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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강연(1984)」 검토 2.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391-456.(P. 524).
박홍규(1919-1994), 1988년 5월 20일 녹음
동일성(l’identite)이 문제로구나. 운동의 동일성은 운동하고 있는 것인데, 정지는 운동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지의 동일성은 운동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왜 그리스 고대 철학은 동일성을 문제거리로 삼았을까? 바깥은 사물은 그대로 있는 것 같은 데, 생명체와 사람은 그대로 있지 않다고 보았을까? 아니다. 바깥의 사물도 오랜 기간을 관찰하면 변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한 이유가 무엇일까? 인격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 그럼에도 인격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았을까? 그러다가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을 것인가? 그 어떤 것이 무엇인가? ‘이 뭣꼬’는 불변의 것을 추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격 또는 변하지 않는 인성이란? 불변하며 지속하고, 영원한 것을 오래 관찰해 보니, 땅도 하늘도 아니고 천체의 운행은 늘 되돌아온다는 데서 찾았을 것 같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편에서처럼 말이다. 변하지 않는 동일성은 오랜 경험적 추론에서는 운동만이 변하지 않는다고 보았을 것 같다. 움직이며 지속하는 것, 그 ‘뭣’에 인간을 대입하여, 신체와 영혼이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런데 ‘뭣’이라고 묻는다는 것이 반성 즉 사유의 시작이 아닌가? 반성과 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은 외적 사물이 아니라 인성에 있을 것이다. 반성과 사유가 인간의 성향이고 능력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유의 능력은 신체와 영혼에 대비하여 영혼 쪽이라고 여긴 것은 당연할 것 같다. 여기서 슬기인(homo sapiens)라는 명칭을 부여 한다고 해보자. 왜 철학사에서는 그리스 시대에 슬기 즉 생각이라는 것을 중요시 했을까? 석기에서 청동기, 그리고 철기에 이르기까지 슬기보다 작업의 동작의 전수가 더 중요했을 것 같다. 철기에 들어와서야 동일한 대상들을 즉 동일한 복제품을 잘 만들 수 있는 거푸집이라는 것을 고안했을 것이다. 물론 동기시대에도 청동기에도 있었을 것인데, 왜 철기시대의 거품집일까? 다른 하나는 동일 복제품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의 수가 많아야 할 것이다. 즉 국가의 성립에서 각자의 무기가 아니라 집단의 무기가 성립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농기구의 필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생산도구의 동일한 복제품은 전쟁도구의 동일한 복제품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동일한 방법과 동일한 전수라는 기호체계로서 전승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고, 반성과 사유는 동일반복을 수행하는 절차와 방법을 일반화하여야 할 것이다. 그다음에 동일성이라는 사유체계 있고, 그리고 물체로서 전수와 구전으로 전승의 과정에서 문자로서 다루는 방안도 나올 것이다. [
전수와 전승에는 인간이 알고 있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능력도 함께 발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다와 생각한다는 것은 대상과 달리 추상된 상징과 기호에 대해 인식의 능력이다. 이런 능력도 ‘뭣꼬’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고 이것도 동일한 복제품과 같이 다룰 수 있을까? 즉 이 ‘뭣꼬’가 외부 대상화의 ‘무엇이냐’와 추상화의 ‘무엇’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이 후자에서 영혼이라는 ‘뭣’이 나왔으리라. (53MLF)
# 「고별강연(1984)」의 내용을 목차로 만들어 보았다.
[§1. 데이터로서 문헌(원문)]
[§2. 데이터의 특징: 고유명사, 재다(동일반복, 동일성).
[§2-1 차이들에 의한 개별학문들의 성립]
[§3. 학문들의 계승, 발전과 분화]
* [§3-1. 천문학에서 물리학으로]
* [§3-2. 근세 물리학]
* [§3-3. 생명철학]
[§4. 마치면서(결론)]
# 「고별강연(1984)」 검토(2).
박홍규, 1988년 5월 20일. 391-456쪽.
박홍규: 요전에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과 물리학(physics)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를 설명해 주려고 했어. 요전에 형이상학이 먼저 나오고 경험적인 사실들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어. 플라톤이고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그 문제가 되니까. (391)
양문흠: 여기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부분 읽어 보겠습니다. / 박: 꽁트 부분 말이야. 불란서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해야 돼. 꽁트 이후 베르그송까지 가고, 또 베르그송 이후 현대까지 여러 가지로 나누어져. 내가 김진성 군한테 이것을 하라고 말했는데 세상을 떠나버렸어. 허허. 그 뒤에 형이상학(metaphysic)과 과학비판이 나오고, 그전에는 또 멘느 드 비랑(Maine de Biran, 1766-1824)이 있고, 자연법칙의 우연성에 대하여를 쓴 부트루(Emile Boutroux, 1845-1921)든지 그 제자들이 죽 나와요. 부트루가 베르그송의 스승이거든. 그래서 그것이 베르그송에 와서 끝나요. 꽁트에서부터 텐느(Hippolyte Taine, 1828-1893)와 같은 결정론이 나오고, 또 비결정론도 나오고, 그 때부터 결정론이냐 비결정론이냐 하는 논쟁도 나와. 그러니까 그것이 큰 주제(Thema)야. 불란서 철학의 핵심 문제야. 나도 그걸 다 안 읽었어. 사회학에도 그 사회학적 결정론이 있지? 누구야? 그 종교적 삶의 기본 형태를 쓴 사람? 유태인 있잖아, 소쉬르(Saussure, 1857-1913)가 영향받은 사람? // 박: 응, 뒤르켐(Durkheim, 1858-1917). 뒤르켐 같은 사람은 사회학적 결정론자거든. 그리고 물리학에서 우연을 주장한 피에르 뒤엠(Pierre Duhem, 1861-1916) 같은 사람 등등 죽 나오거든. ... (391-392)
박: ... 왜 데이터라는 말을 쓰냐하면,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니까 그래. 희랍어로는 <pragma(사물)>에 해당하는데, 그러나 <pragma>를 데이터라고 번역할 수는 없어. 어쨌든 우리의 인식(epistêmê)의 내용은 <pragma>에서 와야 해. 그래야 인식했다고 하지 그렇지 않으면 인식했다고 할 수 없어. .. 가령 꿈의 해석 같은 것이 그래. 또 글자를 해석한다고 하거든? 글자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 나에게 인식되는 것은 도형밖에 없어. 그러나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바로 나야. 그런 해석은 인식이라고 하지 않아. .. 그러니까 인식의 내용은 밖에서 온다는 말이야. 그래서 데이터라는 말을 써. 그렇다면 인식의 최후의 주체는 무엇이냐? 백지(tabla rasa), 아무것도 없는 것이야. (393) [일반적으로 플라톤에서 영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메논 편의 어린이가 ‘직선’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이에 대해 매가 하늘에서 생쥐를 잡으러 돌진하는 것은 ‘직선’개념을 알고 있다.]
