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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3권 / 신도비(神道碑)
명 총병관 조선국 정헌대부 평안도 병마절도사 충민 임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明總兵官朝鮮國正憲大夫平安道兵馬節度使忠愍林公神道碑銘 幷序)
숭정(崇禎) 17년(1644) 천자께서 이르기를, “요양(遼陽)이 몰락하여 사막이 된 지 26년이 되었으나, 장상(將相)과 여러 신하들 가운데 중국을 위해 외부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배신(陪臣) 경업(慶業)은 대의를 지켜 속국(屬國)에서 기병(起兵)하여 뱃길로 3700리 바다를 건넜다.
장산도(長山島)를 넘고 타기도(鼉磯島)를 건너 중국에 귀의하여 종군을 청하며 요양을 수복하겠노라 맹서했다. 짐이 그것을 무척 가상히 여겨 아무개를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았다.”라고 하셨다. 3월 정미(丁未 19일)에 천자가 붕어(崩御)하였다. 4월 병인(丙寅 9일)에 청인(淸人)이 군대를 이끌고 관문(關門)에 들어오자, 공은 석성도(石城島)를 지키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청인이 백성들에게 모두 치발(薙髮)을 하도록 하였으나, 유독 공은 따르지 않았다.
청인이 공을 회유하여 이르기를, “당초 숭정 연간에 부총병(副總兵) 상가희(尙可喜)는 광록도(廣鹿島)를 가지고 청나라에 귀부하여 즉시 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공이 청나라를 섬긴다면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고, 또 마땅히 책봉을 받을 것이다.”하였다.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목숨을 보존하려 했다면 구학(丘壑)에서 늙어 죽으면 될 것인데, 어찌 고생스럽게 부모의 나라를 떠나 천 리 바다를 건너 스스로 명나라에 왔겠는가. 지금 명나라 사직이 이미 망해버렸는데, 내가 어찌 생사(生死)와 영욕(榮辱) 때문에 그 의지를 바꾸겠는가.”하니, 청인이 그 충정(忠情)을 가련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윽고 공을 북경(北京) 감옥으로 송치하여 온갖 수단으로 회유하고 협박하였으나 공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문황제(思文皇帝)가 남조(南朝)에서 감국(監國)을 하고 있을 때 공이 청인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조맹덕(曹孟德)이 관우(關羽)를 석방하여 돌려보내자, 관우도 끝내 맹덕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네가 진실로 나를 남조(南朝)로 보내 준다면, 나도 마땅히 너의 은혜에 보답하여 관공이 맹덕에게 보답한 것처럼 하겠다.”라고 하였다.
청인이 말하기를, “네가 남조를 잊지 않으니, 충신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호랑이를 길러서 후환(後患)을 남기는 짓을 나는 하지 않겠다.”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야 공은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요양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말을 에워싸고 서로 더불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숭정황제(崇禎皇帝)의 옛 총병관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성이 임씨(林氏)요, 자가 영백(英伯)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어려서 아이들을 거느리고 전쟁놀이를 하는데 앉고 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동작에 모두 법도가 있었으니, 아이들이 조심스레 복종하고 지휘를 따르며 감히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장성하여 옛 병법을 배우게 되자 일찍이 크게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천지의 기운을 받아 금수(禽獸)가 되지 않고 사람이 되었으며, 부인이 되지 않고 남자가 되었는데, 어찌 좁은 이 나라에서 늙어죽겠는가.” 하였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권관(權管)으로 소농보(小農堡)에 보직되었으며, 군대를 잘 다스린 공으로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가자(加資)되었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공주(公州)로 피난을 가니, 공이 강개(慷慨)하여 종군을 자청하여 이괄의 반란군과 안령(鞍嶺)에서 싸웠다. 이괄이 주벌되자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봉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우림위장(羽林衛將)에 올랐으며, 방답진(防踏鎭)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거쳐 낙안 군수(樂安郡守)가 되었다.
