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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근은 자연주의 회화 원문보기 글쓴이: 이슬어지에
1.들어가는 글 -글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소개 2.본론 -이론의 배경 -이론의 주요 개념 ①주체와 객체에 대한 인식 ②관계 ③만남, 장소, 무(無)의 공간 ④시간성, 공간성 ⑤이우환에게 있어서의 작품, 작가, 예술의 의미 ⑥모노하 ⑦미니멀리즘과의 비교 ⑧신체적 관계성 ⑨이우한의 한계 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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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이우환은 직접 작품을 제작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론적 근거와 틀을 제시하는 몇 안 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다. 이는 그가 다양한 학문적, 철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키려는 노력과 그러한 지적 배경을 작품과 연결시켜 표현하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1968년경에 일어난 모노파운동을 시작으로 일본에서의 활발한 활동과 더불어 국내의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도 적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설명하는 인터뷰와 다양한 논문들이 많이 발표되어 있다. 본인은 이러한 다양한 자료들을 토대로 이우환의 이론을 객관적으로 접근함과 동시에 필요한 경우 비슷한 시기의 서양의 다른 이론들과 비교 분석하여 그의 이론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한다.
이우환의 이론을 서양의 이론들과 비교하는 데 있어서 본인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의 입장이 아니라 양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고자하는 입장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리고 실기를 전공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그의 이론이 작품과 어떠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지 검토해보려 한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작가들이 이우환으로부터 받은 영향관계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미술가의 한 이론이 전달되고 작가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이해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 또는 생길 수 있는 부분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2.본론
이우환의 이론의 배경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주체와 객체의 분명한 대립구도를 보이는 서양근대의 인식구조에 대해 반발하고, 의미의 고정되고 경직되고 동결된 상태에의 거부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모노하 운동의 핵심적 이론가이기도 했던 그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다음의 인터뷰자료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이미지나 강압적인 환상을 응고시키는 근대주의를 포기하고 되도록 자연에 가깝게 사물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볼 수 있는 열려진 세계로서의 표현이 요구되는 것이거든요”1)라고 당시의 세계미술의 동향을 설명하는 답변에서 자신의 입장이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근대의 기본은 모든 것을 자기 머리에서 나온 것을 대상화하는 것이라 보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죠. 모든 상품화, 생산화의 발상, 모든 세계의 사물을 존재자로 몰아붙이는 것이 근대주의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머리에서 짜낸 것을 현실화하는 것이 산업사회이므로 근대주의 비판은 곧 산업사회 비판입니다.”(2002년 인터뷰)2)라고 말하는 이우환에게 근대란 신중심의 세계에 대하여 산업 부르주아지로써 탄생한 인간의 자기주장시대를 뜻하며 표상(表象)작용은 근대를 규정짓는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보고 있으며3)라고 말하고 있고 근대 문명에 대해서도 인간의 표상화(表象化)작업에 의해 조립된 허구의 세계라고 단언하고 있다.4)
이우환이 근대를 비판하는 이유로서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인간이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인간의 상에 맞는 대상으로서 추상적으로 조작한다는 것이다. 즉 일방적인 ‘대상화의 역사’를 강요당하는 것이며 대상화된 세계사는 더욱 자연성을 잃고 허상성을 노출하게 된다는 것이다.5)
“모노파는 서구모더니즘 미술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모던에 대한 이의제기에서 시작했다고 하겠습니다. ”6)라고 모노파이론7)에 대해서 위와같이 설명하는 이우환의 언급을 통해서 그의 이론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겠다.
그의 이론을 구체적으로 전개시키기에 앞서서 몇가지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수많은 자료들과 논문들에서 재인용되어지는 이우환의 논지들을 산발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관점을 위주로 정리하면서 그의 이론들을 살펴보아 보다 객관적인 비교분석이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는 그의 이론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들에 대해서 주로 그의 직접적인 언급을 자료로써 살펴보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다른 개념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고 작품을 통해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1)주체와 객체의 대한 인식
주체와 객체에 대한 이우환의 인식은 모노파이론이나 후의 회화작업들을 통해서도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그의 논지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를 그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먼저 이해하는 것이 우선과제라 할 수 있겠다.
