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의 회상: 두만강에서 중앙아까지 ①
필자가 중국이 개혁개방을 본격화했던 1990년대 초 냉전의 끝자락에서 사회주의권에 대해 모든 것이 생경(生硬)했던 시절, 중국에서 국경으로 마주한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답사하면서 각인처럼 남겨진 희미한 추억의 흔적을 몇 차례 나누어 더듬어 보고자 한다.
눈에 밟히는 두만강
두만강은 길이 610㎞, 국경하천으로서의 길이 547㎞로서 7백리라 부른다, 유역면적 3만 3269.5㎢(북한 1만 743.5㎢, 중국 2만 2526㎢) 이다. 북한의 양강도 삼지연군 2088m 지점 북동계곡에서 발원하여 양강도 대홍단군, 함경북도 연사군, 무산군,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 은덕군을 지나 선봉군 우암리 동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상류로부터 석을수(石乙水), 연면수(延面水), 성천수(城川水), 보을천(甫乙川), 회령천(會寧川), 오룡천(五龍川), 아오지천(阿吾地川)과 하이란강(海蘭江), 훈춘강(琿春江) 등의 지류가 곳곳에서 합류된다. 두만강 지류 중 그 길이가 5㎞ 이상 되는 것은 약 150여 개이며, 그 가운데 50~100㎞ 되는 하천은 6개이다. 상류에서는 서두수(西頭水)라고 불리며 북한의 대홍단군과 무산군의 경계에서 지류인 석을수와 합류한 뒤에는 두만강이라 불린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국 쪽으로는 있는 연변의 화룡시 숭선진, 로과향, 덕화진, 룡정시의 백금향, 삼합향, 개산툰진, 도문시의 월청향과 도문시를 지나 량수진을 경유하며 훈춘시의 밀강향, 영안향, 삼가자만족향, 반석진, 경신진을 거쳐 동해로 흘러간다.
상류의 하계는 대체로 수지상 하계망을 이루며 중류의 무산에서 회령까지는 (연변의 남평) 감입곡류(嵌入曲流) 하천을 이룬다. 온성(연변의 량수)을 지나 하류의 평지로 접어들면 하천경사가 완만해져 주운(舟運)이 용이하다. 온성에서 강 하구 사이에는 유로 변동이 심하고 퇴적작용이 활발하여 곳곳에 하중도와 우각호(牛角湖)가 형성 되여 있으며 강 하구에는 삼각주가 발달하였다.
두만강에는 모샘치와 비슷한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두만모재를 비롯, 산천어, 연어, 송어, 열목어, 황어, 빙어 등 40여종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두만강 지역에는 벼농사와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담배도 재배되는 곳이 있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의 11년간 조선북부에서는 대 한재와 충재가 연이어 들었다. 특히 1869년 기사년(己巳年)에 함경도의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흥 등 6진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겪어보지 못했던 대 재난이었다. 이조왕조의 부패한 관리 배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의 혹독한 통치까지 겹치면서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앉아서 굶어 죽기보다는 두만강을 건너가서 살길을 찾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백성들은 효수(梟首)와 같은 월경죄가 있음에도 생사를 무릅쓰고 청나라로부터 ‘봉금령’이 내려진 간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처음에는 야밤에 두만강을 건너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는 아침이면 돌아가는 조도석귀(早渡夕歸), 일귀경작(日歸耕作) 하는 걸로 그쳤으나 후에는 며칠씩 붙박혀 있으면서 농사를 지었다. 청나라 관청의 령이 엄하면 돌아오고 뜸해지면 또 들어가는 방법으로 두만강 연안 순라선에서 좀 멀찍이 떨어진 산골짜기에 숨어 곡식을 심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봄에 월강하여 깊숙이 들어와서는 농사를 짓고는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등에 지고 고향으로 춘경추귀(春耕秋歸) 농사도 지었다. 목을 잘리는 엄벌도 무릅쓰고 월강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늘면서 아주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리는 사람들이 점차 생기기 시작했다. 미개척지 나무뿌리를 뽑고 돌을 주어내면서 간난신고 끝에 피와 땀으로 두만강 변에 옥답을 일구어 냈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 연변 조선족들의 뿌리인 것이다.
한편 길림장군 명안과 오대징은 간도지방에서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 사람을 출국시킬 수도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 수도 없다면서 집조를 발급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청나라 조정에서는 로씨야의 침략 등 국내외 복잡한 정세 속에서 조선 이주민을 이용하여 간도를 개간하기로 하고 1885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정식으로 두만강 이북 700리, 너비 40~50리에 이르는 지역을 이주민들의 개간지역으로 정하고 개간을 허용했다. 그 이른바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면서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중국침략의 교두보를 만들기 위하여 만선개척회사를 세우고 우리민족을 협박하여 이민부락과 개척단 부락을 수없이 만들어 집단통치를 실시하였다.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집단적 혹은 분산적으로 동부지역에 이주한 조선 이주민은 2만 360호, 8만 3900명으로 해마다 평균 2만 7103명씩 이주 시켰다고 한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조상들은 피땀으로 간도 땅을 일구어 벼농사를 시작했고 삶의 터전을 닦았다. 청 정부 관리들의 수탈과 일제의 통치에도 굴함 없이 조선족 군체를 이루면서 비장한 이주민의 역사의 장을 엮어 냈다. 일제가 투항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도 온갖 정치적 여파에 시달리면서 개혁개방을 맞이했다. 1990년 제4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중국조선족 인구는 192만 597명으로 집계됐다. 조선족 대부분은(90%이상) 호적상 동북3성에 분포 되여 있고 그 중에서도 두만강 유역에 자리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나라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이하의 약사는 다음 계제(階梯)에).
[일부 옮겨온 글 : 필명/cya0909, 잛고도 긴 두만강, https://wulinamu.com/guxiang/16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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