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19:1-29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
삶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고난과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로를 받고 싶어합니다. 아무리 강인하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는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기는커녕 친구들의 오해와 비난 속에 더욱 깊은 절망을 겪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18장에서 빌닷이 욥을 향해 했던 말에는 욥을 더 이상 회개의 가능성조차 없는 파멸을 위해 작정된 짐승처럼 보는 시선이 짙게 깔려 있었기에 욥은 깊은 절망과 낙심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겪은 욥을 통해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또 반대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자세를 가지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친구들의 잘못된 비난에 대한 답 (1-5)
(1-5)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1절에서 5절 말씀을 보면, 욥은 친구들의 비난에 대응합니다. 욥은 자신이 처한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1절에서 욥은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게 하고 말로 나를 짓밟기를 몇 번이나 하려느냐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정죄하고, 마치 욥이 하나님께 벌받을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욥의 슬픔의 감정이 묻어나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욥의 죄 때문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했습니다. 욥기 4장에서 엘리바스는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냐"라고 말하며, 욥의 고난이 분명 죄의 결과라고 하였고, 8장에서 빌닷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라고 말하며, 욥의 자녀들의 죄와 욥 자신의 죄가 고난의 원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발은 11장에서 소발은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고 말하며 욥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친구들의 말은 욥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욥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친구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며, 친구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상처를 받고 있음을 2절에서 말합니다. 4절에서 욥은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2절의 내용과 연결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좋은데, 설령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친구들이 지금처럼 자신을 공격할 필요는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5절을 통해 친구들을 향해 너희가 고통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의인이는 자만에 빠져 나를 정죄하려거든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말하라고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율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난을 죄의 결과로 단순하게 연결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고난이 반드시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 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태어난 이유를 두고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고난이 때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도 아마 이러한 이해 속에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친구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죄의 결과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타인의 고난을 쉽게 판단하거나 조언을 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위로는 판단이 아닌 공감과 경청에서 시작됩니다. 욥이 바랐던 것은 친구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이러한 외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 주변에도 고난 속에서 이해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함께 아파해 주고 그 상황을 공감해 주는 친구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욥의 하나님에 대한 외침과 오해 (7-12)
(7-12)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에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응답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적대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고백합니다. 7절에서 욥은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폭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חָמָס' (하마스)는 부당한 폭력이나 불의한 억압을 의미합니다. 욥은 자신이 이러한 폭력 속에 던져졌다고 느끼며, 그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또한, 9절을 통해 욥은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광’(כָּבוֹד, 카보드)은 욥이 이전에 누렸던 명예와 존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와 존엄을 빼앗으셨다고 느낀 욥은 자신이 완전히 무너졌고 절망 가운데 빠졌다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0절 하반절에서는 "나는 죽었구나"라는 말을 통해 현재 자신의 소망 없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욥의 이 표현은 고난 중에 느끼는 인간의 절망적인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포기하고 벌하시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이러한 욥의 마음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흔히 느끼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우리를 버리셨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31장 6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기억하며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할 때 소망이 없는 것 같아 한발자국도 내딛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다시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받는 외면과 고통 (13-22)
(13-22)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13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에서 욥은 자신이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13절에서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심지어 집안 사람들까지도 자신을 멀리하고 외면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זָר’(자르)로, 친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완전히 처음 만난 사람처럼 자신을 대하는 상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욥의 고통이 단순히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정서적, 사회적 고통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7절에서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라는 표현을 통해, 욥은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 자신을 멀리하는 고통을 겪고 있음을 토로합니다. 여기서 “내 허리의 자식들”이라는 것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식들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부분을 현재 자식들이 없지만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자신의 기막힌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사용했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숨결'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רוּחַ’(루아흐)로, 이는 단순한 호흡이나 냄새를 의미하기보다는 그의 전체적인 상태, 즉 고통과 절망의 상태를 아내가 부담스럽게 느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욥은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특히, 21절에서 욥이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면, 욥은 단순한 물리적 고통을 넘어서 정서적 위로와 공감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때, 고통중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통 중에 있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공감과 관심입니다. 잠언 17장 17절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와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서로의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십시다.
욥의 신앙 고백과 대속자에 대한 확신 (23-29)
(23-29)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2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 욥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합니다. 25절에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대속자가 살아 계시며 자신을 변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욥의 신앙이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가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을 뵐 것을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승리하게 하실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대속자’, ‘고엘’( גֹּאֵל)은 이스라엘의 법적 용어로서,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언약백성의 신분과 그것의 보증인 기업을 잃고 가문을 이어갈 가능성이 없어져 버린 사람에게 땅, 언약백성 신분, 그리고 가문을 회복시켜 주는 친적을 말합니다. 욥은 지금 자신은 아무런 이유 없이 기업을 잃고 사람들에게 무국적자, 타국인처럼 취급당하고 있으나, 자신의 대속자, 고엘이 나타나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시켜 줄 것임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엘이 하나님이시며,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자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26절에서 욥은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그래서 욥이 ‘부활’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기서 내에서나 욥의 말들 속에는 아직 부활신앙에 대한 이해나 믿음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욥이 부활신앙에 의지하여 자신의 현재 고난을 이겨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26절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내가 극한 고난의 정점을 지난 후에야’, 또는 ‘내가 극한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보리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욥의 믿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절대적으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신앙이 얼마나 깊고 확고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7절에서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욥이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대면할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욥의 신앙이 얼마나 개인적이고 깊은지를 잘 나타냅니다. 욥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구원하심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체험하고자 하는 열망,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27절 하반절에서 욥은 가죽과 살로 버티고 있는데 더 이상이 버티지 못한 채 인생이 끝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초조한 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에 따른 불안한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28절과 29절에서 친구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자신의 말을 마무리 합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가 저지른 죄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그의 잘못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이 자신의 고통을 더 가중시키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들의 비난이 부당하다는 것을 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29절에서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라고 경고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그들의 판단과 비난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속에는 친구들에게 회개와 겸손을 촉구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함을 경고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타인을 지적하고, 정죄하는데 앞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돌아보아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본분 19장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우리의 대속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소망을 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고난을 아시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한 과정임을 신뢰하십시다. 그러한 신뢰와 믿음이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를 끝까지 지탱해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그의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판단이 아닌 공감과 경청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욥이 바랐던 것은 친구들이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공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변의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고난을 아시고 결국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을 찬양하며 나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감을 몸소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주님, 오늘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통해 고난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믿음과 신뢰를 보았습니다. 욥은 그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자신의 고엘, 대속자가 살아 계심을 고백했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의 억울함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었으며, 그 신앙이 얼마나 깊고 확고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현실의 고난으로 인해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때에도, 욥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신뢰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느끼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주님을 믿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위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욥의 친구들이 고난을 죄의 결과로 단정 짓고 비난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고난을 쉽게 판단한 적은 없나요? 내 주변에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2. 욥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분을 신뢰했습니다.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고 계심을 신뢰하고 있는지, 어려움 속에서 그분의 뜻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욥이 외면당할 때 느낀 고립감은 우리 주변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있나요? 내가 오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4. 지금의 어려움이 결국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겪어 온 고난이 나의 믿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 성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