모노파를 서양의 다른 미술운동들과 비교하여 설명하는 인터뷰에서 이우환은
“자연이나 세계에 대해 느끼거나 생각함에 있어 동양사람들은 대상화시키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 대상화가 안되는 가운데 서로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거나 “현대사상의 하나가 자아를 보다 철저히 확립해가고자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아를 철저히 무제한으로 깨버려 무제한으로 확산시켜가자는 것으로 거기에는 자아가 아닌 남(他)이나 혹은 주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를 재확립시키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남(他)과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빨리 터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 것이 모노파들이라고 생각합니다.”8) 라고 말한다. 전자가 ‘내’가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 ‘나’의 관점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학문과 철학을 발전시켰던 서구의 기본적인 인식구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고정된 ‘자아’를 거부하고 ‘타자’(他者)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아’의 의미를 다시 인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우환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역시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있으며 서로 교류가 가능한 열린 의미의 내부와 외부 혹은 자아와 세계로 상정하고 있다. 따라서 고정된 의미가 아닌 내부와 외부는 서로 대립하고 있지 않다. 서로 교류가 가능한 것이며 각각 절대적인 범주를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공존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 내릴 수 있다.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에게 있어 자아와 세계란 공존의 관계를 터득함으로써 의미를 재확립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우환의 이론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관계’이다.
2)관계
작품을 통해서는 돌과 철판 등 서로 다른 이질적 재료의 배치를 구조로 삼아 어떤 관계가 형성이 되게 하고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지해내는 것이 이우환이 의도하는 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우환이 말하는 관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가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와 ~와의 관계’라는 틀 안에 때로는 ‘주체와 객체’가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자아와 세계’, ‘관객과 장소’ 등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가 들어갈 수 있는 마치 수학에서의 고정되어 있지 않은 정의역과 공역사이의 함수관계의 틀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우환의 ‘관계항(Relatum)’9)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관계’의 모습은 대립의 모습이 아닌 ‘공존’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열려진 의미에서의 ‘관계’는 이우환 자신도 불분명하게 사용하고 있고 비평가들 역시 문맥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며 사용하고 있어 작품에 대한 해석이 각기 다르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이우환의 회화 작업에 대하여 강태희는 언급하기를 “폴록의 뿌리는 행위가 한정된 캔버스를 넘어서서 주변 공간 또는 세계까지 확장된 것이라면 이우한은 제한된 공간을 다루어 결국 [관계]를 표면의 문제로 한정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그가 폴록과는 달리 캔버스를 미리 틀에 매긴 후에 작업하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여백이 중요한 모티브가 된 그림에서 공간의 범위를 미리 설정하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0)라고 말하는데 강태희가 이해하는 이우환에게 있어서의 [관계]란 작품의 틀 안에 존재하는 여백공간과 그어진 획 등의 조형요소간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홍가이는 “캔버스 내의 점들이 캔버스 틀을 벗어나 벽과 전시공간과 그 밖의 세상으로 연결되는 어떤 힌트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점들은 캔버스에 고정되어 있다.”11)고 이야기하면서 이우환이 주장하는 [관계]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관계]는 작품과 외부공간, 외부세상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재미있는 점은 앞에서 보았듯이 [관계]에 대해서 이해하고 의미하는 것이 비평가에 따라 각자 다르기 때문에 같은 회화작품을 두고도 서로 상이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시시각각 다른 맥락에서 이 [관계]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3)만남, 장소, 무(無)의 공간
이우환에게 있어 ‘자아’와 ‘세계’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세계’는 ‘자아’의 주위에 있는 것이고 ‘자아’를 무(無)로 보아 세계와의 일체감을 느끼는 것을 ‘만남’이라고 하고 있다.12)그리고 그러한 ‘세계와의 만남’이 바로 예술이라고 말한다. 즉 작품을 매개로 하여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인데 그 ‘만남’이라는 것은 어떤 정화(淨化)적인 장면에 있어서, 기실 어떤 무엇과도 부딪치지 않고, 일체가 투명한 시간으로 되는 생김일의 세계13)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창조작업을 만남의 장(場)인 장소의 신체적 현전으로 규정하며 작품은 타자와의 만남의 관계이고 장소14)라고 말한다.
