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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하나의 작은 우주의 씨앗이다. 어느 들판에서 화려하게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든 백두대간 산길에서 화려하게 피어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든 아니면 서울 양재동 화원에서 작은 꽃다발로 판매되든 모두 하나의 꽃이다. 그런 꽃들을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인 시각으로 유불리를 다투고 그에 맞는 이름을 지어주고 소유하려 하지만 어찌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모든 것들을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 꽃에게 또는 풀과 나무에게 되돌려주고 우리는 한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며 살아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산행을 시작하고 나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조망이 트이는 장소까지 갈 동안 나무와 풀만 보며 걷는다.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가끔씩 보이는 이정표를 만나야 알 수 있다. 뜨거운 여름날씨라고 일기예보에서 떠들썩했는데 산행시작부터 왼쪽 ( 영동 )에서 제법 굵은 바람줄기가 불어와 땀이 차지 않을 만큼 시원하다. 산길도 그리 가파르지 않아 이미 대간길에 익숙한 회원님들의 발걸음이 무척 빠르다. 2.3 km 떨어진 삼성산 정상석 있는 곳까지 이어진 오르막길을 한시간만에 닿았다. 나무나 풀을 본다고 어슬렁 거리다가는 뒤쳐져서 고생할 것 같다.
산에 오르면서 간간이 보이는 엉겅퀴는 먼발치에서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쳤다. 혼자서 뚝 떨어져 나를 보고도 민숭맨숭 하는데 내가 달려가서 반갑다고 아는 체 하기도 멋적은 일 아닌가. 그 대신 길가에 올 해 들어 처음 만나는 기린초가 자기를 봐달라고 눈을 부릅뜨고 올려다 본다. 노란 꽃이 여럿 모여서 있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곁에 앉아서 눈을 맞추고 얼굴도 마주 본다. 꽃말이 “소녀의 사랑 “ “기다림”이라고 한다. 산길 바위틈에 노란 꽃 등(燈)을 켜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소녀다. 한 줄기 끝에 꽃대가 갈라지고 각 꽃대위에 여러 개의 꽃이 피어 마치 꽃방망이처럼 생겼는데 낱개의 꽃을 보면 5개의 꽃받침 위에 끝이 뾰족한 5개의 꽃잎이 피고 그 안쪽으로 10개의 수술과 5개의 암술이 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아주 정교한 예술작품같이 생긴 이 꽃의 이름이 기린초(麒麟草)다. 기린초의 잎모습이 동양,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에서 옛날부터 상상속의 동물로 전해져 내려오는 기린의 뿔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두툼한 잎의 끝이 길게 자라나고 끝이 둥굴게 생겼다. 잎의 가장자리에 날카롭지는 않지만 촘촘하게 톱니가 발달해 있는데 우리는 이 기린초의 잎을 보고 거꾸로 기린의 뿔모양을 상상할 수 있다. 범의귀목 돌나물과 다년생 풀로서 봄에 어린순을 나물로 무쳐먹을 수 있고 뿌리를 포함한 전초는 약초로 쓰인다.
지난번 산행때 산길 내내 길가에 피어 있던 조록싸리가 아직도 남아서 우리를 배웅한다. 꽃잎은 분홍빛이 많이 바래서 약간 희색빛이 돌지만 가지 끝에서 새로 피어나는 꽃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뽐낸다.
얼마전까지 간헐적으로 피어 있던 미역줄나무는 이제 제 세상을 만난 듯 아주 기고만장이다. 산길 초입에는 좀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것이 점차 가까이 다가와 자기를 안보고 가면 잡아먹을 듯이 팔다리를 잡고 늘어진다. 꽃이야 정말 소담스럽고 색깔도 아이보리색에 나무랄 데 없지만 스토커 기질이 있다. 이쁘다고 쳐다보고 갈라치면 그냥 보내주지 않고 왜 그리 붙잡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몇 개만 나 있으면 귀하게라도 여기겠지만 얘들은 어디든 빈 자리만 있으면 차지하고 앉아서 이쁜 척 한다. 미역줄기처럼 긴 덩굴모양 때문에 따로 예쁜 이름은 얻지 못하고 그냥 미역줄나무라고 부른다. 여름이 지나면 꽃이 지고 열매가 달리는데 꽃보다 열매가 더 예쁘지만 아직은 얘네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봄에 어린 순을 나물로 먹을 수 있다지만 아직 먹어보지는 않았다. 다래순과 모양이 흡사하여 착각할 수 있다. 전초를 뇌공등(雷公藤)이라 하여 약재로 쓰인다.
