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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보선원卍 원문보기 글쓴이: 모봉형진
세속의 행복은 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자기는 열심히 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돈만 노리고 있다가 훔쳤습니다. 자, 악업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경전강의 시간에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대답은 당연히 후자입니다. 나는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던진 것이 좀 미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강생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는데 참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머쓱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악업을 지은 사람일까요?”
나는 다시 한번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외로 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돈을 번 사람이 죄인입니다. 남에게 훔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으니까요.”
난 내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진짜요? 진짜로 돈을 열심히 번 사람이 죄인입니까?”
“네.”
사람들의 얼굴표정은 그제야 밝아졌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니 그 죄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불자들은‘돈을 번다는 것’,‘ 내가 행복하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타인에게 미안해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어도 그런 사실을 대놓고 말하기를 꺼려하고, 집안이 화목한 것도 남들에게 몹시 미안해합니다. 아마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라는 마음 다스리기의 법문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요, 너무 행복해하면 꼭 그것을 시기 질투하는 어떤 잡귀가 있기에 삼가려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사실 경전을 보아도 부처님은 온통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법문만 늘어놓습니다. 한순간에 사라진다느니, 그건 화를 불러오는 재앙이라느니, 영원하지 않다느니….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말씀들은 대체로 출가 수행자에게 하신 법문이고, 또 정당하지 않은 수단으로 재물을 긁어모은 이들에게 하신 법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잡아함경>을 보면 부처님은 재물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정당하게 돈이나 재물을 구하고 그것을 보시해서 복을 구하라. 남에게도 베풀고 자기도 누리며 또 그것으로 복덕을 지어라.”
경전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부처님이 돈벌지말라는 말씀을 하신 곳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좋은 일 많이 하라고 일러주십니다.
앞서 언급한 수강생들의 대답대로라면 부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권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재물이란 것을 맑고 서늘한 연못의 물과도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퍼올리고 써야지 물이 마르지 않듯이 재물이란 것도 부지런히 벌어서 자기도 열심히 쓰고 남을 가엾이 여겨서 자꾸만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넓은 들판에 맑고 서늘한 연못이 있어도 그것을 즐겨 퍼 올리는 이 없으면 이내 고스란히 말라버리고 만다. 이처럼 훌륭하고 값진 재물도 나쁜 사람이 지니게 되면 자기도 쓰지 못하거니와 남을 가엾이 여겨 베풀지도 못하여 부질없이 스스로 괴롭게 모으기만 하고 그렇게 모았다가는 저절로 잃고 만다.”
게다가 열심히 번 돈으로 그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행복을 누리라는 당부의 말씀도 하고 계신다는 사실, 여러분은 알고 계셨습니까?
“많은 재물을 얻으면 자신도 쓰면서 즐기고,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와 친척들을 돌보고 자기가 부리는 사람들도 도와주고 벗에게 보시하며 수행자들에게 공양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몇 배나 큰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재물 얻으면 자신도 즐기며 잘 쓸 줄을 알고, 널리 보시해서 공덕도 지으며 친척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베푼다.”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만, 그리고 그 행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아야지만 다른 이의 행복도 빌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넘쳐흐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한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남에게 베푼다구요? 그래서 남이 행복해지면 그것 역시 죄가 아닙니까?
남의 것을 빼앗아서 얻은 즐거움, 여색에 빠지거나 그릇된 대상에 탐닉하는 즐거움은 부처님이 권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만 명심하면 될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내 가족이 행복하게 잘 사는 일- 이것은 결코 죄도 욕심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아함경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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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어머니의 눈물
나라에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어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 나라의 풍속에 의하면 죄인의 목은 전다라족 사람이 베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죄인의 목을 자르기로 되어 있는 전다라 족 사람은‘공교롭게도’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서 와서 죄인의 목을 쳐라.”
이렇게 명하는 왕의 사신에게 그 전다라족 사람은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을 자르는 일은 꼭 내가 아니더라도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제 몸은 비록 임금의 명령을 받고 있지만 제 마음은 언제나 거룩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이 왕에게까지 전해지자 왕은 크게 노하여 그를 불러 준엄하게 질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미천한 사나이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벌레 하나의 목숨도 해치지 말라고 하셨는데 죄인이 아무리 극악무도 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네가 그토록 고집을 부려 죄인을 죽이지 않으면 네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텐데…?”