‘장소’와 ‘만남’에 관해 이우환 자신이 언급한 내용을 직접 인용하자면,
“먼저 [장소]라는 문제를 얘기하기 전에 [만남]이라는 얘기를 하자면 [만남]은 제가 현상학을 공부할 때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일본인이 될 수도 없고 일본인도 아닌 남의 사회에 와 있다는 것이었으며 남을 알아야겠다. 타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일찍 느꼈습니다. <만남을 찾아서>를 쓸 무렵만 해도 타자(他者)라는 용어가 번역도 되어 있지 않았고 거의 몰랐습니다. 나중에 저의 글의 의미가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중반에 와서 였습니다. 제가 왜 장소 개념에 있어 place, site, location 개념을 어떤 의미에서는 무시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면 저의 ‘장소’는 그렇게 한정된 공간이 아니며 특정한 공간도 아닙니다. 어디든간에 만나면 거기가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장소라는 것은 어디 특정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만남의 시적(詩的)인 공간이 장소가 되는 것이죠, 그런 부분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하이데거, 니시다 기타로 등을 많이 끌어오지만 제 글을 잘 읽어보면 첫째는 장소가 시적(詩的)장소라는 것이고, 둘째는 장소를 좀 더 확대하여 깊은 개념으로 하자면 공(空)이라든지 불교적인 개념이 오는 데 공(空)이라는 개념이 너무 애매하다든가 하여 철학에서 말하는 무(無)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고 그 개념을 제일 열심히 많이 해명한 사람이 니시다였기 때문에 인용도 많이 해본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고 그 후에는 그런 개념을 많이 쓰지 않은 채 그냥 ‘장소’라는 말을 썼죠. 지금도 가끔은 무(無)라는 말을 쓰지만 그것은 초기에 제가 철학적인데 많이 젖어 있어서 제 작업을 철학적으로 개념을 확립해야겠다는 느낌을 많이 가졌을 때의 일이죠. 그 후에는 무(無)라는 개념도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타자와의 만남, 그 내면과 외면이 부딪히는 곳, 거기에 장소가 설정되고 그것이 작품공간이 되는 것입니다.”15) 그의 말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결국 ‘장소’라는 것은 한정되고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며 ‘공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시적(詩的)’이라는 형용사를 썼는데 그 의미는 ‘주관적, 감정적, 내재적 ’인 의미에서의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우환이 설명하고자 했던 ‘장소’나 ‘공간’ 혹은 ‘만남’이 닫혀진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면서 동시에 모호한 범위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우환 자신도 다른 개념들을 도입해서 설명하지만 전제조건이 워낙 애매한 것이었기 때문에 끌어들여온 개념들 역시 모호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의미가 분명해지기는 커녕 더욱 흐려진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위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한가지 사실은 이우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16)이 그러한 애매모호한 의미에서의 ‘만남’과 ‘장소’를 상정하게끔 하지는 않았겠는가 하는 사실이다. 최근의 인터뷰에서는 일본 땅에서 타자로서 살아가면서 내면적으로 많이 고독하였으며 타자와의 만남, 관계형성을 원하고 바랬다고 술회하고 있다.17)
공간과 장소에 대한 이우환의 언급을 더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쓰는 장소라는 개념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주 적은 것 같았습니다. 한국의 언어로 그냥 ‘장소’라고 해서는 지정된 장소인지 무엇인지 알기에 애매합니다. ‘무(無)의 장소’라는 것은 작품이 있고 거기서 공간성을 느낀다고 했을 때 그 느낌이 앞선다는 의미에서의 ‘무(無)의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데 있어 작품은 날아가 버리고 거기에 서 있는 어떤 휑한 공간감이 ‘무(無)의 장소’라는 식이지요. 불교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18)
장소와 만남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또 하나의 개념인 ‘무(無)의 장소’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관객이 작품을 마주 대했을 때 어떤 심리적인 감흥에 의해 현실적인 공간감을 초월하여 느낄 수 있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공간을 무(無)의 장소라고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홍가이는 일본 경도철학의 니시다와 니시타니의 순야타 개념등을 이용하여 이우환의 무(無)의 개념과 그의 작품을 비판하지만 이우환 스스로가 자신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전적으로 어떤 한 철학에 의존한다기 보다는 필요에 따라서 부분만을 선택해서 끌어온다고 밝히고 있는 바이다. 결국 그의 무(無)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철학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이우환 스스로 언급했던 내용들을 토대로 살펴보는 것이 그의 의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이우환이 직접 언급하는 아래의 인용구들을 살펴보면 무(無)의 장소는 결국 무한, 무한정한 세계, 자연의 영역 등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작품은 무한에로의 통로이며 그 문이다.
