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 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입니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 시대에 일어난 옥사에서 피해 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 에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정국을 운영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영조로서도 모든 붕당에 공평하게 정국을 운영 해 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한편, 천신만고 끝에 차지한 왕좌였지만 영조에게 형 경종 은 평생 마음의 짐과도 같았습니다. 더욱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서서히 일어나면서 사태는 점점 심각해 졌습니다.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습니다.
영조의 어머니가 궁녀 출신이 아닌 근본을 알수 없는 무수리 신분인 데다가 그럼에도 그녀가 노론을 후원세력 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 영조의 아비가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에게는 참으로 참담한 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728년 소론 중 과격론자였던 이인좌가 정희량 등 일부 소론 세력 및 남인들과 공모하여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고 반란을 아울렀으며 난에 참가한 사람도 20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난이 진압된 후 잡혀온 이인좌는 국문하는 영조 앞에서 그를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영조가 숙종의 자식도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이틀 만에 참수되었습니다.
이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겼고 이 상처 는 평생을 따라다녔으며, 그리고 이것이 결국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111)> 경종 영조 8 - 사도세자(1)
영조 시대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은 영조가 하나뿐인 아들 을 뒤주에 8일 동안이나 가둬 죽게 한 일일 것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아비가 아들을 그렇게 죽인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영조가 사도 세자를 죽인 이유가 무엇일까에 관해 온갖 설이 분분 합니다.
당쟁의 희생양이라거나 사도세자가 더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쳐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설 입니다.
어쨌든... 실록 등 여러 기록을 따라가면서 도대체 왜 영조는 하나 뿐인 아들을 그토록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을까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입니다.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가장 오래 재위한 (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왕후, 정순왕후 등 왕비 2명과 후궁 4명을 두었는데,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 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습니다.
영조가 등극하기 전에 태어난 첫 아들 효장세자는 10살에 죽었고,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1735년 1월 21일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41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던 영조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습니다. - 삼종(三宗. 효종, 현종, 숙)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 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최연소 원자, 최연소 세자)
그 종말은 참혹했지만,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도 기본적 으로는 일반적인 임금과 왕자의 관계와 같이 진행 되었습니다.
임금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순조롭게 성장 했습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매우 총명했고, 영조의 기쁨은 그만큼 더 커졌습니다.
세자는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알았다고 합니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에서는 자기를 가리켰으며, 천지, 부모 등 63자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는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쓰자 대신들이 서로 다투어 가지려고 했고, 영조가 기뻐 하며 세자가 쓴 것을 입시한 대신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왕권과 사대부의 이원체제...사대부가 하나가 아니어야함이 오히려 당연한거는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