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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04년중에 월간 중앙에 연재했던 명리학의 해석과 관련된 내용을 토대로, 조용헌 교수가 자기의 저서인 사주 명리학 이야기중 접신과 입신의 차이점과 무당의 점궤가 어떻게 나오는 가에 대해서 풀이하야 실린 내용중 일부입니다.
接神이란 神과 교접한 상태를 가리킨다. 신이라고 다 신이 아니다. 신에도 급수가 있고 차원이 있다. 교접한 신이 어느 정도 등급이냐에 따라 무당이 되느냐, 예언자가 되느냐, 道人이 되느냐가 정해지는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접신의 상태는 대부분 조상신이 붙은 경우다. 하지만 수도를 해서 에고(자아)를 낮추고 녹일수록 보다 큰 신이 들어오게 된다. 큰 신은 宇宙神일 수도 있다. 성자들과 큰 도인들은 우주신과 합일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능력은 神人合發의 결과물이다.
크게 2가지로 대별하면 사주와 역학을 통해 점을 보는 사주쟁이와 귀신과의 접신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무속인으로 나눌 수 있다.서울 미아리 고개 부근 점집 밀집지역.
점(占)이라고 하는 것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맞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리적 배경은 무엇인가. 앞장에서 그 원리를 3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상응(相應, corresponden ce)의 원리이고, 둘째는 반복(反復)의 원리이고, 셋째는 귀신(鬼神)의 존재이다. 상응의 원리와 반복의 원리는 전편에서 설명했고, 이제 마지막 세번째인 귀신의 존재에 대해 설명할 차례다.귀신의 존재 운운하면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하겠지만, 필자는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귀신이 있다고 믿기까지에는 몇년이 걸렸다. 귀신이 들린 수많은 임상 사례들을 접하면서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점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귀신이 점쟁이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알려줌으로 해서 점쟁이가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맞추는 현상이 벌어진다. 한자문화권의 지적 전통에서는 귀신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 귀신을 이용하여 인간사의 길흉을 미리 예측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그 유명한 예가 도교(道敎)의 방사(方士)들과 신유학자(新儒學者)들의 세계관을 설명한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조선시대에는 ‘태극도설’을 외우지 못하면 선비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비중 있는 문건이다.
여기에 보면 ‘사시합기서(四時合其序) 일월합기명(日月合其明) 귀신합기길흉(鬼神合其吉凶)’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사계절의 순환은 질서와 합하고, 태양과 달은 밝음과 합하며, 귀신은 길흉과 합한다’는 내용이다. 주목할 부분은 ‘귀신합기길흉’이다. 이는 곧 길흉을 미리 알려면 귀신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귀신의 용도가 다름아닌 길흉의 판단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간사라고 하는 것은 길(吉) 아니면 흉(凶)으로 결판나게 되어 있다. 컴퓨터의 원리처럼 둘 중 하나다. 중간은 없다. 그 길흉을 예단하는 방법으로 귀신을 이용하는 전통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길흉을 미리 아는 일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자면 귀신을 알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자기 앞에 전개될 길흉에 대해 관심이 존재하는 한 귀신에 대한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
巫堂은 이승과 저승 연결해 주는 브로커
그렇다면 먼저 접신(接神)에 대해 살펴보자. 접신이란 신(神)과 교접한 상태를 가리킨다. 신이라고 다 신이 아니다. 신에도 급수가 있고 차원이 각기 다르다. 교접한 신이 어느 정도 등급이냐에 따라 무당(巫堂)이 되느냐, 예언자가 되느냐, 도인이 되느냐가 정해진다. 접신한 사람 가운데 가장 확률이 높은 쪽이 무당으로 가는 길이다. 무당(巫堂)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당(黨)이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보다 훨씬 오래 된 당이다. 조선시대의 노론이나 남인과 같은 사색당파보다 훨씬 연원이 깊은 당임에 틀림없다. 어림잡아 5,0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당이 바로 무당이다. 5,000년이라는 한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해 온 당이 무당인 것이다.
5,000년 넘게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품질이 검증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대중들의 끊임없는 수요와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했다고나 할까. 오죽하면 구한말 김제 모악산(母岳山)에서 후천개벽을 외쳤던 강증산도 ‘이 당 저 당 믿지 말고, 무당이나 믿어 보세’라는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다. 힘없는 민초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되지도 않는 공약을 내걸며 립(lip)서비스만 일삼는 ‘이 당, 저 당’보다 병을 치료해 주고 앞일을 예언해 주는 무당이 훨씬 실질적이고 인간적이다. 민초들을 도와주는 변함없는 당이 바로 무당이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단골’이라는 말도 ‘당골’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무당에게 자주 왕래하는 사람이 당골이고, 당골이 단골이 되었다. 무당은 어떤 당인가. 우선 ‘무(巫)자를 파자(破字)해 보자. 무는 공(工) 자가 골격이다. 공자는 그 기본 구조가 심오하다. 하늘(-)과 땅(-)을 중간에서 이어준다(I)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이승과 저승을 이어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공자에 좌우로 사람 인(人)자가 들어 있는 것이 무자이다. 따라서 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주는 브로커가 무당이다. 브로커는 수수료를 받게 마련이다. 무당도 굿이라는 세레모니를 통해 수수료를 받는다.