무한이란, 닫혀진 이미지 공간의 것이 아니라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감지되는 무한정한 세계의 것을 말한다.
공백의 캔버스에 몇 개의 점을 찍음으로써 생생한 무한의 장면을 끌어내려는 회화, 불확정한 돌과 인간과의 사이에 중성적인 철판
을 놓음으로써 자연의 영역-무한에로 다리를 놓아 보려는 조각 등.
그 어느 것도 스스로의 이데아(Idea)의 증식이나 확대가 아니라 미지적인 것을 불러들이기 위한 외계와의 관계의 장(場)인 것이다. 19)
4)시간성 공간성
“원래 공간은 형(形)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20)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혀서 선을 그으면 처음에는 짙지만 점점 엷어지고 마침내는 사라져 가게 된다. 그러면 또 붓에 물감을 찍어들지 않으면 안된다. 선(線)은 반드시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공간이 나타나고 공간형성의 종료와 동시에 시간은 모습을 지운다. 겹쳐 바르는 일이나 다시 그리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 것도 시공간을 자아내는 일필(一筆)일획(一劃)의 실존성 때문이다. 한순간 한순간은 일회성이지만 모든 것이 한순간 자체의 연속이기 위해서는 그들은 반복성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신체성의 개재(介在)를 의미하기 때문에, 기계적 또는 타성적인 선(線)은 단순한 기호에 다름 아니다. 신체의 호흡과 세계의 리듬을 가다듬는 수련(修練)속에서 표현은 피가 통하는 생명체가 된다.”21)라는 이우환의 언급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시간성과 공간성의 개념을 무척이나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우환의 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그의 입체작품에서는 작품이 놓여있는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회화작품에서는 물리적인 의미에서 또는 객관적이고 눈에 볼 수 있는 의미에서의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 있으므로써 느껴지는 주변의 어떤 것, 말하자면 공기 같은 것을 포함하자는 것이에요. 주변을 나타내기 위해 대상을 찢어서 발려 놓는다거나 일부를 다른 곳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사이를 두게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간이나 시간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에요. 장소란 즉, 시간성과 공간성을 다 내포하고 있는 것이에요.”22)라는 언급에서는 그의 입체작품에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이 회화작품에로 동일하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회화작품에서의 시공간은 물리적인 또는 객관적인 의미가 아닌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주관적인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과 과정에서 느끼게되는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관람자인 우리들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다음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인식하고 있는 회화에서의 시간성의 개념을 짐작할 수 있다.
“캔버스와 저는 어떤 면에서는 대등한 입장에서 그린다는 행위를 개재로 해서 절대적인 장면에 맞부딪친다는 그런 것을 느껴요. 그래서 그 행위하고 있는 그 시점, 그 순간, 그 찰나가 굉장히 중요하고 그 찰나가 수만시간, 수억만년과도 맞먹을 수 있는 그러한 찰나라고도 느껴지는데 그 절대적인 찰나를 맛보면서 그것을 지속시키고 싶다. 더 보편화시키고 싶다. 그것이 작가의 갈망이나 소망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해서 하나의 예술이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보아집니다.”23)
공간에 대해서도 그가 이야기할 때 진정 보이는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작품을 놓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는 설정 하에 이뤄지는 지나친 미사여구들은 아닌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세계가 보이는 세계로만 다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지만, 작품 자체는 현저히 눈에 보이는 것이며, 제작된 것이며 자연 그대로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자연 그대로에 두었으면 어색함이나 이질적인 느낌이 없었을 대상물을 전혀 엉뚱한 곳에 섭리에 어긋나게 놓음으로써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물(物)자체에서 오는 그의 작품의 인상은 강하다. 즉 놓여진 돌과 세워진 혹은 찢겨진 철판에서 왜 작가는 그 물(物)과 우주와의 관계를 보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보여지는 대상이 결코 쉽고 만만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 속에 있을 때, 원래 있는 곳에 있는 것을 주목하여 보게 했을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인식하고 그것의 존재와 더불어 주위세계, 외부와의 조응에 고개를 끄덕이고 인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갤러리라는 공간 안에 들어온 작품은 철저히 자아에서 벗어난 듯한 태도로, 마치 작가 자신은 창조자가 아닌, 입장인 것으로 표명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더욱 강한 작가의 자아와 주체성을 느끼게 되고 작가의 행위를 느끼게 되고 인간의 인위적인 의지를 느끼게 된다.