“대왕이시여, 제 몸은 대왕께서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만은 비록 저 하늘의 제석천왕이 명령한다 하여도 따를 수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만 이성을 잃고 노하여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그 남자의 아버지와 여섯 형제를 모조리 끌고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저 오만방자한 녀석이 감히 왕의 명을 어겼다. 그러니 너희들이 대신 저 죄인의 목을 쳐라.”
왕은 그 남자의 아버지에게 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거부하였습니다. 곧이어 그의 형제들에게 명하였습니다. 그들도 하나같이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왕은 그 사나이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목을 베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막내가 남았습니다.
“자, 어떠냐? 너라도 죄인의 목을 쳐라.”
막내 동생은 자기도 왕의 명을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였습니다.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소리쳤습니다.
“이 자도 끌고 가서 죽여 버려라.”
이때 이들 일곱 형제의 어머니가 왕을 찾아왔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왕에게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대왕이시여, 제발 이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단 하나 남은 제 막내아들입니다.”
왕은 노파의 이런 애원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죽은 아들 여섯도 모두 너의 친자식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는 잠자코 있다가 왜 지금 와서 일곱째 아들 하나만큼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냐?”
늙은 어머니의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대왕이시여, 앞서 목숨을 잃은 아들 여섯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으면서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 죽는다 한들 제 마음에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막내아들만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범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생명이 위태롭다고 느끼면 나쁜 생각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간절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 아들의 목숨만은 구해주십시오.”(<대장엄론경> 제8권)
십대 아이들이 또래 여자 아이를 감금하고 밤새도록 폭행하여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렸다는 뉴스를 막 접하였습니다. 저는 흥분한 나머지 “저런 못된 애들은 그 부모를 잡아다 혼내 줘야해”라고 말했습니다. 함께 뉴스를 보던 남편은 이렇게 대꾸하더군요.
“아마 어떤 부모는 이미 내놓은 자식이니 내책임 아니라고 할지도 몰라.”
물론 위의 경에서는 극악한 범죄자의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도 틀림없이 경찰서로 불려갈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말을 할까요?
“다 제 잘못입니다. 부모인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라는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니, 응?”하며 자식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제발 그들의 입에서“더 이상 내 자식 아니니 법대로 처리하시오”라는 말만큼은 나오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식의 삶 그 자체를 가엾이 여겨 눈물을 흘리는 그 늙은 어머니의 애원을 듣고 싶습니다.(동국역경위원 이미령)
불교교양대학을 다니는 시간은 가장 다채롭고 푸짐하게 펼쳐지는 부처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아주 귀한 기회이다. 생각해보자. 내가 언제 어디에서 그토록 다양하고 심오한 법문을 두루두루 다 챙겨들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교양대학을 짧게는 2, 3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다니는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불교가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거기서 뭐 배우셨어요?”하고 물어보면 민망한 듯 씩 웃고 만다.
혹시 지금이라도 누가 불교에 대해 물어볼까봐 겁이 나는 불자들이 있다면 다음의 몇 가지를 참고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번 실천해본다면 좀 더 효과적인 공부가 될 것이고 교양대학에 투자한 돈과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첫째, 불교교양대학의 강좌 중에 초심자 위주의 기본교육은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하여 소홀히 여기면 절대로 안 된다. 기본교육(기초교육)은 말 그대로 기본을 가르치는 단계이다. 그런데 기본이란 것은 전부이기도 하다. 그 속에 불교의 전부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기본교육 교재도 밑줄을 그어가며 어려운 단어를 찾아가면서 꼼꼼하게 읽어가야 한다. 그 책 한 권속에 팔만대장경과 2600여년의 불교역사와 문화가 다 들어 있다.
둘째, 쉽고도 명쾌하게 강의를 하는 강사(법사)를 따라다니며 그의 강의는 다 챙겨 듣자. 그렇다고 흥미위주의 강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몇 번 듣다보면 강사의 쉬운 강의가 깊이 있는 내용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쉽고 재미있는 말로 가볍게 설명을 해도 그 내용이 찌릿찌릿하게 자신을 흥분시킨다면 그 강사는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법사이다. 그런 사람은 책도 몇 권 내었고 신문이나 잡지에도 글을 싣는다. 반드시 챙겨 읽자. 그리고 이메일주소나 전화번호, 홈페이지를 알아내어서 항상 질문을 하자. 단, 즉흥적인 질문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여 자신의 질문을 잘 다듬어서 던져보자.