천계(天啓) 7년(1627, 인조5)에 청나라 수만 기병이 평산(平山)에 침입하자,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절도사를 따라서 밤낮으로 말을 달려 문수산(文殊山)에 이르렀으나, 청군은 이미 해산한 뒤였다. 공이 분개하여 이르기를, “만약 정예 포병(砲兵) 4만 명만 얻는다면, 요양을 쓸어서 평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검산(劒山)에 성을 쌓는 데 방어사(防禦使)에 제수되어 그 노역을 감독하였다. 또 용골(龍骨)ㆍ운암(雲暗)ㆍ능한(凌漢)에 성을 쌓으니, 그 노고에 임금이 말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정주(定州) 목사로 나갔을 때,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 등이 의론하기를, 청북(淸北)은 땅은 넓지만 사람이 적으므로 성을 쌓아 지킬 수가 없으니, 내버려서 청인(淸人)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논쟁하여 이르기를, “경태(景泰) 6년(1455, 단종3)에 청북의 여(閭)ㆍ무(茂)ㆍ우(虞)ㆍ자(慈) 4개 주(州)의 백성들이 근방의 부(府)로 옮겨가서 그 땅을 텅 비게 하였으며, 입암(立巖)ㆍ주사(朱砂)ㆍ신송(申松)ㆍ고도(古塗) 여러 고을을 여진족의 혈거지(穴居地)가 되게 한 지 170여 년이나 되니, 서쪽 변경 지방의 사람들은 아직도 왕조의 실책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하물며 살수(薩水)ㆍ박릉(博陵)의 북쪽 1000여 리는 선왕(先王)의 강토인데, 어찌 떼어서 청인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노하여 조정에 벌주기를 청하여, 마침내 감옥에 갇혔다가 얼마 뒤에 석방되었다. 공이 부친 상중(喪中)에 관찰사가 서문(西門)에서의 일을 장계로 올려 임 아무개가 아니면 맡을 수가 없다고 하자, 임금이 이에 기복(起復)하여 영변도호부사 겸 청북방어사(寧邊都護府使兼淸北防禦使)로 삼으니 백마산(白馬山)에 성을 쌓았다.
처음에 유격(游擊) 공유덕(孔有德)이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구원하러 갔으나, 그 일당 경중명(耿仲明)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오교(吳橋)에서 곧장 능현(陵縣)을 침범하여 임읍(臨邑)ㆍ상하(商河)ㆍ제동(齊東)ㆍ신성(新城)을 함락시키고, 몇 달도 안 되어 또 등주(登州)를 격파하고 순무어사(巡撫御使)손원화(孫元化)와 부사(副使) 송광란(宋光蘭) 등을 잡으니, 마침내 산동(山東)이 두려움에 떨었다. 유격장군(游擊將軍) 진양모(陳良謨)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천자가 도어사 주대전(朱大典)에게 명하여 산동을 순무케 하고, 총병관 진홍범(陳弘範) 등과 함께 공유덕을 토벌하고 진격하여 등주를 포위하게 하였다. 공유덕은 성을 버리고 바다로 도망해 들어가서는 조소종(曹紹宗)과 유승조(劉承祖)를 시켜 표문(表文)를 받들고 청나라에 항복하게 했다.
진홍범이 추격하여 적강(狄江) 서쪽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이에 공에게 협공(夾攻)하라고 명하자, 공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난자도(蘭子島)를 나와 북쪽으로 20리를 가서 형제산(兄弟山)에 웅거하였다. 공유덕의 군사는 10여만 명이 됨직한데 바다 위를 덮고 있었다.
공이 칼을 휘두르며 공유덕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유격장군이 되어 요양을 구원하러 가서는 무엇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느냐?” 하였다. 공유덕이 노하여 창을 휘두르며 곧장 앞으로 나와 그를 찌르려고 했다. 공이 또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비록 산동순무 손어사를 사로잡았으나, 감히 나와 겨루겠는가?” 하고는 화살을 뽑아서 활을 쏘아 그 말에 명중시켰다. 공유덕이 패하여 우가장(牛家庄)으로 달아나니 공이 드디어 추격하여 쳐서 크게 무찔렀고 거의 공유덕을 사로잡을 뻔하였다.
이때 진홍범이 군사를 독려하여 해상에 이르러 멀리서 공의 병사들이 모두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바라보고,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임 아무개의 용맹은 삼군(三軍)에서 으뜸인데, 누가 조선에 준걸(雋傑)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하였다.
마침 청나라 두도(杜度)ㆍ제이합랑(濟爾哈朗)ㆍ아제격(阿濟格)이 심양의 기병을 이끌고 공유덕을 진강(鎭江)에서 맞이하니, 진홍범은 군대를 해산시키고 산동으로 돌아갔다. 천자가 이르기를, “역적 유덕이 매우 방자하고 무도(無道)하여 주현(州縣)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산동 지역이 소란하였다.
배신(陪臣) 임경업이 종군하여 하늘의 토벌을 도와 달아난 자를 추적하여 북쪽으로 내쫓고 첩서(捷書)를 보내어 보고하니, 특별히 칙서를 내려 부총병관(副總兵官)을 제수하노라.”하였다. 이에 금화(金花)를 하사하여 그 머리에 표함으로써 두터운 예를 보였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명성이 알려졌으며, 청나라의 두도ㆍ제이합랑ㆍ아제격도 또한 공을 진정한 장군이라고 칭송하였다.
