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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거에게 박수와 갈채를
-한국의사시인회의 뿌리를 찾아서
히포크라테스는 인체를 구성하는 체액을 혈액(Blood), 점액(Phlegm), 황답즙(Yellow Bile, Chole), 흑담즘(Black Bile, Melancholia)의 네 가지로 분류했다. 이 체액들의 조화가 깨지면서 병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우울한 느낌인 멜랑콜리아(melancholia)는 검은(melan) 과 담즙(cholia)의 합성어인데, 흑담즙이 과도하게 증가하여 생긴 병적 현상으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멜랑콜리를 애도와 구분해서 설명했다. 애도는 상실의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대체 가능한 대상을 찾아 사랑을 옮겨가는 과정이지만 멜랑콜리는 상실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슬픔을 간직한다는 개념이다. 본인을 더 압박하고 상처를 주면서까지 자신에게 동일시하고 융합시킬 때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애도는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극복하는 건강한 작업인 데 반해 멜랑콜리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상실에 대한 방어기제로 애도를 강조하는 반면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멜랑콜리를 더 중요시하기도 한다. 우울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질 수 없고 모든 창조는 우울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멜랑콜리는 예술가들의 필수 조건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멜랑콜리거를 예술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설령 예술적 취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대상이 바로 예술이다. 하지만 지치고 피곤한 의학의 현장에서 위로가 되는 것 또한 예술이다. 더군다나 문학을 가까이 하고 시를 쓰는 의사들이라면 애도보다는 멜랑콜리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와 상실에 대처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하다. 멜랑콜리 기질이 다분한 자, 의사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멜랑콜리거가 아닐까.
한국의사시인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우리나라에 현대식 의학교육이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으니, 한국의사시인회의 태동은 자연스러운 일일 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들의 문학적 행보에 비해 늦게 싹틔운 편이다.
2012년 6월 창립총회를 열며 정식활동을 시작한 한국의사시인회는 현재 약 40여 명의 시인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시 쓰는 의사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지만 아직 전체 시인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사시인회는 매년 문학기행과 시낭송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창립 이래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화집을 발간했다. 창간호 ‘닥터 K'부터 제10집 '개화산에 가는 이유'까지 공동 사화집을 중심으로 한국의사시인회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한국의사시인회가 결성되고 처음으로 발간한 <닥터 K>는 의사와 시인 사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두 종류의 시인이 있다. 하나는 교육과 실습에 의한 시인, 우리는 그를 존경한다. 또 하나는 타고난 시인,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B,W 에머슨의 말처럼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詩를 사랑하는 의사들이 함께 모인 것이다. 아직 시는 탄생하지 않았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서문처럼 누구도 한국의사시인회의 운명을 장담하지 못했다.
출간을 기념하는 모임에서도 직업인으로서 삶과 문학인으로서 고뇌에 대해 많은 의견이 오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고 답습하지 못한 길이었다. 우리는 밤늦도록 맥주를 들이켜며 멜랑콜리거의 사명에 대해 결론 없는 의견을 나누었다.
실핏줄 같은 병력들을 모아
동맥의 바코드로 정리하고
오늘도 그는 무당처럼
주문을 외워댄다
울무에 걸린 들쥐들이
바르르 몸을 떤다
K가 고양이처럼 발광한다
K가 쓰디쓴 토물을 닦고 있다
K가 흩어진 간을 주워담는다
-김연종 「닥터 K를 위한 변주」부분, 『닥터K』 2013년 <황금알 >
한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3월이 되면 모든 학교가 일제히 개학한다. 의과대학을 막 졸업하고 의사로 첫발을 내딛는 인턴이나 전문 과목을 선택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전공의들도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3월이 지나고 목련이 벙글기 시작한 4월이 되면 병원은 또 한 번 진통을 겪게 된다. 적성이 맞지 않는 과를 선택했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전공의들이 결국 병원을 떠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떠나는 전공의들을 애잔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누군들 힘들게 공부해 어렵게 선택한 병원을 떠나고 싶겠는가. 그 애타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어떤 이유에서든 의사로서 사명감까지 잃어버려서는 안 되리라. 시인이 고뇌에 찬 목소리로 가만히 속삭인다. '환자가 우리들의 경전이다' 그 조그만 외침에 우리는 깊게 머리 숙일 수밖에 없다. 의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레지던트 수련 중에
스트레스 견디지 못하고
병원을 떠나는 전공의들
4월초 담장마다
목련 두근두근 벙그는데
떠나는 이들의
까만 눈망울이 젖어있다
유구무언」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우리들의 경전이다
-김완 「환자가 경전이다」 부분, 『환자가 경전이다』 2014년 <황금알>
"해리슨 내과학 교과서의 서문에 적혀 있는 'medicine is art of science' 라는 글을 보고 크게 공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생명 없는 물체를 다루는 다른 과학 분야와는 달리 의학은 생명과 정신을 소유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단순한 과학이 아니라 예술적 과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사와 시인은 이질적 결합이 아니라 궁합이 잘 맞는 커플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문에 밝힌 김세영 시인의 소회처럼 여전히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찾아 꾸준히 질문을 이어 나간다.
