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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시고 또한 킹 제임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킹제임스 흠정역 한글성경을 출판하신 정 동수 교수(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님 께서 쓰신 기독교 교리에서 "주의 만찬에 대하여"라는 글을 읽고 이의를 제기한 글입니다.
>>>[이 귀우 ]
정 동수 교수님
저는 독일 베를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이 귀우입니다. 교수님께서 만드신 웹 싸이트를 통해서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글을 쓰게 된 것은 교수님께서 쓰신 “주의 만찬에 대하여”를 읽고서였습니다. 기독교 교리라면 말씀이 가르치는 내용을 설명하면 되는 것인데, 기독교 교리로 분리를 하시고는 거기에 다른 이들을 예를 들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고 잘한다는 식의 내용에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고, 말씀에 대한 분별이 너무 상이한 점에 대하여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편의상 교수님께서 쓰신 글 중간 중간에 삽입하였습니다. 좀 불쾌한 내용이 있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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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수]
즉 그들은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빵 조각(host)을 진짜 예수님의 몸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빵 조각(성체)을 먹는 자는 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또한 그 빵 조각 안에 무슨 신비한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져나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 빵을 먹이려고 예배 시간에 애들을 찾고 부산을 떱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 아래 묶어 두려는 마귀의 계략이며 성경은 그 빵 조각 안에 아무런 신비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이 만찬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지역 교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의 만찬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므로 지역 교회가 정한 내규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았어도 지역 교회의 내규 - 예를 들자면 침례를 받은 자만이 참여한다는 것 - 를 지키지 못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코 불평이나 시비의 요소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각 교회의 필요에 따라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 11장에 있는 문제들이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44절에 있는 대로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100% 유대인이었으며 -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행10장의 고넬료 사건이 처음임 - 이들은 말라기 3장 말씀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의 주님이 성전에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으므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성전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스데반 사건을 통해 다른 곳으로 흩어버릴 때까지 성전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사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주의 만찬에 대하여
주의 만찬은 침례와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규례(ordinance)입니다. 규례란 쉽게 이야기해서 법규입니다. 보통 소방 법규, 공공기관의 조례 등을 나타낼 때 'ordinance'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그분의 재림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주의 만찬을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찬에 대해 오해가 있으므로 이것을 성경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
● 주의 만찬의 제정 시기
주의 만찬은 신약 성경의 첫 세 복음서 - 공관 복음서 -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7-20). 이 규례는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저녁에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고전11 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것은 또한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나누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3-26).
천주교나 개신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정하신 것이므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은 주의 만찬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요한복음 6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화체설 교리 즉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축도로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거짓 교리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단 한번도 요한복음 6장을 사용해서 주의 만찬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출간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아이언사이드는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03년 1월에 출간되는 그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만찬의 배경
주의 만찬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은 다름 아닌 유월절 음식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에서 이 점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줍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그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들이 그것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규례(規例)들을 전해 준 대로 그것들을 지키므로 이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 26).
●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만찬'이라는 천주교 용어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성례 혹은 성사(sacraments)가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체 성사 즉 '성만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기원이 천주교의 성체 성사 제사인 미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이런 천주교 용어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주의 만찬의 의미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곧 잊어버리므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주의 만찬이라는 시청각 교육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이라는 마귀의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단순한 복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미사가 '피 없이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더 이상 죄로 인해 우리가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제사장(priest) 혹은 사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 주의 만찬의 참석자격
이 규례의 이름이 "주의 만찬"이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구원받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먹이느라 애쓰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천주교의 미사에서처럼 그 안에 무슨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하는 큰 실수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할 의무가 없습니다. 즉 회계보고할 수 있는 나이에 다다라야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주의 만찬의 빈도
주님의 승천 이후의 첫 오순절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군중들을 위해 가정 예배나 모임이 있었으므로 매일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주의 만찬은 보통 '빵을 나눈다'(breaking of bread)는 말로 표현되는데 사실 초대교회의 초반기에는 매일같이 빵을 나누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굳이 '빵을 부순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일'이 곧 '음식을 먹으며'로 해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매일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主)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참고 기다리는 자가 누구리요? 그가 나타나는 때에 설 자가 누구리요? 이는 그가 정련(精鍊)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기 때문이라(말3:1-2).
따라서 이런 구절을 들어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른 시대에 속한 것을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여기서도 그들이 단순히 주의 만찬만을 나눈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절 참조).
