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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 사라져가는 문명 증언한 ‘문학의 구도자’ | |||
| 입력: 2008년 10월 10일 00:50:29 | |||
| ㆍ관능적 황홀감과 인간애 탐험 몰두 ㆍ서구문명 비판 피지배자·자연 대변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68)는 일찌감치 수상이 점쳐지던 강력한 후보였다. 2000년대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지한파 작가인 그는 지난주까지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교환교수로 1년간 한국에 체류해 국내 문단과 독자들로서는 그의 수상소식이 더욱 남다르다. 스웨덴 한림원은 “르 클레지오가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며 “그는 인간성 탐구와 관능적 환희, 시적 모험, 새로운 출발 등에 몰두한 작가”라고 선정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1980년작 <사막>에 대해서는 “이민자들의 눈에 비친 북아메리카의 잃어버린 문화가 잘 그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또 40개의 작품 중 <사랑하는 대지> <도피의 서> <전쟁> <거인들> 을 주요작으로 꼽았다.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르 클레지오는 1940년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태어나 영국 브리스틀대를 졸업했다. 63년 등단작 <조서>로 저명한 르노도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거인들>(1973년), <저편으로의 여행>(1975년) 등에 이어 <사막>(1980년)을 발표하면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94년에는 리르지가 선정한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뽑혔다. 그는 ‘누보 로망’ 계열의 작가로 출발했지만 곧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소설은 거대하고 서사적인 세계를 그리는 대신 작은 모험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리얼리티를 우화로 표현한다. 동시에 평온하게 보이는 사물의 외관을 파고들어 인간의 내적 무질서 및 세상과의 불화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비서구적이고 친자연적인 그의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철학에세이, 종교적 성찰이나 명상, 때로는 주술사의 마술 같은 언어를 통해 현대사회에 맞서 약자와 피지배자, 자연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 멕시코 인디언, 모리셔스섬의 아프리카인 등 역사적인 아픔을 겪은 민족이나 문화에 관심이 많다. 그의 글쓰기 여정은 문명과 도시 속에서 느끼는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증언하던 초기 작품에서 시작해 서구사회에 대한 비판과 거부, 외부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으로 나간다. 이어 인디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세계 속의 뿌리내림을 경험하고, 마침내 기원으로 회귀하는 문학적 여정을 겪는다. 이런 문학세계는 그의 생애로부터 구축된 것이다. 그의 가족은 프랑스 혁명기에 본국을 떠나 아프리카의 모리셔스 군도로 옮겨갔다. 프랑스계인 어머니가 영국인 아버지와 결혼한 뒤 니스로 건너가 그를 낳았으며 여덟살 때는 아버지가 의무장교로 일하던 영국령 나이지리아로 건너가 영어를 배웠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 태국 방콕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불교와 선의 세계를 접했고 멕시코·파나마 체류를 통해 인디언 문화에 침잠했다. 정주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리셔스에 사는 프랑스인이라는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면서 “도도새가 멸종되듯이 없어질 위기에 처한 이 문화를 증언하는 것”을 문학적 임무로 삼았다. 그가 한국문화에 호기심을 갖고 장기간 한국에 체류한 배경에는 이런 개인적 성향이 작용했다. 그는 검소하고 겸손하며 치밀한 성품으로 주변에 감동을 주는 인물이다. 최근 그를 지켜본 최미경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작은 여행가방 하나를 갖고 와서 국제학생기숙사에서 정말 단출하게 살았다. 스웨터에 구멍이 뚫려있을 정도였다. 학생들보다 더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 기다리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가장 늦게 나왔다”고 말했다. <조서> <혁명> <황금물고기> <사막> <아프리카인> 등 주요 작품 20여편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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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 ‘세계의 변두리’에 애정 보여온 ‘친한파’ | |
| 유럽 침략행태 비판…아프리카·남미등 문화 아울러 박찬욱 감독 등 인터뷰…‘운주사 가을비’시 짓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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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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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는 2001년 첫 방한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찾은 대표적인 ‘지한파’ 작가로 꼽힌다. 그는 노벨문학상 발표 직전인 이달 초까지도 한국에 머물렀으며, 지난 4일엔 소설가 황석영씨와 함께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이 주선한 대담을 하기도 했다. 황석영씨는 “르 클레지오와 나는 동년배인데다 생각도 비슷해서 참 좋은 친구로 지내 왔으며 근대와 식민지, 유랑 등의 주제로 십여 차례 대담을 한 바 있다”며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영원한 청년 작가’로서 창작열을 불태웠으면 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르 클레지오는 1940년 남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의 조상들 모두 과거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모리셔스 출신이며, 어린 시절에는 의사였던 아버지의 임지인 나이지리아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그는 전후 유럽을 휩쓴 실존주의와 프랑스의 실험적 소설 운동인 ‘누보 로망’(신소설)의 영향 아래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소설인 <조서>(1963)를 비롯한 초기작들에서 그는 타락한 일상어를 끌어올려 현실의 본질적인 측면을 환기시키려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진 단편집 <열정>(1965)과 장편 <홍수>(1967)와 함께 <조서>는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곤란과 공포를 응시하는 ‘위기 연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르 클레지오는 일찍부터 생태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유럽의 폭력적이고 침략적인 행태를 비판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의 ‘변방’에 있는 존재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 왔다.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지배적 문명 너머와 그 아래에 있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평을 내린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그의 이런 태도에는 모리셔스 및 아프리카에 닿아 있는 개인적 뿌리, 70년대에 멕시코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체험, 그리고 1975년에 결혼한 모로코 원주민 출신 부인의 영향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프랑스 아카데미 대상을 받은 소설 <사막>(1980)은 그의 이런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알제리 출신 이주노동자 랄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에서 그는 북아프리카 사막의 잃어버린 문화를 놀라운 이미지로써 되살리면서 유럽 사회의 추악함과 잔혹함을 그에 대비시켜 비판했다. 르 클레지오는 지난해 가을학기에는 이화여대에서 프랑스 문학비평과 프랑스 시를 주제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역시 지난해 칸영화제 조직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낸 영화 관련서 <발라시네>에는 박찬욱·이창동·이정향 등 한국 영화감독들의 인터뷰도 포함시켰다. 그는 한글 자모를 읽고 쓸 수 있으며 기본적인 단어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대산문화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해서는 전남 화순군 운주사를 방문했을 때의 감흥을 담은 시 <운주사 가을비>를 발표한 적도 있다. 국내에는 데뷔작 <조서>를 비롯해 <홍수> <사막> <섬> <황금 물고기> <성스러운 세 도시> <어린 여행자 몽도> <타오르는 마음> <아프리카인> <혁명> 등의 소설과 영화 산문집 <발라시네> 등 여러 권의 저서가 번역 소개되어 있다. | ||||||||||
르 클레지오 작품
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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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 -
![]()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윤진 옮김/민음사 |
어쨋든 르 클레지오라는 프랑스 작가의 이소설은 카뮈의 [이방인]이후 최고의 문제작이라고 하는데 중간중간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들이 이방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주로 주인공인 아담 폴로의 행동을 근접카메라 기법으로 쫓는 듯이 무미건조한 문체로 이어지는데 중간중간 주인공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아담이 쓴 메모장의 내용등을 그대로 보여주며 단락자체를 공백으로 비우기도 하고 문장에 줄을 긋기도 심지어는 뭉개지워버린 듯한 그래픽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하는등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왜 세상을 등지고 떠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아 마지막장을 덮는 순간까지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세상과의 인위적인 관계속에서 어떻게 생각하면 하찮달 수도 있는 외부적인 요인으로만 규정되어지는 인간실존이란 화두에 대해 이처럼 심각하고 사실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힘들고 내 존재자체도 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자기혐오로 견디기 힘들었던 젊은 날을 돌이켜 보면 나또한 아담폴로처럼 세상과의 인연을 지워버리고 망각의 시공속으로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가.......<kcho>
아침에 번지는 햇살을 무시하기로 한다.