셋째, 경전 강의의 경우, 커리큘럼대로 듣기는 하되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전을 반복해서 듣자. 경전 하나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대답은 ‘평생’이다. 팔만대장경을 다 읽을 생각은 아예 그만 두자.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아예 없다. 그렇다면 평생을 걸려서 겨우 경전 하나 이해하는 걸로 만족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경전 공부하는 마음가짐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경전이란 ‘읽어버리는’ 문자와 종이가 아니라 ‘읽어가는’ 마음의 책이다.
평생 한 권의 경전을 읽고 이해하며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삶은 가장 불교다운 삶이 되었다는 말이다. 쉽거나 차원이 낮은 경전은 없다. ‘어서 빨리 금강경을 읽고 화엄경도 읽고 능엄경도 읽어야 하는데…’ 이런 조바심을 가지는 사람은 절대로 불교공부를 할 수가 없다. 나는 누구에게나 아함경을 가장 먼저 권한다. 하지만 이미 대승경전을 공부하여 오랜 세월 살아왔다면, 그리고 대승경전이 나에게 더 감동을 준다면 단 한 권의 대승경전을 평생의 공부꺼리로 삼기를 권한다.
그리고 서점에 나가서 그 경전을 쉽게 풀어쓴 해설서는 다 사서 읽어보자. 대부분의 불자들이 접하고 있는 경전은 다양한 해설서가 이미 시중에 나와 있다. 강사에게 물어보거나 여시아문이나 운주사와 같이 불교서적을 총판하는 곳에 문의하면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넷째, 불교가 누구 덕분에 우리에게 왔는가?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토론하고 우여곡절을 겪은 이야기들이 ‘불교’다. 부처님이 어떤 삶을 살았고 누굴 만났고 누구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셨는지 잘 모르면서 불자라고 할 수 있는가.
부처님의 일대기에 관한 책은 제법 많이 나와 있고 하다못해 만화책도 다수 있다. 만화책이라고 하여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경전만큼이나 감동을 안겨주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아, 부처님’하고 소리 내어 명호를 부르게 만드는 장면이 만화 속에는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어느 정도 꿰고 있는 사람이라면 불교의 70%는 이미 소화해내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다섯째, ‘나’를 교재로 삼아야 한다. 연속극 보듯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강의를 듣고 있는 자기 자신이 바로 교재요, 경전이다. 집착을 버리라는 내용을 듣고 있으면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인가보다’하고 생각하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자기 몸과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자기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대체 자기에게 가장 강한 집착이 무엇이고 가장 약한 집착이 무엇인지 정도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불교공부이고, 그런 사람만이 불교공부의 우등생이다. 그리하여 한 강좌가 끝나면 내가 변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자기가 어떤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교양대학의 공부는 그냥 공부이고, 기도와 수행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삼천 배를 해야지만 수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삼천 배가 없었다. 염불을 하는 것만이 수행의 전부가 아니요, 경전을 수천 번 수만 번 베껴 쓰는 사경도 수행의 전부는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양한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그날 배운 내용 중에 자기가 가슴에 담아두고 숙제로 삼을 구절을 하나 챙겨보는 것, 그리고 그 구절을 자꾸만 생각하고 되새겨보는 것도 다시없이 중요한 수행이다. 그리하여 몇 년의 교양대학 공부를 마친 뒤 노루꼬리 만큼이나마 자기를 들여다볼 여유를 챙기고 변화된 자신을 느낄 수만 있다면 어쩌면 이것이 부처님의 공부방식과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불광 3월호-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베살리 도시에 암라팔리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신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좀 분분합니다만 자신의 미모를 팔아서 큰 돈을 번 여인이라는 점에 대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어느 날 자신의 소유인 암라팔리 동산에 부처님이 5백 명의 비구들과 함께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게 차려입고 수레를 타고서 부처님을 뵈러 동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좋은 가르침을 받은 뒤에 다음 날 자신의 집으로 부처님과 5백 명의 비구승을 초청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초대를 받아들이자 그녀는 기쁨에 들떠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도중에 그녀는 그 도시의 이름 있는 집안의 청년들 5백 명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려고 동산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청년들은 부처님 계신 동산 쪽에서 여자가 급히 수레를 몰고 나오는 것을 보자 좀 언짢아졌습니다. 그녀가 암라팔리인 것을 알아채고서 위엄 있게 짐짓 물었습니다.