제3집 출간기념회는 부산에서 개최했다. 시와 사상 발행인인 김경수 시인과 편집 주간인 박강우 회원의 도움으로 부산 지역 시인들과의 교류의 장이 펼쳐졌다. 우리는 의학과 문학의 만남을 기리며 문학의 궁극을 향해 늦은 밤까지 떠돌았다.
나는 또 어디로 흘러갈까요 밤새 나를 보살폈던 책갈피는 팔다리가 마비돼 천장을 둥둥 떠다녀요 잠에서 깨어나 보니 우울과 망상의 찌꺼기들이 라면가닥처럼 엉겨 붙어 있어요 불안을 베개 삼아 페소아가 잠들어 있고 상실의 시대를 지나온 하루끼가 쓰다 만 편지처럼 서성거려요 담장 너머 저만치엔 안개 자욱한 욕망이 보이고요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새로 생긴 절망이 나를 노려보고 있어요 나는 또 어디로 흘러갈까요
-김연종「카우치에서 길을 묻다」 부분, 『카우치에서 길을 묻다』 2015년 <시산맥>
언어의 궁극을 향한 발걸음은 지속된다. 이경철 문학 평론가는 제4집 <가라앉지 못한 말들> 해설을 통해 "언어의 꽃밭을 거니는 감동을 느꼈다. 65편의 시들을 접하면서 이 아름다운 시어를 뽑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까. 왜 이렇게 피 말리는 고통에 몸과 마음을 맡길까 생각하게 된다"며 순수와 열정, 그리움 등이 한밤중에 혹은 첫새벽에 시인들에게 영감을 부여하고 시에 귀의하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사시인회의 이런 꽃밭이더욱 다채롭고 그윽하게 피어오르길 빈다고 말했다.
제4집 출간기념회는 의료계및 문단의 내빈들을 초청하여 문단과의 교류를 확장하고자 노력했다. 의학과 문학의 융합, 새로운 상상력이말로 한국의사시인회를 더욱 다채롭고 그윽하게 피어오르게 하리라는 믿음은 여전하다.
가라앉지 못한 것들
가라앉지 못한 말들
목까지 잠겨
목까지 잠겨
아니,
조금만 조금만 더 잠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출렁이는 경계에서
더 이상 허공을 떠돌지 않을
언어에
- 유담 「섬」 부분, 『가라앉지 못한 말들』 2016년 <시담 >
문자로 기록된 처방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건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진료 때마다 챙겨야 했던 수많은 필름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소통이 처방전이라면 그것은 시와 독자 사이 소통의 양식과도 무척 닮아있다. 환자들을 대할 때 의사의 내면엔 무수히 많은 층위의 사유가 진행된다. 그것이 질환과 환부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이 '처방전'이다. 그게 아픔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가 말해지는 형식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황학주 시인은 <그리운 처방전>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처방전을 받아 든 할머니는 점심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 못 할 고민을 털어놓고 오랜 시간 상담받고 단돈 1500원을 내기에는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품속에 꼬깃꼬깃 아끼고 아꼈던 거금을 젊은 의사에게 모두 드린다. 이제 할머니의 마음은 홀가분하다. 이를 받아든 의사의 마음이 복잡해진다. 할머니를 대접해도 시원찮은 판에 촌지라니.
이 빠진 할머니 입을 손으로 가리고
감사하다고,
줄 것도 없고
점심이라도 사 드시라고 꼬깃꼬깃
품속 만 원짜리 한 장
오래되고 푹신한 냄새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박권수 「처방전」전문, 『그리운 처방전』 2017년 <시인동네>
눈물이 사라졌다. 세상은 더욱 각박해졌고 눈알은 빡빡하다. 눈물과 함께 웃음도 사라졌다. 세상인심은 빠르게 변하고 점점 말라간다. 그래서일까. 인공누액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의료계가 처한 현실도 마찬가지다. 의료제도에 대한 모순은 여전하다. 환자들의 불신은 오히려 더 커졌고 의사들에 대한 반감도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 소통을 회복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은 아닐지라도 빡빡한 세상에 인공누액 같은 처방이 나왔다.