박: 응,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래서 플라톤은 형상(idea)를 보고 인식을 갖는다고 했지. 그때 영혼(psychê)는 내용이 아무것도 없는 것 아냐? 그러니까 영혼의 내부의 문제가 가장 힘들어. (393) [영혼이 백지가 아니라는 증거는 상기(réminiscence), 즉 추억을 떠올리는 데 있다. 그 추억은 어디서 오는가? 소크라테스 이야기처럼 에르(Er)에서 올까?]
왜냐하면 주체자는 자발성을 가지고 있는 자기 운동자(autokinêton)의 그 자기(auto)이고, 바로 그것이 받아들이는데, 그 자신은 내용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자기 운동자의 영혼의 구조를 다루는 것은 힘들어. (394) [주체가 빈 것이라는 것은 한편 아페이론이 수동자라는 측면, 그리고 다른 한편 원래 무라는 측면, 두 가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생물의 진화에서는 없는 것도 수동자도 아닌 자발성의 힘과 권능이 있다. 능동성(생성)과 유전자(기억)이 있다.]
박: ...해석에서는 집어넣어서 읽는다(deu. hineinlesen). .. 플라톤의 <logizomai(deu. = logizieren)> 그런 거야. .. 그래서 테아이테토스편에 나오는 것처럼 인식의 도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나와 플라톤은 논리적 사고(dianoia)인데 또 의견(doxa)이라고도 해. 그것이 있다고 놓으면(hypolambanô) 가정(hypothesis)이 나와. (394) [나로서는 해석학에서 해석의 원형은 삼위격(la trinité)인 것 같다. 뒤메질에 의하면 거의 모든 신화에는 이 삼격이 있는데, 들뢰즈가 폴리스 사회의 기본이라 한다. 불교의 사유가 힌두교의 위격을 타파하려고 나왔다고 하는 해석은 윤구병이다. 이 사고와 달리 노마드 사유는 위상이 있다고 해야 할까보다.]
박: .. 현대 철학은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느니 뭐니 하지. 그러나 사물(pragma)에서 온 것만이 지식이니까, 우선 사물이 먼저 실재(Dasein)해야 돼.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석론(Analytica)에서 제일 뒤에도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와. 있어야 거기서 무엇이 나오지, 없는데 무엇인 나와? 무(無)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오지. 데이터도 안 나오고, 지식도 안 나와. 그걸 머리 속에다 집어넣고 이 강연을 읽어야 돼. 그러니까 오귀스트 꽁뜨는 형이상학이나 신학 같은 것은 허구적이라고 봤거든. 요컨대 갈릴레이에서 나오는 물리학, 그것만이 허구적이 아니라는 거야. 허구적인 것이 아니니까 실재하는(real) 것이고, 따라서 데이터가 된다는 말이지. (395) [자연(물리)의 데이터(le donné)와 심리(영혼)의 데이터(la donnée)는 다를 것이다.]
박: 흄 같은 이는 보편적(universal)인 것을 빼지? (396) [흄은 보편논쟁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보편’ 같은 개념은 “해제총”을 보건데 없는 것 같다. 경험론자로서 보편이나 절대란 용어에 부정적일 것 같다. 일반과 개별이 아니겠는가.]
박: 그게 그러니까 인식의 내용이 어디 있냐 그 말이야. 지식 내용은 사물(pragma)에서 출발해서 오는 것이지, (396)
박: .. 인식이란 말, <epistemê(인식)>, <scire(알다)>, <cognoscere(알다)>란 말은 외부에 있는 것, 거기서[외부]에서 오는 것에 대해서만 쓰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말을 안써. (398)
김남두: 아니, 유클리드 기하학 맨 처음에 주어진 것이 공통관념(koinê ennoia)인데 그것이 나중에 공리(axioma)로 번역되고, 그 다음에 요청들(antêmata)이 있죠. .. 그 다음에 정의(horos)가 있고, 그다음에 그것에 근거하여 정리(theorema)가 성립하죠 (399) [fr.Wiki: 유클리드 원론(Στοιχεῖα)은 정의(des définitions)[35정의], 요청(des «demandes» (postulats))[공준], 공리(des «notions ordinaires» (axiomes) αξιωμα), 명제(des propositions: 총 470명제들)들로 되어 있다. .. / 정의: 35개 중에 하나, 점은 크기와 위치가 없다. / 다섯 요청[공준]들 중의 1. Un segment de droite peut être tracé en joignant deux points quelconques. (어떤 한 점에서 어떤 다른 한 점으로 선분을 그릴 수 있다.), 4. 모든 직각은 같다(합동이다)[원은 동일성이다]. 5. [소위 말하는 평행선 공준] / 다섯 공리들 중의 1. Deux choses égales à une troisième sont aussi égales entre elles. 셋째 점에 같은 거리에 있는 두 거리는 같다. 5. Le tout est plus grand que la partie. (전체는 부분 보다 크다.) / 13권에서 470명제들 // 나중에 de définitions, axiomes, théorèmes et leur démonstration: 정의, 공리, 정리, 명제로 통용된다. ]
박: 있어야 돼, 있어. <esto(있게 하라)>. 그러니까 <esto>야. 지금 내가 학문의 대상을 논하려면, 그 대상이 현재 있어야 된다 그 말이야. 있다고 이야기하자, 그래야 지식이 되지 않느냐 하는 입장이거든 (400) [esto: esse( ..이다)의 3인칭 단수 미래 명령형/ 빛이 있으라 할 때 쓰는 문구인가? 미래에 있을 것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학문이 될 수 없는데, 현재 있으라고 하면 대상처럼 지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고... (53MLG)]
박: 기본적인 도형도 그렇지 뭐.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도형이 언제든지 구체적 공간하고 같이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추상해 낸다(extrairesis)고 했지. 풀라톤은 다 연속되어 있어. 그러나 각각은 따로따로 자기 법칙을 따라가더라는 이야기야. (401) [각 도형은 자기 법칙이 있다?]
이정우: [「고별강연(1984)」의 오귀스트 꽁트 부분부터 읽어간다.]
