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뿐 아니라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나 외교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측면으로 협상을 이끌어 가는것이 중요하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상대와의 협상에 있어 큰 힘을 수 할수 있는 반면 교육수준이 낮으면 상대방과 수에 눌려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제와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교육은 반드시 필요했다.
고구려 인재 육성 정책의 두번째 특징은 활동목적이 분명한 전문집단의 양성이었다.
고구려는 조의선인 皁衣仙人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 검은 조복을 입은 선인'이라는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
선배는 무술과 사냥. 가무등 여러 분야에서 우승한 사람들로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학문과 무용을 갈고 닦았다.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보다 훨씬 오래된 조직으로 머리를 빡빡깎고 , 검은 옷을 입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가끔씩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전시에 자체적으로 조직을 구성하여 전장에 나가 싸웠으며 정예군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머리스타일과 검은옷 때문에 때로는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조'에는 '고구려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데 이처럼 앉아서 먹는자座食者가 1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 下戶들이 먼 곳에서 곡식, 소금, 생선을 운반해 그들에게 바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구려의 인구가 70만명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그중 반멍이 가만히 앉아 먹고 놀았다니 상당히 많은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은 말 그대로 앉아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어려운 말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문적인 전사집단이다. 이들 '좌식자'가 바로 조의선인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의선인이 활약한 기록은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잘 나타난다. 고구려에 침략한 당태종은 길목에 있는 여러 섬들을 점령한 후 안시성에 이르렀다. 백만대군이 안시성을 둘러싸고 연일 공격을 퍼부었지만 워낙 성이 견고하고 방어가 치밀하여 함락 시킬 수가 없었다. 60여 일간에 걸쳐 무려 50여만명의 연인원을 동원하였지만 안시성은 도무지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열이 오를대로 오른 당태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시성 옆에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흙을 쏟아 부은 결과 성과 나란한 높이로 토산이 완성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이유없이 무너져 내렸다 엄청난 규모의 흙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면서 안시성의 벽을 무너뜨렸고 견고하던 안시성에 틈이 발생했다. 위기의 순간, 바람처럼 안시성을 뛰쳐나간 수백명의 검은 옷을 입은 전사들이 토산울 점령하고 나무를 깎아 목책을 만든 후 당나라군이 얼씬 못하도록 했다.
이들이 바로 조의선인이다
당시 고구려에는 약 3만명 정도 조의선인이 활동을 했는데 그 수장이 바로 연개소문 이었다.
이들 조의선인들은 아주 특별한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어린나이에 선발되어
논리력과 판단력을 기르는 각종 지적인 교육과 육체적인 무술같은 전쟁시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으며 이를 통해 실전에서도 빛나는 성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육성 되었다.
고구려 22대 안장왕 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올밀선인 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인 3천명이 '「다물 방지가」'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연개소문 등 고구려 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재상들도 모두 조의 선인 출신이다.
이들은 독서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여 심신을 단련하던 고조선시대의 국자감國子監 같은 영재들로 고구려 시대에는 태조왕때 처음 기록이 나타나는데 아마도 그 이전부터 그와 같은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에는 신분의 귀천이 없어 오로지 학문과 기술로 지위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이름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이다.
고구려는 이렇듯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백성들에게 개방적인 교육을 실시하였고 체계적으로 전문적인 전사 집단을 양성하였는데 모두 궁극적으로는 건국이념인 다물과 그의 밑바탕이 되는 상무 정신의 함양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들의 비전 달성에 신분의 차이보다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깨달았고 백성들의 기본적인 자질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신분이라는 형식보다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같은 실리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교육이 자신들의 건국이념 실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대상과 과목을 효율적으로 운영한 것이다.
고구려의 이러한 인재 육성 정책은 오늘날 기업인재육성 정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중략-
안타깝게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 이후 한동안은 고구려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