소통의 수단인 언어에도 결핍이 존재한다. 바다라는 말은 바다를 바다라고 표기된 약속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소통이 가능하다. 환영이나 환청을 적확한 언어로 표시할 수 없듯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는 안구건조증처럼 삐걱거린다. 먼 이국에서 모국어를 쓰고 들으면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는가?
언어에도 냉기가 있다.
그러니까 실패한 단어를 만졌기 때문이다.
언어가 차가운 꽃이 되어 나무의 꿈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꽃을 품고 모국어母國語의 잎을 피운다.
문장도 나룻배가 되어 나무 앞에 정박한다.
바다라는 언어에는 물은 없다. 단지 그렇게 지시할 뿐이다.
먼 이국에서 모국어를 쓰고 모국어를 읽을 때
왜 우리는 눈물이 나는 걸까?
-김경수 「언어의 냉기 冷氣」, 부분『왜 우리는 눈물이 나는 걸까?』 2018년 <시인동네>
"시와 의학은 영혼과 육체의 치유가 결코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의술의 목적인 치유와 예술의 목적인 구원 역시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따라서 위대한 문학가는 메스를 들지 않는 위대한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집을 내면서 덧붙인 말이다. 그리고 시 한 구절에 얼마나 많은 고뇌가 담겼는지를 에둘러 말한다. 손 시린 겨우내 담금질한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새롭게 선보이는 시인들의 넋이 찍힌 '무늬'들을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라고.
가만히 표제작을 펼쳐 본다. 시의 제목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 같아서다. 시인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달과 둥글어지다'의 이미지가 자꾸 겹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둥글어진다는 것일 테고 둥근 것을 상상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질 테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달이 떠올랐을 테고….
당신은 당신의 달을 걱정하는 말을 하고
둥그러워 둥그러워진 달이야,란 말을 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둥근 것을 묘사할수록 기분은 좋아져
달은 낮게 있어서 붉어지는 거고
높이 떠 있을수록 밝아지는 거고
자꾸만 달이란 말이 찻잔 위에 올라왔다
모두 자신의 달을 호호 불어내며
가을에 구부러진 말을 펴고 있다
-한현수 「둥그러워 둥그러워진 달이야,란 말을 들었다」 부분, 『자꾸만 달이란 말이 찻잔 위에 올라왔다』2019년 <현대시학>
2020년의 세상은 온통 블루다. 하늘과 바다는 늘 푸른데다 연초부터 이어지는 코로나19는 삶을 헤집어놓은 채 평온한 일상을 기약 없이 뒤로 물렸다. 우리의 마음도 온통 블루다. 그런 와중에 여덟 번째 사화집 <코로나19 블루>가 출간됐다. 예년 같으면 조촐한 출간 모임이라도 가졌을 텐데 이번엔 영락없이 우편으로 책을 받아야 했다.
코로나19로 변한 세상의 풍경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호모마스크스 시대의 도래를 예견한 것인가.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게 더 이상하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악수 대신 손등 인사를 하고 쉴 새 없이 손을 씻는다.
모든 스포츠는 관중 없이 치러지고 온라인으로 원격 수업을 한다. 그토록 인파에 가득 찼던 장소들이 유적지처럼 황량하게 변해버렸다. 모든 사람을 온라인이라는 가상 세계에 끌어들여 놓았던 이 혹독한 봄을 먼 훗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독을 품고 떠도는 소문일 뿐
감춰진 것은 좀체 드러나지 않으며
보이는 것도 전부가 아니다
이즈음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21세기의 거리에 마스크만 걷고 있다
-조광현 「코로나19 블루」 부분, 『코로나 19블루』2020년 <현대시학>
비대면 총회를 통해 총회를 하고 비대면으로 사화집을 발간하고 역시 비대면을 통해 출간기념회를 개최한다. 두어 평 진료실에 갇힌 말들을 한데 묶어 다시 세상에 내보낸다. 어느덧 아홉 번째다.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시집을 통해서만 서로의 안위를 확인한다. 서로 대면하지 못한 채 문학적 교류를 지속하고 있지만 글로서라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코로나 귀로나 봄은 곁에 있고 입에 걸린 마스크는 필수품이 되어버린 2021년, 2평 진료실에 갇힌 말들을 나열해본다. 청진기로 들어오는 호흡, 액정이 읽어내는 체온들 문전박대당한 해시태그는 38C를 넘어서고 복면으로 가린 불안이 불러온 춘곤증은 늘어진 청진기를 깨우는 오후 4시"는 코로나 시절의 진료실 풍경이다.
