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출처 http://windy1969.tistory.com/
온 몸으로 동학이 된 사람,동학연구가 표영삼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묵은 음식은 새로 끓여 먹도록 하라. 침을 아무 곳에나 뱉지 말며 만일 길이면 땅에 묻고 가라.… 가신 물은 아무데나 버리지 말라. 집안을 하루 두 번씩 청결히 닦도록 하라.’
1886년, 해월 최시형이 동학도들에게 권한 가르침이다. 흔히 동학하면 혁명이라는 거대한 의미들만 떠오르기 쉬운데, 지도자가 이렇듯 자잘한 일상까지 신경을 썼다는 게 놀랍다. 진짜 혁명이란 피 흘리는 전장이 아니라 이렇듯 작고 사소한 것부터 새롭게 삶의 틀을 바꾸어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콜레라 때문에 온 나라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던 때였다. 다행히 해월의 가르침에 따른 사람들은 ‘동학을 하면 점염병도 피해간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효험이 컸다.
해월은 그런 지도자였다. 모든 사람이 하늘님으로 대접받는 새 세상, 개벽을 꿈꾸는 지도자는 각자의 살림살이와 몸가짐부터 새로워지는 삶의 중요성부터 일깨웠다. 그 방법은 친절하고도 자상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어머니 대지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다며 지팡이도 짚지 않을 만큼 엄격했다. 또 관군에게 잡혀 가는 날까지 새끼를 꼬아 짚신 삼는 일을 놓지 않을 정도로 바지런한 노인이었다. 그런 해월이 있었기에, 마흔 한 살 대구 관덕당 뜰 앞에서 참형을 당한 수운 최시형의 꿈이 단지 한사람의 꿈으로 끝나지 않았다. 동학이 조선 백성의 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지금 우리에게 아득한 전설이나 잊혀져버린 옛이야기쯤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2005년 모심과살림연구소가 마련한 동학공부모임에서 표영삼 선생을 만난 뒤로 더 이상 그것이 전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동학이 여전히 살아있는 삶의 철학이며 세계관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존재와 삶 전체를 통해 말해주는 이였다.
표영삼 선생은 1925년 평안북도 구성군의 동학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를 통해 어릴 때 동학에 입도했다. 독립운동을 이끌던 천도교회 활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한국전쟁 때 월남한 뒤로는 줄곧 동학 연구와 교육에 몸 바쳤다. 그리고 지난 2004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책 <동학1,2>를 펴냈다. 현재 마지막 3권 집필을 마치고 교정교열 작업에 생명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사진은 월간 MOUNTAIN 기자로 있던 남영호님이 찍은 것임. 선생님은 생전에 이 사진을 무척 좋아하셨다.
설을 앞두고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개 다섯 마리와 함께 곰산 아랫자락 점말에 살고 있다. 시골로 이사 온 뒤로 주위에 오갈 데 없는 개들을 받아주다 보니 한 때는 열 마리도 넘었던 식구들이다. 집 둘레 철망으로 울타리를 치고 현관문에는 자유롭게 집안을 드나들 수 있는 구멍까지 내놓아 개들도 사람과 똑같이 주인마냥 활보하고 있다. 사람만 하늘이 아니라 온천지의 생명체계 모두를 하늘님으로 섬기라는 동학, 그 뜻대로 사는 이의 집답다.
영하의 날씨인데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인기척에 놀란 개들이 쪼르르 뛰쳐나와 왕왕 짖어댔다. 무슨 일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어 집안에 들어가 보았다. 선생의 오랜 손때가 묻은 부엌살림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표영삼 선생은 20여 년째 아내 대신 식사당번을 맡아왔다. 한번은 답사 여행길에 예정보다 귀가시간이 늦어지자 ‘돌아가서 저녁 차려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라고 전화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다. 그보다 일곱 살 아래인 아내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들이 학교 다닐 때 아내는 꼭두새벽부터 담도 치지 못한 부엌에서 밥을 짓는데 혼자 늦잠을 자는 게 미안해서 자청한 일이라고 했다.
“처음에 안사람에게 ‘밥 먹어요’까지는 쉽게 되는데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은 참 어려웠어요.”
라고 하던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수도자처럼 보이는 그 역시 자기 아내를 하늘님처럼 섬기는 마음이 몸에 배기까지는 오랜 시간 애를 써야 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은 깨우치고 나서 제일 먼저 아내에게 큰 절을 했다. 뒤를 이은 해월 역시 제자들에게 부인과 아이들을 정성껏 섬기라고 가르쳤다.