공이 영변(寧邊)으로 돌아와 즉시 부친상을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상복을 벗자 천거되어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배수되었는데 공이 이르고 나서 처음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니, 전문령(箭門嶺)과 통군정(統軍亭)에서부터 청수동(靑水洞)을 넘어 위원(威遠) 고장성(古長城)까지 모두 12둔(屯)에 이어졌다.
의주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운데 섞여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취하도록 하니, 의주부가 그에 힘입었다. 임금이 장려하여 타이르고, 특별히 가의대부(嘉義大夫)를 가자하였다. 1년 있다가 어떤 일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는데, 의주 백성들이 비변사(備邊司)에 찾아가서 “공은 변방에 거처하면서 위엄과 은혜를 베푸셨다.”라고 하였다. 이에 다시 의주 부윤을 제수하였다.
청나라 대선(代善)이 사자를 보내어 이서(移書)하였는데 임금이 받지 않자 사자가 도망쳐 버렸다. 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청나라 군대가 조만간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장계(狀啓)를 올려 전사(戰士) 2만 명을 얻어 청나라 군대를 막기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고, 인하여 해서 절도사(海西節度使)에게 하교하여 기병(騎兵)과 보병(步兵) 2만 명을 출동시켜 의주로 나가 경비토록 하였으나, 시사(時事)를 말하는 자가 안 된다고 하여 일이 마침내 중단되었다.
영아아대(英俄兒代)가 샛길을 따라 진격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고, 요호(要虎)로 하여금 기병 300명을 거느리고 의주에 주둔토록 하였다. 공이 장사(壯士) 최효일(崔孝一)을 이끌고 백마산(白馬山) 아래에서 청나라 기병을 기습 공격하였다. 요호는 몸에 양은갑(兩銀甲)을 입었는데 무게가 100여 근이나 되었다.
공이 최효일(孝一)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은갑옷을 빼앗아 입어야겠다.” 하고는 즉시 말을 달려서 청군의 진영으로 쳐들어가서 요호를 죽이고 양은갑을 빼앗아 몸에 걸쳤다. 최효일이 협공하여 청인 150명의 목을 베고, 남녀 120명과 말 60필을 모두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청나라 기병들은 달아났다.
군대를 해산할 때에 가서, 영아아대가 공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는 어찌 감히 우리 장수를 죽였는가?”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나라를 위해 변방을 지키면서 적병을 보고 감히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였다. 그러자 영아아대가 이르기를, “우리 군대가 남한산성에서 돌아올 때 네가 우리를 토벌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였다.
공이 다시 대답하기를, “왕실이 불행하여 왕세자가 너희 군중에 계시므로 나는 울분을 억제하고 너희와 교전(交戰)하지 못한 것이다.”
하니 영아아대가 그 의로움을 대단하게 여겼다. 처음에 청나라 사자가 서울에 이르자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이 건의하여 사자의 머리를 베어 천자에게 바치기를 청하니 청나라 사자가 노하였다.
청나라가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맹약(盟約)을 끊기를 도모한 우두머리 신하를 찾으므로 조정에서는 충정공을 심양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주현(州縣)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아무도 감히 방문하지 못했으나 오직 공이 교외로 나가 의순관(義順館)에서 충정공을 맞아 손을 잡고 말하기를, “군자가 제대로 죽을 곳을 얻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공이 천자를 위해 대의를 밝힌다면 죽는다 해도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자기 갖옷을 벗어서 입혀주고, 전송 물자를 매우 넉넉하게 대어주었다. 여러 장수들이 이르기를, “청인(淸人)이 들으면 반드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니, 부윤께서 심양에 붙들려가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대의를 밝힌다면, 나는 시퍼런 칼날을 밟더라도 영광스러울 것이다.”하였다.
모친 상중에 임금이 기복(起復)을 명하여 주(州)의 일을 보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일이 있어 서울에 이르니 임금이 불러 보며 위로하고 내구마(內廐馬)를 내려주었다. 공이 의주 부윤으로 있을 때, 청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밤에 관청에 침입하여 공이 차고 다니는 우전(羽箭)을 훔쳐갔다.