햇빛이 처음 와 닿는곳
누군가의 장례식장이거나, 동물원의 창살들, 멀리 있는 대륙붕, 기린과 고래의 눈동자, 혹은
동백과, 목련의 꽃눈, 모딜리아니의 그림과, 그림속 여자의 나체
햇빛은 어딘가에 처음 와 닿는 순간, 그것의 일부로 존재한다
빛의 미메시스
나는 이미 충분히 저 햇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언젠가 햇빛의 진화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할수도 있을것이다.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일종의 무기력함에 깨어났을때.
나를 닮아버린 빛들을 보았고, 그 빛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목이 많이 뻐근했다.
소통: 그것은 일종의 통증의 기호학이다.
한 감성이 다른 감성을 만나서 느끼는 서로 다른 통증은, 앎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것이기에.
우리는 종종 씁쓸한 어떤 표정으로 헤어지며, 서로를 오해 하기도 한다.
가끔 내가 나를 오해 했을때
그것은 아직도 내 자신과 대화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여전히 외롭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황금물고기
-참된 자아와 잃어버린 뿌리 찾기의 긴 여정’ -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를 읽고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납치되어 자신의 뿌리를 잃고 이리저리 세파에 부딪히지만 끝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자 아이의 성장담을 그린 소설이다. 아무리 보아도 세상의 모진 풍파를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나 불리한 조건에 놓인 가녀린 어린 여자 아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이름이 무엇이고 부모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슴 속에 남은, 아니 이미 납치되는 그 순간부터 무의식 속에 각인된 회귀의 본능은 그녀를 어디에도 뿌리내지지 못하게 하고 육체적인 안식과 정신적인 평안함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끊임없이 붙잡아 두고 곁에 두려하지만 주인공 라일라는 그들이 놓아둔 덫을 피해 더 멀리 도망쳐 버린다.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이어야 정신적인 자유도 담보된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드넓은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물고기처럼, 라일라는 그 어떤 구속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부들의 숱한 그물질을 피해가며 삶을 연장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들 같이 그녀는 힘차게 인생의 바다에서 자기 삶의 시원으로 헤엄쳐 나가는 것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 정체성을 찾고 뿌리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삶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면, 사회적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들의 삶과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다른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르 클레지오는 성적 차별의식과 편견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를 라일라의 고된 삶을 통해 명확하게 보여준다. ‘황금물고기’에서 남성의 부담스런 시선은 성적 폭력의 상징이고 라일라에게 두려움과 역겨움을 주는 근원이다. 그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스스로 찾아내는 빼어난 순발력과 강한 생명력은 주인공의 장점이다. 때론 폭력에 노출되어 남성중심 사회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지만 자기 삶의 주인은 자신일 뿐이라는 강한 주체의식이 언제나 촘촘한 그물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얽매려는 남성들의 시선을 뿌리치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녀가 만나는 여성들은 남성의 폭력 앞에서 무기력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프랑스로 밀입국해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아 남편에게 되돌려보낼 것이라고 언제나 두려움에 떠는 후리야가 그렇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폭력적인 애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몬느가 그렇다. 남편의 구타로 앞니 하나를 잃은 마리-엘렌드도 마찬가지다. 르 클레지오는 자신이 선택하지도 또 원하지도 않은 비애를 겪어야 하는 여성의 삶을 서정성이 짙은 문체 속에서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가난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가난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 또한 그 누구에게나 불편하고 구질구질하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어두운 수렁일 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르 클레지오는 보여준다. 라일라가 조라의 괴롭힘을 피해 찾아든 여인숙에서 ‘몸 파는 여인들’을 ‘공주님들’이라 여기며 그들과 함께 보낸 시기를 ‘삶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하는 것, 밀입국한 프랑스 파리의 낡고 허름한 하숙집에서 마리-엘렌느를 만나 도움을 받는 일, 자블로 거리 지하 아파트에서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가난한 권투선수 노노와 함께 한 삶, 노노의 친구이자 대학자격시험 준비를 도와준 하킴과 하킴의 할아버지 엘 하즈와의 만남, 엘 하즈의 죽음 후에 주아니코와 함께 니스로 내려가 구제소에서 한 경험 등은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삶을 그리고 있다. 이런 삶의 대척점에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게 생활하는 부자이지만 매우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사는 부류도 있다. 부자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들러내는 인물들은 라일라의 순진함을 이용하여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이다. 집에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 늙은이 들라예는 자기 부인이 집에 같이 있는데도 어린 라일라의 사진을 찍고 범하려 한다. 그는 예전에 ‘외교관 또는 장관’이었고, ‘항상 멋지게 차려입은’ 신사였다. 그는 사회적으로 강자임 셈이다. 남자이고 젊었을 땐 권력을 누렸던 사람이다. 그는 그의 시선(카메라)으로 사회적 약자인 어린 여자 아이인 라일라를 탐한다. 그 시선은 ‘어느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고 그녀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 안타까운 것은 권력을 가진 남성만 라일라를 가둬두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여성도 가난하고 힘없는 라일라를 성적으로 억압하고 마치 자신의 인형이나 전리품처럼 소유하려 한다. 병원에서 신경과 과장으로 일하는 프로메제아가 그런 인물이다. 이렇듯 북부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파리로 흘러 들어온 출신이 불분명한 흑인 여자아이는 백인이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프로메제아의 먹잇감이 된다. 나중에 엘 하즈 할아버지가 ‘...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살을 먹는다는 것 말이다. ...’라고 이야기할 때 라일라의 가슴 속에 남다른 큰 울림을 남긴다.
어디를 둘러봐도 탈출구가 없는 꽉 막힌 현실을 꿋꿋이 견디는 라일라에게 진정 위로가 된 것은 음악이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문. ‘황금 물고기’에서 음악은 라일라가 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고 이 험한 세상의 고통을 한 순간이라도 잊는 행복한 순간이다. 여인숙에서 몸을 파는 ‘공주님들’의 노래와 박수 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춤을 추었던 기억, 차 사고로 한쪽 귀를 잃었지만 라디오를 사서 음악을 들었던 일, 파리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집시의 음악이 마음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준 일, 허름한 파리의 하숙집에서 음악과 춤으로 파티를 벌이던 일. 이 모든 상황은 음악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음악이 중요해지는 계기는 시몬느와의 만남이다. 시몬느는 지하철 통로 안에서 ‘아프리카 단어가 섞인 크레올어로 노래’하는 가수이다. 그녀가 노래와 춤에 심취해 아름답다고 느낀 라일라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시몬느에게 털어놓는다. 시몬느도 자신의 처지가 라일라와 같다고 이야기해주고 그 둘은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된다. 시몬느의 집에서 라일라는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운다. 시몬느는 라일라의 몸과 마음속에 음악이 깃들어 있다고 굳건히 믿었고 아프리카 노래를 가르쳐 준다. 그 순간에 라일라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안 좋았던 일들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고 사라짐을 느낀다. ‘시몬느의 음악’이 라일라를 인도하는 곳은 다름 아닌 아프리카이고 그녀가 태어난 곳이다. 이렇게 음악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은 서로 만나 하나가 되고 라일라는 음악을 통해 고향을 보게 되며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 병이 들어 임신했던 아기도 잃고 거의 듣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어도 라일라는 비버리의 어느 악기상에 진열된 피아노에 앉아 연주를 하면서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귀가 아니라 온 몸으로 들으며 왜 그렇게 자신은 음악을 갈망하고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깨닫는다. 그 음악은 자신만을 위한 음악이 아니고 그때까지 만났던 모든 이를 위한 음악임을 고단한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음악임을 확신하게 된다.