5월24일, 2평 진료실에 환자를 기다리며 졸고 있는
갱년기를 보았네 왼손엔 내시경을 오른 손엔 설압자.
재윤이의 기침을 뽀로로로 달래며, 콧물 가래 중이염을
겨냥한다 사랑점도 시아의 맑은 눈동자에
키를 낮춘다 저 멀리서 MMR을 째려보는 서준이의
사팔눈이 심장을 찌른다 사랑을 들고 온 시윤이가
손에 쥐어준 츄파 춥스
- 송명숙 「투명한 진료실」 부분, 『진료실에 갇힌 말들』 2021년 <현대시학>
그리고 마침내 10집을 발간했다. 한국의사시인회 제10집 <개화산에 가는 이유> 출판기념회 겸 문학 강연이 6월 25일 인사동에서 열렸다. 올해는 3년 만의 재회라 모두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참석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코로나가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은 데다가 만남 없는 모임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왠지 씁쓸한 기분이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개화산은 시인의 진료실과 가까운 야트막한 산이다. 그가 정상에 올라 겨울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는 죽은 듯 기척이 없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나무, 그저 흔들리며 눈을 감고 있는 나무, 나무를 본 것인지만 실은 자신의 내면을 관찰한 것이리라. 인간이라는 나무는 슬프고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아니던가.
겨울나무를 보러 개화산에 간다.
죽은 듯이 서 있는 나무,
도무지 되살아날 희망이 어디에도 없는 나무,
찬바람에 그저 흔들리며 눈을 감고 있는 나무.
(중략)
다시 겨울나무를 보러 개화산에 간다.
이제 보니
나는 너를 닮았다.
개화산 사계절 나무들이 모두 내 모습이다.
-홍지헌 「개화산에 가는 이유」 부분, 『개화산에 가는 이유』2022년 <지혜>
지금까지 사화집의 표제작을 중심으로 한국의사시인회의 실체를 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 뿌리를 찾기는 요원해 보인다. 의사 시인이라는 단단한 카테고리로 묶여 있지만 그들의 활동 분야와 시적 취향은 굉장히 다양하다. 서정에 충실한 시인, 모더니즘을 표방한 시인, 우주와 철학에 관심을 갖는 시인, 의료 현장을 다루는 시인까지.
그들은 대부분 동네 의사의 명함을 간직한 채 시를 쓴다. 의사로서 삶을 살다가 문학에 대한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공부한 경우가 많다. 그들을 시적 지향점이나 문예사조로 한데 묶기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의사 시인들을 소개하기 위해 사화집에 참여한 시인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편의상 출신지 혹은 출신 대학별로 분류했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세란 문학회와 행림 문학회를 주축으로 하는 수도권 출신은 마종기 김춘추 신승철 유담 정의홍 황건 홍지헌 김응수 서화 김기준 송명숙 시인 등이다. 문예지 <시와 사상>을 중심으로 부산 경남북 시인들은 허만하 이원로 조광현 김세영 박언휘 김경수 박강우 이규열 허준 최예환 등이고, 문학 단체인 '작가회의'를 중심으로 한 광주 전남북 출신은 장원의 김현식 김대곤 나해철 김완 서홍관 한현수 김연종 한경훈 윤태원 등이다. 필내음 문학회를 필두로 한 대전 충남북 출신은 송세헌 이용우 주영만 김승기 권주원 박권수 김호준 시인 등이다. 이들이 한국의사시인회의 뿌리이고 열매다.
지역 연고에 따라 네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보았지만 학풍이나 시풍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적 취향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뿐, 전공과목이나 소속 대학과도 무관하다. 자기만의 선명한 색깔에도 행간에 스며있는 멜랑콜리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잘 아시다시피 의사의 일상은 그리 한가로운 것이 아니고 그 틈새 시간에 시를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전국의 훌륭한 의사 시인들이 밤잠을 밀어두고 섬세한 인간애를 시의 행간에 심어 놓은 것을 살필 기회가 왔습니다. 과학자인 의사가 어떻게 환자라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을 함께 아파하고 또 함께 눈물 흘리는지를 볼 기회가 왔습니다. 더불어 의사라는 인간이 목석이 아니고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지키며 불완전한 자신을 깨워 이겨나가는지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거주 중인 마종기 시인이 첫 사화집 서문에 보내온 축하 메시지다.
진료 현장의 순간순간은 시로 쓰여지고, 그렇게 태어난 멜랑콜리의 시들은 다시 진료 현장으로 들어가 불편한 삶을 일으켜 세운다. 몸을 치료하는 의사와 마음을 치료하는 시인은 결국 하나가 된다. 진료와 시작(詩作)을 병행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멜랑콜리거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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