공이 이에 몰래 도둑질 잘하는 자를 달래어 청나라 군막(軍幕)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그 주인이 붙이는 작령(雀翎)을 훔쳐내어 감추어버렸다. 그 뒤에 청인이 의주에 이르러서는 우전을 꺼내어 공에게 주며 말하기를, “공의 우전을 돌려준다.”하였다.
이에 공도 역시 작령을 꺼내어 청인에게 주며 말하기를, “네 작령을 돌려준다.”하니, 청인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공이 일찍이 신의로써 청인을 접하고 의리로써 꺾으니, 청인이 감복하여 세수미(歲輸米) 1000여 석을 감해주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옥새가 찍힌 문서를 내리고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하였다.
또 사건에 연루되어 철산부(鐵山府)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의주 부윤이 되고, 천거를 받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안주(安州)를 지킬 때, 일찍이 면포(綿布) 6000필을 바치며 심양 전수(轉輸) 비용에 보태기를 청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에 특별히 가자되었다.
처음에 신헐(申歇)은 묘향산에 들어가 불교를 배우고 삭발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심세괴(沈世魁)가 동강(東江)에 주둔했다는 말을 듣고 바다를 건너서 갔다. 세괴가 죽자 신헐은 몰래 달아나 송산(松山)으로 들어가 홍승주(洪承疇)에게 의탁하고 독보(獨步)로 개명하였다.
한참 후에 홍승주가 신헐에게 동쪽으로 심양에 가서 청인들의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어 돌아오게 했는데, 국경에 이르러 공에게 잡혔다. 마침 조정에서 은밀히 중국에 사자(使者)로 보낼 만한 의사(義士)를 찾고 있던 차에, 공이 신헐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구변(口辯)이 있다고 아뢰니 상(上)이 행장을 꾸려 보내도록 명하였고, 신헐은 인하여 홍승주에게 이송(移送)할 자문(咨文)을 얻었다.
신헐이 돌아가서 홍승주의 군대에 보고하고 그 자문을 올리니, 천자가 조서를 내려 포장하고 신헐에게 ‘여충(麗忠)’이라는 호를 내렸다.
2년 후에 신헐이 송산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신헐에게 쌀 550석과 백금 1500량 및 인삼 50근을 내리고, 인하여 또 공에게 명하여 짐을 꾸려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신헐은 달아났고, 사자도 다시는 왕래하지 않게 되었다. 이계(李烓)가 심양의 감옥에 구속되어 있을 때 공이 짐을 꾸려 신헐을 보낸 일을 고하니, 청인이 매우 노하여 사자를 보내 공을 잡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청인이 계주(薊州)에 들어오니, 북경에서는 경계를 엄중히 하고 훈신(勳臣)들에게는 궁궐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태감(太監)들에게는 여러 진영의 병마(兵馬)를 감독, 징집하여 들어와 호위토록 명하였다. 공이 붙잡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러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천자께서 부총병을 제수하시고 금화(金花)를 내려 내 머리에 표하셨다.
지금 청인이 산해관(山海關)을 들어와 계주를 도륙하니, 경사에서는 놀라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내가 능히 들어가서 천자를 시위(侍衛)하지 못하니, 이는 위로 명나라 조정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거늘 단지 금화에 있어서만 부끄럽겠는가. 신헐을 사자로 보낸 일은 왕명을 받들어 짐을 꾸려 보냈을 뿐이니, 나의 대의(大義)를 밝히기에는 부족하다.”하였다.
이에 달아나서 거짓으로 중이 되어 천보산(天寶山)에 들어가 회암사(檜巖寺)에 의복을 남겨두고 사명산(四明山)과 반룡산(盤龍山) 사이를 두루 떠돌아다녔는데, 군현(郡縣)에서 대대적으로 수색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공은 평소 정주(定州) 상인 이무철(李武鐵)과 친하였는데, 일찍이 밤에 조용히 무철(武鐵)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청인이 곧바로 황성(皇城)에 닥칠 것인데, 총병관 오삼계(吳三桂)와 좌양옥(左良玉)도 모두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망명하여 장차 등주(登州)에 들어가 도독(都督)을 따라 들어가서 천자를 시위하려고 하니, 너와 함께 바다를 건너가고 싶다.”하였다. 그러자 이무철이 개연히 허락하였다. 공이 마침내 행장에서 백금(白金)을 꺼내어 이무철에게 주어, 배와 식량을 갖추게 하고 또 바닷길을 잘 다니는 뱃사람을 모집하게 하였다. 길일을 점치지도 않고 돛을 펼쳐 서쪽으로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금화(金花)를 꽂고 뱃사람들에게 사례하며 말했다.