선생의 동학 강좌나 답사 모임에 여러 차례 함께 했던 나는 짬짬이 선생이 꾸려가는 살림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우리밀 밀가루를 반죽해 효모를 넣고 부풀려 전기밥솥에 쪄서 빵을 만들어 먹는 이야기며, 다섯 가지 색깔의 야채를 고루 섭취해야 한다며 철따라 먹기 좋은 샐러드와 소스 만드는 법 등은 얼마나 실감나고 입맛 당기던지.
“다른 야채는 모두 생으로 먹지만 당근은 카로틴 때문에 기름에 살짝 볶아 먹는 게 좋아요.”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 못한 일이었다. 작년 여름 경주 인근으로 답사를 떠나는 차 안에서는 ‘요즘 식사 준비를 간단히 하려고 비빔밥을 자주 하는데, 밥을 고슬고슬 윤기 있게 짓기 힘들어요.’라고 했다.
“선생님, 그럼 밥물에 다시마 한 장 넣어 보세요.”
나는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을 뿐인데, 나중에 만났을 때 ‘정말 그렇게 하니까 밥에 윤기가 돌아 좋았어요.’ 라며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밥 짓는 일 하나에도 온 정성을 다해 공부하는 자세가 몸에 밴 그였다. 하긴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하늘님과 온 우주의 이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라고 동학은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랬던 선생이 더는 부엌살림을 즐기지 못한다. 순간 마루 벽에 붙여 놓은 메모가 보였다. 사람 눈에 잘 띠도록 써 붙인 종이에 ‘사망사고 후’라고 쓴 선생의 글씨였다. 대학병원 전화번호를 적어 놓은 필체가 떨린 것도 같았다. 그는 오래전 아내와 의료 연구용으로 시신기증을 약속했다.
“어제는 병원에 전화해서 죽기 전에 우리가 뭘 준비해야 하냐고 꼼꼼히 물어봤어요. 정신이 말짱할 때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고맙게도 우린 아무 신경 쓸 게 없다는군요.”
두어 해 전, 그는 시신기증을 약속한 대학병원과 통화한 이야기를 무심한 듯 건넸다. 젊은이들을 이끌고 동학유적지를 찾아 먼 길을 나설 만큼 건강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찾아올 죽음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평생 동학을 하며 살아온 사람다운 다짐이었다.
“이 세상 저 세상이 따로 없어요. 동학은 사후세계를 부정하지요. 오로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드는 게 동학의 꿈이에요. 육신이 죽으면 그걸로 끝인데, 마지막 가는 길에 몸뚱이라도 좋은 데써야지요.”
담담하던 기다림이 이제 절박해진 것 같다. 그는 최근 부쩍 ‘3년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안타까워했다. <동학> 3권 집필을 마치고 나면, 동학 경전들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고 싶어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홀로 길 없는 길을 찾아 며칠씩 산을 넘어 가며 전설과 소문의 흔적을 더듬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난 노인들의 증언을 기록해 동학의 역사들을 복원했다. 지금처럼 차를 타고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있는 그런 답사가 아니었다.
“엄동설한에 보따리 하나로 쫓겨 다니던 대신사님의 심정을 느껴보려고 일부러 그때 날짜에 맞춰 찾아가 보곤 했어요. 그때의 고절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어렵게 찾은 유적지들을 요즘 사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것도 그의 남은 꿈이었다. 힘닿는 대로 다시 전국을 답사해 사진도 새로 찍고, 옛 자료들도 디지털화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를 새로 사고, 사진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 여든 살 때의 일이다.
2007년 선생님을 모시고 경주 부근 동학유적지 답사를 다녀왔을 때 김선미가 찍은 사진. 새 디지털 카메라를 사시고 동학의 묵은 자료들을 복기하는 일에 한창 열성이셨다.
선생은 영원히 그렇게 청년 같을 줄 알았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담즙이 막혀 소화를 못시키게 되면서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뒤로도 천도교에서 연 동학강좌에 매주 출강을 했다. 용문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인사동 수운회관까지 결코 짧지 않은 길을 매주 오간 것이다. 기력이 쇠해져 강의 시간을 줄이고 의자에 앉아서 겨우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는데 그는 그것을 몹시 미안해했다. 그래도 강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일어서서 학생들을 향해 깍듯이 절을 했다. 그는 늘 그랬다. 초등학생인 우리 딸아이 앞에서도 언제나 허리를 굽혀 공손히 절을 했고 존댓말을 썼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정말 하늘님처럼 공손히 모시는 자세는 그가 가장 존경하던 소춘 김기전 선생으로부터 배워 익힌 것이라고 한다. 김기전은 방정환의 스승이자 어린이운동을 이끌었던 동학의 지도자였다. 표영삼 선생은 그를 가리켜 “언제나 만나고 싶고, 뭐든 가져다 드리고 싶고, 같이 있으면 계속 곁에 머무르고 싶은 분”이었다고 했다. 김기전 선생을 만나본 적 없는 나는 표영삼 선생이야말로 그런 사람이라 생각할 뿐이다.