라일라는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빠져나오거나 뒤늦게 깨닫지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찾아가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과 굴레에서 벗어난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인한 생명력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가 있었고,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엘 하즈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심어준 귀향의 욕구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뿌리내리고 점점 더 크게 자라고 있었다. 자신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이 어릴 때 납치되었던 그곳에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자꾸 커져만 간다. 마침내 기나긴 여정 끝에 그녀는 자신이 고향이라고 확신하는 아프리카 어느 황량한 거리에 서게 되고 왜 자신이 그 긴 여행을 하고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젠 라일라는 어리고 연약한 여자 아이가 아니다.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했고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너무 밝은 햇살에 세상이 하얗게 보이고, 뜨거운 바람이 부는 텅 빈 거리에 서서 왜 이곳에 왔는지를 깨닫는다. 그러므로 라일라는 자유로운 영혼의 영원한 이름이고 인생의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고 삶이 시작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생명력 넘치는 ‘황금 물고기’이다. 그녀의 앞에는 이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삶만이 있을 뿐이다.
[출처] 황금 물고기 - 르 클레지오|작성자 styjy

침묵
르 클레지오의 글을 읽으면 항상 슬프다.
르 클레지오라는 이름도 슬프고, 침묵도 슬프고, 인간으로 사는 삶도 슬프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이 책을 읽는다.
그가 주는 하나의 희망
<우리는 진화할 뿐, 우리는 침몰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다시 한번 줄을 그으며.....
무한(無限) 그리고 영원(永遠)은 여기에,
우리들 앞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얼굴들의 숲을 건너 질러갔다.
그 얼굴 하나하나에 나를 결합시켰고, 그 얼굴들을 차례차례 거쳐갔다.
그 이름들을, 그 본성들을 하나하나 지녀보았다가 잊어버리면서,
결코 합쳐지는 일을 끝내 보지 못한 것과 합쳐지기 위해 심장부로,
무한한 중심으로 걸어갔다.
있는 것은 타오르는 불의 중심,
끝없이 분열, 분포되는 그 어미세포,
세계 속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하고 있는 그 엄청나게 뜨거운 자궁뿐이다.
나를 세상에 낳은 여자가 또한 나를 죽이는 것이다.
나의 죽음은 나를 헐벗은 모습으로 남겨놓을 것이며
나는 누더기 하나도 건질 수 없게 되리라.
빈손으로 왔듯이 빈손으로 나는 돌아가리라.
내 생의 상처는 나 스스로의 상처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고통과 비명과 행복은 나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세계에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었으리라.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의존한다.
그 어느 것도 독립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또한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 다듬고 헐어빠지게 하는 적극적인 시간,
현실적인 시간은 심연이 아니다.
우리는 진화할 뿐 우리는 침몰하지 않는다.
죽어야 할 모든 것,
사라져야 할 모든 것은 나의 속에,
오직 나의 속에 있다.
침묵은 빈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재가 아니라
모든 리듬, 모든 화음, 모든 멜로디의 무한한 현존이었다.
죽음은 무(無)가 아니었고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제적인 연합이었다.
우리는 침묵하기 위해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글로 쓰지 않는 것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하지 않기 위해서 하고 있었다.
우리는 창조하지 않기 위해서 창조하고 있었다.
우리는 부재(不在)하는 것을,
끔찍하게 현존하는 신비로운 부재를 그리고 있었다.
인간의 표시들 뒤에는 인간이 아닌 것,
결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의 표시가 새겨져 있다.
내가 하나이기를 그치고
내가 하나가 될 때
내가 더이상 알지 못하게 될 때,
나는 인식의 거대하고 지울 수 없는 대해(大海)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의식이란 바로,
그가 단지 하나의 지나감에 지나지 않음을,
그가 태어났던 바로 그 장소로 향한 내일이 없는 지나감임을 아는 힘,
짐작하는 그의 힘이었다.
모든 살아있는 물질은
다시 그의 문을 닫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 그 순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새겨져 있다.
그것이 끝이다.
내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세계는 또한 내 이름을 지우는 세계다.
인간의 단 한가지 위대한 생각은
바로 사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이 세계 속에서 사라져 버릴 방법은 없었다.
생존을 파괴할 방법은 없었다.
무(無)를 찾을 방법도 없었다.
오직 모든 것에게 <존재하라, 있으라>하고 말하는 것이
물질의 거역할 길 없는 계명,
무시무시하고 거창한 계명이었다.
세계는 <그것 자체의 영혼이다.>
오직 있는 것은 그 실체 뿐이다.
내 속에는 언제나 죽어버린 인간이 있었다.
물질로 되돌아간 사고,
싸늘하게 식어서 대지의 지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육체,
허물어진 이름, 해체된 행동들, 침묵으로 환원된 낱말들.
내가 행동할 때마다 파괴했던 인간,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지워버리던 인간인 그대는
한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충실히 그대는 직무를 다했고 내게 절대의 관념을 선사했다.
내게 그 죽음의 흙을 알게 해 준 것도 그대였고,
내 삶의 매순간을 중대하게 만든 것도 그대이다.
타인들 속에서, 비슷한 두 눈과 입을 가진 비슷한 얼굴들 속에서
내가 알아보았던 것은 그대이다.
그 속에 무한히 도사린 채 기다리고 있는 짐승들을,
초목들을, 바위들을, 가스들을 보여준 것은 바로 그대이다.
내 정신의 정신, 내 육체의 육체,
내 생명의 생명이었던 것은 바로 그대이다.
내가 나의 내부에 모시고 있는 신처럼
그대는 싸늘하게 움직임 없는 세게 속에서 나를 피조물이라 명명했다.
그대는 삶에 있어 나의 아버지,
내가 어느 날인가는 되돌아가야 할 죽은 아버지였다.
지금은 헤어져 있으나 내가 장차 한 몸으로 합쳐질 그이였다.
죽음 속에 머물러 있는 나의 그이는 내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내가 무슨 행동을 완수할 때마다,
내게 돌아오라고, 돌아오라고 요구한다.
나의 말 속에서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이 목소리,
말없는 침묵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내게 말한다.
<떠나야 한다......떠나야 한다......그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오너라!>
사랑한다는 것, 미워한다는 것,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지속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처나 쾌락보다 더 멀리에, 삶보다 더 먼 곳에,
비길 데 없는 이 귀환(歸還)이, 세계 속으로의 귀환이 있었다.
불행이나 행복보다 더 멀리에 이 한없는 기쁨이,
영원히 뒤엉킨 이 평화의 전쟁이,
결국 사람이 그것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에
더 이상 풀 수 없는 이 펼쳐진 수수께끼가 있었다.
