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레는 그 편지의 복사입니다.
지난 9월1일 새벽에 어머님께서 92살을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작년에 형님들과 만나서 상황을 전했을때에 이미 자기 힘으로 걸어다니지 못하는 형편이였으며 올해에 들어서 급격히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자기 손발도 제데로 움직이지 못하고 가족들의 힘을 빌려 식사를 하게되였습니다.
특히는 5월에 들어서면서 식사를 제데로 드시지못하게되였습니다.
년세가 많다고 병원도 볼것이 없다는 테도였는데 急救로 병원에 모셨다가 感染이 발견되여 입원을 하게되였습니다.
이때까지만하여도 우리 부인이 정성을 다하여 모셔주었으니 그 공헌에 감사의 말을 찾을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한후에도 부인은 매일 병원을 찾아 문병을 하고 신변을 돌보아주었습니다.
경화나 누님도 있지만 저를 포함하여 그사람처럼 돌볼수는 없었습니다.
그후 입원한 병원이 두달을 넘어 입원을 못하는 곳이라 딴 병원으로 傳院을 하게되였는데 좀 먼곳에 있는병원인데 낡은 병원이라 분위기가 안좋았습니다.
이런 병원에서 돌아가시게 하는것은 자식으로서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병원은 일주일만에 나가 미리 찾고 있었던 병원이 비웠다고하여 다시 전원을 하게되였습니다.
그 병원에서 친단을 다시 해 보니 심장이 이제 肥大하여 언제 몸추어도 疑問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확인 되였으며 手足이 움직이지 않는것은 首의 骨이 변형을 이르켜 신경을 마비시켜있으며 고령이라 수술도 곤난하다고 들었습니다.
식사를 제데로 들지못하는 지경이되여 영양분을 보급하는데 点滴으로 하였는데 손목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그레서 중심정맥에 점적을 하여 목숨의 이어가게되였습니다.
이병원에서는 일주일에 한두번은 沐浴도 시켜주었기때문에 어머님도 깨끗하게 지넸으며 비교적 편안하게 지내셨습니다.
8월26일 아침에 제 회사의 오렌종업원이 수술이 잘안되여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장례를 도우느라 돌아다녀 8월31일에 화장을 끝네고난 다음날 9월1일 새볔에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접하였습니다.
병원에 급히 찾아갔더니 새볔 3시반에 おむつの交換을 하였을때에는 아무 변화도 없고 회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5시반에 순회를 할때에 숨이 없는것을 발견하여 5시 54분에 의사가 림종을 확인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빨리 졸하고싶다고 늘 이야기하셨는데 고통은 싫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얼굴을 보니 마침 참자고있는듯 아무 고통을 느끼지않고 돌아가신것을 침작할수있었습니다.
손발을 제데로 움직이지못하고 Bed우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제딴에 이제 어머님께서 편안하게 되셨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마음 어쩐지 놓였습니다.
41년전에 아버지를 보낼때의 느낌과 비슷한 느낌이였습니다.
올해 여기 도꾜는 매일 30도에서 35도 이르는 熱風이 감돌아 밤에도 28도이하로 네려지는 일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부인은 그 더운 날들을 거의 하루빠짐없이 걷고 전차를 타고 병원을 찾아 어머님을 문병하고 돌봐두었습니다.
우리 부인이 딸이 일나가는 관계로 손자를 볼때에는 문병을 못가게되였는데 그때에는 知榮누님이나 京花가 알아서 찾아주었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토록 가족의 도움을 받는 환자를 보기가 힘들다고합니다.
今年の夏はとても暑いので熱射病で亡くなる人々が多く葬儀をするのも気を使います。
장례는 `落合斎場`란 곳에서 차렸습니다.
이제 모친도 92살이라 형제들도 거의 없고 여기板橋에서는 아는 사람들도 없으니 가까운 친척들로만 정성겄 장례를 지렸습니다.
지영누님의 가족들과 경화의 가족 그리고 부인의 친척들로 약 40명을 모였습니다.
스님은 우리 아버님때의 國平寺를 선택하였습니다.
우리 아버님을 보내주신 스님의 손자되는 분입니다.
앞으로 10월17일 부친의 산소에 유골을 납골할 예정입니다.
이번 장례를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 형제의 맏인 鐘起의 유배가 집에 있었는데 그 사연을 알게 되였습니다.
누님의 이야기로는 자기를 화장할때에 鐘起の位牌を抱かしてくれと話をしていたそうです。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바가 없었고 종기의 유배가 있는것에 대하여 아무 의문도 않갖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어머님은 종기의 유배를 아버지앞에서는 감추고 살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에 어머님이 불단을 만들고 아버지의 유배뒤에 종기의 유배를 감추듯이 두고계셨던것입니다.
국평사스님의 이야기로는 자식이 먼저 돌아가면 자식을 위하여 제사는 않한다 그레서 집에서 제사를 않했을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제사바람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셨기에 그 말만을 믿었는데 제 생각이 모자란것을 알게되였습니다.
그레서 이번에 산소에 어머님을 모실때에 종기형의 글자도 함께 묘석에 찍고 유배도 유골과 함께 묘지에 묻을것으로 하였습니다.
아다싶히 1944년 2월25일돌아간 종기의 유골은 도꾜대공습으로 절간이 없어져 찾을수없게되였다고 합니다.
이번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종기를 함께 모실수있게되였습니다.
이제 종기도 제사를 올릴수있게됨샘입니다.
앞으로 제가 일본에서 부모님과 종기의 제사를 올릴것입니다.
세상이 많이 변화를 하고 있으니 어떤변화가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어머님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생각을 않하도 되였습니다만
앞으로 부모님의 산소앞에서 살아남은 우리 5형제가 한자리에 모여 향을 올릴때가 올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하겠습니다.
2010년9월12일 박수홍
우와 같은 글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