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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시와 묵상의 집 (영월 생태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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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스크랩 고 강영우박사의 이야기
훈훈한님 추천 0 조회 25 12.10.27 21: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영우 박사 별세…
알려지지 않은 감동 스토리








▲시각장애인으로 미국 백악관 차관보까지 오른 강영우 박사가 미국 현지시각으로 지난 2월 23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 강영우 박사는 타계하기 전 아내에게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라는 마지막 연서를 보내 세상을 또 한번 감동시켰다. ▲고 강영우 박사의 장례식은 다음달 4일 워싱턴 인근 한인 중앙장로교회에서 추도예배로 치러진다.


 
고 강영우 박사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떠났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평생 그의 눈이 돼주었던 아내 석은옥(본명 석경숙)과 그의 삶에 또다른 빛이 되었던 두 아들 진석, 진영이 지키고 있다.
고 강영우 박사는 특별하다. 시각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아내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아내의 이름으로 살다가 세상과 아름다운 작별을 했다. 그의 절망적이던 운명은 아내 석은옥을 만나면서 희망으로 바뀌었다.

1962년 5월 20일, 한 살 연상의 천사를 만나다

1944년 양평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중학생 때 축구공에 맞아 망막박리(망막 찢어짐)로 시력마저 잃었다. 당시 국립의료원에서 2년간 치료를 받았지만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선고를 받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 어머니는 8시간만인 다음날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17세였던 누나가 학업을 포기하고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세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지만, 그 누나마저 과로로 2년 후 세상을 등졌다.

결국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남동생은 철물점 점원으로, 소년 강영우는 ‘공안과’로 유명했던 공병우 박사가 사재를 털어 운영하던 맹인 부흥원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점자와 한글 타자기를 배운 후, 서울맹학교 중등부 1학년에 들어갔다.

그리고 운명의 1962년 5월 20일. 18세의 강영우는 평생 자신의 눈이 되어 줄 한살 연상의 숙명여대 1학년 학생 석경숙을 만난다. 맹학교의 자원봉사자로 일했던 석경숙은 누나로, 그리고 연인으로 자리바꿈 하면서 소년 강영우의 곁을 지켰다.

직접 지어준 아내 이름에 30년 인생설계 담아

그리고 6년후 1968년. 강영우는 석경숙에게 결혼 승락을 받고, 직접 석은옥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석은옥’이라는 이름 속에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앞으로 펼쳐질 30년 구상이 그대로 녹아있다.

그들 부부의 첫 10년은 석(石)의 시대, 다음 10년은 은(銀)의 시대, 마지막 10년은 옥(玉)의 시대가 될 것이라 구상한 것이다. ‘석의 시대’ 10년간은 고난과 역경의 시대를 딛고 맹인으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는 것, ‘은의 시대’ 10년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양육하는 것. 마지막 ‘옥의 시대’ 10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사는 것이라고 고 강영우 박사는 밝혔다.

아내 석은옥을 만난 지 10년만인 1972년. 연세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강영우는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하지만 문교부 시험에서 시각장애는 결격 사유가 되었다. 자칫 꿈을 포기할 뻔 했던 그는 당시 문교부 장관이던 고 민관식 박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아빠의 눈을 고쳐주겠다며 안과의사가 된 큰 아들

강영우 박사는 두 아들을 글로벌 리더로 키웠다. 푸른 눈의 큰 며느리는 산부인과 의사, 둘째 며느리는 법학 전문대학원 교수다. 강 박사의 첫 아들 진석(영어 이름 폴)은 워싱턴 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의사인 ‘수퍼 닥터’ 중 하나로 선정됐다. 그리고 둘째 아들 진영(크리스토퍼)은 미국 법률 전문지 ‘내셔널 로’가 선정한 ‘40세 미만 최고 법조인 40명’ 중 하나다. 진영은 오바마 대통령의 선임법률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현재 오바마 대통령 입법관계 특별보좌관으로서 한인들 중 최고 공직자이며, 백악관의 최연소 특별보좌관이다.

생전 강영우 박사는 아들 진영이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을 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두 아들을 키우면서 강영우 박사에게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맹인이란 사실을 긍정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큰 아들 진석이 어느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아빠는 운전도 못해요, 야구도 못해요, 그리고 자전거 타는 것도 못 가르쳐줘요.”

이 말을 듣고 강 박사는 어린 아들에게 ‘잠자기 교육’을 시작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아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맹인인 아빠가 눈뜬 엄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도 있단다.”