<침묵> 중에서
르 클레지오 지음 김화영 번역
도서출판 세계사 (1990)

혁명
클레지오의 40번 째 소설 《혁명》은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자전적인 특징이 강하다. 그는 스스로 “여전히 나의 국적은 모리셔스 섬이며, 감성적으로도 모리셔스 섬의 주인”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정신적 모태 모리셔스 섬과 그 섬에 정착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시적 서정성, 서사적 자연스러움과 철학으로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모리셔스 섬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역사적인 관점이 드러나 있고, 작가자신에게 나쁜 기억이 있는 알제리 전쟁에 대한 언급도 이루어진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클레지오의 조상은 대대로 살던 프랑스 서북부의 브르타뉴 지방을 떠나 모리셔스 섬에 정착했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장 마로의 시점에서, 그의 고향인 프랑스 니스 지방을 시작으로 그의 여정을 따라 런던, 멕시코, 모리셔스 섬으로 이어진다. 장님인 카트린 할머니로부터 장 마로는 모리셔스 섬의 추억과 역사를 들이며 성장한다. 장은 할머니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리셔스 섬의 아름다움에 몰입하게 된다.
할머니가 간직한 유품 가운데 장과 그의 선조를 연결 짓는 중요한 물건은 18세기 말에 프랑스를 떠나 모리셔스 섬에 처음 도착했던 그의 조상 장 외드 마로의 일기다. 일인칭으로 쓴 이 일기는 삼인칭 화자가 전하는 장 마로의 여정과 얽히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혁명의 기억을 현재에 되살리고,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섰던 선조의 꿈과 그의 꿈이 하나가 된다.
클레지오의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이전에는 그의 작품을 접한 적이 없다. 그는 40년이 넘는 창작 활동을 해 왔고, 1994년에는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가장 위대한 현존 작가’로 선정된 바도 있다. 연륜과 창작의 내공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고 하니,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나로선 여간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을 좋아해서 작품 발표순으로 하나씩 접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나처럼 책 두께만큼이나 대작이라 할 만한 이 책을 먼저 접하고, 거꾸로 그의 작품 세계를 여행하는 것도 또 다른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은 그렇게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클레지오의 이 작품은 프랑스어 특유의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이 그의 작품에 그대로 담겨 있는 느낌이다. 혁명이라는 비교적 과격한 느낌의 제목이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부드러우면서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그를 이전에 몰랐어도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의 내면적인 상처와 삶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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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의 향기>
아프리카인
『아프리카인』은 현대 프랑스 문학이 살아 있는 신화로 일컬어지는 르 클레지오가 아버지의 사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는 자전적 이야기이다. 평생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라는 인간의 삶을 상상세계 속에서 살려내면서 작가 자신의 정신적 모태인 아프리카 대륙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서정시 같은 작품이다.
<울타리 없는 집> |
물질적 황혼
1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내가 아직 내 생명을 온전히 갖추지 않았을 때, 장차 다시는 지울 수 없는 것이 될 그 무엇이 아직 새겨지기 시작도 않았을 때; 내가 아직 존재하는 그 어느 것에도 속해 있지 않았을 때, 내가 아직 잉태되지도 않았고 그럴 가능성도 없었을 때, 무한히 미세하지만 정밀한 것들로 이루어진 그 우연이 행동을 개시하지 않았을 때; 내가 과거도 현재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미래는 더욱 아니었을 때;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내가 존재할 수 없었을 때; 알아차릴 수 없는 디테일이요 씨앗 속에 섞인 씨앗이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충분히 갈 길이 달라지 있는 그저 단순한 가능성이었을 때. 나 혹은 다른 이들. 남자, 여자 혹은 말(馬), 혹은 전나무, 노란 포두 상구균. 내가 그 무엇에 대한 부정조차도 아니요 한갓 상상조차도 아니었을 때. 나의 씨앗이 광막한 어둠 속에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그 많은 다른 씨앗들과 한가지로 형상도 미래도 없이 떠돌고 있을 때. 영양을 섭취하는 이가 아니라 남의 영양이 되어주는 이였을 때, 구성된 이가 아니라 구성하는 이였을 때. 내가 죽어 있지 않았을 때, 내가 살아 있지 않았을 때. 내가 오직 다른 이들의 몸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었을 때, 다른 이들의 힘에 의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때. 운명이 나의 운명이 아니었을 때. 실체를 이루는 것이 미세한 진동들에 의하여 시간을 따라 온갖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내게 있어서 그 어느 순간에 드라마는 벌어지게 되었던가? 그 어느 남자 혹은 여자의 몸 속에서, 어느 식물 속에서, 어느 바위조각 속에서 나는 나의 얼굴 모습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던가?
나는 숨겨져 있었다. 다른 형상들과 다른 생명들이 나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으니 나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그 가득하고 팽창된 공간 속에서 내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초만원상태였다. 어느것 하나 더 보탤 수가 없었다. 이 기막힐 정도로 정밀한 얼크러짐 속에서, 이 모든 전반적인 조화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가운데 그 곳에 존재하던 그 모든 물질 속에서 일체는 충족 그것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견고하게, 알맹이를 갖추고 존재했다. 오직 그런 것뿐이었다. 내가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그 형상들이며 내가 살지 않고 있던 그 삶이며 내게는 들리지 않던 그 리듬들이며 내가 따르고 있지 않았던 그 법이 그러했다. 어쩌다 생생하게 현전하는지 영원일 수도 있어 보이는 그 완전한 세계 속에서 나의 허무가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나의 것이라고는 그 무엇 하나 출현하지 않았었다. 나의 것이라고는 그 무엇 하나 나타날 필요가 없었다. 이리하여 발생하는 것은 헤아려 분간할 수 없는 어떤 계획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힘차게, 낯설은 외계의 생명은 그 혹을 팽창시켜서 공간을 채워갔다. 불등걸의 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러나 그건 결코 똑같이 불꽃인 법이 없지만, 존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은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존재했다. 존재들이 태어났고 그리고 사라졌다; 끊임없이 분열했고 공허를 채웠고 시간을 채웠고 음미했고 또 음미되었다. 수백만의 눈들, 수백만의 입들, 수백만의 신경, 안테나, 큰 턱, 촉수, 위족(僞足), 눈썹, 발판, 촉각구멍이 이 세상 전체에서 열렸고 물질의 부드러운 발산물들이 그리고 흘러들었다. 도처에 빛과 외침과 향기들, 추위와 더위, 단단한 것들, 영양분들뿐이었다. 도처에 전율, 물결, 그리고 진동들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침묵, 부동, 그리고 어둠. 그것은 마취상태였다. 나의 진실이 몸담고 있는 곳은 저 덧없는 상호소통들 속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그 빛, 그 어둠 속도 아니었고 생명을 위하여 나타났던 그 어떤 것 속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생명들도 나의 생명처럼 어떤 한순간들,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환원시킬 능력이 없는 덧없는 순간들에 불과했다. 세계는 아직 이쪽에, 현실적이고 에워싸는 것으로 그 무엇으로도 귀착되지 않고 사라지기 쉬운 단단함으로, 느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질료로써, 겉으로도 안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그저 그 자체일 뿐인 충만하고 긴 질료로서 존재했다.