박: 페히너, .. 분트(Wilhelm Maximilian Wundt, 1832-1920). 분트는 근세 원자 물리학의 영향을 받아서 사람의 감정을 요소들로 나누었거든. .. 그건 엉터리지. 물리현상과 심리현상은 다르니까. (402)
박: .. 요새 같으면 복지 정책으로 돈을 대주어 ... 정상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구별을 어디다 둘 것이냐 하는 문제를 심리학자들한테 의뢰했기 때문에 .. 그것을 확립한 사람이 비네(Alfred Binet, 1857-1911)지. .. 그러니까 불란서 심리학은 보통 사람이 아닌 사람을 상대로 하고 독일 심리학, 분트 심리학은 건강한 사람을 상대로 해. .. 불란서에서 무의식이니 병리학 같은 것이 발달했으니까, 프로이트도 불란서에서 샤르코(Charcot 1825-1893)한테서 배웠잖아(1885-1886, 8개월). (403)
박: ... 심리학을 알려면 생(Leven)을, 생물학을 먼저 알아야 돼. 심리학을 하려면 생명의 기능이 무엇이냐는 답이 나와야 될 것 아냐? 그런데 요소 심리학은 그것이 없이 뉴턴 물리학과 같이 원자적인 것을 집어넣었어. .. 결국 요소적인 것이 다 빠져서 현대 심리학이 되었어. 형태(Gestalt) 심리학이나 다 요소적인 것은 빠져버려. 요소적인 것은 안 돼. 그 말은 또 무슨 의미냐 하면, 플라톤의 형상자고 하는 심리학은 다 죽어버린다는 얘기야. (404) [형상으로는 심리학을 할 수 없다. 즉 상층의 추론은 심리학이 아니라 과학을 다루는 사고의 일부이다. 심리(영혼)은 심층이며 감성을 포함하는 이마쥬가 있다. ]
박: 텔레파시[ES, 3장] .. 최면술 .. 저서에서 최면술이 자꾸 나와. 물질과 기억에 특히 많이 나와. 왜냐하면 최면술을 통해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실증적으로 알 수 있거든. 데카르의 관념론하고 다른 점이 그거야. (405)
박: .. 조대경(曺大京, 1932-)씨가 한 것 뭐야? ... 임상 심리학이라 하던가? <clinical psychology)라고. (405)
박: 미개인은 현대에서 보면 너무나 비이성적(non reasonable)인 것 아냐? 그러니까 정신병자의 세계와 비슷한 것 아니냐는 것이지. 하여간 그런 책도 있고, 특히 유명한 것은 레비-브륄(Lévy-Bruhl, 1857-1939)이지, 분트도 민족심리학(Völkerpsychologie)을 했어요. .. 그런데 불란서에서는 인류학(anthropology)을 공간적으로, 요소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차원에서 보려고 했지. (406)
이정우: <철학은 모든 데이터를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입장이 나옵니다. 수학에 기반을 두고 그 위에 물질을 놓았는데 그렇게 양자를 구별한다는 것은 분명히 물질 속에 수학으로 흡수될 없는 것이 있으니까 물질을 놓는 것이 아니냐, .. 그러나 꽁트는 그렇게는 하지 않거든요. 분명히 수학은 수학이고, 물리학은 물리학이고, 생물학은 생물학이라고 했거든요. ... (「고별강연(1984)」, 35쪽)> [“철학은 모든 데이터를 취급한다고 여러 번 강조해서 이야기 한다.]
< 도대체 꽁트처럼 나가면 결정론이 될 텐데 과연 결정론이 옳으냐, 비결정론적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 차원에서 제기됩니다. 모든 것이 물질과학으로 환원된다면, 결정론적이며 유물론적인 형이상학[질료형이상학]까지 갈 것입니다. (「고별강연(1984)」, 35)
.... [비결정론에 관하여] 그리고 또 그 반대로 물리학적인 세계, 아니 수학적인 세계에까지 결정론이 아니라 우연이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나옵니다. 뒤엠(Duhem, 1861-1916) 같은 사람, .. 뿌앙까레(Henri Poincaré, 1854-1912), 보렐(Émile Borel, 1871-1956) 같은 사람이 있지요. .. 또 에밀 부트루(Émile Boutroux, 1845-1921)는 아무리 이론을 논의해도 이론과 사실(fait)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고별강연(1984)」, 36)> - [벩송을 옹호한 르화(Édouard Le Roy, 1870-1954)는 보렐보다 한 살 많지만 보렐보다 늦게 ENS에 들어갔다. 그리고 르화는 프랑스 아카데미에 벩송의 뒤를 이었다. - 왜 선생님은 개연성 이론의 학자들을 나열했을까?]
이정우: 그런데 그 <hasard>하고 <contingence>가 어떻게 구분돼요?
박: <hasard>는 불란서 말이고 라틴어가 아냐, 그렇지? <contingence>는 라틴어고 더 기본적인 말이야. <contingere(접촉하다)>에서 나왔어. (411) [아자르(hasard)의 기원은 아랍어 « al-zahr »에서 왔다. 우연(contingence)의 설명은 뒤에 나온다.]
박: 노력 안 해도 되는 것, 그것이 <automaton(자동적)>이야. (413)
김남두: 그 빗나 간다(swerve)란 말의 라틴어가? / 이태수: <declinatio> .. 루크레티우에서 <sua sponte(스스로, 저절로>라는 말을 썼던가, 그런 것 같은데... /..(414)/ 이태수: 논리학 책에서 <endechetai(허용되다, 가능하다)>가 우연성(contingent), 개연성 노릇해주죠. // 박: 부트루의 자연 법칙들의 우발성(De la contingence des lois de la nature, 1874)에서, 그 우연(contingence)은 <endechetai>는 아냐. (415)
박: 철학자하고 과학자는 다르지. 독일에서 아인슈타인이니, 유명한 과학자 코흐니, 생리학자 등등 많지만, 철학자들이 바로 그 물리학의 연장선상에서 형이상학을 하지는 않잖아? 그게 다르지. (418) .
이정우: <가령 베르그송을 보면 실어증이 나오는데, ... (「고별강연(1984)」, 37)> (420)
이정우: .. 파스퇴르 실험하고 밀러(Stanley Miller, 1930-2007)의 실험이 있지 않습니까?
박: 그렇다면 지금 생물학자들이 생각하는 생물이란 것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지. 지금 생물학은 종에서 성인으로 해서 다시 종으로 가는 순환원(cycle)을 생각해요. 순환과정이 안 나오면 생물이라고 하지 않아. 종에서 성숙해서 어른이 되어서 다시 종이 나와야 돼. 번식을 해야 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다 큰 성인이 생물의 출발점이야. 또 자네가 말하는 실증과학자의 생물의 기준은 생물을 구성하는 물질의 성분이야. 지금 생물학에서 생각하는 생물은 그것이 아니라, 종에서 출발해서 성인되어서 다시 동일한 종이 나오느냐,기능이 순환원을 형성하느냐 않느냐에 있어. (422) [RNA가 형성되어 자기 복제를 하는 것에서 생물이다. 무기물에서 생명의 한 기능이 생겨나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박: 밀러가 한 얘기는 희랍철학의 <automaton(자동적인 것)>에 해당해. (423) [선생님은 종으로서 자기 복제와 보존을 유지하는 것을 생명으로 정의한 것 같다.]