“아빠 그게 뭐야”
“눈뜬 엄마는 불을 끄면 너한테 그림동화도 못 읽어주지?” “하지만 아빠는 이렇게 불을 끄고도 어둠속에서 (점자로) 성경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잖니.”
“어 정말이네~. 아빠, 아빠가 눈 뜬 사람보다 더 잘하는 것이 있구나.” (자서전 ‘원동력’에서. 2011년 두란노 서원 출판)

아빠의 잠자리 교육을 받고 자란 큰 아들 진석은, 결국 ‘아빠의 눈을 고쳐주겠다’며 커서 안과의사가 되었다.

절망과 포기를 넘어 ‘no where’이 아닌 ‘now here’

고 강영우 박사는 미국에서 대통령 임명, 상원 인준을 거치는 고위 공직자 500명중 한 명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11년간(2001~2012년)이나 지냈다. 그는 ‘아너러블(honorable; 영광스러운)’이라는 공식 경칭이 붙는, 당시 재미한국인 중 연방정부 최고위 공직자였다. 반세기 전만해도 후진국의 맹인 고아에 불과했던 그가, 세계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미국 지도층들도 부러워하는 삶을 기적적으로 이뤄낸 것이다.

강영우 박사는 자신의 장애를 오히려 축복으로 여겼다. 아내 석은옥은 자신의 실명 때문에 시각장애 특수교사로 전공을 바꿨다. 그렇게 인디애나 공립학교에서 30년간 헌신적으로 봉사, 미국 교육자 인명사전과 여류명사 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큰 아들 진석은 자신의 실명 때문에 세계적인 안과의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 진영은 오바마 대통령의 특별보좌관까지 올랐다.
 
강 박사는 절망 속에서 꽃피운 자신의 삶을 ‘노 웨어(no where)’가 아니라 ‘나우 히얼(now here)’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노 웨어(no where) 즉 ‘아무데도 없다’가 아니라 나우 히어(now here) 즉 ‘지금 여기에 기회가 있다’는 의미다. 그는 “절대로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를 가슴에서 역설했다.

펄벅 여사와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

강 박사의 아내 석은옥은 결혼 전 1년간의 미국 유학생활 중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펄벅 여사를 만났다. 여사는 부부에게 평생의 금과옥조가 되는 말을 전했다. 시각장애 분야를 공부하던 석은옥을 만찬에 초대해 “세상이 어둡다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의 촛불이 되어 어둠을 밝히라”고 격려해 준 것이다. 펄벅 여사의 이 말은 훗날 부부가 함께 쓴 책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의 제목이 되었다.

강 박사와 아내 석은옥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1994년 MBC 휴먼드라마 ‘눈먼 새의 노래’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탤런트 안재욱이 강 박사 역을, 김혜수가 아내 석은옥 역을 맡았었다. 이 드라마는 강영우 박사의 말을 빌리면 그의 인생 3단계에 있어서 고난과 역경의 ‘석의 시대’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후 1년 뒤 강 박사의 삶은 이기원 감독의 영화 ‘빛은 내 가슴에’로 제작돼 다시 한번 세상을 뭉클하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 편지

강 박사는 지난해 10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4개월 동안 투병하다 세상과 이별했다. 그는 떠나기 두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너희들이 준 사랑이 너무 크고 함께 한 추억이 가득하기에.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다"라고.

그가 아내에게 남긴 글은 더 애절했다. 그는 1962년 5월 20일, 아내와 처음 만나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햇살보다 더 빛나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 아직도 기억합니다. 나를 바래다 주던 그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날개없는 천사였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강 박사는 자신의 유학을 도와줬던 국제 로터리재단에 25만 달러를 기부, 세상에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자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더 큰 빚을 졌다. 그는 장애인 인권을 위해 국제 교육재활 교류재단을 창설했고, 유엔 세계 장애위원회의 부의장을 역임하며 루스벨트 장애인상 제정을 제안하고 창설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고 강영우 박사가 한국에서 살았다면 그의 삶이 지금처럼 빛날 수 있었을까?
 
실제로 강영우 박사는 가장 안타까웠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1976년 한국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한국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때문에 고국에서 뜻을 펼치지 못했다.”

2012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일이다.

천국으로 돌아간 고 강영우 박사. 두 아들과 아내의 아름다운 삶을, 이번엔 두 눈 뜨고 행복하게 내려다 보시길 고개숙여 기도한다.

 

그의 삶. 1944년 1월 16일 (경기도 양평) ~ 2012년 2월 23일. @factoll

출처 : http://www.factoll.com/bbs/board.php?bo_table=article&wr_id=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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