양지바른 뜰에 나와 무작정 주인을 기다렸다. 한 달 전만 해도 우리 부부에게 큰 절로 맞절까지 해주던 어른이 그새 다시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문득 그때 사모님이 내준 대봉 감이 생각났다. 방안에서 한겨울을 난 홍시가 껍질이 쪼글쪼글해져 있었는데 달디 달았다.
“서울서 올 때 워낙 아끼던 나무라 우리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가지를 잘라내고 뿌리를 동여매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잘 자라 이웃에 나눠 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감나무 북방한계선 훨씬 이북일 것으로 여겨지는 추운 산골로 이사 온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때까지 두 부부가 쏟은 정성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다.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라는 시에 ‘나무는 자기 몸으로 / 나무이다 /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표영삼 선생도 자기 온몸으로 동학이 된 한 그루 곧은 나무다. 가만히 둘러보니 그의 집 뜰 안 곳곳에 심어진 겨울나무들 가지 끝마다 봄눈이 오르고 있었다.
그때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선생이 오래된 홍시처럼 쪼글쪼글 수척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책 백 페이지… 집에 가서 백 페이지를 마저 교정봐야 한다고 통 잠도 못자고… 그래서 그냥 모시고 왔어요. 인제 원 없이 하고 싶은 거 하시다 가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모님 곁으로 일제히 개들이 달려들었다. 한 마리씩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고 입을 맞추며 “그래, 이쁜 내 새끼들 엄마 없어서 얼마나 힘들었어.” 하는데 비로소 집도 웃고 사람도 웃는다. 구급차 침대 위에 누워, 서울에서 양평까지 통 밖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 달려 왔을 선생도 겨우 웃는다.
“선생님, 집에 오시니 좋으시죠?”
“예. …팔당을 건너 온 것 같아요.”
그가 어렵게 한마디 했다. 팔십 평생 건너온 동학이라는 거대한 물길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살림>지에서 처음으로 만나고 싶어 했던 표영삼 선생은 이런 이유로 더는 인터뷰를 계속할 수 없었다.
“인제 그만 와요. 우린 돌아가셔도 아무데도 연락 안할 거예요. 봄 되면 그때 마당에 핀 꽃이나 나눠줄 테니 놀러오고. 다행히 일어나시면 내 밥 해줄 테니 같이 밥이나 먹어요.”
길가까지 배웅 나온 사모님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간 여러 번 찾아와도 반갑게 인사만 할뿐 일절 선생의 손님 드나드는 일에 관여하지 않던 분이다. 요사이 어떤 젊은이들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이던 평등한 부부였다. 나는 이 집에 오면 늘 선생이 직접 끓여 주는 차를 마시곤 했다. 그런데 이제 사모님이 밥을 해주신다고 한다. 정말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와 부엌 창틀 앞에 말려 둔 감 씨앗들을 만져 보았다. 가늘고 길쭉한 갈색 씨앗이 햇살 아래 맨질맨질 윤이 났다. 사모님이 싸주신 감을 먹고 씨를 차마 그대로 버릴 수 없어 발라 둔 것이었다.
“우리는 저 아득한 처음의 씨, 우주가 처음 생기고 첫 부모님의 씨앗의 씨, 그 생명의 씨가 이어져 오늘의 내가 생긴 거예요. 그런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감격스런 일이죠.”
선생이 강의 때마다 즐겨한 말이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툭’ 던져진 생명의 씨앗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갈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이 가장 생명다운 것은 언제든 지금을 부정하고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선생의 씨앗은 지금 가장 크게 자신을 부정하며 새 틀을 준비하는지도 모르겠다. 씨앗이 스스로를 부정하면 새싹이 올라온다. 그게 봄이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님 묘에서 내려오는 길 김성희가 찍은 사진. 앞서 걸어내려 가시는 선생님과 나.
*2008년 3월 <살림이야기> 창간 준비호에 쓴 글을 다시 편집함.
삼암장 표영삼 선생님은 2008년 2월 13일,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가 실릴 책이 막 만들어질 즈음, 고요히 환원하셨다. 선생님 마지막 가시던 모습에 대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언제고 다시 이곳에 풀어놓을 계획이다.
|
첫댓글 저희 김교수님께서 얼마전에 삼암 표영삼 선생님의 책을 주셨습니다..^^ 제가 햇병아리라 아직 모르는것이 많으니,,,배우라고 주신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수 있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