“내가 일찍이 성스러운 천자를 위해서 청인들을 내쫓아 경사(京師)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이제 다행히 너희들의 힘을 입어 중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비록 죽더라도 또한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뱃사람들이 놀라서 절하며 이르기를, “감히 공의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우도(牛島)에서 2000리를 가면 평도(平島)에 이르는데, 바람이 순조롭지 않아 해풍현(海豐縣)에 도착하였다. 해풍현 사람들이 청나라 첩자로 여겨 처음에는 옥에 가두었다가, 공이 꽂은 금화를 보고서는 비로소 천자께서 총애하여 하사하신 것을 알고 곧 풀어주었다. 등주에 이르러 도독이 더불어 얘기를 해보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천자에게 천거하였다. 그러나 경사에서는 이미 경계 태세를 풀었다.
융무(隆武) 2년(1646)에 공이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의관은 예전 그대로였으며 지기(志氣)도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심기원(沈器遠)의 반란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공은 중국에 가 있어서 사실은 기원(器遠)의 반란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자점(金自點)이 공의 명성을 시기하여 매질을 하며 심문하자 공이 크게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나를 죽여서는 안 된다.”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병술년(1646) 6월 을미(20일)로, 누린 햇수가 53년이었다. 상이 크게 통곡하며 “죽었단 말인가. 죽었단 말인가. 임 아무개는 과감하게 소임을 다해 공을 세웠는데, 매우 애석하구나.”라고 하였다. 인하여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시신에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내가 경(卿)을 죽일 뜻은 없었는데, 어찌 이다지도 급하게 세상을 떠났는가.” 하였다.
그해 8월 며칠에 충주(忠州) 달천(達川) 언덕에 장사 지냈다. 숙종(肅宗) 때 관작이 추복(追復)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젊어서부터 강개(慷慨)하고 큰 절개가 있었으며, 위기와 고난이 닥쳐도 회피한 적이 없었다. 비록 천하가 망해가는 시기였을지라도 오히려 의리에 귀의하였고, 포승줄에 묶여 곤욕을 당하였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5세조 임명산(林命山)은 관직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청렴하고 신중함으로써 나라의 명경(名卿)이 되었다. 