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집 제17권 / 서(序)
밀성박씨가승 서(密城朴氏家乘序)
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년) 6월 3일 ~ 1879년(고종 16년) 12월 29일
[수(壽) : 81세
강한(江漢)의 지류는 타잠(沱潛)이 되는데, 그 굽이는 다시 강한으로 돌아간다. 대체로 수원(水源)이 큰 것은 그 물결이 꼭 넓은 곳에 이르면 범람하여 갈라져 나가는 것은 형세상 마땅히 있을 법하니 이와 같지 않다면, 어찌 큰 물결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나눠진 것이 끝내 나누어지지 않고 결국 합쳐진다면, 또한 원래 처음의 물일뿐이다.
일찍이 씨족으로 살펴보건대, 박씨(朴氏)가 동방에 있는 것은 마치 강한과도 같다. 그중 밀성(密城)의 관향이 또한 가장 번창하므로 역중(域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보첩(譜牒)을 융통하지 못하고 각기 그 근본을 근본으로 하고, 각기 그 친한 이를 친히 한다. 이는 나약하고 단출한 씨족이 관향이 동일한 사람들을 완전히 수합하는 것과도 같지 않으니, 박씨는 간혹 이를 아쉬워한다.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족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씨족을 수합하기 때문이요, 씨족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서로 친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박씨의 씨족이 크다 하나 참으로 그 족보를 함께 할 수 있지만 과연 그 친목까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친목을 같이 할 수 없으면서 그 족보만 같다면, 그것이 씨족을 수합할지 알 수 없습니다.
무릇 원래 천만인도 본래 한 몸입니다. 성인이 백세라도 친속을 같이 하고자 않는 것은 아니지만 복제(服制)를 만들 때는 사세(四世)에서 그쳤으니, 행여 마음으로는 한량없는 것은 아닌데 정의(情誼)에 끝이 있을까 해서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박씨의 족보는 참으로 씨족을 수합하는 의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조상을 높이는 일은 고려의 시중공(侍中公)에 이르고, 그 종족을 수합하는 일은 13세 찬성공(贊成公) 이하부터입니다. 그리고 무릇 친히 이미 10세가 되었다면, 복이 다하기를 두 번이나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하향(下鄕)한 조상을 같이 하기 때문에 봄가을 상총(上塚)한 이래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족보는 족보가 아니라 곧 한 덩어리의 ‘돈목(敦睦)’입니다. 세상에서 그 계첩(系牒)을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찌 이를 취하여 법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어찌 일찍이 관향은 동일한 문서에서 멀어지고자 합니까. 은혜를 미루는 도리는 반드시 가까운 데로부터 비롯되니, 가까운 사람이 가까워지면 먼 사람도 가까워질 수 있고, 가까운 사람을 가까워 하지 않고 지나쳐서 먼 사람을 가까워 하면 되겠습니까.
이제 박씨 일파(一派)는 이미 가까운 사람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가령, 밀성(密城)을 관향으로 한 박씨에게 매파(每派)마다 각자 그 가까운 사람을 가까이 해서 회통(會通)하도록 한다면, 은연중에 함께 흐르는 강한이 되리니, 그 성대함이여.”라고 하였다.
박씨의 선세(先世) 중에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낸 분이 있었다. 자손이 이 때문에 호남에서 살았으니, 마치 미소씨(眉蘇氏)가 미도(味道)에서 비롯된 것과 같고, 창평현(昌平縣)은 곧 그 고향 마을로 문행과 문벌이 지금도 유명하다고 한다. 박춘석(朴春錫)이 정진에게 서문을 상의하므로 삼가 이를 써서 돌려준다. <끝>
[註解]
[주01] 강한(江漢) :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를 말한다.
[주02] 타잠(沱潛) : 타수(沱水)와 잠수(潛水)를 말한다. 《서경》 〈우공(禹貢)〉에 “화산의 남쪽과 흑수에 양주가 있다. 민산과 파산에 이
미 곡식을 심으며, 타수와 잠수가 이미 물길을 따른다.[華陽黑水. 惟梁州 岷嶓旣藝, 沱潛旣道.]”라고 하였다.
[주03] 찬성공(贊成公) : 박신생(朴信生)을 말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부친은 박침(朴忱)이다.
1429년(세종 11) 첨총제(僉摠制)에 임명되었고, 이어 경창부 윤(慶昌府尹)ㆍ호조 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으며, 1434년
(세종16)에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437년(세종19)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역임하였고, 1440년(세종22)에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주04] 상총(上塚) : 묘소가 잘 있는지 살펴보러 간다고 하여 성묘(省墓)ㆍ전묘(展墓)ㆍ상묘(上墓)ㆍ상분(上墳)ㆍ배분(拜墳)ㆍ배소례
(拜掃禮)ㆍ소묘(掃墓)ㆍ전소례(展掃禮)라고도 한다.
[주05] 미소씨(眉蘇氏)가 미도(味道)에서 비롯된 : 미소씨는 미주(眉州)의 소씨를 말하는데, 주로 소식(蘇軾)을 이른다.
또한 미도는 소미도(蘇味道, 648~705)를 말하는데, 소순은 족보 서(序)에서 “장사 소미도가 미주 자사로 있다가 벼슬자리에 있으
면서 죽었는데, 한 아들이 미주(眉州)에 남았다.
미주에 소씨가 있게 된 것이 여기서 비롯되었다.[長史味道刺眉州, 卒于官, 一子留于眉. 眉之有蘇氏, 自此始.]”라고 하였다.
《唐宋八大家文鈔 卷116 族譜引》
[주06] 창평현(昌平縣) : 현재 전남 담양(潭陽)을 이른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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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密城朴氏家乘序
江漢之枝流爲沱潛。其委復歸于江漢。蓋水源洪大者。其波及必廣。汎濫別出。勢所宜有。不如是。何足以爲巨浸乎。及其分不果分而終於合。則又只是元初水也。嘗以氏族驗之。朴氏之在東方。猶江漢也。密城之貫。又最蕃昌。故其散在域中者。譜牒不能融通。各本其本。各親其親。不若孱門單族盡蒐同貫之爲者。爲朴氏者蓋或病焉。幸州奇正鎭曰不然。所貴乎譜者。以收族也。所貴乎族者。爲相親睦也。今朴氏之族雖大。固可同其譜也。果可使同其睦乎。不能同其睦而同其譜。未見其爲收族也。夫元元本本。千萬人本一身。聖人非不欲百世同親。而爲之服也。則止於四世。儻不以心無竆而情有限歟。然則今日朴氏之譜。眞可謂得收族之義也已矣。其尊祖也。至於高麗侍中公。其收宗也。自十三世贊成公以下。夫親已十世則服盡者逾再矣。然以其同下鄕之祖也。故自春秋上塚以下。歡欣憂慽。無不同焉。是譜也非譜也。乃一塊敦睦也。世之欲修其系牒者。盍取而法諸。雖然亦何嘗欲簡於同貫之疎者乎。推恩之道。必自近者始。近者近。則遠亦可近。不近於近。而徑欲近遠可乎。今朴氏一派。旣近其近矣。試使朴氏貫密者。每派各近其近。會而通之。則隱然一同流之江漢也。其盛矣乎。朴氏之先。有牧羅州者。子孫因居湖南。若眉蘇氏之始於味道。昌平縣。卽其鄕井也。文行閥閱。至今有聞云。朴君春錫甫問序於正鎭。謹書此以歸之。<끝>
노사집 제17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