무당의 당(堂)은 집 당(堂)자니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주는 브로커가 사는 집이라는 의미가 된다. 신령 영(靈)자도 무(巫)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영자를 뜯어보면 무자 위에 입 구(口)자 세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비 우(雨)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무당이 입으로 중얼중얼 외우면 비가 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큰 천재지변이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고, 이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무당이 동원되어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야만 고대하던 비가 왔던 것이다. 무당의 힘으로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는 것, 그게 바로 신령함이다. 무의 기반 위에 영이 있다. 고로 무성(巫性)과 영성(靈性)은 상통한다. 무성을 배제한 영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보통 무당이라고 할 때 그 무당에게 접신된 신은 조상신인 경우가 많다. 신들렸다고 할 때 그 신은 대부분 조상신이다. 왜 조상신인가. 그것은 동이민족의 사생관(死生觀)과도 연결된다. 동이민족은 후손을 통해 영생을 추구했다. 즉, 자식을 낳음으로써 죽음을 극복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집트 사람들이 미이라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 배경에는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사생관이 담겨 있다.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한다고 보는 사생관은 이집트에서 유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예수의 부활까지 이어진다. 인도 사람들은 윤회를 통한 환생을 믿었다. 몸을 바꾸어 다시 태어난다고 보았다. 부활이나 윤회를 통한 환생의 사생관이 아니라 후손을 통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동이족은 조상의 제사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제사를 통해 조상이 다시 후손에게 강림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데 많은 투자를 했다.
제사를 지낼 때 후손의 꿈에 조상이 나타나야 제사를 제대로 지낸 셈이다. 대충 지내면 꿈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고, 껍데기로만 지낸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 후 제삿밥을 못 얻어먹는 경우를 크게 걱정하였다. 조상과 후손의 연결. 이 연결을 위한 의례가 제사라면, 이 연결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족보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분야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족보와 제사다. 우리 나라처럼 족보가 발달한 곳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20대 이상의 가족 분화를 족보라고 하는 두툼한 책으로 만들어 수만명의 집안 사람들에게 돌리는 민족이 어디에 있는가. 족보 편찬사업은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묏자리도 조상과 관련된다. 명당에 조상의 뼈를 묻으면 살아 있는 후손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풍수사상은 한국인 특유의 관습이다. 서구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이 세 분야는 형식적인 의례로만 남아 있을 뿐, 그것이 지닌 본래의 종교성은 점차 쇠퇴해 가고 있다. 묏자리와 족보, 제사는 조상신의 감응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산은 예로부터 巫性이나 靈性의 상징이었다.그래서 기인.달사.도인들은 산에 올라 도를 닦고 무당들은 기도와 굿을 한다.
接神과 入神, 啓示의 같은 점, 다른 점
조상신의 감응을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제는 한국의 지리적 특성이다. 한국은 산이 많다. 전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말은, 전국토의 70%가 ‘기도발’을 잘 받을 수 있는 토양을 갖추고 있다는 말과 같다. 산은 무성의 토대이고, 영성의 바탕으로 보아야 한다. 그만큼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산이다. 단군 이래 수천년 동안 한국 사람들은 정한수를 떠 놓고 산신이나 칠성님·용왕님에게 공을 들이던 민족이다. 그 수천년 공들였던 전통이 어디로 가겠는가. 공들였던 정보는 DNA에 저장되어 후손들에게 유전되어 온다. 한국의 무속 인구가 20만명이라는 통계도 있다. 요즘 사람들은 무당이라고 하면 벌레 씹은 얼굴로 쳐다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이를 잘 활용하면 영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풍부한 영성이야말로 한국 사람들이 지닌 원초적 본능이요,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성과 감성 위에 영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성과 감성의 변증법적 종합이 영성인 것이다. 앞으로는 영성이 주목받는 시대가 온다.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자본은 이 영성이다. 적어도 5,000년 이상 쌓아온 두터운 지층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무성을 영성으로 승화시킬 때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그 자질의 핵심 요건은 이타행이요, 봉사정신이다. 이것이 결여되면 무성에서 끝나고, 갖추면 영성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우리가 말하는 접신과 서양에서 말하는 계시의 차이도 이것이다.