증조 임유명(林有名)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는데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부 임덕윤(林德胤)은 처음으로 무과에 합격하여 부장(部將)이 되었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임황(林篁)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영중추 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공의 부인 전주 이씨는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장자 이방우(李芳雨)의 후손으로, 심양 감옥에 갇히자 곧바로 자살하였다. 자식이 없어서 공의 아우 부사 임준업(林俊業)의 아들 중번(重蕃)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중번에게는 아들이 둘, 딸이 둘 있다. 아들은 시망(時望)과 시량(時亮)이며, 큰딸은 곽시욱(郭時郁)에게 시집가고 작은딸은 최준영(崔俊榮)에게 시집갔다.
처음에 공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갈 때 신헐에게 이르기를, “내가 심양에 붙들려 가더라도 해를 넘기지 않고 반드시 풀려날 것인데, 어찌 중도에 망명함이 옳겠는가. 그러나 청인들이 관내(關內)에 깊숙이 들어와 황성(皇城)이 위급하니, 내가 망명하지 않으면 들어가서 천자를 구원할 방법이 없다.”라고 하니, 신헐이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출중하신 충민공이시여 / 忠愍矯矯
그 용기 장렬도 하셨으니 / 有壯其勇
키는 7척이 안 되었어도 / 長不七尺
적들은 두려움에 떨었도다 / 而敵震恐
산동이 소란해졌고 / 山東繹騷
도적들이 흉포한 기세를 뻗쳤으니 / 蟊賊鴟張
공유덕과 경중명이 / 維孔與耿
모두 심양에 부화하였도다 / 胥附瀋陽
공이 군대를 정돈하여 / 公整師旅
저 궁문을 나가서 / 出彼弓門
용기 있게 적을 잡아 신문하니 / 執訊曁曁
흉악한 무리가 모두 달아났도다 / 羣醜悉奔
황제께서 훌륭하여라 / 帝曰休哉
너의 충성이 아름답도다 / 嘉汝之忠
하시고 총병을 제수하시어 / 乃授總兵
무공을 표창하셨도다 / 以章武功
아 빛나는 금화를 / 於鑠金華
공의 머리에 꽂아주시고 / 綴公之首
영광되이 삼군을 움직이게 했으니 / 榮動三軍
천자께서 후대하심이로다 / 天子所厚
계주를 지키지 못하여 / 薊州不守
경사가 놀라 떨었으니 / 京師震驚
아마도 대장군이 없어 / 豈無戎帥
출정하려 하지 않은 것인가 / 莫肯從征
공이 발해 바다를 건너 / 公浮渤澥
부역 땅을 향해 갈 때 / 指于鳧繹
범 무늬 활집이 배에 있었으니 / 虎韔在舟
중국을 보위하자 맹서했도다 / 誓衛中國
황제께서 장하도다 / 帝曰烈哉
너의 의리가 올바르니 / 爾義之正
천 리 먼 이곳에 와 구원함에 / 千里入援
짐의 명을 기다리지 않았도다 / 不待朕命
전공이 빛나는 총병이여 / 赫赫總兵
다시 대장의 직임을 맡기노라 / 復長戎垣
제서를 펴시어 / 申以制書
위로해 주심이 돈독하셨도다 / 慰諭是敦
공이 절하고 눈물 흘리며 / 公拜泣涕
덕음을 공경스레 받들었으니 / 欽承德音
중국이 비록 몰락하였어도 / 中國雖摧
두 마음을 품지 않았도다 / 罔貳其心
부월로 위협해도 / 斧鉞威之
그 머리 깎지 않았고 / 伊髮不薙
감옥에 가두어도 / 桎梏幽之
그 무릎 꿇지 않았도다 / 伊膝不跪
적국은 두려워 굴복하고 / 敵國竦伏
오히려 그를 석방했건만 / 猶且釋之
슬프도다 흉악한 신하가 / 痛矣孽臣
어찌 차마 그를 해쳤는가 / 胡忍賊之
이 산은 무너지지 않고 / 維山不崩
이 바위는 깨어지지 않을지니 / 維石不泐
공의 명성이 / 維公之名
이와 더불어 무궁하리로다 / 與之無極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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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明總兵官朝鮮國正憲大夫,平安道兵馬節度使忠愍林公神道碑銘。幷序