그런데 그 이후에는 회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고전 11:26에 마지막으로 만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6).
어떤 이들은 "이 빵을 먹을 때마다"(as often as ye eat this bread...)라는 표현에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가지고 '모일 때마다'로 해석하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as often as'가 단 두 번 나옵니다. 이곳 말고는 계11:6에 나옵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11:6).
These have power to shut heaven, that it rain not in the days of their prophecy: and have power over waters to turn them to blood, and to smite the earth with all plagues, as often as they will.
여기서 알 수 있듯이 'as often as'의 'often'은 일차적으로 '자주'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as often as'는 '매번 할 때마다'의 뜻입니다. 물론 고전 11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귀우]
고린도 전서 11장 26절의 ‘as often as'를 말씀하셨는데, 11장 25절에 있는 ‘as oft as'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다음은 위에서 말씀하신 아이언사이드의 설명입니다. “아마 제일 먼저 일어나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왜 이 예식을 대부분의 다른 교파에서는 대체로 일 년에 한번 내지 두 번 지키는 정도인데 당신들은 어떻게 그리 자주 행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유월절의 경우와 같이 이 예식을 언제 지키라고 하는 명확한 말씀이 없습니다. 유월절은 일 년에 한번 씩 경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의 만찬을 세우실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행하여 자주 나를 기념하라"고 하심으로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행하여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자기들을 위한 그의 사랑과 희생을 「자주」 나타내 줄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아이언사이드) 아이언사이드는 영어권의 미국인이었는데 한국인보다 영어를 이해 못할까요? 그는 무디기념교회 목사였습니다.
헬라어로는 둘다 hoskis라고 하는데, ‘보다 얼마나 더 많이’, ‘만큼 자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역시 미국인인 윌리암 맥도날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의 빈번에 대해 ‘너희가 자주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에’(고전 11:6)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시(時)에 대해서 반드시 매주, 혹은 매월, 혹은 각 절기마다 일회씩 지켜야 된다고 말하나 그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보다 지나쳐 간 것입니다. 동시에 초대 제자들이 매주 주님을 기억하기 위하여 모였다는 가능성은 강한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윌리암 맥도날드, 엠마오 성경학교 간행)
찰스 스펄전 역시 주의 만찬을 매주 지켜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나의 증언은 내가 현재의 하나님의 백성 중 다수의 심정을 말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들의 주의 만찬상에 우리 몇 사람들이 해 오고 있는 대로 매주 모인다고 해도 우리는 만찬의 상징을 상실하는 떡 뗌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것입니다. 나는 흔히 주일 저녁에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 주제가 어떤 것이든, 비록 시내산이 머리 위에서 우뢰를 발하는 말씀이든, 혹은 갈보리의 애석한 주석의 말씀이 우리의 심중을 찌르는 것이든, 만찬을 떼기 위해 모이는 것은 동일하게 특유한 것 같습니다. 교회가 만찬을 월 일회로 미루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부끄러운 것이며, 교제나 떡 떼기 위해,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만찬의 영광을 탈취함으로서 주 중 첫날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매 주일 주의 만찬을 행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계절적인 빈번 이하로 주의 만찬을 미루는 것을 만족히 여기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Treasury of the Old Testament - 찰스 스펄전, vol. I. P.543)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주의 만찬을 매주 할 것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매 주일마다 자기들의 사랑하는 구주의 고난을 기억하는 예식을 행하였음은 명백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또한 오늘날에 그러리라고 나는 믿는 것입니다.”(Thoughts on Revival,1736)
또한 사도행전 20장 7절은 바울과 그 일행이 말씀을 전한다거나 또는 듣는다거나 기도한다거나 찬양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지 않고 “떡을 떼려하여 모였다고”(소위 변개된 개역한글성경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떡을 떼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음식만을 먹기 위한다면 그들이 왜 하필 드로아에서 일주일을 기다려 “안식 후 첫날에” 모였을까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은 안식일에나 평일에나 유대인의 회당으로 갔습니다.(행 9:20, 13:5, 14:1, 17:2,10, 18:19, 19:8)
그들은 특별히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정해 모였던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사도행전 20장을 인용하시면서 “그런데 그 이후에는 회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고전 11:26에 마지막으로 만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고 하셨는데 고린도 전서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주후 53-58년경)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에 체류하는 동안에 기록되었습니다.(참고: 행 19: 8-10절, 고전 16:8) 그러면 시간이 어떻게 거꾸로 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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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수]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주의 만찬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에서는 주의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며 예배의 꽃이 주의 만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의 'often'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희는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배(worship 혹은 service)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예배에는 찬양도 있고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영혼 구령임을 감안할 때 예배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령의 메시지와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전담 사역자가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많은 시간을 들여 선포할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시청각 교육을 위해 주의 만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찬 자체가 예배라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이 귀우]