“그대는 여자라면 수줍게 지내야 할 것인데 어찌 거칠게 수레를 몰며 성 안으로 달려가는가?”
암라팔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일 부처님과 비구스님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양 준비를 하려고 서둘러 성안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청년들은 안색이 바뀌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 도시에 온 부처님을 가장 먼저 초대할 영광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암라팔리에게 말했습니다.
“순금 천 냥을 주겠다. 내일의 공양을 우리에게 양보해라.”
“싫습니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청년들은 돈의 액수를 점점 올렸습니다. 급기야 백천냥의 금화를 주겠다고까지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암라팔리는 완강하였습니다.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언제나 ‘세상 사람은 두 가지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 두 가지란 재물에 대한 희망과 목숨에 대한 희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목숨을 내일까지 보장하겠습니까? 누가 나의 재산이 영원하리라고 약속해주겠습니까? 만약 당신들 중에 그것을 보장할 사람이 있다면 내일의 초청을 양보하겠습니다.”
500 명이나 되는 청년들 가운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내일 일을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암라팔리는 청년들에게 그 한마디를 던진 뒤에 공양 준비를 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갔습니다.(<증일아함경> 제10권 19.권청품)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참으로 다양한 기회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인생의 굽이굽이를 돌 때마다 훈장도 주고 상처도 주면서 우리를 키워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떤 기회가 닥쳤을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조차 모른 채 그냥 흘려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라면 적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행운을 다른 이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부처님을 만나는 일이고 법을 듣는 일일 것입니다. 선업을 쌓고 복을 지어서 돌아오는 과보라면 함께 나누고 양보해야겠지요. 하지만 내 어리석음의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기회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여러분들과 만나 부처님 말씀을 나누게 된 이 기회가 지금 저에게는 참으로 크나큰 행운입니다. 글을 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예전에 흘려보냈던 부처님 말씀을 곱씹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에게 찾아온 이 행운을 축하하고 격려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대장경의 바다에는 지금 황금 비늘 반짝이는 싱싱한 부처님 말씀이 힘차게 노닐고 있습니다. 저는 힘껏 낚아올려 여러분의 품에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경전, 열한 번째 이야기 - 경전의 꽃, 경전의 왕-법화경
1) 법화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 - 예언
법화경, 정식 이름은 묘법연화경입니다.
‘경전의 꽃’, ‘경전의 왕’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경입니다. 그런 애칭에 걸맞게 대부분의 불자들은 처음부터 법화경을 펼쳐 읽지는 않습니다. 본래 최고 스타는 가장 나중에 무대에 나오는 법인 것처럼 법화경 또한 나중에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이지요.
사실 법화경을 읽어보면 뭐 그리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괜히 지나치게 부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법화경 아니라도 매우 깊고 깊은 마음의 경지를 설명한 경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굳이 이 법화경을 경전의 꽃이라느니 경전의 왕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한 마디로 말해서 법화경은 진짜 부처님의 속내를 털어놓은 경이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지요? 부처님의 속내가 무엇인지….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 하나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주 똑같은 지혜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부처요, 저도 부처라는 것입니다. 이게 부처님의 속내입니다.
법화경에서는 데바닷타에게도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데바닷타가 누구입니까? 교단의 화합을 깨고 부처님을 해치려고까지 한 극악무도한 사람 아닙니까? 물론 이런 인물평에 대해서는 후대의 학자들이 깊이 연구한 결과 너무 지나쳤다는 반성이 일고 있기는 합니다만 법화경이 문자로 기록되던 당시에는 가장 혹독한 지옥에 떨어지고도 남을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조차도 나중에 부처가 된다고 하니 저와 여러분이 어찌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 글을 읽는 순간 “에이, 뭐야. 싱겁기는…”이라며 피식 웃어버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마도 “나같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뱃속 가득 차 있는 중생이 무슨 부처란 말이야? 놀리는 것도 아니구….”라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인생이란 (1)
해인사를 아시나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명찰로서 손꼽히는 해인사, 화엄사, 부석사, 범어사, 갑사 등은 모두 화엄사상을 표방하고 있다.
뿐이랴! 높다란 산봉우리들 중에서 최고봉을 일컫는 말이 비로봉일진대, 그 비로봉은 ꡔ화엄경華嚴經ꡕ에 등장하는 최고의 부처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서 나온 말인 것을 보면 화엄 불교가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력은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토록 우리 마음속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화엄이란 무엇인가?
