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林泉十有餘載(소요임천십유여재)/ 10여 년간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사는 선비의 정원에서 소요하다가
丁酉壽七十一而以疾復于家 (정유수칠십일이이질복우가)/정유년(1717년) 나이 71세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갔다.
墓在長城北面巽坐之原(묘재장성북면손좌지원)/묘는 장성군 북면 巽坐에 있다.
配全義李氏通德郞䪫女/배는 전의 이씨로 통덕랑 경의 따님이며
吏判大提學文靖公愼儀曾孫也(이판대제학문정공신의증손야)/이조판서,
대제학 문정공 (石灘)慎儀의 증손이다.
有二男長聖奎次瑞奎(유이남장성규차서규)/두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은 성규이고 차남은 서규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 부정(副正) 익희(益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간(侃)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원손(元孫)이며, 어머니는 정종(定宗)의 현손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며 김장생(金長生)과도 친교가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이어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운 공으로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이어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가 합세하였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광해군의 폭정에 대해 극간하다가 유배되자, 그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 해 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 해 가을 북로(北虜)의 경보(警報)가 있어 변경 일대가 불안하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 해 형조참판에 올랐다. 이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해 강화로 가던 도중 병이 나 인천에 머물다가 수원 마정리(馬井里)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6대조 귀(龜)가 조선조에 들어와 한성 윤을 지냈다. 아버지 원손(元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호는 무하옹(無何翁)이니 세상에서 문장과 훌륭한 행실을 높이 받들었다. 어머니 정부인 이씨는 처인도정 성종(盛終)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 신해년생이고 천계 정묘년에 졸하였으니 수명은 77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습정 민순(閔純)선생을 스승으로 모셨기에 격치의 학문은 그 연원이 유래가 있으니 당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겼다. 너무 어려서 부모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여 16세에 국상(國喪)을 당한 때에 부모의 추복(追服 : 돌아가셨을 때 복을 입지 못한 경우 나중에 복을 입는 것)을 입었다.
선조 때에 숨은 선비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섰고 임진왜란 때에는 향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많이 토벌하였다. 직산현감이 되어서는 관노 한명을 데리고 명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응접하는데 명나라 장수가 탄식하며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광해군 정사년에 완이 의견을 구하니 공은 대순(大舜)의 효를 인용하여 극력 간쟁하여 북쪽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후 형조참판에 나아갔다. 특진관으로 경연에 입시해서는 바른 말을 자주 하였고 군(郡)과 목(牧)을 다스림에는 매번 청렴한 치적이 현저하였으니 이는 실로 공의 학문과 효의와 절행의 대략이지만 우암(송시열)이 지은 신도비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여기서는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다. 숙종 때에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정의 시호를 내렸으며 문봉서원에 배향하였다가 후에 다시 괴산서원에 배향하였다. 부인 정부인 경주이씨는 승훈랑 응룡(應龍)의 따님이다. 말과 기상이 온화하고 부덕이 있었으니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고양 원당리의 동남향 언덕에 장사지냈고 공이 돌아가심에 같은 자리에 별도로 봉분을 하였다. 공의 두 아들은 장남은 선무랑 정길(貞吉)이고 차남은 감역 안길(安吉)인데 난리 중에 죽어서후사가 없다. 딸 둘은 홍계와 박욱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후손이 없다. 선무랑의 세 아들은 호(頀), 참봉 소(韶), 경이고 딸은 수사 조유에게 출가하였다. 호의 아들은 운부이고 세 딸은 정수중, 이배원, 홍도일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소의 두 아들은 운숙, 운재이며 세 딸은 영장 유상로, 최성, 윤태상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경의 네 아들은 운백, 운식, 운익, 운추이며, 두 딸은 양지해, 군수 나중기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조유의 다섯 아들은 방어사 세웅, 첨지 세걸, 세발, 방어사 세성, 세기이고 딸 셋은 병사 이행성, 이만갑, 통제사 김중원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운부의 아들 넷은 집, 옹, 중, 윤이고 두 딸은 안후기, 김승호에게 출가했는데 김승호는 후손이 없다. 운숙의 아들 셋은 광전, 창전, 명전이고 딸은 장극보에게 출가했다. 운재의 세 아들은 최전, 수전, 기전이고 운백의 양자는 도전, 두 딸은 박철, 최면에게 출가했다. 운식의 아들은 효전이고 딸은 김귀서에게 출가했으며 운익의 아들은 덕전이고 딸은 김이황에게 출가했다. 운추의 아들은 여섯인데 도전은 양자로 나갔고, 태전, 후전, 성전, 경전, 복전이다. 내외의 후손들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5대손 상규(相奎)가 기록하고 이광사(李匡師)가 글을 쓴다. 숭정기원후 122년 기사년(영조 25, 1749년) 7월 일에 세움.
李匡師(이학사)
1705(숙종 31)∼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이진검(李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큰아버지인 이진유(李眞儒)가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으로 처벌될 때 이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옮겨졌다. 다시 강진군 약산도로 유배되었고, 1777년에 약산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글씨를 동국진체(東國眞體)라고도 부른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行書四言詩)」(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1746년(영조 22)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畵圖)」(간송미술관 소장),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을 비롯하여 『원교집선(圓嶠集選)』 등의 저서를 남겼다.
첫댓글 행주산성공원에는 남효온.석주 권필 의 대형 시비도 있습니다.
다음편은 이신의 유적지를 올립니다.
전의이씨 석탄공파에도 인터넷족보가 개설되었는데...회원제라서...그것도 석탄공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