이른 봄부터 싹이 나고 아주 작은 꽃봉오리를 본 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 털중나리는 아직도 입을 앙다문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색깔이 밝은 주황빛으로 변해가는 걸 보니 바야흐로 곧 나리의 시대가 열릴 모양이다. 어떻게 이런 모습의 꽃이 생겨났을까. 저처럼 긴 시간을 안으로 안으로만 단련하다가 마침내 꽃잎을 활짝 벌리면 온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듯 하다. 옛날 조선시대 지체 높은 사람을 “나으리”라고 불렀는데 꽃이 얼마나 존귀하면 ‘나리’라 불렀을까. 나리는 산이나 들에 주황색으로 피는 각종 나리꽃과 집뜰에 심어서 가꾸는 흰백합 등 비늘줄기를 갖고 있으면서 6장의 꽃잎이 겹쳐서 피어나고 6개의 수술과 한 개의 암술을 갖는 나리과 식물 전체를 지칭한다.
그 꽃 모양도 기품이 있고 예쁘기도 하지만 옛날 신라시대 또는 늦어도 고려시대부터 ‘나리’라고 하는 아주 존귀한 꽃으로 대접받게 된 것은 단순히 꽃의 모양에만 연유한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도 우리가 풀이나 나무를 보면 우선 먹을 수 있는건지 없는건지, 또는 먹으면 어디에 좋은건지 관심을 갖게 되는데, 먹을 것이 없던 옛날에는 그런 관심이 지금보다 더 컸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꽃도 예쁘고 뿌리는 굽거나 쪄서 먹으면 배부른데다 몸에도 좋으니 어찌 자신들이 모시고 사는 ‘나으리’만 못하겠는가. 이 나리는 몸을 보하고 기관지염 같은 호흡기 질환이나 자폐증이나 정신분열증 치료에도 효험이 있다 하니 가이 나리대접을 받을 만 하지 않은가.
나리집안도 꽤 복잡하다. 백합(百合)이라 부르는 흰나리를 포함한 전체를 나리라 부른다. 야생에서 자라는 나리 중에서 꽃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 따라 하늘을 바라보는 하늘나리 땅을 바라보는 땅나리 그리고 옆을 보고 있는 중나리가 있으며, 줄기 중간쯤에 잎이 한겹으로 돌려나는 말나리에다 그 돌려난 잎이 두 층으로 되어 있으면서 꽃이 하늘을 바라보는 하늘말나리, 중나리 중에서도 꽃대 및 잎에 작은 털이 나 있는 털중나리 그리고 잎모양이 솔잎처럼 가늘게 모여 나는 솔나리 등 그 종류가 꽤 많다. 그 많은 나리 중에서도 키가 2 미터까지 크면서 꽃도 많이 피고 또 잎겨드랑이에 까만 살눈(珠芽)이 달려있는 참나리가 으뜸이다.
산길은 나무그늘로 이어지다가 가끔 하늘이 열리면서 널찍한 공간이 나타난다. 그늘에서는 햇볕이 부족해서 잘 살지 못하는 풀들이 이런 데서 자란다. 그 트인 공간 초입 길가에 참좁쌀풀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작년 이맘 때 춘천 금병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저수지 둑위에 피어 있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이 좁쌀풀은 수분이 넉넉한 양지에서 잘 자란다. 꽃봉오리가 좁쌀처럼 생겨서 이렇게 부른다 하나 내 생각엔 열매의 모양이 동그랗고 작아 좁쌀처럼 보이는 것 같다. 노란 꽃은 꽃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피고 꽃이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띄면서 꽃잎끝이 뭉툭한 것은 좁쌀풀이고, 우리 조상님들은 이런 꽃을 보면서도 늘 머릿속에는 가족을 먹여 살릴 양식 걱정을 해야 했다. 노란 꽃잎속에 자줏빛 무늬가 있고 꽃잎끝이 뾰뾰족한 것 참좁쌀풀이다.
들머리인 질매재(우두령)를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삼성산 (三聖山 986 m)에 도착했다. 김천 산악회 회원들이 자연석을 다듬어 조그만 정상석을 세워놓았는데 아담하니 보기 좋다. 산의 표지석이 굳이 클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그 표지석이 유실되지 않으면서 그 지역의 특징을 살려 세워 놓으면 산을 지나는 산객들의 길잡이도 되고 또 산을 다녀갔다는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어 좋을 것이다.
삼성산에서 여정봉으로 가는 산길에서 목탁에 맞춰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이 산 아래 김천쪽으로는 직지사에 딸린 부속 절과 암자가 많다. 삼성산 아래에는 산마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성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삼성산이 꽤 여러 개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북 경산에 있는 삼성산이다. 그 아래에는 삼성사라는 절이 있는데 신라시대 최고의 고승이었던 원효 의상 설총 세 성현을 모시는 절이라 한다. 이곳 대간길에 있는 삼성산아래 삼성암도 같은 의미로 이름 붙여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삼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니 재미있는 글이 눈에 띈다. 이 절의 주지스님이 절의 입구 등에 소위 사훈(寺訓)을 적어서 붙여 놓았는데 그 첫째가 ‘비교하지 마라’ 그리고 두번째가 ‘따지지
마라’라고 한다. 정말 만고의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의 떡과 자기떡을 비교함으로써
불행해지고 또 하챦은 것에 연연하여 다투다가 정작 인생 본연의 의미를 놓지고 살아간다. 짧으면서도 어쩐지 절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 같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뜻을 음미하면 매우 함축적이다
길가에 분홍빛 노루오줌풀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었다. 예전에는 산에 무슨 꽃이 피는지 또는 나뭇잎이 언제 물드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계절을 보냈는데, 산에 다니고 부터는 어떤 꽃이 피고 지는 시기를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시계에 시침과 분침이 있듯이 계절의 시계에는 꽃들이 있다. 얼마전부터 꽃봉오리가 맺힌 노루오줌과 비비추가 잔뜩 보이더니 오늘 마침내 노루오줌이 꽃을 피웠다. 이꽃도 약 2주정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다가 꿩의다리에게 시선을 넘겨주고 점차 시간의 뒷켠으로 넘어갈 것이다. 계절의 시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다.