체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외된 채 동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무한은 유한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영원은 오직 시간의 토대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 어찌나 먼지 현재가 뒤집힐 정도다. 보이는 것은 오직 옛날에 존재했었던 것뿐. 옛날에 존재했었던 것밖에는 아무것도 엇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건간에 창조의 심연으로부터 나온 그 결과는 원인이 없는 것이었다. 원인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우연의 극소의 운동에 따라 출현했던 것은 어떤 길을 좇아가지 않았다. 운명은 소급능력을 갖춘 환상이었다. 돌연 모습을 나타낸 그것은 어떤 현전의 확인이었으니 거기에다가 기원이나 종말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오직 이런 점은 말할 수 있었다. 즉 침묵에서 나와서 침묵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 말이다. 또 이 점도 말할 수 있다. 즉 침묵이라는 사실 말이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세계는 버려져 있었다. 내가 죽고 나면 세계는 버려져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살아 있을 때 세계는 버려져 있다. 창조된 세계가 한점 불티처럼 빨려들어가 버리는 현기증 나는 깊이, 갖가지 운동들을 익사시켜 버리고 갖가지 행동들을 수천 수억 가지 행동들로 뒤덮어버리는 엄청난 밀물, 도무지 그 한계에서 벗어날 길 없으며 그 속에서는 어느 것 하나 구제될 권리를 갖지 못하는 어마어마하게 광대한 평원. 나는 거기에 없었다. 어느 순간에도, 그 어느 장소에도, 나는 거기에 없었다. 우뚝 속은 나무들은 숨을 쉬고 있었고 잎으로 뒤덮였다가 이윽고 가을이 오자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발정기의 짐승들은 교미를 했다. 태양은 떠올랐다가 졌다. 더위로 흐릿한 대지는 쩍쩍 갈라졌고 비가 오자 씨앗들이 썩었다. 수정들은 녹았고 숲은 화석이 되었다. 어린아이들이 태어났고 대 재난들이 차례로 발생했으니 이는 분지의 표면에 이는 바람의 주름과도 같았다. 허파에는 공기가 가득 들어찼고 피가 사지에 순환했고 신경망이 떨렸으며 내장은 소화 작용을 하면서 흡수하고 배설했다. 산들은 공기와 눈에 닳아갔고 마그마는 화산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사건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졌다가 마침내 그쳤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내겐 나의 몫이 없었다. 나는 심지어 만들어지지조차 않았다.
나는 바로 얼굴 없는 그 시간, 그 장소로부터 왔다. 그 혼돈, 그 고요하고 완벽한 혼돈 속에 나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동안 잠겨 있었다. 무엇보다도 더 가득한 그 공허가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 공허가 나의 살이었다. 그 공허가 나를 창조했다. 행위에 행위를 거듭하여, 결말에 결말을 거듭하여 그것이 내 몸과 내 정신을 태어나게 했다. 형성되면서, 그리고는 해체되면서, 그렇게 태연히, 그러나 열중하여, 그것은 하나하나의 발아한 편린을 제 앞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제 속으로 거두어들였다. 이 질료가 끊임없이 확장되고 짜이면서 그 폭을 늘여갔다. 그리고 이 확장해위는 순수했다. 이렇게 제시된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전에 있었던 것,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무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오로지 존재의 척도를 지닌 것이었고 그것만이 오로지 긍정과 부정을 지녔으니까 말이다. 이 신비가 가장 강력했고 가장 상상불가의 것이었다. 돌연 존재했던 것, 형성되고 있었던 것은 공허를 채우지 않았다. 그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는 그 어느 것도 가능하지 못했다. 심지어 무(無)조차도.
언제나 그 빛이 있었다. 언제나 그 에너지가 있었다. 한결같이, 최대한 먼 곳까지 살펴보아도 항상 그 운동 혹은 그 부동, 그 구상이 있었다.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무한한 견고함이, 총체적인 현전이 있었다. 무엇하러 기원을? 무엇하러 종말을? 실존의 장소는 가이없고 빈틈이 없었다. 행동들의 흐름은 순환현상처럼 결코 시작하기를 완료한 적도 없으며 끝나기 시작한 적도 없다. 그 흐름은 실제로, 똑같이 규칙적이고 갈래 많은 물결에 따라 흘렀고 획득하는 것 없이 그저 나아갔고 내려가지 않은 채 내려갔고 올라가지 않은 채 올라갔다. 그것은 단 하나로 환원시킬 수 없는 수많은 사물들의 행정(行程)이었다. 공연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지며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응집하며 뜻없이 형성되며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건들의 거역할 수 없고 다양하며 만져서 느껴지지 않은 흐름이었다. 내가 없은 채로 나타났던 것이 나타났다. 내가 없은 채로 돌이었던 것, 내가 없은 채로 공기였던 것, 내가 없은 채로 벼락이었던 것, 내가 없은 채로 양서류였던 것, 태양도 대지도 없은 채로 있었던 것, 빛이 없은 채로 있었던 것, 그 모두가 비물질적인 공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전해 있었다. 형언할 길 없는 방식으로 현전해 있었다. 개개의 것은 그 속에 저마다의 무한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한은 몸을 가진 것이었지 어떤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서 벗어날 길 없는 질료의 정확한 공간이었다. 다른 모든 무한들이 표현되어 있는 단 하나의 무한은 물질의 실제적인 울타리 속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하게 존재한다. 무라는 것은 없다. 혹시라는 것은 없다. 창조될 수 없었던 세계의, 결코 생겨나지 않은, 결코 태어나지 않은, 죽어버릴 수 없는 세계의 무시무시하고 영화로운 이미지. 별들이 달리고 있는 싸늘한 공허, 보랏빛 공허, 원자들과 전자들이 움직이고 있는 공허, 무한히 뜨거운 것, 무한히 차가운 것의 공허. 무한히 존재하는 것의 공허: 어떤 누워 있는 거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호흡처럼 우주는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다. 국경선이 없는 나라, 위로도 아래로도, 과거를 통해서도 미래를 통해서도 떠나버릴 수 없는 나라.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고향. 혼자, 혼자인 나라.
이렇게 아무에게도 바쳐지지 않은, 그 어떤 부재에 대항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실,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내가 그것으로부터 나온 비전. 내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나는 태어나지 않은 채이다. 저 벽들 뒤에, 저 다른 도시들 속에,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탄생 이전의 침묵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 나를 압박한다. 어떻게 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던가? 어떻게 나는 여기에는 있고 저기에는 없을 수 있는가! 그러나 우주는 절대확실. 내가 있든 없든 우주는 치밀하여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나는 침묵에 속한 것이었다. 나는 표현되지 않는 모든 것과 혼동되었고 타자들의 이름과 몸에 가려져 있었다. 나는 다른 숱한 것들이 가능할 때 불가능의 품안에 있었다. 나의 말들, 나의 언어는 무가치했다. 나의 생각, 나의 의식은 통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언어로, 나를 배고 나를 창조한 이들의 어휘로 말했다. 나는 거기에, 거의 도처에, 그토록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몸 속에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혹은 더 먼 곳에는 이해되고 싶지 않은 것의 세상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모든 외침들, 그 모든 무용한 말들이 아무 마찰 없이 지워지고 두꺼운 침묵의 막이 다시 내린다. 그 말들은 이르렀으나 이유도 실감도 없었다. 항상 저 불가해하고 견고한 충만으로, 역사라는 얼어붙은 바다로 되돌아가야 한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 거기 알 수 없는 기나긴 밤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은 채, 함게 표현된, 의미 없는 완벽한 판도를 그리고 있는 모든 기호들. 대상을 선택할 필요도 없었고 대상을 골라내어 빛 속에 드러내보일 필요도 없었다. 이 모든 부스러기들이 함께 모아져서 전체로서 동시에 리듬에 의하여, 디테일에 의하여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파괴할 수 없는 그것의 진실을 전시해 보이고 있는 것은 하나인 동시에 여럿인 그 세계, 맹목이되 천 개의 눈이 달린, 무감각하되 천 개의 살갗을 갖춘, 타협할 수 없되 천 개의 기관을, 천 가지 반응을, 천 가지 수준을 갖춘 그 세계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진실 이상이었다. 그것은 일체의 언어를 초월하여 표현된 것 저마다의 불가능한 정체성이었으니까. 그 담배는 그 담배였다. 박테리아와 먼지를 담은 그 물방울은 그 물방울이었다. 그 플라타너스는 그 플라타너스였다. 그 갤럭시는 그 갤럭시였다. 이를테면 단 한가지의 안전성밖에 없었다. 즉 존재하는 것의 완벽함과 소외불가능성 말이다. 변함으로써, 혹은 그 자체인 채로 남아 있음으로써 저마다의 사물은 <충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우주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이 현실은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통용되던 그것이다. 이 침묵은 먼 것이 아니다. 이 공허는 낯선 것이 아니다. 내가 불가능한 상태로 있었던 흙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내가 내 손으로 만지는 것은 그 흙이다. 제로에서 돌연 솟아난 이 물질은 내 몸과 내 정신을 구성하는 그것이다. 내 주변에, 도처에, 이 연약한 빛의 장관 속에, 내 인간세계라는 작디작은 광경 속에 나는 내가 없은 채로 존재했던 저 거대세계의 무시무시한 무게를 알아차릴 수 있다. 내 자율성의 적들이 만들고 있는 탐욕스러운 심연이 사방에서 위협한다. 싸늘한 물질, 단조롭고 고요한 물질, 말이 없는 물질이 도처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나를 노린다. 내 탄생 이전의 세계, 나를 원치 않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 깊이가 없는 심연, 저의 끔찍한 표면을 파먹는 심연, 분산시키지도 소멸시키지도 않고 땅바닥에 붙여만 두는 공허! 침투할 수 없는 세계, 그것 스스로에게 밖에는 다른 그 무엇에게도 쓸 데가 없는 내장. 단 하나의 기관. 나는 무너져 가라앉으려고 하는 작은 섬과도 같은 그 청록색 대양 위에 있다.