5)이우환에게 있어서의 작품, 작가, 예술의 의미
“작품이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만남을 불러일으킬 열려진 구속성이 필요한 것이다. 열려진 구속성이란 세계와 융합하면서 다른 것과 사이를 두고 있는 작품의 이중성을 말한다.”
“나로부터 나온 것과 저편에서 와주는 것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 어떤 작품이 된다”
“작품은 합일과 사이를 동시에 지닌 모순률의 구조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작품은 나의 저편에 존재하는 인식의 텍스트는 아니다. 그것은 비대상성을 띤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나의 내부를 통과하여 주변으로 확대되고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無의 매체(媒體)로서 작품은 이루어 지고 있다. ”
“작품은 기호도 텍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연이며 비대상적인 세계다.”
“예술가의 일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빗겨 놓은 일에 있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다. 느껴진다....예술은 대상을 넘어 존재하는 우리도 감싸안은 無이기 때문이다..”24)
위에 제시된 그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이우환은 작품을 창조하는 입장으로서의 예술가를 부정한다. 그에게 작품제작이란 오히려 창조와는 거리가 먼 ‘제시하기’에 지나지 않으며, 그는 표현이라는 말도 거부하다. 단지 다른 차원에 옮겨놓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빗겨놓은 일25)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가의 일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빗겨 놓은 일에 있다.”26)라고 말한 것처럼 예술가의 역할을 무엇을 만들어내는 입장이 아닌 단지 ‘제시’함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제시’한다는 내용에서 더욱 발전시켜 모노하의 또 한가지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우환의 설명을 빌리자면 앞의 있는 그대로는 일반적 상념이고, 뒤에 있는 그대로는 표현의 차원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표현의 차원으로 갖다 놓은 [있는 그대로]는 얼마만큼 다른, 있는 그대로를 제시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27)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알기 위해 다음의 인터뷰를 살펴보자.
“모노하의 경우 돌을 썼거나 물을 썼거나 철판을 썼거나간에 돌은 돌대로, 물은 물대로 철판은 철판대로 있어요. 그것은 어떤 개념을 나타내지도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의 개념과 더불어 있는 것이에요. 개념과 더불어 있으면서 개념아닌 측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요. 돌은 돌대로의 측면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Earth Work의 경우 돌은 돌 그대로의 측면을 지니지 않아요.”28)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이 과연 감상자에게 얼마나 이해될 것인지는 과연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노하가 분명 물성(物性)에 대한 강조를 유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물질 그대로의 측면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표현은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작품이 존재하는 맥락과 장소를 더 강조하지만 어쩔수 없이 보여지는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물질감에 대해서 완강히 거부할 수는 없기에 말하자면 자신들의 논지의 모순을 ‘어떤 개념을 나타내지도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의 개념과 더불어 있고 그러면서 개념아닌 측면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식으로 돌려 표현함으로써 어느정도 인정한 것은 아니겠는가. 그리고 같은 인터뷰에서 이우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관계라고 하기 보다 관계항이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요.…다시말해 項자체가 문제이지 작품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러나 작품이라는 대상물 자체가 없이는 느끼게 할 세계를 표현할 수가 없어요. 대상물을 제기하면서 대상이 아닌 주변의 커다란 세계를 느끼게 하려니까 장소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에요 … 미국의 미니멀 아티스트들의 경우는 …사물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는 세계와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거에요.” 여기에서는 보여지는 역설과 모순의 어법은 중의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역설과 모순이 아닌 개념의 불분명함에서 빚어진 어리둥절한 결과라고 본인은 생각하는 바다.