산에서 자라는 풀이름에 ‘오줌’이 들어간 것이 여럿 있는데 이는 뿌리나 줄기 또는 꽃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봄에 일찍 피는 쥐오줌풀이 그렇고 지금 막 피기 시작하는 노루오줌풀 그리고 8~9월에 피는 여우오줌풀이 있다. 그리고 남쪽지역에서 자라는 말오줌때나무나 울릉도에 있다는 말오줌나무도 특유의 냄새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냄새를 맡아본적은 없다.
산길 양지쪽에 큰뱀무 꽃이 보인다. 지난번 삼도봉구간에서 해인리로 내려갔을 때 마을 큰길가에 무성하게 피어
있던 것을 보았는데 이제는 산위에까지 계절이 올라왔나보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에서도 잘 자라는 큰뱀무는 잎의 모양이 무잎과 닮았고
뱀이 다니는 곳에서 자란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풀이름 중에 뱀자가 들어간 것을 보면 뭔가 하챦은 것인게 많다. 뱀딸기도 딸기라고는 하지만 맛있어서 따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고, 개머루를 뱀포도라고도 부르는데 이것도 머루처럼 생겼지만 먹을 수 없는
것이고 뱀고사리도 마찬가지다. 일단
뱀자가 들어간 것은 욕심내서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다. 큰뱀무의 어린 잎을 채취하여 나물로 무쳐먹을 수 있으나 별다른 맛이 없고
질기다. 그러나 꽃은 인간을 유혹하는 뱀의 영혼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무척 예쁘다
여정봉으로 가는 길목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바위구간이 나타나 처음으로 조망이 트였다. 바위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기린초가 군락을 이루며 노랗게 피어 있다
여정봉 (旅程峰 1,030 m )에서 산길은 우측으로 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이런 표지판이 없다면 쉽게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미에서 삼성산에서 황악산으로 가는 여정에 한 번 쉬면서 길을 살펴보라고 그런 이름을 붙였는가 보다. 꿈보다 해몽인가 ?
식사를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밑에 눈에 익은 풀잎이 보인다. 이른 봄에 산과 들에서 많이 피어 있던 개별꽃과 잎사귀가 많이 닮았다. 그런데 아래 잎사귀에서 덩굴이 올라오고 그 끝에 꽃봉오리가 달려 있다. 개별꽃이라면 이미 꽃이 다 지고도 한참 지난 시기인데 그 지고난 풀에서 줄기가 올라와 다시 꽃을 피울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검색을 해보니 “덩굴개별꽃”이라고 한다. 하지만 덩굴개별꽃도 5 ~ 6 월에 피는데 6월말에 이처럼 꽃이 피지도 않은 채 긴 꽃대위에 여러 개의 꽃봉오리가 맺어진 걸 보면 다른 꽃인 것 같기도 하다. 꽃이 피어 있으면 구별하기가 좀 쉬울텐데 과연 어떤 꽃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덩굴꽃마리 (?)”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좀 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겠다.
바람재 (811 m)에서 앞으로 가야 할 황악산 줄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름 있는 높은 산이다 보니 그 산줄기가 자못 장엄하게 느껴진다. 이제까지 룰루랄라 휘파람불며 지나왔는데 갑자기 앞에 우뚝 솟아난 황악산 산줄기는 그렇게 명랑했던 기분을 숙연하게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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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 기행글 표현이 참 좋네요!!
이 글을 읽으니 지나왔던 길들이 한눈에 다시 드러오네요~!
찾아가는 이들 에게도 많은 즐길거리가 되겠어요.
다래나무처럼 생긴 나무
도대체 무슨 나무길래 틈나는 곳은
다 삐집고 잘 자랄까 궁금했었는데
미역줄나무 캬 그래서 그렇게 잘 자라나?
감사합니다
나리꽃도 종류가 그리 많은지 몰랐습니다
그저 나리꽃인줄만 알았지 ㆍㆍ
친절하신 설명 감사합니다
예 드디어 글이 시작됐군요...특히 꽃 설명은 우리기 쉽게 지나쳐왔던 그네들의 이름이라도 알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앞으로 다들 꽃사진만 찍고 안간다고 하면 어쩌지요?
박상복 작가님 상세한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