계시받았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신과 교접된 상태다. 바둑 9단의 경지를 입신(入神)의 경지라고 부른다.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으로서 입신의 경지는 대단히 고준한 경지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접신은 무엇이고, 입신은 무엇인가. 입신과 접신은 무엇이 다른가. 마찬가지로 접신과 계시는 무엇이 다른가. 같은 것 아닌가. 그러나 접신은 천한 뉘앙스로 다가오고, 입신과 계시는 신성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따지고 보면 계시나 접신이나 입신이나 모두 신과 교접된 상태다.
바둑의 이창호도 입신한 사람이고,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천하 제일 끝내기의 실력은 바둑신과 접신된 상태에서 나오는 내공이라고 본다. 바둑신과 접신되지 않으면 어떻게 이창호 같은 괴물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베스트셀러를 낼려면 문장신과 접신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유명한 소설가들도 대부분 문장신과 접신된 사람이라고 여긴다. ‘토지’의 박경리, ‘장길산’의 황석영, ‘혼불’의 최명희, ‘태백산맥’의 조정래, ‘사람의 아들’의 이문열 등이 그렇다.
이들은 조상 중에 문장을 잘 하는 조상이 분명히 있었다고 판단된다. 조상이 쌓아놓은 문장의 실력과 현생의 내가 단련한 노력이 접합됨으로 해서 시너지 효과를 보았고, 그 시너지 효과에 바탕하여 작품들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물론 문장신과 접신되지 않고도 소설을 쓸 수 있지만 뛰어난 작품을 남기기는 어렵다고 본다. 필자 같은 경우가 바로 그렇다. 문장신과 접신되지 않아서 이런 수준에서 헤매고 있다. 제발 접신 좀 되었으면 좋겠다.
바둑이나 소설뿐만 아니라 기타 다른 분야에도 이 법칙이 적용된다. 평범한 수준은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비범한 경지는 조상신과의 합작이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가 그동안 많은 사례를 관찰한 결과다. 접신과 계시, 접신과 입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접신은 자의보다 조상신이라고 하는 타의가 많이 개입된 결과다. 자의반 타의반 중에서 타의가 7대 3으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결과다. 그래서 능동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다. 조상의 의지가 보다 많이 작용한다. 그것이 흠이다.
입신은 이와 반대다. 조상보다 나의 의지가 많이 작용한다. 능동적이라서 자유가 많다. 그것이 장점이다. 접신(接神)과 계시(啓示)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접신이 조상이라면 계시는 조상을 벗어난 다른 범주의 신일 수 있다. 즉, 가족의 범주를 벗어나는 신이라서 스케일이 더 클 수 있다. 스케일이 더 크다는 것은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쪽으로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조상신 중에서도 스케일이 큰 신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입신과 계시도 다르다. 입신의 경지는 능동적인 자의가 많이 작용한다면, 계시는 들어온 신에게 철저히 복종해야만 한다. 완전히 수동적이다.
점을 보는 방식은 점쟁이마다 제각각 다르다.얼굴 사진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사진점쟁이가 굿당에 사진을 붙여놓고 점을 보는 모습.
기억에 남는 무당 ‘사진점쟁이’
필자는 무당을 연구하기 위해 많은 정력과 시간, 그리고 돈을 투자했다. 지난 15년 동안 대략 300여명의 무당과 인터뷰했으며, 여기에 투자한 경비(복채 포함)만 해도 계산해 보니 대략 6,000만원 정도 지출한 바 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무당은 ‘사진점쟁이’로 불리는 무당이다. 1990년대 초반 전주에는 사진점쟁이라는 점쟁이가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 점쟁이의 첫번째 특징은 앞일을 잘 맞춘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점치는 공법이 사진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사진점쟁이는 점을 치러 온 고객의 사진을 요구한다. 고객이 가져온 증명사진이나 가족 사진을 일단 물 속에 집어넣는다. 즉, 대접에 물을 받아 그 대접 속에 사진을 넣으면 물 위로 그 사람의 전생(前生)이 투사된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과거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시한다. 물론 물 위에서 전생이 투사되는 장면은 옆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사진점쟁이 본인에게만 보이는 장면이다. 사진점쟁이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신통력도 신통력이지만 그 공법에 있었다. 사진을 물에 띄워 점을 보는 방법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사진을 휴대하고 가서 3만원을 내고 접수하였다. 방안에는 대략 열댓명 정도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중년 남자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내 앞 순서의 손님도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이 남자는 언뜻 보기에 대기업체의 간부처럼 보이는 외모였는데, 사진점쟁이는 이 남자를 보자마자 “깡패 총장이 오셨구만”하고 반말로 내뱉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조폭 두목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8년 동안 형무소에 있다 출소한 지 두달만에 점을 보러 온 것이었다. 결혼해야겠는데 현재 만나는 여자가 과연 궁합이 맞아 오래 해로할 수 있는지 보러 온 것이었다.