김인곤: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이 쓴 코스모스를 보면 생명의 기원에서부터 죽 나오는데... (424) [나도 코스모스(1980)(재번역2002)의 번역본을 권하고 싶다. / 2013년 증보판은 여성 작가 드뤼얀(Ann Druyan 1949-)과 천체물리학자인 티선(Neil deGrasse Tyson, 1958-)에 의해 이어졌다.]
김남두: 투르킨 .. / 그 사람은 요새 사이버네틱스 하는 사람입니다. (427) [트루킨은 구글에서 누구인지 찾을 수 없다.]
박: 유전이론은 여기서는 형질이 아니라 살려고 하는 기능(function)이 유전된다는 것이지. 극한치로 가면 말이야. 플라톤의 파이드로스편에서 자기 운동자라고 해. (429) [기능이라기보다 스피노자의 권능과 같이 들린다. 플라톤은 영혼에다가 이 권능을 부여했는데 권능은 하늘의 천체 운동이다. - 영혼은 이 원 밖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박: 유전공학이라는 것이 산다고 가정하고 하는 것이지, 죽이고 나서 새로운 생물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잖아. (430) [이 말을 와 닿는다. 게다가 기계의 부속품으로 산다는 것은 더 더더욱 아니지 않는가. 주인과 노예 변증법으로 보면, 기계의 노예가 되자고 기계의 완전성(?)을 믿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 허무주의 극복으로 닫힌 원환 속에서 벗어나는 두가지가 하나는 플라톤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이다. 그러나 이런 극복은 예속과 굴종이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극복이 진솔한 극복이며, 그 극복에서 아제 인간(이질 반복)이 새로운 삶을 산다.]
박: 기능이 유전돼. 그걸 베르그송은 기억이라고 하지. (430) [기억의 총체는 추억의 집합과 달리 작동하는 권능으로서 지속(운동성)이며 자기 확장이다. 이 확장은 인성을 자기완성으로 고양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노력하고 애쓰며 산다. 노력하는 이가 드물고 애쓰는 점에서 어렵게 우여곡절을 겪는다.(53MLE)]
박: [수학의 도형들은 시간이 지나도] 노력할 필요 없이 자신의 동일성이 그냥 보장되는 것 아냐? 그러면 DNA도 그러냐? (432) [크리스토스의 의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냥 동일성이 유지되는 것과, 전승에 따르며 여러 노력을 해야 메시야가 나타날지(유지하고 보장될지) 생각해 보라. 선지자가 말씀을 따르지 않고 간간히 전승되는 말투를 따라 말씀을 배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권력의 사주를 받은 대주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새한당과 민주당(정의당 포함)의 말씀이 아니라, 인민의 말투(노동당, 녹색당, 민중당)로 살아 가니라. 저 상부가 말투를 알아듣지 못하니라.]
박: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DNA에서 출발해서 자기 통제를 해서, 성인이 되어가지고, 다시 DNA를 형성해서 또 아이가 나오거든. 그럴 때 퍼져 있는 물질을 DNA로 수렴에 주는 작용이 생의 비약(l’élan vital) 속에 들어 있어야지. 그런데 거기서는 물질만 수렴한다고 보니까 그렇지, 요즘 같은 정보 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여러 정보가 자기 자신 속에 수렴되는 거야[la convergence]. (433) - [도약하는 하는 힘을 벩송은 puissance d’agir(작용하는 권능)라고 했는데, 이 권능은 발산과 수렴의 두 힘을 발휘한다. 이를 이중 열정(La « double frénésie »(MR 4장)이라 한다. ]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기억[추억] 그것만 툭 튀어서 나온다는 거야. 이 이동식 같은 이의 병리학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대. 그런데 [기억의 총합으로] 그 수렴해서 받는 내용은 다르잖아. 그러니까 베르그송 이론에 의하면, 나의 개인적(private)인 내면과 저 사람의 개인적 내면은 전혀 달라져 버려. 내면적인 세계가 전혀 달라. 밖의 우주와의 관계도 전혀 다르지만, 내면도 전혀달라.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그렇게 이해해야 돼. (433) [벩송에서 추억들과 기억(지속)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정우: <운동에 있어서 운동의 존재는 일정한(definite) 성격을 띱니다. (39쪽)>
박홍규: 나 그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 // .. 거기 고쳐야 되겠네. 운동의 자기 동일성(identity)이 아닌 것은 하나는 정지고 하나는 수동성(passivity)이고, 그렇게 둘로 나누는 것이 좋겠네. (434)
박: 운동이 아닌 것은 정지고,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 아닌 것은 운동의 수동성이야. 운동의 자기 동일성은 운동의 능동성(activity)에서만 성립해. <ergon(기능)>이야. (434) [선생님께서 벩송을 기능주의로 설명하는 부분들은 에르곤의 의미를 기능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사 에르고조마이(ἐργάζομαι)는 작업하다, 행하다, 완성하다, 생산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면 능력 나아가 원초적 권능으로 해석하면 스피노자와 벩송이 보일 것 같다.]
박: 운동의 자기 동일성(identity)은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야 돼. 첫째 운동과 운동 아닌 것을 구별할 때는 정지가 운동이 아닌 것이야. 둘째, 어떤 사물이 여기서 이렇게 연속적으로 갈 때, 그 동안에 변해버린단 말이야. 그렇게 변하는 측면[정체성]이 있는데, 그 변하는 측면이 없다는 것이 운동의 자기동일성[정체성]이야. (435) - [극한에서 첫째는 상징의 동일성이고 후자는 인격성의 정체성이다. 전자는 사물에 후자는 영혼에 속한다. / 가우스 곡선에서 중간이 불룩한 종모양이 ‘정지의 상징’(기호)이라면, 철학적으로 보면 좌측에 불룩하고 우측이 얇은 모양에서 좌에서 우로 운동에는 자유의 추구가, 우측이 불룩하고 좌측이 얇은 모양에서 우에서 좌로 운동은 평등을 구호로 삼는다. 현실에서 보면 평등의 현실화 없이는 자유의 추구가 허상일 수 있다. 그럼에도 18세기 까지 철학사가 자유에 관점을 둔 것은 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이었는데, 19세기 산업화에서는 불평등의 심화가 구체적이어서 이에 항쟁하는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을 주장한다. 지금도 불평등의 해소가 주요과제이고 그리고 자유가 부차적일 것이다. 생산양식에서 생활양식으로 전환이 저항과 항거의 방향을 잡을 지라도 항쟁과 혁명에는 생산양식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생산관계에서 토지와 기반산업의 국유화는 필수적이다.]
