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庾黔弼)은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사람으로, 태조를 섬겨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광(大匡)이 되었다.
태조는 북계(北界)의 골암진(鶻岩鎭 :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이 자주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당하므로 여러 장수를 모아,
“지금 남방의 흉적[南兇 : 후백제의 견훤세력]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는데 북방 오랑캐도 우려되니 짐은 자나 깨나 근심스럽고 두렵소. 유금필을 파견하여 진무하고자 하는데 어떻소?”라고 의논하니 모두가 좋다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유금필은 그 날로 개정군(開定軍) 3천명을 거느리고 떠났다. 골암진에 이르러 동쪽 산에 큰 성을 쌓고 머물러 지키면서 북방 오랑캐의 추장 3백여 명을 불러 모아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서 먹이고 취한 틈을 타서 위협하니 추장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이어 북방 오랑캐의 여러 부락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미 너희 추장을 붙잡아 두었다. 너희들도 마땅히 와서 항복하라.”고 효유했다. 이에 여러 부락에서 뒤이어 귀부한 사람들이 1천 5백 명이었으며, 또한 포로로 잡혀간 고려 사람 3천여 명을 돌려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북쪽지역이 안정되었음으로 태조가 특별히 그를 표창하였다.
태조 8년(925)에 정서(征西)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 :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으며, 임존군(任存郡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을 공격하여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태조가 견훤과 조물군(曹物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견훤의 군사가 매우 강해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태조가 서로 대치하면서 적군이 지치기를 기다리던 차에, 유금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자 군사들의 기세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견훤이 두려워하여 강화를 요청해오자 태조가 허락한 후, 견훤을 군영에 불러다가 강화의 일을 의논하고자 하였다. 유금필이 “사람의 마음이란 알기 어려운 것인데 어찌 경솔하게 적을 가까이하려 하십니까?”라고 간하자, 태조가 중지하고 “경은 연산진과 임존군을 격파하였으니, 공적이 이미 적지 않소. 국가가 안정된 후에 마땅히 경의 전공을 표창할 것이오.”라고 격려하였다.
태조 11년(928)에 왕명으로 탕정군(湯井郡 : 지금의 충청남도 온양시)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그 때 후백제의 장수 김훤(金萱)·애식(哀式)·한장(漢丈) 등이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靑州)로 쳐들어 왔다. 하루는 유금필이 탕정군의 남산에 올라갔다가 앉은 채로 깜박 졸았는데, 꿈에 한 대인(大人)이 나타나, “내일 서원(西原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이니 빨리 가라.”고 알려 주었다. 유금필이 놀라 깨어나 곧장 청주로 달려가서 후백제의 군사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패배시키고 독기진(禿歧鎭)까지 추격하여 3백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중원부(中原府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로 달려가 태조를 뵙고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하자, 태조는 “동수(桐藪)의 전투에서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두 명장이 죽어서 크게 나라의 근심이 되었던 차에, 이제 경의 말을 들으니 짐의 마음이 차츰 안정되오.”라고 하였다.
태조 12년(929)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을 포위하자 유금필이 구원군으로 태조를 따라 예안진(禮安鎭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까지 갔다.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전투가 불리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이오?”라고 의논하니,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洪儒)는,
“전세가 불리하게 될 경우 죽령(竹嶺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의 고개)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니, 미리 사잇길을 마련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금필은,
“신이 듣건대 ‘병기는 흉한 기구이며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하였으니, 구차히 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싸워야만 승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적과 마주하고 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기세가 꺾여 달아날 걱정만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만약 뒤쫓아 가 구원하지 않고, 고창군의 3천명 넘는 군사들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준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길 바라옵니다.”
라고 하므로 태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유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급히 공격하여 적을 크게 무너뜨렸다. 태조가 그 군(郡)에 들어가 유금필에게, “오늘의 승전은 경의 힘이오.”라고 칭찬하였다.
태조 14년(931)에 참소를 당하여 곡도(鵠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로 유배갔다. 이듬해(932) 견훤의 해군 장군(海軍將軍)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 : 지금의 황해남도 강령군의 부근)를 공격하여 약탈하자 태조가 대광(大匡) 왕만세(王萬歲) 등을 보내어 구하게 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므로 태조가 근심하자 유금필이 이런 글을 올렸다.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살이 중에 있습니다만 후백제가 우리 섬 고을을 쳐들어 왔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곡도와 포을도(包乙島)의 장정들을 뽑아서 군대에 충당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이를 막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주상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태조가 글을 살펴보고 “참소를 믿어 어진 이를 내쫓은 것은 내가 현명하지 못한 탓이로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자를 보내어 소환하고는,
“경은 아무런 죄도 없이 유배되었으나 지금껏 원망하거나 분개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생각만 하였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고 후회되오. 대대로 포상함으로써 경의 충절에 보답하는 것이 내 바람이오.”