“당신은 전생부터 부하를 많이 데리고 다녀서 금생에도 먹을 것을 전부 부하들이 가져다 주어 가만히 있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 여자는 많은데 정작 자기 여자는 없는 팔자네.”
그는 조폭세계에서는 내로라하는 주먹이었지만 점쟁이 앞에서는 얌전한 손님이었다. 반말로 내뱉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 다음 순서는 30대 후반의 아주머니였다. 사진을 물에 넣어 보더니 “남편 바람 피워 왔구만”하고 던진다. 아주머니는 그렇다고 시인한다.
“이 집은 남편이 바람을 피워야 사업이 잘 되네. 참 이상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구만. 바람을 피우지 않으면 돈이 없어지니….”
바람을 피워야만 남편의 사업이 잘 된다! 그것을 긍정하느냐 않느냐는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겠지만, 어찌됐거나 필자는 세상에 그런 이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다음에는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는 필자를 오라고 하였다. 필자는 그날 수염도 일부러 깎지 않고 옷도 허름한 잠바를 입고 갔다. 점을 치러 갈 때는 실업자처럼 허름한 차림새로 가야만 점발(占發)이 잘 받는다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실천한 것이다. 잘 나가는 사람처럼 화려하게 하고 가면 왠지 점발이 잘 받지 않는다. 아마도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다. 점쟁이들은 허름해야 동질감을 느껴 점괘가 술술 나오는 법이다. 과연 필자에게는 뭐라고 할 것인가. 필자의 사진을 넣더니만 대뜸 하는 말이 “수염이 허연 노인이 오셨구만요!”하면서 공손하게 첫마디를 꺼냈다.
“아니 이렇게 새파란 사람더러 노인이라니요?”
“뒤에 수염이 허연 노인이 서 계시네요!”
무당들로부터 내 뒤에는 허연 노인이 서 계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사진점쟁이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연 노인은 짐작컨대 나의 고조부인 것 같다.
심령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이 고조부는 나의 보호령이다. 어디를 가나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인 것이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파일을 지워도 백파일(back file)은 남게 마련이다.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의 일부는 백파일처럼 남게 마련인데 대체적으로는 후손의 등 뒤에 스크린처럼 떠 있는 수가 많다.
이 혼령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무당들은 그 사람의 등 뒤에 떠 있는 보호령을 먼저 보게 마련이다. 보호령이 어느 정도 등급이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 필자의 경우는 수염이 허연 노인이기 때문에 비교적 대접을 잘 받는 편이다. 고조부는 불교의 윤회전생 이론에 따르면 필자의 전생에 해당한다. 유교적 관념에 따르면 필자의 선조다. 조상이 그 집안에 후손으로 다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돌고 돈다. 그래서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선대에 악업을 많이 쌓아 놓으면 후대에 뒤끝이 좋지 않은 경우를 여러 번 목격하였다.
이집트의 부활 이론에 따르면 고조부의 부활이 곧 현재의 필자인 것이다. 포인트만 다르지 결국 모두 같은 맥락이다. 고조부가 살았던 인생이 현생의 필자 인생의 골격을 이룬다. 즉 고조부가 장사를 했으면 후손인 필자도 사업을 하는 수가 많다. 전생(고조부)에 보부상을 했다면 금생(나)에는 오퍼상을 하는 식으로 포장지만 약간 바뀐다. 고조부가 살았던 기본 틀에 금생에 필자가 노력하는 요소가 가미되어 인생이 진행되게 마련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중학교때 성적표를 보는 것과 같다. 중학교때 성적표를 훑어보면 고등학교때 성적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전생이 중학교라면 현생은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필자는 사진점쟁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그러자 사진점쟁이가 접수 보는 아가씨를 불러 “이 손님에게 받았던 복채를 다시 돌려드려라!”하고 지시하는 것 아닌가. “아니 왜 돌려주려 하느냐. 이것도 노동의 대가이니 받아라”하고 필자가 사양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절대 받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50대 중반이 넘으면 유명한 선생이 되니 그때가 되거들랑 내 자식들 좀 잘 부탁한다!”는 부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복채를 다시 돌려받은 적이 있다. 필자가 수많은 무당을 만나 보았지만 복채를 다시 돌려받기는 처음이었다. 화대와 복채는 깎는 법이 아니라는데, 필자는 치사하게도 복채까지 면제받아보는 경험을 해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