나의 밖에 있는 세계, 거대한 장터인 양 내가 절대로 뒤집어놓을 수 없는 세계: 어둠 속, 콘크리트 궁전의 궁륭 아래로 싸늘한 네온불빛들은 저마다 따로따로 빛난다. 열린 입이 숨겨져 있는 한 뼘씩의 땅에서 혼란스러운 부르짖음이 솟아올라 반향하고 다시 튕겨오르고 서로 충돌한다. 확성기들의 광채, 뒤섞인 냄새들, 무수한 운동들이 거기 현전한다. 그것들은 이제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나타내지 않는다. 몇 가닥의 음악이 제자리에서 맴돈다. 멈출 수 없는 광기와 고독의 낱말들. 올라가는 것이 있고 내려가는 것이 있다. 뒤집히는 기구(氣球)들. 끝없는 선로 위를 굴러가는 수레들. 빠지직거리며 타는 불꽃, 끝없이 반복되는 폭발들, 거대한 거울의 무수한 면들에 반사되는 뿌옇거나 핏빛나는 불빛들. 이미 방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모든 것이 뒤섞이고 모든 것이 미끄러져 들고, 모든 것이 교차하는 이 검은빛 속에서는, 이 흰빛 속에서는 선택하고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사람 사는 영역으로 흘러들어가고, 그리하여 이성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살가죽을, 영혼을, 언어를 벗어던지고 태어나지 않은 자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용돌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의 형태 없는 뒤엉킴 속에서, 이제는 싸우기를 그쳐야 할 때다. 여기서 이젠 더 이상 이해할 것이 없다. 더 이상 미워할 것이 없다. 불덩이들이 서로 교차하고 성좌들이 펼쳐지며 빛의 응집된 덩어리가 어지러운 속도로 미지의 한 점을 피한다. 여기서 이제 더 이상 미워할 것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이름 붙일 것이 없다. 유용 무용한 섬광들이 스쳐가는 이 어둠은 그의 놀이를 하고 있다. 이 힘들이 서로 대결하고 수십억 세기가 실린 시간의 덩어리들이 천천히 무너진다. 이 화살들이 공간 깊숙이에까지 날아올라서 희망과 절망의 한계들을 터뜨려버린 다음 어느새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제 더 이상 어름어름 말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사라져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저주는 억누를 수 없는 것. 그것은 생명보다 더한 것. 생명을 가진 파편 하나하나 뒤에는 잊을 수 없는 그만큼의 사막과 포기가 있다. 그것은 어떤 꿈의 추억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태어나게 만든 밤은 끝나지 않았다. 지구 주위에서, 공간 속에서 검은 하늘의 바닥 없는 우물 속에서 그 위력은 마비시키는 힘을 발휘하면서 짓밟는다. 끔찍스러울 만큼 광대한 공허의 무게는 분위기의 궁륭을 펼쳐놓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무거운 구름들처럼, 모든 것이 뜨거운 열기 속에, 탄력성이 있으면서 물렁물렁한 습기 속에 빠져 있는 소나기 많은 날씨처럼, 내가 부재하는, 인간들이 부재하는, 초목과 짐승들이 부재하는 세계의 저주. 그 악몽은 우리들 등뒤에 있다. 숨어 있다. 우리에게 보이는 개개의 사물들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다. 이 무시무시한 혼돈은 한번도 지배력을 거두지 않았다. 그것은 저기,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유리조각들 속에, 거울들 속에, 캄캄한 주철 속에, 시멘트와 대리석 덩어리 속에 그것은 있다. 거기에 있기를 한 번도 그치지 않았다. 거기서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의 불가해한 기원들의 무거운 짐, 삶의 덧없는 광채들 속에 엎드려 있는 공허와 어둠의 폭군이다. 그토록 대단한 태연무심, 그토록 대단한 침착함이 지워져 버릴 수는 없다. 그 평화는 우리의 몸과 정신을 가득 채우고 그 평화가 우리의 혈관 속을 흐르고 근육 속에서 움직이고 공기와 함께 우리의 허파 속으로, 물과 함께 우리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그 절대의 검은색이 빛의 진동과 더불어 스며든다. 저마다의 색깔은 이렇게 하여 부정되고 저마다의 운동은 이 얼어붙은 부동을 그 속에 지니게 된다. 견고한 모든 것, 즐길 수 있는 모든 대상은 또한 증오와 패배의 그 후광을 가리켜 보인다. 대낮의 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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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하늘 한복판에 태양이 불탄다. 미친 태양이 수은의 장막에 구멍을 뚫는다. 그리하여 지구는 눈부시다. 건물의 벽들, 기와나 슬페이트 지붕들, 포장한 길들이 강렬한 빛을 반사한다.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은 그들 주위에서 끊임없이 짓누르고 들이받고 튀어오르고 물결치는 덩어리에 얻어맞는다. 이 획일적인 빛 속에 그토록 대단한 위력과 폭력이 실려 있다. 대기권의 한가운데 있는 그 점으로부터 어찌나 세찬 흰빛이 쏟아지는지 이건 마치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져버린 느낌이 들 지경이다. 극단한 사로잡힘에서 오는 어리둥절함, 무섭고 피할 길 없는 그 빛은 하나하나의 대상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에다가 비길 데 없을 만큼 그것 자체였던 것을 실어놓는다. 열기와 빛의 무게에 짓눌려 세계는 저 나름의 방식으로 경련하며 뒤틀렸다. 그리하여 이젠 더이상 움직이지도, 소리치지도, 신음하지도 못할 것만 같아 보인다. 이런 생명은 생명보다 천 배도 더 강한 것이다. 그것은 무(無)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그것이 모습을 나타내보일 때는 불가능에 의하여 뻣뻣하게 굳는다. 하늘 꼭대기에서 빛나는 성운에 의하여 그 생명은 공허와 연결된다. 혹이 돋고 메말라버린 나무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먼지 덮인 잎사귀들 속으로, 조약돌들 속으로, 꽃들 속으로, 꿀벌과 도룡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거기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즉 생명 이전의 저 미지의 것이 지닌 극한에까지 긴장된 무한한 에너지 말이다. 이 번뜩거리는 비를 맞으면서 땅덩어리가 송두리째 불타지만 소멸하지 않는 그 불덩어리의 힘에 복종한다. 땅덩어리 역시 불꽃 없는 불로 타오른다. 그것은 제 몸을 불태운다. 그 꺼질 줄 모르는 불은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성취되는 행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었던 것은 이름을 갖기 시작하고 나이나 몸이 없었던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문득 솟아나기 시작한다. 창조의 행위는 결코 그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이처럼 끈질기게 계속되는 단단한 물질 속에서 이루어진다. 주기, 계절, 세기, 연대 같은 것들은 이제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있는 것은 타오르는 그 불의 중심, 끝없이 분열, 분포되는 그 어미세포, 세계 속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하고 있는 그 엄청나게 뜨거운 자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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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분만행위에 예속된다. 