에 걸친 고단한 고기잡이로 관절염이 도질 때,
이유 없이 설사가 나고 온몸이 아플 때 양귀비 열매 즙을 먹으면 아픈 게 좀 수그러든다는 것이다.
삶아도 먹고 술을 담가 먹기도 한다.
키우던 소나 염소가 배탈이 났을 때도 양귀비를 먹이는가 하면, 심지어 "암에도 좋다"고 철썩 같이 믿는 노인도 많다.
삼육대 약대 정재훈(49) 교수는 "양귀비는 배탈·설사를 멎게 해주고 진통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통증을 못 느끼게 할 뿐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상의 약효도 거의 없다"고 했다.
이날 단속에 걸린 어의도 주민 C(78)씨는 불만이 많았다.
"병원 한번 가려면 몇 시간이고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디…."
김 계장은 "매년 섬 지방을 중심으로 밀경작이 이뤄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노인들 사정이 딱하다고 단속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 경찰의 애로사항이다.
방치할 경우 수집상들이 나서서 섬을 돌며 양귀비를 모을 우려가 있다. 비록 소수지만,
애초에 돈벌이 목적으로 대량 재배하는 이들도 있다. 작년 전남 신안군 임자면 재원도(島)에서는
섬 주민 D(48)씨가 양귀비 700여 주를 몰래 키우다 적발되기도 했다.
대검찰청 마약과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양귀비 밀경작으로 처벌받은 사람 900명 중 60대 이상이 63%,
50대는 27%였다. 열 명 중 아홉 명이 50대 이상인 것이다.
성별로 따지면, 열 명 중 일곱 명이 여성이다.
적발된 사람 900명 중 구속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100주 이상의 양귀비를 기른 사람 112명이 벌금형 처분을 받았고, 6명은 불구속 기소,
나머지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대검찰청 최윤수(42) 마약과장은 "노인들이 약으로 쓰려고 소량 재배한 경우엔 가능한 한 선처해주는 편"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시골 노인들이 매년 수백 명씩 '마약사범'으로 형사 입건되는 상황을 개선하려면
섬 지역에 의료지원을 늘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성대 마약과 조성권(51) 교수는
"무작정 심지 말라고만 할 게 아니라 '대안'을 마련해줘야 한다"며 "섬 지역 순환진료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이날 어의도 단속을 마친 경찰관들은 배로 20분쯤 떨어진 신안군 지도읍으로 이동했다.
한 농가 마당에 빨간색, 보라색 양귀비꽃이 만발해 있었다.
주인을 찾는 단속반원들 앞에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70대 할머니가 나타났다.
김 계장이 양귀비를 세어보며 말했다.
"
7주 키웠네요.
다시는 키우지 마쇼잉.
감옥 가요잉."
할머니는 이가 다섯 개 남은 입을 쩍 벌리며 하소연했다.
"다 가져가는 것이여?
아따, 하나만이라도 남기고 가랑께.
나가 아파,
이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