화엄華嚴이란 진달래, 개나리, 연꽃, 장미, 들꽃 등 갖가지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뜻으로, 이를 일러 잡화엄식雜華嚴飾이라 한다. 보잘것없는 이름 모를 풀꽃들은 물론 소담스럽고 탐스러운 가지가지 꽃들로 아름답게 꾸며진 부처님의 도량 내지는 불국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을 화장세계華藏世界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갖가지 꽃들을 들이댄 이유는 그 정도로 아름답다는 비유이지 실제로 그렇게 꽃이 만발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세계와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정진하는 인간의 행위가 그 정도로 아름답다는 얘기다. ꡔ화엄경ꡕ에서는 그 두 가지를 해인삼매海印三昧․화엄삼매華嚴三昧의 세계라 일컫는다.
해인삼매란 광명의 부처님이라 불리는 비로자나불의 삼매 속에서 펼쳐진 세계를 말하는데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합천 해인사의 ‘해인’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광활한 바다에 바람이 그쳐 이리저리 크게 일렁거리던 파도가 잔잔해지면 햇빛이며 달빛을 비롯해 산과 강 등 온갖 삼라만상이 그대로 해면에 나타나 그것이 마치 바다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해인海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청정한 마음의 바다에 온갖 번뇌의 풍파가 소멸되었을 때, 그 잔잔한 마음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들이 다 투영되어 나타난다. 즉,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어 일체 삼라만상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해인삼매’라 한다. 그것이 비로자나불의 세계요 우리의 깨끗한 마음자리다. 마음을 비워 거기에 온갖 사물이 그 모습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된다.
해인삼매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 조화로운 모습에서 하나하나의 사물은 질서를 이루어 아름다운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 진리의 세계를 ‘법계法界’라 하는데, 마치 법계를 꽃으로 아름답게 장엄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부처님의 몸이며 음성이 일체 속으로 들어가 모든 존재물 하나하나가 깨달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진배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엄삼매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화엄삼매의 화華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서려는 갖가지 행위며 수행을 일컫는다. 그 갖가지 행위란 진리의 세계를 향해 맑고 깨끗한 믿음을 일으켜 그곳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행위로서의 한 발 한 발이 또한 세계를 아름답게 꾸미는 화엄인 것이다. 그것은 ꡔ화엄경ꡕ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등장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명의 스승을 만나 진리를 깨우치고 마침내 법계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요 길이다.
화엄삼매는 이와 같이 인간의 행위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수행과 구도를 통해서 현실화된다. 그리고 그 생활 방식, 행동 방식이 진리에 합치하여 비로자나불의 세계에 융해, 몰입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계속_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똑똑해서 부모가 뭐든 가르쳐 주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그렇지 못하여 한 두 마디 단어가 이어지기만 해도 외지 못했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형은 한 비구스님에게서 부처님의 가르침 한 토막을 듣고는 그 깊은 뜻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출가한 그날 밤에 삼장을 다 외웠고 깊은 사색과 선정에 잠겨 아라한을 이루었습니다.
홀로 집에 남겨진 동생은 워낙 어리석은지라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걸식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큰스님이 된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형은 거지 행색의 초라한 동생을 보는 순간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형은 하루라도 빨리 동생을 깨우치려고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내 동생은 머리가 좋지 않으니 게송 하나만 외게 하자.’
“세 가지 악한 업을 짓지 말고 세상 모든 중생을 괴롭히지 말라. 바른 마음으로 살펴서 탐욕의 대상은 공하다고 알아서 아무 이익 없는 괴로움을 멀리 떠나야 하리라.”
동생은 열심히 외웠습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외지 못했습니다. 오죽하면 옆에서 소 치던 사람들이 그것을 외웠다가 동생이 물으러 오면 가르쳐 줄 정도였습니다.
형은 동생의 우둔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다른 이에게 보내보았지만 그 사람 역시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동생을 절 문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대체 내 머리는 왜 이리도 나쁜 것인가! 사랑하는 형마저도 나를 포기할 정도이니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녀석이다.’동생은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 서러움에 북받쳐 슬피 울었습니다.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의 슬픔이 부처님에게 전해졌습니다. 부처님은 그를 불러들여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아난존자에게 그의 교육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아난 존자도 포기했습니다. 결국 동생의 교육은 부처님 몫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나는 먼지를 턴다. 나는 때를 없앤다’라는 두 구절만 외우거라.”