출12:26-27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유월절은 단순히 명절입니까, 제사입니까? 위 말씀은 분명히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the sacrifice of the LORD'S passover)”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월절에 바쳐지는 예물은 어린양입니다. (민9:7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사람의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었거니와 우리를 금지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정기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심은 어찜이니이까) 이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정월 십사일 해질 때에 지켰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드린 예물을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꼭 먹어야 할 주식인 어린양을 나누어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부식인 무교병과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이었습니다. 제사에 예물이 없으면 그게 어디 제사가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 1절에는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첫 언약에도”라는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는 섬기는 예법과 하늘에 속한 성소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기록한 말씀입니다. 첫 언약의 섬기는 예법인 제사의 제물은 짐승이었지만, 지금 우리들의 섬기는 예법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율법으로 말미암아 드리는 제사들은 죄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며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위하여 드릴 제사가 없다고 해서 제사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곧 예배입니다.(요 4:21-24)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고전10:18) 예배하는 자는 그 제단에 참예하여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제물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또한 정말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결코 식인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전 11:32) 이 말씀이 단순히 음식을 먹기 위해서 모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초대 성도들이 애찬(愛餐,agape)을 하며 주의 만찬을 했었지만 말입니다. 단순히 음식을 먹으러 모였다면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안했을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고전 11:34) 그들은 교회에 모일 때에 주의 만찬을 먹으러 모였던 것입니다.(행 20:7, 고전 11:18, 20, 33) 그들이 먹으러 모인 날은 “매 주일 첫날”(고전 16:2)이었습니다. 주후 약 110년경 비두니아와 본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가 자기의 상관 트라얀(Trajan) 황제에게 그리스도인들의 관습에 관한 보고서에 ‘순전한 음식에 참예하기 위하여’ 모이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주의 만찬-네일 M 후레이저, 엠마오 성경학교)
유월절 제사가 “여호와께서 애굽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하듯이, 주의 만찬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6-10)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제사는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는 것이었지만, 주의 만찬은 떡과 잔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하듯이 떡과 잔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떡과 잔을 가지시고 “나를 기억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먹으러 모였고 누가가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다고 한 것은 주의 만찬을 대하며 주님을 기억하기 위하여 모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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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수]
그러면 이런 전통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것을 주장하는 ○○ 교회는 다비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비는 성공회 교인이었으며 거듭난 뒤에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와 비슷한 성공회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하듯이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하며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하게 했고 그 결과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미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천주교나 성공회의 주장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므로 ○○ 교회에서도 같은 규례를 만들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다비의 용기와 지혜와 명철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사람의 전통을 교리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다비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창시자가 있는 교단이나 교파는 어쩔 수 없이 그 창시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등은 인간 창시자가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침례교인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창시자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만을 따르므로 과감하게 '성경신자'(Bible believer)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감리교인, 장로교인 등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오직 침례성도 즉 'Baptist'라는 말만 성경에 14회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용어요, 자랑스런 용어인 것입니다.
>>>[이 귀우]
침례교는 1611년경 토머스 헬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런던에 세운 침례교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찍이 분리주의자들(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하길 원하는 자들)에 대한 박해를 피해 1608년경 암스테르담으로 갔다가 영국으로 되돌아온 자들이었습니다. “Baptist”라는 단어가 성경 그것도 14회가 아니라 15회 신약의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데, 요한과 결부시켜 “침례 요한”, 또는 “침례자 요한”을 지칭하기 위해 쓰인 단어로 “침례를 주는 자”란 뜻이며, 성경적인 용어로서는 그것이 어디 “침례교인”을 의미하는지 참으로 이상할 따름입니다.