박: 물질을 엔트로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피가 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라는 겁니다>로 고치게 (436) [선생님은 강연을 수정하였다. 즉 물리학이 운동과 질량으로 설명하던 시대에서 바뀌어, 열의 평준화에 대한 관점을 받아들인다. / 왜냐하면 평준화의 반대 방향이 생명활동이기 때문이다. 생명활동은 물리적 총체에 역행한다. 그러면 운동관점이 원운동의 동일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운동의 자발성과 자기복제 의 운동이 될 것이다.]
이정우: (강연 읽음) <... 요컨대 운동론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라는 것은 모조리 우연의 집합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전부 변칙뿐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변하는 과정만 있다는 것입니다.> (437)
박: 이제 봐, 이렇게 돼. 요컨대 운동에는 능동적(active)인 척면이 있고 수동적(passive)인 측면이 있는데, 운동 전체하고 우선 대립되는 것은 정지이고 – 공간하고 시간으로 나누었지 – 그 다음에 운동 자체에 있어서 운동의 자기 동일성(identity)하고, 비동일성(non-identity)이 있는데, 운동의 자기 동일성만을 능동성(activity)이라고 해. 운동의 수동성(passivity)은 운동 자체가 타자의 영향에 의해서 자신의 동일성이 사라지는 측면 아냐? 그러니까 그것은 능동성이라고 하지 않아. 그런데 운동이란 것 자체가 능동적인 것도 의미하고 수동적인 것도 의미하거든. 그러니까 거길 어떻게 좀 고쳐봐야겠네. (437) [능동성과 수동성의 양면성은 물체의 반응하는 측면에서 보는 관점일 것이다. 생명이 수동적이라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니체가 부정이라고 하지 않고, 반작용을 부정의 부정으로서 긍정이라고 한 것은 생명의 자발성을 본 것이리라. 벩송도 생명은 긍정 방향이고 물질이 부정 방향으로 두 가지 질서를 인정하면서 인식에서 무질서란 한 질서에서 다른 질서를 보는 측면이라 한다.] 을
이태수: 그냥 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437) [물리적 측면에서만 보면 그대로 두어도 될 것 같다.]
[운동을 공간적인 표면에서 수평적으로 능동과 수동의 중간참이 운동일 수 있다. 그 수평적인 면의 시간상 전후가 있다고 수직적으로 보면, 고대 철학은 운동이 하부에서 무한한 회오리(혼돈)에서 점점 더 상부로 정지를 향해 가는 것 같다(종교의 유일신앙도 마찬가지). - 이 정지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하부(심층)의 회귀라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은 이 회귀를 거부한다. 이 거부를 해소하기 위해 심층회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 니체인 것 같다. 불교의 열반의 경지로서 해탈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벩송은 기억의 총체의 새로운 창발(une émergence, un jaillissement)을 말할 것이다. 벩송에게는 플로티노스의 일자로 회귀가 들어있어야 창발이든 용솟음이든 성립할 것이다. (53MLF)]
박: <inertia>는 베르그송에서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 중간이야. 수동적인 것도 아니고 능동적인것도 아니고. (438) - [관성(fr. inertie): 갈릴레이 좌표계에서 물체의 관성은 외적 영향이 없으면, 모든 고정된 물체는 일직선운동을 지속 한다(tout corps ponctuel perdure dans un mouvement rectiligne uniforme). 그리고 관성의 법칙(또는 원리)이라 불린다. 나중에 관성법칙은 뉴턴의 제1법칙에 속하다. - 제2법칙은 (힘을 가하는 경우) 가속도의 법칙,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동시에 반대방향의 힘도 있다)]
박: 이것 봐.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기 속이라는 것 자체가 양화해서 볼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야. 둘 속에 하나가 들어 있다. 공간 속에, 이 방에 우리가 들어 있다고 할 때처럼. 그러니까 우리 사고 자체가 항상 양적인 공간, 공간화된 방식으로만 움직이고 그걸 기준으로 해서 뭔가를 생각한다 그 말이야. 그러면 플라톤의 그 자기 운동자(autokinêton)는 어떠냐?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론에서 반박하듯이 운동이란 일자에서 타자로 갈때에만 성립하는데, 어째서 하나인 자기(auto)에서 운동이 나오느냐 하나일 뿐인데, 하는 문제가 나와. 문제가 좌우지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와. 불가능한 것이 현실화될 때에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데, 그 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가를 생각해야 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데 그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가능이라는 말을 써. (442)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dynamis)은 질료적으로 연속적인 과정에서 나오니까 계산할 수 있어. 그런데 충족률은 계산을 못해. 그러면 그런 플라톤의 자기 운동자 이야기가 들어맞냐 안 맞냐? 들어맞는다는 거야. 왜? 인간이란 것은 금시라도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거야. 그것이 자기 운동자의 의미의 하나야. 감각적인 세계, 연속적인 공간의 세계에서 생명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또 거꾸로 말하면 이 순간에도 불가능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야. 우리 생물은 이 순간에도 죽어버릴 수 있어. 무질은 그렇지 않아. 연속적인 것은 그렇게 되지 않고, 뭔가 흔적이 남아[원자로, 요소로 남아]. 우리가 죽어도 시체는 흔적으로 남아. 우리 생명 현상은 흔적이 없어. 그러니까 자기 운동자라는 것은 생명체[영혼]에 들어맞는 얘기야. 살아 있다는 것은 충족률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살든, 이 사람이 살든, 저 사람이 살든, 산다는 것 자체는 벌써 하나의 완성체야. (442-443)
박: .. 다만, 베르그송이 기원을 논하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야. 현대 생물학에서 보니까 미생물에서 점점 고등 생물로 발달하더라, 그런데 생물의 발달은 자기 운동자의 [논리적] 불가능성 때문에 비결정성(indetermination)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고등 생물을 보면 그 생존의 조건이 하들 생물보다 더 까다로워진다는 거야. .. 까다로워지니까. 비결정적인 면이 커지니까. 이렇게 되면 문화[문화]가 발달한다는 것은 나중에 이 지상에서 인류가 없어진다는 결론이 나와. 실제로 그런 현상이 나오거든. 다 그런 방향으로 가거든. 지금 경제가 발달한 선진국은 무엇에 대해서 선진국이야, 인간존재가 불가능한 것으로 간다는 뜻에서 선진국이야. (443) [논리적 불가능성이 이루어질 때, 생명체는 가능이다. 문명은 AI(인공정보)를 통해서 논리적 불가능으로 간다. AI가 (새로운) 가능을 만들까? 만든다면 생명체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질 것이다. 토지(지구) 위에는 여전히 다양한 생명체가 존속할 것인데, 인간종이 사라지더라도 말이다. AI종, 곤충, 극피동물, 원형동물, 박테리아, 효모들은 여전히 존속할 것이다. 이들의 영혼(생명)은 두뇌와 다른 방식으로 신체 속에서 활동하는 방식을 유지하리라. (53MLG)]
박: .. 식물보다 동물, 동물보다 인간이 점점 더 비결정성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 만큼 삶의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는 얘기야. .. 분석해 가지고 죽 보면 고등 생물이라는 게 불완전한 것은 분명하다, 그 얘기야. .. 그래서 원칙론으로 가면 플라톤이 위대해. 아까도 말하지만 지식은 외부에서 온다고 했거든? 그것만이 지식이라고 해. 그러면 자기 운동자(autokinêton)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때 그 자기 자신이 먼저 아니냐는 문제가 생겨. 그 때에는 자기 자신이 인식의 대상이 아니냔 말이야. 그 문제 때문에 나도 골치를 앓고 있어. 자기 운동자[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니까 그 운동은 그냥 운동은 아냐. 그냥 운동이 아니라 불가능성을 통해서, 선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운동만이 자기 운동이야. (444) [선택과 비결정성을 말하는 것은 벩송의 DI 3장에서 인데, 이 자기운동은 이질적이지만 동일성(정체성)처럼 취급하는 것은 단위가 끊어져서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연속)을 유지하면서 단위의 확장과 압축(발산과 수렴)의 과정을 겪는다.]