崇禎十七年。天子曰。遼陽沒爲沙漠。於今二十六年矣。將相諸臣。無一人能爲中國禦外侮者。陪臣慶業。秉大義。起自屬國。浮海三千七百里。踰長山。絶鼉磯。依歸中土。乞從軍。誓復遼陽。朕甚嘉之。其以某爲總兵官。三月丁未。天子崩。四月丙寅。淸人引兵入關門。公保石城。爲所執。淸人。令民皆薙髮。獨公不從。淸人諭公曰。始崇禎中。副總兵尙可喜。以廣鹿歸附於淸。卽賜策封。爲諸王。公如事淸。必不死。又當受封矣。公罵曰。吾誠圖存。則終老丘壑足矣。何苦去父母之國。千里浮海。以自投於大明哉。今大明社稷已亡。吾豈以死生榮辱。變其志邪。淸人無不憐其忠。已而。送公北京獄。誘脅百端。終不屈。思文監國公謂淸人曰。昔曹孟德釋關羽而歸之。羽竟報孟德之恩。汝誠能送我南朝。則我當報汝之恩。如關公之報孟德焉。淸人曰。汝不忘南朝。可謂忠矣。然養虎而遺患。吾不爲也。居歲餘。公得東歸。遼陽父老。皆擁馬。相與流涕曰。是崇禎故總兵官也。公姓林氏。字英伯。平澤人也。幼率羣兒爲戰陳。坐作進退。皆有度。羣兒慴伏聽指揮。不敢違令。及旣長。學古兵法。嘗太息曰。吾受天地之氣。不爲禽獸而爲人。不爲婦人而爲男子。安能局促老此邦也。年二十五。擧武科。初補權管小農堡。治軍有功。加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李适反。上如公州。公慷慨。自請從軍。與适兵戰于鞍嶺。适旣誅。冊振武原從功臣。陞嘉善大夫羽林衛將。由防踏鎭僉節制使。爲樂安郡守。天啓七年。淸數萬騎入平山。上如江都。公率師從節度使。晝夜馳抵文殊山。淸兵已解。公憤曰。苟得精礮四萬人。則遼陽可掃平矣。城劒山。授防禦使督其役。又城龍骨雲暗凌漢。以勞賜馬以奬之。進牧定州。都元帥金自點等。議淸北地曠人少。不可城守。宜棄之以予淸人。公爭曰。景泰六年。淸北閭,茂,虞,慈四州之民。移旁府而空其地。使立巖,朱砂,申松,古塗諸洞。爲女眞所穴有者一百七十有餘年。西鄙人尙恨王朝之失策也。况薩水博陵以北千餘里。先王疆土。烏可以割予淸人乎。自點怒請罪于朝。遂繫獄。已而見釋。居父憂。觀察使啓西門之事。非林某不可任。上乃起復。爲寧邊都護府使兼淸北防禦使。城白馬山。初游擊孔有德引兵援遼。與其黨耿仲明反。自吳橋直犯陵縣。陷臨邑,商河,齊東,新城。不數月。又破登州。執廵撫御史孫元化副使宋光蘭等。山東遂震。游擊將軍陳良謨力戰死之。天子命都御史朱大典廵撫山東。與總兵官陳弘範等。討有德。進圍登州。有德棄城亡入海。使曹紹宗,劉承祖。奉表降淸。弘範追至狄江西。上乃命公夾攻之。公率精兵出蘭子北二十里。據兄弟山。有德軍可十餘萬。被於海上。公奮劒罵有德曰。爾爲游擊將軍援遼陽。何以反爲。有德怒。揮矟直前。欲刺之。公又罵曰。爾雖禽山東廵撫孫御史。敢與吾抗乎。乃抽矢射。中其馬。有德敗走牛家庄。公遂馳擊大破之。幾獲有德。當是時。弘範督師至海上。望見公兵皆敢戰。顧謂諸將曰。林某勇冠三軍。孰謂屬國無雋傑也。會淸杜度濟爾哈朗阿濟格。引瀋陽騎。迎有德於鎭江。弘範解兵歸山東。天子曰。逆賊有德。大肆不道。攻陷州縣。山東騷然。陪臣慶業從軍旅以助天討。追奔逐北。捷書來聞。特降勑書。宣授以副總兵官。仍賜金花表其首。用示優禮。公由是知名中國。淸杜度濟爾哈朗阿濟格。亦稱公爲眞將軍。公還寧邊。卽上疏乞終父喪。上許之。服除。薦拜義州尹。公旣至。始置屯田。自箭門並統軍亭。逾靑水。屬之威遠古長城凡十二屯。令州人雜耕其中以取食。一府賴之。上奬諭。特加嘉義。居一年。坐事削職。義州民詣備邊司言。公居邊。有威惠。於是復授義州尹。淸代善遣使移書。上不受。使者亡去。公歎曰。淸兵朝暮必至矣。乃馳啓。乞得戰士二萬人以禦淸兵。王許之。因敎海西節度使發騎步卒二萬人。出戍義州。言事者以爲不可。事遂寢。英俄兒代。從間道進圍南漢。令要虎率三百騎屯義州。公引壯士崔孝一。疾擊淸騎於白馬山下。要虎身被兩銀甲。重百餘斤。公顧孝一曰。彼銀甲可奪而擐也。卽躍馬馳入淸陳。殺要虎。奪兩銀甲而擐之。孝一夾擊。斬淸人百五十級。盡還其所掠男女百二十口馬六十匹。淸騎遁去。及解兵。英俄兒代讓公曰。爾何敢殺吾之將也。公對曰。爲國捍邊。見敵兵不敢不伐也。英俄兒代曰。我兵歸自南漢。而爾不伐我何也。公對曰。王家不幸。王世子在汝軍中。慶業抑志不能與汝交兵也。