라고 위로하였다. 또 이듬해(933)에 정남(征南)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의성부(義城府 :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를 수비하고 있는데,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나는 신라가 후백제에게 침략 당할까 염려하여 일찍이 대광(大匡) 능장(能丈)·영주(英周)·열궁(烈弓)·총희(悤希) 등을 보내어 그 곳을 지키게 하였소. 지금 듣건대 후백제의 군사가 이미 혜산성(槥山城)과 아불진(阿弗鎭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부근) 등지에 이르러 인민과 재물을 겁탈하고 노략질한다고 하니, 그 침략이 신라의 국도(國都)까지 미칠까 두렵소. 경이 가서 구원해야 할 것이오.”
라고 분부하였다. 유금필이 장사 여든 명을 뽑아서 그 곳으로 가다가 사탄(槎灘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위치)에 이르자 군사들에게 “이 곳에서 적을 만난다면 나는 필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다만 너희들도 같이 칼날 아래 죽을까 염려되니, 각자 알아서 살 계책을 잘 세우도록 하라.”고 일렀다. 군사들이, “우리들이 모두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 살아 돌아가시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매, 이로써 서로 마음을 합쳐 적을 치기로 맹세했다.
사탄을 건넌 후 후백제의 통군(統軍) 신검(神劒) 등의 군사와 마주치자, 유금필이 맞서 싸우려고 하니 후백제의 군사들은 유금필이 거느린 정예군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무너져 달아났다. 유금필이 신라에 이르자, 어린아이,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성 밖으로 나와 맞이하고 엎드려 절하면서, “오늘날 대광을 뵈올 줄을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대광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어육(魚肉)과 같이 무참히 죽었을 것입니다.” 하고 울었다.
유금필이 이레 동안 머물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검 등을 자도(子道)에서 만나, 맞서 싸워 크게 이겼다. 그의 장수 금달(今達)·환궁(奐弓) 등 일곱 명을 생포하였으며, 죽이고 사로잡은 적이 매우 많았다. 승전의 보고가 이르자, 태조는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이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가 개선하자, 태조가 대전(大殿)에서 내려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경의 공훈과 같은 것은 예전에도 드물었소. 짐의 마음에 새겨 두었으니 이를 잊을 것이라 여기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유금필이 “국난에 임해서는 사사로운 것을 잊어야 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신하의 직분일 따름입니다. 성상께서는 어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라고 사례하니, 태조가 그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17년(934)에 태조가 친히 운주(運州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를 정벌하면서 유금필을 우장군(右將軍)으로 삼았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甲士) 5천 명을 뽑아 운주까지 와서,
“두 나라 군사가 서로 싸우면 형세가 양쪽 모두에게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무지한 사졸들이 많이 죽고 다칠까 두렵소.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하는 게 옳을 것이오.”
라고 알려왔다. 태조가 여러 장수를 모아 이 문제를 의논하니, 유금필이 “오늘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신들이 적을 쳐부수는 것을 보시옵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견훤이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정예 기병 수천 기를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명 넘는 군사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술사(術士) 종훈(宗訓), 의사(醫師)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과 최필(崔弼)을 생포하였다. 이에 웅진(熊津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항복하였다. 18년(935)에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물었다.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경계의 40여 고을은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나의 교화에 복종하였소. 일찍이 대상(大相) 견서(堅書)·권직(權直)·인일(仁壹) 등을 보내어 그 곳을 순무(巡撫)하였는데, 근래에 후백제에게 빼앗겨 여섯 해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고 있으니, 누가 나를 위하여 그 곳을 진무(鎭撫)하겠소?”
홍유(洪儒)·박술희(朴述熙) 등이 “신들이 비록 용맹은 없지만 진무하는 장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요청하였다. 태조가 “무릇 장수가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귀중하오.”라고 하자, 공훤(公萱)과 대광(大匡) 제궁(悌弓) 등이 유금필이 적임자라고 천거하였다. 태조가,
“나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였소. 다만 근래에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을 때 유금필이 가서 그 길을 통하게 하였으니, 짐은 그의 노고를 생각하여 차마 다시 명을 내리지 못하고 있소.”
라고 하니 유금필은, “신은 이미 늙었으나, 이는 국가의 큰 일이니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조가 기뻐 눈물을 흘리며, “경이 명령을 따른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쁠 수 있으랴?”라 하고, 마침내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으로 삼았다.
태조는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왕이 타는 배를 내려주어 그를 보내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머물면서 유금필이 바다로 내려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돌아왔다. 유금필이 나주에 도착하여 경략하고 돌아오니 태조가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그를 맞이하고 위로하였다. 19년(936)에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태조 24년(941)에 죽었다.
유금필은 장수의 지략을 가졌으며 군사들은 그를 충심으로 따랐다. 정벌하러 나갈 때마다 왕명을 받으면 이내 출발하여 집에 머물지 않았고, 개선할 때마다 태조가 맞이하여 위로하였으며 언제나 총애가 장수들 가운데 으뜸갔다. 시호를 충절(忠節)이라 하였으며, 성종 13년(994)에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들은 유긍(庾兢)·유관(庾官)·유유(庾儒)·유경(庾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