박: [자기 운동자에서] 안 돌아오면 과오를 범한 것이야.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말하면, 모든 세포가 본능저그로 움직인다고 했을 때 병이 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얘긴데, 첫째 정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생겨. 자기 자신이 아니냐고 해야 돼. 정보이론에서 최초의 정보가 무엇이냐? 기능의 기능에 대한 정보는 인식이라고 하지 않느냐? 인식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야. 요는 문제는 거기에 있어. 기능이 자기 기능에 대해 가지는 것은 인식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야. 외부로부터 오는 질(quality), 정적인 것, 그것만을 인식[지식]이라고 한다는 거야. (445)
박: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이론[사유의 사유(noêsis noêsiôs)]은 대단히 모순되는 데, 자연학에서는 제1의 원동자(proton kinoûm)라고 했다가, 영혼론이나 형이상학에서는 사유의 사유(noêsis noêsiôs)라는 말을 쓰는데, 거기에는 벌써 플라톤의 사상이 들어가 있거든. 자기 운동자(autokinêton)는 떨어져 있으니까 다른 것이 인식의 대상이 될 것 아니냐는 얘긴데, 아리스토텔레스에는 정적인 것이 먼저 들어가 있어. 난 그렇게 생각해. 그것이 형상이냐 아니냐에도 문제가 있어. [사유의 사유에는] 질료가 없거든. 질료가 없는 데 무슨 형상이야. 그런 문제가 생겨. 어떻게 보면 전체 우주에 있어서 제1질료(protê hylê)에 대한 형상으로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그러나 질료가 없는 데 형상이 어디 있냐 .. (445)
박: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얘기야. 비어 있느냐, 충만해 있느냐? 여러 가지 형상이 거기서 다 나오는 근원이야(플로티노스), 그렇지 않으면 형상도 없고 초월적이며 알 수 없는 것이냐?(유대교 카발라). (446)
박: 무한정자(apeiron) 속에서 여러 방면으로 갈 수 있는데[,] 헷갈리지 않고 자기한테만 돌아온다는 선택도 들어 있고. 둘이 동시에 들어있는데 그 둘이 균형(balance)이 맞아야 돼. .. 본능은 지능하고 행동하고 반대 균형(contre-balance)을 이룰 때 성립한다는 거야. 즉 생물이 산다는 거야. ... (446) - [운동의 측면에서 둘: 흐트러짐 과 선택(역엔트로피) – 벩송의 상반된 두 질서. (여기서는 본능)인식의 측면에서 둘: 지성과 행동 – 들뢰즈에서 이중구속(이중분절)은 영과 육의 절편화인데, 들뢰즈는 <지각과 행동의 특성들 그 자체는 이중-집게, 이중분절과 같다. (67-68, 106), 천개의 고원, 3장 1만년전>]
박: .. DNA 구조에 왜 정보이론을 개입시키느냐, 그말이야. ... / 그러니까 생물학자가 <아, 이런 경우는 정보가 개입되었겠다>고 생각하는 것 아냐? .. / 나중에 그저 <배열하는 데에 의미(meaning)가 있다고 해. <의미가 있다>니 무슨 말이야, 하하. 문제가 점점 어려워져. 그 사람 말을 들어보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요컨대 물질을 배열할 때 생명현상이 되도록, 성장하도록 배열한다는 얘기야. 정보이론이 들어간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그 DNA가 기계적(mecanical)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얘기야. 기계적으로 활동하면 정보이론을 넣을 필요가 없는 것 아냐? (447) [DNA가 무엇을 만들게 한다고 해서 생명활동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는가? 라는 물음인데, 기계적 활동을 생명 활동성이라고 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공정보(AI)를 다 밝혀서 각 절편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서 연결(접속)시키면 생명성이 나올까? 선생님은 부정하는 것 같다. 나도. 요소와 절편의 종합이 생명이 아니고, 지속하는 권능(능력)이 생명이다. 만일 AI의 조합(종합)이 재생과 자기 보존을 갖는다고 하면, 그것은 생명종과는 다른 종의 출현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종이 생긴다면, 인간종은 사라질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AI를 만들 때까지는 필요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연의 황폐화에 앞장선 인간중은 쓸데없는 종이니깐. (53MLG)]
김남두: 운동이 바깥에서 주어지느냐 자기 안에서 주어지느냐.. / 박: 속이라느 말도 공간적인, 양적인 것을 가지고 하는 얘기야. 필연이니 하는 것도 전부 그런 것이야. 우리 사고라는 것 자체가 그래. (449) [사고는 그렇다. 데미우르고스의 사고도 있었던 것을 본다. 사유는 지속하는 과정에 있다. 아직 또는 아제에 있을 것을, 다음측정을 사유하면서 행동한다.]