싹을 틔워 개화시키는 운동은 결코 끝나거나 완료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은 그 심장부에, 그 행위의 한가운데에 생식능력을 갖춘 잠의 마법적인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꿈꾸는 좁으면서도 광대한 공허, 그 누구도 아직은 완전히 입주하지 않고 있는 이상한 집에 잡힌 채로 아직은 잠을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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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의 태양 아래 세계의 탄생. 심연 속에서의 탄생, 천천히 암흑의 벽을 밀어내는 연악한 움직임. 내 눈앞에서 휴식도 없이 이루어지는 탄생. 도시는 바닷가에 펼쳐져 있다. 색깔의 입방체들이 진동하면서 할퀸 상처들처럼 빛난다. 산들이 가볍고 투명한 모습으로 일어서 부유한다. 바다의 파도들이 제자리에서 우글대고 구름떼가 걸려 있고 풀들이 뻣뻣해져 있다. 모진 시선 아래 대지는 칼날처럼 견고하다. 대지는 휴식하지 않는다. 결코 휴식하는 법이 없다. 매순간 켜지고 팽창하고 열중한다. 풍경은 싸늘하면서도 불타듯 뜨겁게 요지부동. 그러나 움직인다. 굽이친다. 강들이 흐르고 연기들이 흐르고 검은 길들이 흐르고 밀밭들이 흐른다. 그늘이 확대되거나 아니면 오므라든다. 갖가지 향기가 기어가는 곤충의 행렬처럼 퍼져나간다. 소리들이 무겁고 낮게 펼쳐지거나 혹은 탑들처럼 하늘에 곧게 솟는다. 모든 것이 빛을 발하고 모든 것이 수백만 개의 머리칼, 화살, 도주, 거센 구멍뚫림이 되어 곤두서고 내닫는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고의적으로> 과거를 향하여 창조의 멀리 떨어진 장소를 향하여 돈다. 폭발이 어떤 결과를 얻게 되어서는 안 된다. 미지의 길 위로 내몰린 입자들은 끊임없이 방향을 달리하는 빛살들을 그리고 그 빛살들은 이미 존재했던 것의 힘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유일무이한 것은 어디 있는가? 최초의 출발의 순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들 속에, 내 속에 말하기가 불가능한 상태로 숨겨져 있다. 그러나 분리되어 떨어져나온 저마다의 몸 속에는 사람들이 그 속에 깃들기를 바랐던, 물질이 분리되어 나오기를 바랐던 싸늘하고 태연한 불의 존재가 담겨 있다. 나의 내면에는, 내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영원히 내가 기억하도록, 항상 그 한 조각 태양이 들어 있다. 그것은 나의 도피행위요 나의 해방이다. 나의 현재 모습은 그것과 더불어 존재하는 모습이다. 나는 멀어져간다. 나는 움직인다. 나는 한 가닥의 물질이다. 그의 물질의 한 가닥이다. 그의 절대적인 불이 말 없으면서도 강하게 내 속에서 타고 있다. 내가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내 밖의 것이 아닌 그 조각은 나에게 빛을 준다. 끊임없이 그것은 나를 미지에서 기지의 세계로 옮겨놓는다. 공허에서 충만으로,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옮겨놓는다. 그리하여 나의 밖에서, 바로 그와 똑같은 이동이 멋지게 이루어진다. 리듬이라든가 시간, 그리고 척도 따위는 그 빛의 광채 앞에서는 어리석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멈추고자 하는 정확한 순간이 아니라 그 끝이 없는 탄생이다. 대지의 태양, 돌과 나무의 태양. 짐승들과 사람들의 태양, 별들의 태양, 그러나 또한 태양의 태양, 태양들의 태양. 모두가 창조충일 뿐 결코 창조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어떤 다른 모터에, 그 몸 속에 감추어진 어떤 다른 모터에 연결되어 있다. 그건 마치 우리가 분간하지 못하는, 그 어디에서 온 것도 아닌, 그 누구를 향해서 온 것도 아닌 어떤 질서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단 한번도 진정으로 표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고 지칠 줄 모른 채 그 출현을 새로이 하는 중이다. 하나하나의 부스러기는 또다른 부스러기에 자리를 내주고 한 방울 한 방울은 떨어져나와 똑같은 방울이 된다. 전, 후, 그런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 혼돈을 고요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조용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치지 않는 전쟁이었고 출산의 출산이었다. 불의 힘에 의하여, 행동과 동시에 그 실패가 단 한 가지 의도인 저 잔혹하고 거역할 길 없는 힘에 의하여 충동받은 물질은 오로지 그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으로서만 존재했다. 대지는 그 계속적이고도 헛된 파열에 의하여 마비되었다. 가장 긴 세기와 가장 짧은 순간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무질서 속에서 파닥거리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일종의 환상에 불과했고 아무런 중요성도 없었다. 내 심장의 고동, 꿈 쾌락, 내 정신의 영상들, 날들, 주일들, 여러 해들이 돌연 번뜩이는 현실의 벽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삶, 이 시대, 이 인간문명들, 이 물건들과 가축들, 변화무쌍한 이 풍경들 모두가 모닥불을 계속 타게 하는 땔감이 되었다. 대지, 흐릿한 하늘, 공허와 별들, 태양들은 너무나도 멀어서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리라. 무한의 저 반대편 쪽에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수미일관했다. 모두가 단 한번의 광대한 불꽃으로 불타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타고 있는 성냥개비의 색깔없는 섬광과도 같았다.
18
이윽고 태양이 삼켜져 사라졌을 때, 비단실의 빛이, 까슬까슬한 끈들을 늘여뜨린 빛이 사라졌을 때, 물건들이 더이상 부드럽지도 아름답지도 그로테스크하지도 않고 그저 잊혀져 알 수 없이 되었을 때, 대지 위에 어둠이 내려 뒤덮였을 때. 마침내 나타나는 것은 맑고 싸늘한 진짜 얼굴이다. 나무들은 이제 더이상 해롭지 않다. 색깔들은 이제 더이상 충돌하지 않고 모서리들이 돌여 눈 속에 파묻힌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다시금 일치를 보이며 고요하다. 운동이 진정되었다. 거리는 전혀 없어졌다. 시간 그 자체도 전처럼 흐르지 않고 지극히 길고 동시에 지극히 빠르게 쉰다. 냄새들이 선명치 않게 되고 소리들이 가늘어진다. 충격, 불지짐, 날카롭고 아픈 면도날이었던 모든 것은 차츰차츰 어렴풋해지고 넓게 퍼지고 닳는다. 태어나고자 했던, 죽지 않으려고 하는 개체, 탐욕스럽고 저주스러운 개체는 천천히 주저앉아 버린다. 이 마비상태가 그를 사로잡고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것이 세계 속으로 물러나 부유하면서 혼란스레 뒤섞이다가 자취도 없어진다. 이 생각들에는 이제 더이상 목적이 없다. 시선은 제 앞에 바닥 없는 심연을 판다. 왜 이런 패배가 온 것일까?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쪽에서는 무시무시하고 엉큼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를 그치지 않고 있었던 알지 못할 그 무엇이 내 속에 있으며 낯선 그 무엇이 내 속에 있는가?