英俄兒代多其義。初淸使之至王京也。洪忠正公翼漢建言。乞斬使者頭。獻于天子。淸使怒。及圍南漢。索首謀絶盟之臣。王朝乃遣忠正公入瀋陽。州縣震懼。莫敢問。獨公出郊迎忠正公于義順館。執手而語曰。君子死得其所。誠難矣。公爲天子明大義。死何所恨。立解其裘以衣之。資送甚盛。諸將曰。淸人聞之。必不悅。安知府尹之不繫瀋陽乎。公謝曰。苟明大義。則慶業雖蹈白刃。有光榮矣。居母憂。上命起復。視州事。未幾。以事至王京。召見慰諭。賜廐馬。公在州時。淸遣人夜入府中。竊公之所佩羽箭。公乃陰誘善盜者。入淸帳中。竊其主所著雀翎而藏之。其後淸人至義州。乃出羽箭。投於公曰。還公羽箭。公於是。亦出雀翎。投於淸人曰。還爾雀翎。淸人大慙。公嘗以信接淸人。而義折之。淸人感服。減歲輸米千餘石。上大喜。爲賜璽書。加資憲大夫。又坐事流鐵山府。已而。復爲義州府尹。薦拜平安道兵馬節度使。鎭安州。嘗獻綿布六千匹。請助瀋陽轉輸費。特加正憲。初申歇入妙香山。學浮屠。削髮爲僧。聞沈世魁鎭東江。浮海往游。世魁死。申歇間走入松山。依洪承疇。改名獨步。久之。承疇使申歇。東之瀋陽。取淸人要領而歸。至界上。爲公所得。會王朝陰求義士之可使中國者。公因言申歇精敏有口辨。上乃命裝送。申歇因得以移咨承疇。申歇還報承疇軍。而上其咨。天子下詔以褒之。賜申歇號曰麗忠。居二年。申歇歸自松山。上嘉之。賜申歇米五百五十石,白金一千五百兩,人蔘五十斤。因又命公裝送之。未幾。承疇降于淸。申歇亡去。使者不復往還矣。及李烓繫瀋陽獄。告公裝送申歇事。淸人大怒。遣使者。執公以行。是時。淸人入薊州。京師戒嚴。命勳臣分守九門。太監督察徵諸鎭兵馬入衛。公被執至金郊驛。喟然歎曰。始天子授副總兵。賜金花以表余首。今淸人入山海關。屠薊州。京師震驚。余不能入衛天子。是上負皇朝之恩也。獨不愧於金花乎。夫申歇奉使之事。承王命裝送而已。不足以明余大義也。乃亡命。詐爲浮屠。入天寶山。留衣服於檜巖寺。周流四明,盤龍間。郡縣大索。終不得。公素善定州賈人李武鐵。嘗夜從容見武鐵。流涕而言曰。淸人直薄皇城。總兵官吳三桂,左良玉。皆不能援。余亡命將入登州。從都督入衛天子。願與汝偕浮于海。武鐵慨然而許之。公遂發裝中白金予武鐵。具船與糧。又募船人之能海行者。不筮日。張帆西行。旣中流。乃揷金花。謝船人曰。余嘗欲爲聖天子。逐淸人。以安京師。今幸蒙汝等之力。得入中國。余雖死。亦無恨矣。船人驚拜曰。敢不如公之令。自牛島行二千里。至平島。風不利。抵海豐縣。縣人以爲淸間者。初繫之獄。及見公所揷金花。始知天子之所寵賜也。於是乃釋。至登州。都督與語大奇之。薦于天子。而京師已解嚴矣。隆武元年。公東歸。衣冠如故。而志氣猶不挫也。沈器遠反。坐被逮。然公西行。實不預器遠反事。金自點忌公之名。掠問之。公大呼曰。天下事未定。不可殺慶業。明日遂卒。丙戌六月乙未也。享年五十三。上大慟曰。死乎死乎。林某敢任有功。甚可惜也。因命史官。諭其屍曰。予無殺卿之意。何遽死邪。以其年八月某日。葬于忠州達川之原。肅廟時追復官爵。謚曰忠愍。公少慷慨。有大節。履危赴難。無所回避。雖天下垂亡之時。猶歸義。困於縲絏而不悔也。五世祖命山。官至吏曹判書。以淸愼爲國名卿。曾祖諱有名。司憲府監察贈承政院左承旨。祖諱德胤。始擧武科。爲部將贈戶曹參判。父諱篁。折衝將軍贈領中樞府事。公夫人全州李氏。康獻長子諱芳雨之後也。繫瀋陽獄。卽自殺。無子。以公弟府使俊業子重蕃爲後。重蕃有子二人。女二人。子曰時望。曰時亮。女長適郭時郁。次適崔俊榮。始公浮海入中國。謂申歇曰。吾繫瀋陽不踰年。必將見釋。豈宜中道而亡命哉。然淸人深入關內。皇城危急。吾不亡命。則無以入援天子矣。申歇爲之泣下。銘曰。
忠愍矯矯。有壯其勇。長不七尺。而敵震恐。山東繹騷。蟊賊鴟張。維孔與耿。胥附瀋陽。公整師旅。出彼弓門。執訊曁曁。羣醜悉奔。帝曰休哉。嘉汝之忠。乃授總兵。以章武功。於鑠金華。綴公之首。榮動三軍。天子所厚。薊州不守。京師震驚。豈無戎帥。莫肯從征。公浮渤澥。指于鳧繹。虎韔在舟。誓衛中國。帝曰烈哉。爾義之正。千里入援。不待朕命。赫赫總兵。復長戎垣。申以制書。慰諭是敦。公拜泣涕。欽承德音。中國雖摧。罔貳其心。斧鉞威之。伊髮不薙。桎梏幽之。伊膝不跪。敵國竦伏。猶且釋之。痛矣孽臣。胡忍賊之。維山不崩。維石不泐。維公之名。與之無極。<끝>
江漢集卷之十三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