박: 그러나 불가능 한 것을 넘어서서 가능케 하는 것이니까, 언제 불가능한 것으로 빠져들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항상 들어있어. 베르그송은 참 도식적이지. 연역적인 철학이야. 그런데 그 연역적 사고를 기초로 해서 실증과학이 정리가 되고, 경험에 들어맞는다는 것이지. 그런 한에서만 형이상학이 성립하는 것이야. 연관이 안 되면 곤란하지. 필연이니 우연이니 하는 우리의 사고 자체, 학문자체, 우리의 논리적 사고 자체가 전부 수학이 모델이 되고, 연속성[계속성] 속에서만 가능해. 하나, 둘, 그래야 관계맺음이 성립하고 얘기가 되는 것이지, 그걸 떠나면 초월자가 돼. 하나, 둘의 관계를 떠나면 초월자야. (450) [벩송은 경험총체의 철학이고 미래에 예참하는 다음측정이 있다. 윤구병 표현은 (아제)있을 것을 사유한 철학자이다. / 고대의 필연과 우연은 폐쇠적 우주에서 일정량이 불변하다는 토대위에서 사고 한 것으로 보인다.]
박: 요컨대 혼돈(chaos)이 나와 / 응 무한정자(apeiron)가 나와. 무한정자 중에서도 운동의 측면에서 무한정자야. 말하자면 뭐랄까, 순수생성(genesis), 아니 생성이라는 말도 못하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non)-être: 들뢰즈], 생성도 뭔가 아는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그것까지도 사라져 버린 것, 그런 것이 나와. (450-451)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무엇, ‘뭣’이 나온다. 그것을 사람들은 신만이 안다고 하여, 신이라 이름을 부여했을 수 있다.]
박: ... 플라톤에서 무질서한(ataktos) 운동에 선한 제작자(dêmiourgos)가 작용을 해서 대부분을 선(善)으로 이끈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 선이 무엇이냐, 한계(peras)가 분명히 나오는 형상(idea)으로 가는 것이냐, 아니면 제작자로 가는 것이냐, 그런 문제가 생겨. (452) [추상의 선, 사회의 선으로 가는 길이 있구나.]
박: 그러니까 무질서(ataktos)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형상이 다(多)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그 속에 들어있는 무한정자의 어떤 측면이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 아냐? 그러니까 무한정자의 무질서하게 만드는 측면을 억제하는 것이 제작자(dêmiourgos)야. 분석해 보면 그것이 바로 능동성이야. (455) [선생님은 아페이론에는 운동자체, 제작자가 선을 향한 능동자로 본다. 벩송은 자연이 능동자이며 운동 자체이다. 들뢰즈에서 제작자는 양면성(이중구속, 이중절편)의 기능을 하는 노력의 능력일 것이다. (53MLG)]
박: 형상과 형상의 관계가 질서라면, 우선 사물이 딱딱 떨어져 나와야 될 것 아냐. 사물과 사물을 혼동하면 질서가 안 나오지. (1988년 5월 2일)
(13:32, 53MLG)
***인명록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세 이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3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50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O
1711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역사가이다. 서양 철학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관련된 인물 중 손꼽히는 인물이다.
172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계몽기 프러시아 철학자. 비판론 창시자.
1766 멘느 드 비랑(Maine de Biran, Marie François Pierre Gontier de Biran, 1766-1824)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심리학자. 프랑스 학술원의 도덕정치 분과의 논문상 수상(1802).
1795 베버(Ernst Heinrich Weber, 1795-1878) 독일 해부학자, 생리학자. 비텐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798 콩트(Auguste Comte, 1798-1857)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이다. 《실증철학강의》 1) 신학적 단계, 2) 형이상학적 단계, 3) 실증적 단계.
1801 페히너(Gustav Theodor Fechner, 1801-1887) 독일 자연과학자, 철학자이며, 정신물리학의 창시자. 자극과 감각의 강도 관계를 수량화하여 실험심리학 연구법을 확립하였다.
1822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1861년의 저작 자연발생설 비판
1825 샤르꼬(Jean Martin Charcot 1825-1893) 프랑스 신경학자 살페트리에르(Salpêtrière)에서 병리 해부학 교수였다. 다음 병원장은 쟈네 였다.
1828 텐(Hippolyte Taine, 1828-1893) 프랑스 철학자, 역사가. 비평과 역사 시론(Essais de critique et d’histoire (1858 et 1882)
1832 빌헬름 막시밀리안 분트(Wilhelm Maximilian Wundt, 1832-1920) 독일의 심리학자 겸 철학자, 생리학자. 1879년에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최초로 심리학 실험실을 개설하였고,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라 한다. [1839 리보(Théodule Ribot, 1839-1916) 프랑스 심리학자. 1885년 실험심리학 도입]
1845 부트루(Émile Boutroux, 1845-1921)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박사학위 De la contingence des lois de la nature, 1874
1854 뿌앙까레(Henri Poincaré, 1854-1912)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기술자. 프랑스 수학회 회장 두 번 역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 과학과 가설(La Science et l'Hypothèse, 1902), 과학과 방법(Science et Méthode, 1908) <Oe 없음, Me, 1037외 네 번)>
1857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스위스의 언어학자,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 구조주의 사회학의 선구자.
1857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 1857-1911) 프랑스의 심리학자, 의사. 1894년 소르본 대학의 생리적 심리학 실험실 소장. 1905년에 시몽(Théodore Simon 1873-1961)과 함께 “비네-시몽 지능 조사법(l'Échelle métrique d'intelligence)”을 만들어 지능 검사의 기초를 세웠다[Âge mental(AM) et Quotient intellectuel(AI)]. 그 밖에 정신 분열증에 대해서도 큰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1857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 1857-1939)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도덕과 품성들의 과학(Morale et Science des moeurs, 1903) 열등 사회에서 심성적 기능들(Les fonctions mentales dans les sociétés inférieures (1910), 원시 심성(La Mentalité primitive, 1922).
1858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 알사스 유대계, 프랑스의 사회학자. 종교적 삶의 기본 형태들(Les Formes élémentaires de la vie religieuse : le système totémique en Australie 1912)
1859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861 삐에르 뒤앙(Pierre Maurice Marie Duhem, 1861-1916) 프랑스 물리학자, 화학자, 역사가, 인식론자. 1882년 ENS 일등 입학, 베르뜰로(Marcellin Berthelot, 1827-1907)의 반대 견해로 박사학위를 거절당하다. 역학의 진화(L'évolution de la mécanique, 1905)(Oe 700, 1564) 세계의 체계(Le Système du Monde. Histoire des Doctrines cosmologiques de Platon à Copernic, 10 vol., (1913—1959)
1871 보렐(Émile Borel, 1871-1956) 프랑스 수학자, 정치가. 에콜폴리테크니끄와 에꼴노르말에 동시에 1등으로 합격했는데 에꼴노르말을 선택했고, 수학으로 교수자격도 1등했다. 측정이론(la théorie de la mesure)의 개척자이며, 측정이론을 개연성 이론(la théorie des probabilités)에 응용하는데 전문가이다.