19
그 검은 하늘이 대지의 이쪽 끝에서 저쪽 가에까지 둥글게 휘어진 채 거기 있다.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내 운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담지 않은 채 펼쳐져 있다. 엄청날 만큼 불가사의하고 텅빈 그것이 차디찬 공허로 대지를 지배한다. 어찌나 깊고 어찌나 광대한지 이건 마치 아무런 기복도 없는 색칠한 표면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빛과 어둠이 그 속에 흘러들어 한데 뒤섞인다. 열과 한기가 움직이고 그것을 건너지르지만 그것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시작하지 않은, 그리고 끝내지도 않은 영원한 여행의 자리다. 자명하고 태연한 드러냄의 자리다. 여기 왼쪽에, 혹은 오른쪽에 그것은 현전해 있다. 그것을 앞지를 수가 없다. 그것 속에 있는 대상들, 지극히 작은 불덩어리들, 돌의 낱알들, 천천히 폭발하는 중인 별들은 이 자리를 소유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자리가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 수백만 개의 속이 빈 생명들, 속이 빈 운동들로 이루어진 그것은 실존은 거역할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인 것이다. 이 잉크빛 유리 위에서 별들은 또렷한 모습으로 요지부동이고 빛을 발하지도 않는다. 그 별들 중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감촉할 수 있는 것은, 색깔도 없고 형체도 없는 저 덩어리이고 흐르지 않는 저 물이고 퍼지지 않는 저 공기고 그토록이나 무겁지만 도무지 부딪쳐지지 않는 캄캄하면서도 반투명한 저 강철이다. 소리들은 귀에 들리지 않는다. 더이상 그 어느 것도 혓바닥 위에서 녹을 수 없고 기관 속에서 불타면서 해체될 수 없다. 더이상 그 어느 것도 망막 위에 찍혔던 거칠고도 즐거운, 그리고 또 몹쓸 그 영상과 닮아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실체들은 무한정적으로, 견고함, 부드러움, 부서지기 쉬움, 수증기 등 차례로 하나씩 제거되어야 한다. 바위들이 갈라지고 바다가 찢어지고 불과 용암이 증발한다. 대리석이 슬며시 없어지고 콘크리트가 녹아서 구름처럼 떠다닌다. 생기 있는 공기가 움직이는 열기에 힘을 잃고 공간과 분간할 수 없도록 섞인다. 모든 몸덩어리가 해로운 것이 되어 전혀 경계가 없고 잡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세계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것들은 이 무심한 공간 속에서 선회한다. 서로 헤어지고 서로 만난다. 이 자잘한 불빛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메시지를 보내지만 도무지 가서 닿지를 않는다. 행동들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생각들도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전개를 보인다. 침묵과 어둠의 사막에서 이 모든 생명들이 그들의 미세한 폭발을 무질서하게 일으킨다. 그것들은 밀리미터 단위의 작은 행동들을 온 사방으로 전개한다. 시간들이 서로 혼동된다. 박테리아들과 곤충들의 시간, 인간들의 시간, 올리브나무들의 시간, 석회암, 규토, 망간의 시간, 질소, 탄산가스, 수소의 시간, 미시세계, 거대시간, 무한장소, 미지행동, 모두가 형언할 수 없는 외피에 싸인 채 거기 존재하며 나타난다. 모든 것이 보다 큰 공허, 기울어져 있고 에워싸는 보다 충만한 그 공허에 침투되어 있다. 모든 것이 그 암흑 속에서 날카롭고 요란스럽다. 그러나 저마다 고의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그 장소는 어떤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아니다. 그 장소는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다.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 캄캄하고 성스러운 심연이 유일한 현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무엇을 하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솟아날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살고 그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20
이 진실된 무한이 나를 품었다. 그것이 나의 물질을 저의 물질 속에 품었다. 그리고 다른 물질들을 또한 품었다. 그것은 이 땅과 이 공기를, 이 싸늘한 유성들, 이 태양, 이 별들, 이 성운들을 품었다. 그것은 그 모든 것들을 여전히 품고 있으며, 그의 어마어마한 방기의 품안에 끊임없이, 오래도록 품고 있을 것이다.
21
나는 태어나지 않았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여전히 어떤 결말에도 이르지 않고 있는 밤의 휴식 속에 잠겨 있다. 내 삶의 저 안쪽에 있는 이 잠은 끝날 수가 없다. 그 속에서 온갖 에너지들은 벌써 소진되었고 한편 또다른 에너지들이 솟구쳐오른다. 그 속에서 낱말들은 아직 잠들어 있고 체계들은 꿈들처럼 낙오해 있다. 사람, 미움, 욕망은 피를 흘리기도 전에 이미 아물어버린 그만큼의 상처들이다. 추위, 노쇠, 죽음의 공포가 거기 퇴색한 상보 위에, 수백만 개의 별들 가운데 있다. 그것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었다. 그것은 우리가 벗어날 길 없는 저 무량한 물질의 밀물과 썰물에 불과했으므로. 이 미지 속에는 항상 그 기지가 있었고 이 엄둠 속에는 그 빛이, 이 침묵 속에는 그 소요가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마치 어떤 섬처럼 존재했지만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기숡인지를 더이상 알수가 없었다. 만들어지지 않았었던 것, 살아 있던 것과 해체되어 버렸었던 것이 끔찍할 만큼 한데 뒤엉켜서 더이상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벌것벗은 대상들, 공간 속에 응집되거나 고삐 풀린 듯 회전하는 형상들의 견고함, 현존, 이런 것은 인식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의 몸을 허공으로 열어야만 했다. 세계의 편린 하나하나를 느끼기 위해서는, 그 어떤 빛도 지우지 못할 저 어둠의 공통된 광경을 앞에 두고 자신을 열어볼 필요가 있었고 세계가 그 자명성의 단순소박한 상태 속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나의 무심한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이 되기를 인정하자면 충만하고도 가벼운 그 어둠, 어지럽지 않은 심연이 필요했다. 열기, 미세함, 특수함에 불과한 것이 되기를 받아들이자면 그 차가움, 그 무한, 그 불가역이 필요했다. 한갓 경련에 불과한 것이 되기를 받아들이자면 멈추지 않는 그 여행으로부터 생명과 동시에 온 그 생각, 단 하나뿐인 생각이 필요했다. 몸 속에 그 심장의 박동이, 생명 속으로 내달으면서 동시에 죽음 속으로 내달은 그 숙명적인 고동이 울리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의 끝없는 늪에서 건져올린 이 절대적 현전의 기쁨이 필요했다. 희고 붉은 도살장 속에서 둔탁한 망치질로 예리한 못을 두드리자 못은 황소의 목줄기에 재빨리 들어가 박힌다. 나를 세상에 낳은 여자가 또한 나를 죽였다.(끝)
<출처: 등대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