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박정번(朴廷璠)
1550년(명종 5) - 1611년(광해군 3)
조선 후기에, 예빈시주부 등을 역임한 학자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군신(君臣), 호는 학암(鶴巖). 종성 판관 박일(朴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민종건(閔宗騫)의 딸이다. 박성(朴惺)· 박월(朴越)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형 박정완(朴廷琬)과 더불어 왜구와 대항하여 싸웠다. 왜란이 끝나고 공을 논할 때 자신의 공적은 드러내지 않고 형만을 내세우는 덕성이 있었다. 1605년부터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과 더불어 『심경』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내기도 하였다. 고령 문연서원(文淵書院)에 제향되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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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주부 박군 묘지명 병서(主簿 朴君 墓誌銘 幷序)
박군이 죽어 장차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효자 효선(孝先)이 나를 군의 지우라 하여 묘지명을 청하니, 내가 어찌 차마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아아! 이것이 군의 무덤이구나. 군은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3)에 태어나 만력(萬曆)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돌아갔으니 향년 62세이다.
군의 휘는 정번(廷璠), 자는 군신(君信)이며 고령현 사람이다. 고려 전농감사 박길소(朴吉召)의 후손으로 부창정 박환(朴還)이 있었는데 군의 13대조이다. 증조부 휘 형(烱)은 정헌대부, 함경도 병마절도사였는데 선왕 때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조부 휘 계조(繼祖)는 통덕랑 종성도호부 판관을 지냈다.
모친은 여흥 민씨이다. 부친 휘 종건은 통훈대부 영월 군수를 지냈다. 생부는 택(澤)인데 참봉 최필손의 따님과 결혼하여 공을 낳았다. 판관공이 후사가 없어서 공이 뒤를 이었다. 군은 태어나면서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약관이 못 되어서 판관공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다.
모친 민씨가 심장병이 있어서 일이 자못 도를 잃자 시종 온 힘을 다해 기쁘게 해드렸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마침 왜구의 난리를 만나 상제가 행해지지 않고 있었는데, 홀로 예를 행하며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거동이 속되지 않아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다.
안으로 천륜을 중시하여 슬픔을 품고 화락하였으며 겉으로 친구를 신뢰하여 교유하는 사람들이 모두 당시의 훌륭한 선비들이었다. 평상시에 서책을 펴고 공부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고인의 격언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반성하였다. 의롭지 않은 것은 털끝만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오래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 해도 관직이 높아져서 이름이 나면 찾아가려 하지 않았고, 그쪽에서 먼저 문안을 행하면 답을 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관직을 가진 것은 시세가 그렇게 한 것이지 군의 뜻은 아니었다. 대가천과 낙동강 사이에 살면서 경치 좋은 곳을 골라 두 개의 정사를 지었으니 학암정(鶴巖亭)과 부래정(浮來亭)이었는데 그곳에서 늙어가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년에 문연재(文淵齋)를 짓고 때때로 고을 자제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고 글을 읽었으니 이로운 바가 아주 많았다. 병이 들자 여자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다시 자리를 바르게 한 다음에 죽었다. 현풍 곽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 부친의 휘는 두(﨣)이며 통정대부 동부승지를 지냈다.
부인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 정숙하고 아름다웠다. 시부모를 모시는 일에는 도리를 다했고 군자와 짝하기에 어긋나는 덕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간질하지 못했다. 맏딸은 사인 조경담(趙慶覃)에게 시집가서 아들 조원로(趙元老)를 낳았다. 장남 효자 효선은 교리 이광윤(李光胤)의 따님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어리다. 차녀는 가선대부 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에게 시집가서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차남 경선은 어릴 적에 죽었다. 삼녀는 사인 조정생(曺挺生)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부인은 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현의 남쪽 자좌오향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군도 함께 묻혔다. 사는 곳과 가까운 산에다 모신 것이다. 때는 4월 모일이니 이에 묘지문으로 삼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면 / 人生於世
남이 알아주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네 / 或知不知
남이 몰라주는 것을 근심하지 않으면 / 不患不知
하늘이 진실로 알아주는 바가 있다네 / 天固有擬
하늘이 알아주는 바가 있어서 / 天其有擬
길이 남을 것이 있으니 / 長存者存
넉 자 봉분 하나 / 四尺一封
무너지지 않고 길이 남으리라 / 不崩其壽
<끝>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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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主簿朴君墓誌銘 幷序
朴君沒將窆。孝子孝先。以余爲君知友。請誌子墓。余尙忍爲。嗚呼。此君幽宅也。以嘉靖庚戌生。萬曆辛亥歸藏焉。享年六十二。君諱廷璠 。字君信 。高靈縣人。高麗典農監事吉召之後有副倉正還。於君十三代祖也。曾王父諱▣▣正憲大夫。咸鏡道兵馬節度使。先廟朝錄原從功。王父諱▣▣。通德郞。鍾城都護府判官。妣驪興閔氏。考諱宗蹇。通訓大夫寧越郡守。生父曰▣▣。娶參奉崔弼孫女。生公。判官公無嗣。後焉。君生有美質。未弱冠。判官公卒。三年廬于墓。絰帶不脫。閔氏有心疾。事頗失度。終始盡懽。丁憂値寇難。喪制不行。獨以禮不少變。儀表不俗。有長者風。內重天倫。念哀和樂。外信朋友。所交遊多一時佳士。常日不廢書冊功。書古人格言。揭諸壁爲觀省地。非其義。一毫不取諸人。雖舊相識。官高名盛。不肯相問。彼先焉。答之而已。其有官稱。時勢使然。非君志也。居在倻川洛水間。擇勝構兩精舍曰鶴巖曰浮來。老焉不求知。晩建文淵齋。時會鄕子弟講誦。所益甚多。疾令婦人不得近。更正席而歿。娶玄風郭氏。考諱▣▣。通政大夫同副丞旨。孺人溫柔淑嘉。事姑盡其道。配君子無違德。人不間焉。女長適士人趙慶覃。生子元老。男長孝子孝先。娶校理李光胤女。生男幼。次女適嘉善大夫兵馬節度使金應瑞。生女幼。次男敬先夭。次女適士人曺挺生。生一男一女皆幼。孺人先君卒。葬于縣南子坐午向之岡。君同穴焉。蓋營近山也。時四月某日子。此其誌也。銘曰。
人生於世。或知不知。不患不知。天固有擬。天其有擬。長存者存。四尺一封。不崩其壽。<끝>
한국문집총간 |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