6) 모노하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철판을 찢어서 가르고 그 사이에 돌을 늘어놓음으로써 의지와 자연의 상호침투의 장을 짜내고 있다. 또한 철판에 유리를 겹쳐놓고 돌을 떨어뜨림으로써 산뜻한 금을 자아내고 신체와 사물이 직접 만나는 장면성(場面性)을 끌어내었다”29)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다른 모노하의 작가들의 작품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이러한 작품들의 모습은 극히 임시적(臨時的)이며 임장적(臨場的)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작품이 존재하는 그 순간과 그 공간만이 중요한 것이며 작품을 그 자리에서 옮겨 놓으면 그 모습은 원래의 그것과 달라진다30)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임시(臨時)는 일시적인 것을 의미하고 임장(臨場)은 사전적의미로 그 현장에 나타남, 영어로는 presence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을 ‘있다’의 개념과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무엇이 존재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무엇이 있다’의 의미이다. 작품이 임장(臨場)성을 지닌다고 보는 이우환의 입장은 그것이 그냥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31) 그러나 실제 이우환의 입체 작품들이 정말 주변의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입체 작품들이 작품 주변의 공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있다기 보다는 단지 작품이 놓여지는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우환은 모노하가 대결한 것은 사물에 관해서가 아니라 행위와 사물을 맞대어 봄으로써 공간이나 상태, 관계, 상황, 시간 등이 나타나게 되는 비대상적 세계라고 밝히고 있다.32) 재밌는 것은 모노하 운동이 명칭에서는 ‘물파(物波)’를 의미하지만 전적으로 사물성, 물성만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자신이 60년대 말에 입체를 시작할 때에도 물체에 대해서 강한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도 물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고 하며 자신의 작품은 입체라고 해도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소끼리의 관계 개념이었으며 장면 형성의 의식으로 작업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고 강태희는 지적하고 있다.33) 모노하의 권위자인 미네무라 토시야키 역시 모노하의 제작원칙을 만남의 추구, 자연물질과 물리적 현상을 소재로 하기, 존재와 상호 연관의 상황 파악을 추구하여 제작자 아닌 관람자나 명상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이기에 정작 중요한 것은 물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개방이나 노출이다34)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운동을 모노하(物波)라고 지칭하게 된 것은 상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7)미니멀리즘과의 비교
이우환은 행위나 사물을 인간의 표상물로서가 아니라 가능한 한 각각의 존재성에 관련짓게 하는 일, 최소한의 관련에 의해서 최대한의 세계을 개시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장소적 미니멀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35)라고 언급하였는데 아마도 이것은 위의 논지와 일관되게 사물의 물성(物性)보다는 사물이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 새로 만들어지는 주변상황과 맥락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장소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에 과연 적합한 것인지는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니멀리즘의 영향관계에 대해서 이우환 자신이 분명히 말하기를
“실제로 저는 미국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능한 대로 자기 감정이입, 자기 이미지이입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소재를 중성적(neutral)으로 다루고 최소한도로 한정을 해서 거기 있는 바로 그것 외에 가능한 한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라는 부분은 모두 서구 미니멀리즘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곧바로 “미니멀 아트는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지만 저는 그 지점이 출발입니다. ‘그것 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게 함으로써 ‘그것 외의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중략......그러니까 그 주변이나 그 장소나 시간 등 그것 외 그 무엇을 보이게 하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의미나 이미지를 주지 않고 중성적(neutral)으로 최소한도로 한정함으로써 그것을 항(項)으로 해서 그것 외 주변의 공간이나 다른 것이 보이게 하는 셈입니다.(이우환 인터뷰 2002.8.14)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그는 자신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분명히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의 미니멀리즘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서구 미니멀리즘의 문맥에서 논하고자 한다면 모순된 부분이 적지 않다. 서구의 미니멀리즘의 작가 도날드 저드는 기존회화나 조각이 갖는 추상적 성격에 대한 반발로 자신의 글 [구체적 사물(specific object)]36)을 새로운 예술의 형태로 제시하였다/. 그는 직접적인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에 구체적일 수밖에 없고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사물을 반복 배열함으로써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작품을 표현한다. 그의 작업에서의 반복과 연속은 전체를 조화롭게 보이기 위한 구성적 발상이 아니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작위적인 행위의 결과이며, 작가의 이성적 논리적, 주관적 구성체계를 배제한 작품 구성법이다. 그것은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전체와 부분간의 서열 없는 단순한 배열이다. 그를 비롯한 미니멀아트 작가들이 추구하였던 목표는 구체성의 획득과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축소된 제작형식만큼이나 축소된 내용을 갖는 예술’이 바로 미니멀아트37)이고 추상적인 관념이나 환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미술이 미니멀아트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관념’이라는 부분에서 이우환과 미니멀 아트는 다르다. 미니멀 아트 작가들의 작품이 단지 ‘사물 그것’이라면, 이우환은 스스로 ”작품은 (기호나 텍스트가 아닌) 살아있는 ‘자연’이며 ‘비대상적’세계“라고 단언한다.38) 이것은 작품 자체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작품이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관념적 무게를 지닌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의 돌은 자연물이고, 철판은 돌에서 뽑아내어 인간의 개념으로 추상화시킨 자연성과 인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보며 이 양면적인 의미의 철판을 돌과 인간 사이에 놓아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작품의 의도라고 설명한 바 있다. 39) 그의 이러한 입장은 작품이 지니는 관념적 추상적 무게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미니멀리스트들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며 그들과 같은 것이 있다면 ‘제작방식에 있어서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 한 작품 형태’가 유일한 것이다. 이처럼 분명히 다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스스로를 ‘장소적 미니멀리스트’40)라고 언급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할 뿐이다.