침례교인을 Baptist라고 부른 것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안 그들은 본래 자기들을 지도하던 존 스미스의 가르침을 따라 교인들에게 침례를 주면서 Baptist(침례를 주는 자)가 나중에 침례교인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성경신자'(Bible believer)라고 부르는데 할 말은 없지만, '성경신자'(Bible believer) 역시 어디 성경적인 용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적인 용어라는 말이 나왔지만, “형제”나 “형제들(Brethren)”이란 단어가 성경적인 용어임을 부인하진 못할 것입니다. 또한 소위 그리스도인 형제들 또는 형제단의 창시자는 다비가 아닌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비는 성공회의 신자가 아니라 신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1827년에 사임했고 그 다음해에 더블린의 6 형제들과 함께 주의 만찬을 시작함으로 기성교계를 결별했습니다.
그 당시 그러한 형제운동은 전 유럽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으며 나중에 서로를 알아보고 교제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100여명의 형제들이 각처에서 구원을 받고 주님을 섬기며 서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조지뮬러(고아원, 기도의 사람), C.H.맥킨토시(저서: 모세오경강해-생명의 말씀사), 위그람(성서 히브리어,헬라어 사전 저자), 디엘 무디와 함께 복음을 전했던 헨리 무어하우스, 에릭 사우어(저서: 세계구속의 여명, 영원에서 영원까지-생명의 말씀사), 핫슨 테일러(중국내지선교회) 등도 있습니다.
위에서 예를 드신 아이언사이드 또한 형제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무디기념교회의 사역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불렀기 때문에 세속교회들은 그들을 형제단(Brethre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는 그러한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그들은 교파주의를 배격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분리하는 어떤 명칭도 사용하여 부르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교파명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며 모이는 지역에 따라 지역의 이름으로 교회명 만을 사용합니다.
위에서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므로 ○○ 교회에서도 같은 규례를 만들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일일이 설명하자면 책 한 권이 나올 것입니다만 다만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11장 1절-16절까지를 잘라내십시오.” 적어도 100여 년 전만 해도 교파를 막론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행했던 것입니다. 특히나 박해로 인해 미국에 건너갔던 청교도들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갈뱅(John Calvin) 또한 그의 고린도전서 주해를 통해 여자는 반드시 교회에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방세계에서 예의상 남자가 실내에서 반드시 모자를 벗어야하고 여자는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은 이러한 기독교사상에서 나온 관습입니다.
이것에 관하여는 참고로 “여자의 너울과 하나님의 영광-전도출판사”이란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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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수]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주의 만찬의 회수를 정해서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성경적인 교회들이 평균 일년에 4-6 회 정도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요소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결코 자기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의 만찬의 요소들 즉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부서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떡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빵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이 귀우]
교수님께서는 떡이란 말을 쓰지 말고 빵이라고 부르라고 하시지만, 우리나라에서 빵이란 단어를 사용한지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빵이란 단어는 포르트갈어 pão에서 온 외래어라고 하는데 프랑스어(pan)는 발음상 더 가깝더군요. 우리나라가 포르트갈을 안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지금은 빵이란 외래어가 우리말로 자리를 잡았지만, 한글성경으로 처음 번역할 당시 빵이란 단어는 전혀 생소한 단어였던 것입니다. 밥이라고 하자니 그러면 ‘밥을 떠서’라고 번역해야하니 모양이나 형태나 가까운 떡 이외에 다른 단어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 단어에만 치중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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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수]
(1) 누룩없는 빵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 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출12:15).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서 대부분 누룩이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7-8).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교회들이 카스테라나 누룩이 들은 일반 빵을 사서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또 천주교회에서 쓰는 성병(성체)을 대량으로 사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우상 숭배용 빵 조각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만 알고 그분을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물이 바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안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알면서도 이렇게 행하면 위선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들을 앞으로 하나 하나 나오게 하고는 빵 조각을 친히 입에 넣어 주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 사제나 하는 일이지 기독교 목사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귀우]
인용하신 고린도전서 5장 7-8절 말씀은 주의 만찬에 적용되어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시는 것은 마치 천주교에서 요한복음 6장 53절 말씀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누룩없는 떡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에 누룩을 제거한 것같이 너희가운데 죄를 없이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명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명절을 지키기 위해(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기 위해) 예루살렘이 아닌 (건물이 아닌)교회로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잡수신 떡은 분명히 누룩없는 떡 무교병이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 또한 무교병을 먹었을까 하는 데에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는 떡을 구울 때 누룩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레 23:15-17)