1863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1863-1936) 독일의 철학자. 신칸트학파 중에 하나인 독일 서남학파(바덴학파: 문화 역사론). 빈델반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Die Grenzen der naturwissenschaftlichen Begriffsbildung. Eine logische Einleitung in die historischen Wissenschaften. 1896》(1896-1902), 《문화과학(文化科學)과 자연과학(Kulturwissenschaft und Naturwissenschaft. 1899,》
1893 유리(Harold Clayton Urey 1893–1981) 물리화학자. 생명기원 실험 1934년 노벨화학상. 그의 제자 밀러(Stanley Lloyd Miller, 1930-2007)와 실험.
1919 박홍규(1919-1994) 우리나라 철학자, 플라톤과 벩송 전문가.
1920 이동식(1920-2014) 정신과 의사. 대학교수, 역동정신치료의 효시. 학술원 회원. “자기반성이 도(道)라. 석가모니가 자심반조, 공자가 일일삼성. 미국 유학자인데도 정신치료는 불교와 같다고 한다.
1930 스탠리 로이드 밀러(Stanley Lloyd Miller, 1930-2007) 미국의 화학자, 생물학자이다. 그는 실험에서 암모니아와 수증기 등 원시지구에 다량 존재했던 기체들에 전기 방전을 가하면 유기물이 합성되며, 이 유기물들이 생명체의 존재 없이도 합성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1932 조대경(曺大京, 1932-)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대학원 심리학 박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심리학과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
1934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 미국의 천문학자, 천체화학자, 작가이자 천문학, 천체물리학. 코스모스(COSMOS)(1980. 새번역 2002)
1935 박전규(朴全圭, 1935-) 전북대학교 교수. / 1966서울대 석사, 루방대학 1968, 1979 University of Paris I Pantheon-Sorbonne.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전공.
1944 양문흠(梁文欽, 1944), [前]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ㅡ'과 "他者"를 중심으로 한 파르메니데스 편 연구, 서울대, 1984, 박홍규.>
1944 이태수(李泰秀, 1944-) 인천, 괴팅겐 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 대학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47 김남두(金南斗, 1947-)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 석사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 철학 박사.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석좌교수.
1947 김진성(金振聲, 1947-1984) 서울대 철학과, 성균관대 교수. 베르그송 연구(문학과 지성사, 1985). 1980년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에서 <베르그송 철학에서 무관심과 삶에 주의(Desintéressement et attention à la vie dans la philosophie de Bergson>로 박사학위.
1947 손동현(孫東鉉, 1947-) 성균관대 교수, 박홍규 강의 수강.
1957 염수균(廉秀均, 1957-2014) 조선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철학과 교수
1959 이정우(李正雨, 1959-) 충북 영동. 서울대 공대, 1994년 서울대 철학 박사, 1995-1998년 서강대 철학과 교수, 경희 사이버대학 교수.
1959 김인곤(金寅坤, 1959-) 정암학당 당장 지냄.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편 연구, 1995, 서울대, 김남두>
(10:40, 53MLF)(16:12, 53MLG)
참조 1 :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
코스모스(Cosmos, 1980)(재번역2002), 이 번역본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창백한 점; 공간에서 인간미래의 전망(Pale Blue Dot: A Vision of the Human Future in Space, 1994)
세이건은 사진(희미한 점 하나)과 같은 이름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A Vision of the Human Future in Space, 1994)>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도움이 올 것이라는 암시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집인 ‘창백한 푸른 점’을 지키고 소중히 여기는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내가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세이건이 은하계 안에 지구와 같은 종류의 행성구성이 수 만개 있을 수 있다고 하다가, 연구를 깊이한 결과 이런 조건에 맞는 지구가 생길 확률이 우주에서도 있을까 말까하고 또 은하계 안에서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투로 쓰여진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가 지구가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내가 생각하면서, 그는 진솔한 자연주의적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다른 곳에 가능성이 있다면 그곳에 가려고 노력하면서 지구를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리고 종교적으로 다른 곳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싹 없애듯이 은하계 뿐만이 아니라 우주에도 지구와 동일한 조건을 가질 수 있는 행성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만큼 지구를 소중히 여겨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세이건을 나는 좋아한다.
= 시간이 지나서 소중한 지구 소중한 땅으로 생각하면서, 인간은 땅으로 돌아간다. 저 세상으로 갈 곳은 없다. 은하계에도 우주 어느 곳에도 없다. 단지 지구를 잘 보존하자는 것을 넘어서 지구가 어머니이고 생명의 근원이다. 세이건이건 호킨스건 간에 멀고먼 우주를 계산했다. 그런데 인도의 무량대수(無量大數, 10의 68승)을 생각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극한이라는 극(極)은 10의 48승이고 갠지스강의 모래알을 세는 수 10의 52승 항하사(恒河沙)이다. 아승기(阿僧祇, 1056) 나유타(那由他, 1060)을 넘어서 불가사의(不可思議, 1064)다음이 무량대수이다. 맞지는 않지만 대칭적 번역하여 보면 그리스 사유의 극한은 모래알 세는 것보다 낮은 차원이고, 신비가에 이른다고 하는 불가사의는 무량대수에 비해 단위가 낮다. 무량대수(양이 없는 수)가 순수한 아페이론이 아닐까 한다. 무량대수에서 보면 인간 한갑자 또는 백년은 갠지스가의 모래 한알보다 더 작다. 이런 점을 세이건이 사진으로 찍자고 NASA연구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신념과 실력이 이끌어주었을 것이다. 서구의 인간들이 얼마나 놀랐을까하는 것은 공상으로도 넘치고 넘친다. 우주 상에 티끌 같은 점과 같은 현존자에 사는 인간이 무얼 아웅다웅하느냐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세이건일 것이다. 나도 철학사 강의에서 꼭 우주넓이와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같잖은 현존자-인간: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지구를 비참하게 하지 말 것이며, 인간들 사이에 처참(야만)하게 하지 말지라. 공동체를 이루며 야만스럽게 살지 말지라. 사키야 무니가 무량대수를 이야기 한 것도 오만하지 말며 착각(환상, 마야)에 사로잡혀 저세상을 추구하지도 말라고 한 것이리라.(53M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