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서장(宋書狀) ①과우(寡尤)가 먼저 귀국하는 것을 전송하며
의기와 성명 모두 어슷비슷 출중한 분 / 意氣聲名乍後前
삼천 리 밖에 나와서도 한결같이 단란했소 / 三千里外一團圓
떠나올 땐 서리와 눈 시기가 서로 달랐어도 / 差池去國交霜雪
돌아갈 땐 차례차례 한 해를 넘기게 되었구려 / 次第還家換歲年
나란히 날아 ②화표를 건너가진 못하오만 / 不作雙飛過華表
그동안 같은 꿈속에서 ③균천을 들었잖소 / 向來同夢聽鈞天
뒷날 언젠가 이야기할 다리 위의 이 이별 / 河橋此別他時話
밤비 내리는 산골에서 등잔불 돋워 보십시다 / 燈剪山簷夜雨懸
【최립 간이집(簡易集)】에서
① 과우(寡尤) : 송언신(宋言愼)의 자이다.
② 화표(華表) : 요동(遼東)을 가리킨다. 요동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선도(仙道)를 배워 터득한 뒤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고향 땅에 돌아와서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있다가 탄식하며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搜神後記 卷1》
③ 균천(鈞天) : 균천광악(鈞天廣樂)의 준말로, 중국의 궁중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균천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춘추 시대에 조간자(趙簡子)가 5일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균천에 올라가서 광악을 듣고 왔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43 趙世家》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0
간이집 : 1631년(인조 9)에 출간되었다. 『간이집』의 책머리에 장유(張維)의 서문이 있다.
『간이집』 권1은 주(奏) 1편, 봉사(封事) 1편, 진언(陳言) 4편, 공사(控辭) 2편, 투진(投進) 1편, 표전(表箋) 23편, 정서(呈書) 1편, 게첩(揭帖) 1편, 요송(謠誦) 2편, 제문 11편, 상량문 1편, 격(檄) 1편, 책(策) 1편, 평(評) 1편, 설 1편, 비(碑) 2편이 실렸다.
권2에는 신도비 7편, 묘지 3편, 묘갈 14편, 기 8편이, 권3에는 서(序) 39편, 지(識) 8편, 발 11편, 권4에는 사행문록(四行文錄), 권5에는 괴원문록(槐院文錄)이라 하여 중국ㆍ일본과 내왕한 문서와 기타 잡기 등을 실었다.
『간이집』 권6에는 초미록(焦眉錄)ㆍ정축행록(丁丑行錄)ㆍ신사행록(辛巳行錄)ㆍ분진록(分津錄)ㆍ진양록(晉陽錄)ㆍ호행록(扈行錄)ㆍ난후록(亂後錄)ㆍ계사행록(癸巳行錄)이 실렸다.
권7에는 갑오행록(甲午行錄)ㆍ공산록(公山錄)ㆍ송도록(松都錄)ㆍ여강록(驪江錄)ㆍ마포록(麻浦錄), 권8에는 서도록전(西都錄前)ㆍ서도록후(西都錄後)ㆍ환경록(還京錄)ㆍ동군록(東郡錄)ㆍ환조록(還朝錄)ㆍ휴가록(休假錄) 등의 표제 아래 시를 시기별로 분류하여 묶어 놓았다.
권9에는 신도비명ㆍ묘지명ㆍ기ㆍ녹(錄)ㆍ서(序)ㆍ발ㆍ서(書) 등이 실려 있다. 허균(許筠)이 평한 바와 같이 최립의 시는 실로 문보다 더 뛰어났다. 『간이집』 권8에 수록된 「삼일포 (三日浦)」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혀오고 있다.
이 시는 권8의 「동도록(東都錄)」이라는 표제 속에 들어 있는 작품으로, 「청간정(淸澗亭)」ㆍ「금강산」ㆍ「낙산사(洛山寺)」 등과 함께 관동지방 일대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며 경관의 아름다움과 느낀 바를 읊은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간성에서 지은 「관일출시(觀日出詩)」는 금강산 나그네가 자기가 지은 것처럼 친구를 속인 이야기로 유명하다. 『간이집』은 1978년 조용승(曺龍承)이 영인하고 간행하여 배포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이집 [簡易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최립(崔岦) :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 동고(東皐), 본관은 통천(通川)이다. 조부는 최세영(崔世瀛)이며, 부친은 진사(進士) 최자양(崔自陽), 모친은 윤운필(尹芸弼)의 딸 무송윤씨(茂松尹氏)이다. 이사종(李嗣宗)의 딸인 예안이씨와 결혼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말도 잘 못하여 태어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으나 어린 나이에 태학에 들어가 문장이 날로 세상에 유명해졌다. 1554년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국자감시(國子監試), 생원 ·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156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1562년 장연현감 · 옹진현감을 거쳐, 1567년 재령군수로 재직하던 중 구황(救荒)을 잘해 옷감을 하사받았다.
1577년 종계변무를 위해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성천(成川) 부사(府使)를 거쳐, 1586년 이문정시에 수석하여 가선으로 자급이 올랐다. 1587년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으나 송사를 잘못 판결했다는 이유로 논계를 받아 파직되었다. 1589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며, 군직으로 숙위하면서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였고 이후 장단부사 · 전주부사를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오랫동안 승문원 제조를 지내면서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작성하며 제일의 문장가로 꼽혔으며 1594년 주청부사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가서도 문서를 잘 써 칭송을 받았다.
1596년 승문원 제조를 겸하여 사대문서를 전담하였으며, 1598년 공주에 사명을 받들고 갔다가 병으로 복명을 지체하여 체직되었다. 이때부터 개성에 머물다가 평양으로 옮겨 몇 년간 우거하다가 잠시 여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05년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을 완성하고 투진소(投進疏)를 올렸으며, 1612년 고양의 압도(鴨島) 선영에서 74세에 사망하였다. 1631년 이정구(李廷龜)가 신료들과 청하여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최립은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이름을 크게 떨치어 이산해 · 최경창 · 송익필 · 이순인 · 하응임 · 백광훈 · 윤탁연 등과 함께 팔대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최립의 문장, 차천로의 시, 한호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렀다. 행장에 의하면 생전에 저술이 매우 많았는데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2책은 민유중이 간행하였고,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창려문구결(昌黎文口訣)』 등도 모두 당시에 간행되었으며, 『배파록(拜罷錄)』 4책은 집안 대대로 전해졌다고 한다. 사망한지 40년 후에 『간이당유문(簡易堂遺文)』 29권이 출간되었다.
문집으로 『간이집(簡易集)』이 있으며, 시학서(詩學書)로는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초(草) · 목(木) · 화(花) · 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며,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로 일가를 이루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립 [崔岦]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