오순절 날에 교회가 시작함으로 율법은 끝이 났습니다. 이는 율법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떡을 뗀다는 말을 빵을 나눈다로 번역하셨는데 말씀에 내포된 뜻이 변질에 우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의 ‘breaking of bread’가 ‘빵을 나눈다’거나, ‘빵을 부순다’는 뜻이 아니고, ‘빵을 부러뜨리다’가 원래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또한 누룩없는 빵은 단순히 고운 밀가루에 약간의 소금을 넣고 물로 반죽해 둥굴고 납작하게 눌러서 화로에 구운 것이라 딱딱하기 때문에 한조각 부러뜨려서 과일소스에 찍어 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나눈다’는 단어가 주님의 고난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누룩이 든 빵을 사용하던지, 누룩없는 빵을 사용하던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만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면 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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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수]
(2) 누룩없는 포도즙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여야 합니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 이런 이유로 포도주스를 사용합니다. 단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만이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된 음료가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29; 막14:25; 눅22:1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천주교에서는 포도주를 쓰면서 신자들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고 사제들이 다 마십니다. 이것이 어찌 바르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몇몇 그룹에서는 한 잔에서 마셔야 한다는 주장 하에 큰 그릇이나 잔에 포도주를 담고는 남녀가 함께 마시면서 입 자국을 지우느라 분주합니다. 이렇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D. L. 무디의 말대로 크리스천들은 상식의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식 수준에서 질서를 지키며 의미 있게 주의 만찬 규례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이 귀우]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이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즙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포도 열매를 으깨서 즙을 짜고 가죽부대에 저장하면 이스라엘의 따뜻한 기후로 인해 그것이 얼마 안가서 포도주로 변하고 맙니다. 포도주를 만드는데 누룩이 전혀 필요치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포도즙을 변질되지 않게 오래 보관하여 사용하였다면 놀라운 기술인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성도들이 포도즙을 사용하였으면 어떻게 해서 취하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고전 11:21)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레 23:13)그렇다고 저는 꼭 포도주를 써야 한다든지 포도즙을 써야 한다든지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독일교회에서 보통은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성도 중에 알코올 중독자였다가 갓 믿은 성도를 위해 특별히 포도즙을 구입하여 사용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또한, 잔 네 개로 돌리는데 성도들이 잔을 건네줄 때 얼굴을 마주보고 미소지우며 고개를 끄떡하던지, ‘주님께서 나와 당신을 위해 흘리신 피입니다.’하며 건네줍니다. 그런데 위생관념이 철저한 독일인인데도 그 잔의 입자국을 지우기는 커녕 수건이라든가 티슈 조차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기드신 분은 우선 돌렸다가 맨 나중에 받아 마시더군요.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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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수]
● 주의 만찬 시 주의사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11:27-28).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합당하게"라는 단어를 너무나 극단적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죄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앞서서 크리스천은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고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이 엄숙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큰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귀우]
맞는 말씀입니다만 다만 “합당하지 않게”란 말씀은 전체 문맥상 불경건한 마음과 태도로(함부로) 주의 만찬을 대하는데 대한 말씀으로 분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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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동수]
●주의 만찬의 유효기간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행하는 잠정적인 규례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이 우리 믿는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귀우]
주 예수님께서는 떡과 잔에 대하여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이외에 레위기와 같이 어떠한 규정이나 세칙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주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만찬을 대하며 주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의를 단 것 외에는 받을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나와 다르다고 이상하게 보는 그러한 종교적인 색안경을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 14: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
우리는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5-7)
주 안에서 형제 된 이 귀우 드림 http://cafe.daum.net/soongsari
첫댓글 이 귀우 형제님 ! 좋은 토론 많은 도움되었어요 . 고맙습니다 .
윗 글은 숭사리 개혁포럼에서 스크랩 해왔습니다. 카페 주소도 있으니 좋은 유익 얻으세요..
숭사리란 -"숭의(높은뜻)를 사랑하는 이웃"의 준말로 한국교회의 개혁을 소망하는 사람들의 초교파적 모임입니다. 성경과 동떨어진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 곳에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세상전통에 속아서 성경의 진리를 버렸는가를 알게되겠고 성경의 진리를 사모했던 사람들은 이 곳이 샘물을 만난 것 처럼 반가울 것입니다. 많은 목사와 장로, 그리고 청년부터 70대 노인까지 아우러져 함께하는 이 카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숭사리는 숭의교회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떡떼는 문제를 잘 조명한 글입니다
모일 때마다 실행 해 보신다면 분명한 이상이 있을 것입니다
이상을 가졌다하더라도 로마서 14:1절이 주는 교훈이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