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군청이 기록과 직계후손의 얼굴 등을 참고해 2009년 제작해 발표한 영정
조선 후기 『1762년(영조 38) 6월 16일~1836년(헌종 2) 2월 22일』에,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였으며, 실학 사상의 집대성자이자 개혁사상가로 평가되는 학자이다.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 사암(俟菴) · 여유당(與猶堂) · 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이고,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으로 벼슬 살이를 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 · 『牧民心書』 · 『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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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초상'은 진본 영정일까.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개혁과 개방 사상을 제시하면서 파탄에 이른 조선의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오늘날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평가받는 다산이지만 사실 당대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가 관직에 머물렀던 기간도 28세 때 대과에 급제한 이래 정조가 승하하기까지 불과 10년 남짓에 불과했다.
또한 이후 18년에 걸친 오랜 유배 생활 과정에서 국가개혁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힌 목민심서(牧民心書), 형법서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숱한 명저를 남겼지만 그가 살던 시절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다산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팔당댐 인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은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참고 시작]
다산 정약용이 <천자문에 대한 평>에서 “천자문은 어린 아이가 배울 책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천자문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기대승이 5살 때 천자를 다 외우고도 천지현황(天地玄黃)의 본뜻을 몰라 3년간이나 고심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자문은 전후 문맥과 내포된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참고 끝]
다산은 7세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그 자국이 남은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져 큰 형 약현이 '삼미(三眉)'라고 불렀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했고 28세에 대과에서 을과(2등)로 합격해 벼슬길로 나갔다.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참의(參議) 등으로 관직에서 승승장구했으며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의 업적도 남겼다.
강력한 후견인이던 정조의 죽음은 그를 고난으로 내몰았다. 20대 초반 서학(西學)에 심취했던 이력이 빌미가 돼 기나긴 유배 생활에 오른다. 유배지인 강진에 도착해 처음 머무른 곳은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이후 고성사(高聲寺) 등을 전전하면서 예학 연구에 전념했으며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 잡으면서 1000여 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본격적으로 유교 경전을 연구했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이후 1836년 75세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해 실학사상을 완성했다.
아들 정학연은 부친의 대표 저술을 엮은 '여유당집(與猶堂輯)'의 교열을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부탁했으며,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 만인 고종 20년(1883년) 드디어 왕명에 따라 여유당집이 전사(轉寫)돼 규장각에 수장됐다.
다산의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져 왔다.
1974년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다산의 초상화는 충무공 이순신 영정을 그린 월전 장우성의 작품이다.
이 표준영정은 진본 초상화에 근거하지 않은 작가의 창작품이다.
일찍부터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의 생전에 초상화가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다산은 그의 아들, 그리고 양반제자 18명과 중인 제자 6명 등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던 만큼 제자들이 스승의 영정을 제작했을 수도 있다.
한때 정약용의 노년기 모습을 그린 전신상이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끈 바 있다.
문화재 수집가 이원기 씨가 발견한 초상화다.
세로 91.5㎝, 가로 53.5㎝ 크기의 그림에는 '정약용선생초상(丁若鏞先生肖像)'이라는 제명과 '실사구시창시(實事求是創始)' '목민경세대성(牧民經世大聖)'이란 글자가 각각 적혀 있다. 낙관이 없어 화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180여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이 초상화 속에서 다산은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도포를 입은 평상복 차림으로 정좌해 있다.
안광(眼光)이 빛나는 눈매, 각진 광대뼈와 단아한 모습에서 청정한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초상화는 초상화사전에 수록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이후 많은 학술서와 일반 서적에도 진본 영정으로 인용되는 사례가 늘어난 바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진위 여부 논란도 불거졌다. 과연 이 초상화가 다산의 진짜 영정일까.
다산의 현손인 정규영이 1921년 편찬한 사암선생연보(俟菴 先生年譜)에 다산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여기엔 "다산의 얼굴 모양과 수염이 대부분 공재 윤두서(다산의 외증조, 윤두서 자화상은 국보 240호)의 모습을 닮았다.
다산이 항상 말하기를 '나의 정신이나 모습 대부분 외가에서 받았다'고 했다"는 구절이 있다.
윤두서는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안면 전체가 두툼하고 둥근 얼굴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풍성한 구렛나루가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다. 하지만 다산 초상화는 수염이 드물고 얼굴도 길면서 모가 난 형상이다. 또한 오른쪽 눈썹에 있었다는 천연두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 좌우 양쪽에 쓴 글씨도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초상화에는 정약용선생이라고 썼지만 한문으로 기록된 옛 서적에서 성명을 직접 적은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경우 정다산약용, 다산선생, 정다산선생, 다산정선생으로만 쓴다.
초상화라는 단어도 20세기 이후 근래에 유행한 용어이다.
조선시대에는 초상화를 일컬어 진(眞), 영(影), 상(像), 진영(眞影), 진상(眞像), 사진(寫眞)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초상(肖像)이라고 표현하는 예는 없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창시(創始), 목민경세(牧民經世)의 대성(大聖)이라는 글씨도 현대식 표기법이다.
학계에서는 이 같은 모든 정황으로 미뤄 일제시대보다도 훨씬 후대에 이 초상화가 제작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산이 유배를 살았던 지역인 전남 강진군은 다산 현창사업을 추진하면서 2009년 각종 문헌과 다산의 직계 후손 4명의 인상을 참고해 새로운 영정을 제작해 발표했다. 영정은 방대한 독서량과 저술로 인해 시력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해 돋보기안경을 낀 모습이며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진 흔적도 표시됐다.
'정약용선생초상'이라는 제명의 초상화는 도대체 누구의 얼굴을 묘사한 것일까.
▲ 정약용선생초상이라는 제명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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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윤두서의 인상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 진위논란이 제기됐으나
이 늙은 얼굴에 살만 조금 붙이면 젊은 윤두서와 많이 닮아 보인다는
점에서 진품으로 여겨진다.
▲ 정약용이 많이 닮았다는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 윤두서
가문은 정약용의 외가로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 된다.
▲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군청이 기록과 직계후손의 얼굴 등을 참
고해 2009년 제작해 발표한 영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