하지만 동생은 그것조차도 외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에게 먼지떨이를 쥐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절에 있는 스님들의 신발을 털어라. 그러면서 너는‘나는 먼지를 턴다. 나는 때를 없앤다’라고 자꾸만 생각해야 한다. 그건 할 수 있겠지?”
처음에는 신발을 맡기려고 조차 하지 않던 스님들은 부처님의 의중을 알고 난 뒤에 동생에게 신발을 맡겼습니다. 그는 열심히 털고 또 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외우게 하신 먼지와 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열심히 신발을 털던 그의 손이 멈추었습니다. ‘아, 그 먼지는 흙먼지가 아니구나. 욕심, 분노, 어리석음을 먼지라고 하는구나.’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탐진치 삼독을 깨끗이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맺고 앉아 깊은 선정에 들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어리석던 동생은 아라한을 이룬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주리반특이었습니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제31권>
불자들이면 누구나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경을 읽을 때마다 ‘그래, 아무리 어려운 부처님 말씀이라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게 될 거야. 주리반특도 해내었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이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리반특이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는 ‘천천히 깨달아갔다’는 사실이란 것입니다.
멸시와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모자람을 절실히 깨달았고, 짧은 구절 하나를 외기위해 온 몸으로 노력한 그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는 과정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지요. 일단 붙고 보자는 마음이 수능시험의 부정행위를 불러왔습니다. 어른들의 책임이고 사회의 책임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들 말하지요? 아닙니다. 끝만 좋다고 다 좋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 과정이 좋으면 끝이 좋은 법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는 생각을 주리반특을 통해서 해보게 됩니다.
사리불이 부처님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듣고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다른 종교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을 숭배하는 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사리불을 보자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시오!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오?”
“부처님을 찾아뵙고 법을 듣고 오는 길이오.”
그러자 그 종교인은 딱하다는 듯 이렇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허허, 아직도 스승의 설법을 듣고 다니다니…. 여태 젖을 떼지 못하였소? 나는 이미 젖을
뗀지 오래요.”
사리불 존자는 부처님에게 출가하기 전에 이미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수백 명이 될 정도로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부처님 계신 곳을 따라 다니며 낮은 자리에 앉아서 법을 듣는다니 제가 생각해봐도 그는 여간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존자는 태연스레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런가?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하오. 그대가 벌써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요, 진정으로 의지할 만한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오. 어미 소가 있다고 합시다. 성품이 거칠고 사나운데다 젖이 적어서 아무리 빨아도 젖이 잘나오지 않으면 송아지들은 어떻게 하겠소? 어미 소를 떠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내가 배우는 법은 좋은 진리이고, 바른 깨달음이며, 번뇌를 없애주는 가르침이며, 의지할 만한 가르침이오. 마치 맛있는 젖이 풍부하여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항상 잘 나오기 때문에 송아지들이 떠나지 않는 어미 소처럼 말이오. 내가 오래도록 스승을 자주 찾아뵙고 그 분의 설법을 자꾸만 청해 듣는 것은 그 가르침이 바른 것이고 훌륭하기 때문이오.” <잡아함경>35권(947경)
대체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이기에 사리불 존자가 이와 같은 비유를 드는 것일까요? 스승의 깊이를 가늠할 수준의 제자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승에 대한 진실하고 소박한 마음가짐을 끝까지 유지했던 사리불 존자는 정작 자신의 제자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도 자못 궁금해집니다.
장사꾼들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장사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마침 그들이 길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 개가 장사꾼들의 고기를 훔쳐 먹었습니다.
“저런저런, 아니 우리도 아껴 먹는 고기를 감히 개가 먹어 치워?”
사람들은 그 개를 죽도록 때리고 다리를 부러뜨린 뒤에 그냥 버려둔 채 떠나갔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사리불 존자가 천안(天眼)으로 죽어가던 그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서둘러 성에 들어가 음식을 얻어 가지고 나와 개에게 밥을 먹였습니다. 개는 음식을 먹고 간신히 기운을 차렸고 사리불 존자는 미묘한 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사리불 존자의 법을 들은 뒤 개는 이내 목숨을 마치고 사위국의 어느 바라문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사리불 존자가 그 집에 걸식을 하러 갔습니다. 그 집의 주인인 바라문은 존자가 홀로 걸식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자 자기 아들인 균제를 그에게 출가시켰습니다. 사리불은 균제를 사미로 얻어서 기원정사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차근차근 알아듣기 쉽게 설법을 해주자 아이는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려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고는 공덕을 다 갖추었습니다.