신체적 관계성
이우환은 71년부터 회화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41) 그의 회화는 근대 회화에서 중요시했던 선, 색 등의 조형요소보다는 ‘행위’를 더 중요시하였고 그것을 이우환은 ‘신체적 관계성’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행위와 과정을 회화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도입하였으나 이것은 이우환 이전의 다른 작가들에게서 이미 많이 보여지는 것으로 그다지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게 본인의 입장이다. 단지 이우환 스스로 말하는 ‘작품과의 호흡’의 내용이 매우 중요한 것 같은데 이우환이 말하는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가 바로 이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바이다. 실제로 그는 ‘작품을 통한 타자와의 만남’을 자주 언급하지만 여기에서 ‘타자’가 과연 ‘다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타자’라는 개념조차 때로는 외부, 세계 등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말하는 ‘만남’은 개인적인 수련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게되는 관념적이고 극히 주관적인 체험일 뿐이지 작품과 관람객과의 ‘만남’은 뒤로 물러나 있을 뿐이다.
그가 말하는 신체적 관계성이란 철저히 작가 자신이 제작과정에서 개입되고 스며들어간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만든다’, ‘제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부정하고 “세계와 직접 만나고 관계맺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실질적으로는 만드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이뤄질 수 밖에 없다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우환은 작가의 창조적 행위로서의 예술활동을 거부한다는 뜻에서 ‘만든다’ ‘제작한다’는 용어를 부정하고 있는 듯하며 대신에 그와 같은 의미로 ‘신체적 관계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p 15
9)이우환의 한계
근대미술을 표상화의 논리에 의한 이미지의 대상화작업이라며 비판하고 거부하였던 그가 실상은 자기 스스로 비판의 대상이었던 근대미술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표상(表象)이라고 하면 그 사전적 의미로 ‘상징, 감각을 요소로하는 심적 복합체,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 의식내용, 심상’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우환의 작업에서 적용해본다면, 실제로 그가 재현하려는 대상을 거부하고 행위와 과정을 중시하는 작업을 하였다 하더라도 단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만 제거되었을 뿐이지 작가 자신의 관념과 의식이 작품을 통해서 드러나는 표상화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우환은 像을 필경은 허상(虛像)이라는 철저한 인식, 말하자면 세계란 결국 대상(對象)세계 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각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오브제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오브제는 세계의 소유의식을 그대로 노정시킨 ‘근대 부르조아 가치관 위에 선 인간’의 표상(表象)이라는 그림자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관념과 그것이 표상화된 물체, 작품 사이에는 자기동일(自己同一)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낸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관념의 양식(樣式)과 크기만큼의 응고물로 그치고마는 작품은 보는 자로 하여금 그 관념의 윤곽을 넘어서서 볼 수 없게 한다고 말한다.42) 이것은 Earth Work나 개념미술 등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우환의 이런 입장은 자신의 작품에서의 돌이 “어떤 개념을 나타내지도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의 개념과 더불어 있다”거나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스며든 어떤 것이 허용되어 있으며 완전히 개념으로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돌은 돌대로 남게 되는 것이고 개념과 돌과의 어긋남을 허용하는 것”43)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논지는 앞서의 자신이 비판한 미술의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이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작품 역시 작가의 관념을 표상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러한 모순된 부분은 다음의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이우환 스스로도 어느정도 인정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제가 아무리 근대주의를 비판했어도 제 작업이 근대주의를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저는 근대주의를 안고 있으면서 자기 비판으로서 근대주의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밖에 서서 근대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2002, 8, 14 김미경과의 인터뷰)44)
덧붙여서 이우환은 [오브제의 현상학적 서설]이라는 글에서 개념미술과 Earth Work가 미술의 영역과 한계를 극복하고자하는 시도에서 일어난 미술개념이라는 시각보다는 작가의 관념이 대상물을 통해서 투영되고 작품을 통해 표상화하는 미술이라는 시각에서만 주로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작가의 오해인지 아니면 논지의 전개상 한 부분만 부각시켜 설명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3.결론
이우환의 이론들과 그의 작품들은 70년대의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한국의 미술계에도 끊임없는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77년 계간 미술과의 인터뷰에서 이우환은 세계의 미술동향에 대한 정보전달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고 이를 비롯한 이후의 많은 인터뷰에서도 한국 미술계에 대한 평가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45) 이것은 비단 당시에 그치지 않고 199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동향]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는 등46) 한국에서 활동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한국 미술계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표명하고 있다.
현재 이우환에 대한 다양한 연구논문들이 발표되면서 그동안 이우환과 70년대 한국의 모노크롬을 연관지으려는 그릇된 이해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지적하는 사례들이 많다. 많은 사례들 중에서도 강태희가 이미 지적한 바 있는 내용으로 우리나라의 권위있는 비평가들이 일본의 모노파를 모노화(畵)로 잘못 사용하기까지 한 전력이 있다.47) 서성록이 1990년 8월호 월간미술에 [모노톤 회화와 일본 모노畵의 관계]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표기상의 오기가 아니며 “物派로 널리 알려진 일본 모노화”라고 언급하며 시종일관 정체불명의 ‘모노화’와 우리나라의 모노톤 회화를 비교대조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권위있는 비평가가 지난 시대의 미술을 재평가하는 의미의 글을 철저한 연구없이 기본적인 것조차 잘못 이해한 채 왜곡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더욱 독자들의 오해를 조장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필경 작업과 이론을 병행하며 자신의 철학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려했던 그의 생애에 걸친 노력은 높게 평가할 부분이다. 아마도 그만큼 일관되고 연속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발표한 작가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동서양의 철학적 개념이나 미학개념, 용어 등을 무분별하게 인용하여 쓰지는 않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바이다. 그가 동서양의 철학, 미학 개념들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와 문맥 내에서의 이해 없이48) 단지 부분만을 가져다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논지를 분명하게 하기는커녕 더욱 애매하게 하고 이해를 어렵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하면 할수록 그의 이론은 작품에서 더욱 멀어질 뿐이다. 또 한가지 그의 이론이 애매모호한 성격을 띌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원인으로 그의 이론의 주요 개념들이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영역들에 동시에 사용됨으로써 빚어지는 혼선을 들 수 있겠다. 즉 회화와 조각은 그것이 존재하는 양상도 다르거니와 맥락이 다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주요 단어들이 두 영역의 구분 없이 쓰여 독자가 스스로 구별해서 이해해야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렇듯 하나의 용어를 가지고 전혀 다른 문맥들에서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학문적 자세에서 그를 연구하고자하는 후학들에게 당혹감과 난감함을 안겨다 준다. 이는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작품자체를 감상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진정 그가 바란 것이 ‘타자와의 만남’이었다면 소통을 위한 작은 배려가 있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품이 100% 언어와 이론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작품의 영역과 이론의 영역은 분명 독립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 양자는 각각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두 가지가 서로 완벽하게 결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이 작품자체를 부정하거나 작품의 진면모를 느끼는 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이론의 역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우환이 ‘한국인’이라는 요소가 과연 일본의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1965년 한국과 일본과의 협정이 일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였으며 60년대 후반 일본내 새로운 미술운동의 이론가로서의 이우환이 ‘한국인’이었다는 것 또한 일본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일본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의 이우환을 연구해보는 것도 (즉 일본내 타자-특히 한국인-로서의 이우환) 그를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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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