도를 얻은 균제 사미는‘대체 나는 지난 세상에 어떤 업을 지었기에 이런 훌륭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을까’궁금해 하다 지혜의 힘으로 지난 세상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나는 사리불 존자님의 은혜를 입었다. 내 몸이 다할 때까지 우리 스승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리라.’
그리하여 균제는 계속 사미로 지내면서 대계를 받지 않고 사리불을 모셨습니다. <현우경>
훗날 사리불 존자가 고향에 돌아가서 열반에 들었을 때도 끝까지 그 옆을 지킨 사람은 균제 사미였습니다. 존자의 유해를 부처님에게 가지고 와서 눈물 속에서 스승의 열반을 알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입니다만, 그 깨달음이 인간 속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사제관계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자꾸 우리 곁에서 큰 스승님들이 떠나가십니다. 만난 자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세상 모든 것은 흩어지기 마련이라지만 훌쩍 자리를 비워버리시는 스승님들이 못내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아직 그 젖을 못다 먹었는데 말입니다.
2) 재미나는 일곱 가지 이야기
사실 이런 글을 쓰는 제 자신도 긴가민가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그 냉소나 뜨악한 표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부처님도 우리들의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견하셨던지 법화경 속에는 모두 일곱 가지의 쉽고 재미있는 비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일곱 가지 이야기를 읽자면 부처님이 우리를 처음 만나 우리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금 씩 조금 씩 단계를 높여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거지 아들 이야기). 자기 주머니 속에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물이 들어 있는데 그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걸인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사람 이야기(옷 속의 보물 이야기)도 있습니다. 본래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지 못하여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어리석음과 탐욕 속에서 윤회를 거듭해온 당신과 내 모습이 꼭 그렇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들려주어도 도대체 마음을 열고 들을 생각을 하지 않기에 부처님은 당신이 죽었노라는 말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의사의 아들 이야기). 그래야지만 중생들은 부랴부랴 부처님의 남기신 말씀이라도 제대로 가슴에 새기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약초의 이야기, 상투 속에 감춘 보석 이야기, 마법의 성 이야기, 불난 집에서 아이를 구해내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들에는 하나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우리들을 대해왔는지, 그 사실을 알아챈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인생이란 (2)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영롱한 구슬
깨달음의 자리, 진리의 세계인 법계에서는 온갖 삼라만상이 끊임없이 거듭거듭 이어지고 연결되어 조화로운 세계를 형성하는데, 그것을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라고 한다. 모든 것은 서로 끝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는 이치다.
비유하자면, 도리천忉利天의 주인공 인드라indra 신의 궁전에는 끝 간 데 없는 커다란 그물이 걸려 있는데 그 그물코마다 아주 작고 영롱한 구슬이 박혀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구슬 속에는 다른 무수한 구슬이 비치는 모습과 같다고 하겠다.
거기서는 나 자신의 개성을 간직하면서도 나만 잘났다고 얼굴을 삐죽 내밀거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법이 없으며, 하나의 이념에 의한 획일주의나 독재자에 의한 전체주의도 자리 잡을 수 없다. 오케스트라에서 각각의 악기들이 제 나름대로의 소리를 내지만 그것이 다른 악기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기서는 나 자신을 공空으로 돌려 상대방을 앞에 내세운 결과 그렇게 상호 일치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을 ‘상즉相卽’이라 한다. 또한 나 자신은 상대방이 생겨나는 원인 역할을 하며 무대 뒤로 사라진다. 거기서 나는 상대방 속으로 들어가 있다. 그것을 ‘상입相入’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만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만인은 나를 위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원리가 전 우주로 확대되면서 하나하나가 조화를 이루어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 관계에 적용시켜 보자. 결코 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이 타인의 구원, 타자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결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그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은 상대방을 저 언덕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배요 다리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삶은 풍요로워지고 평화로워지며 거기서 자신의 목적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때 상대방도 나 자신의 존재 의의를 알아주고 서로가 감사한다. 그것이 진정한 형제애요 인류애다. 그럴 때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완성되는 것이요 자신이 만물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나는 종이면서 동시에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