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
단체 |
시대 |
근대 |
성격 |
독립운동단체, 의병부대 |
설립일시 |
1896년 |
해체일시 |
1896년 7월 |
설립자 |
김하락,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외 |
대표자 |
민승천 |
정의
1896년 일제침략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서 봉기한 의병진영.
개설
1895년 12월의 단발령 공포 직후 경기도 이천에서 조직되어 1896년 7월경상북도 영덕에서 해산할 때까지 장거리를 이동하며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설립목적
이천수창의소의 초기 조직과정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한 인물은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이다. 이들은 모두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중·장년층의 유생들이다.
이들이 의병 봉기에 착수하는 계기는 김하락의 『진중일기(陣中日記)』에 의하면, 을미개혁에 의한 국정의 문란과 일제의 내정 간섭, 이로 인한 전통문화의 파괴, 청일전쟁을 악용한 일제의 무력침략, 친일관리들의 무분별한 친일행각,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단발령의 강행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이들의 의병봉기 이념은 반일제침략, 반친일관리, 전통문화 수호의 복고주의, 근왕의식(勤王意識) 등으로 정리된다.
연원 및 변천
1) 조직구성
김하락과 동료들은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날인 1895년 12월 31일 의병 모집을 위해 서울을 떠나 이천에 도착하였다.
이천에 도작한 이들은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으로부터 관군 100여 명을 지원받고 이들을 기반으로 이천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에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광주·시흥·안산·수원·용인·안성·죽산·음죽·지평·포천 등 경기도 전지역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대규모의 이천수창의소가 조직되었다. 구성원의 측면에서 보면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병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창의대장에는 민승천(閔承天)이 추대되었다. 민승천은 이천수창의소에 참여하기 이전 이미 경기도 안성에서 대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창의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인물이다. 이 밖에 지도부의 주요 직책은 서울에서 이동해 온 김하락·조성학·구연영·김태원·신용희가 맡았다.
특히 김하락은 각군 도지휘의 직책을 맡아 의병진을 이끌었다. 이천수창의소 병사 계층에는 관포수가 다수 참여하던 것이 특징이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도 남한산성의 별패진 군관 300여명, 양근·지평의 군사 300여 명, 음죽·죽산의 화포군 300여 명, 이천의 화포군 100여 명 등 약 1,000여 명의 관포수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천수창의소 조직은 지역 이동에 따라 이천 조직·의성 조직·경주 조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지역에서 지방 의병진과 연합이 시도되었는데, 여주의 심상희(沈相禧)의병진, 광주의 심진원(沈鎭元)의병진,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의병진, 예천의 박주상(朴周庠)의병진, 영양의 김도현(金道鉉)의병진, 경주의 이채구(李采九)의병진, 영덕의 신돌석(申乭石)의병진, 안동의 유시연(柳時淵)의 병진 등이 이천수창의소와 연합했던 의병진들이다.
2) 활동내용
이천수창의소 전투활동으로는 백현(魄峴)전투·이현(梨峴)전투·남한산성전투·성황현(城隍峴) 전투·경주성전투·영덕전투 등이 대표적이다. 백현전투(이천시 신둔면 수광리)는 이천수창의소의 첫 전투이다.
1896년 1월 17일 의병진의 결성이 마무리되었을 때, 일본군 수비대 보병 100여 명이 이천으로 공격해 왔다. 이 때 이천수창의소에서는 병사들이 민군(民軍)임을 감안, 복병전술로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의병진은 백현을 중심으로 야산에 매복해 있다가 다음날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맞아 밤낮을 계속해 전투를 벌여 일본군 대다수를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현전투는 이천수창의소의 두 번째 전투이다.
1896년 2월 12일 새벽 일본군 수비대는 200여 명의 병력으로 이천을 공격해 왔다. 다음날까지 전투가 이어졌고 의병진이 패해 후퇴하였다. 남한산성전투는 이천수창의소가 남한산성에 입성한 뒤 광주의병진 및 양근의병진과 연합해 치른 큰 전투였다.
이천수창의소가 남한산성에 입성한 때는 1896년 2월 28일이고, 입성 계기는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있던 심진원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이천수창의소가 입성한 뒤 곧 양근의 이석용(李錫容) 의병진도 합세해 세 의병진의 연합 의병진이 구성되었다.
당시 연합 의병진의 병력 규모는 약 1,000여 명의 관포수를 포함해 1,600여 명에 달했고, 남한산성에는 군수물자가 ‘산같이’ 쌓여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지였기 때문에 연합 의병진은 여러 면에서 강력한 의병부대의 조건을 갖추었다.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서울 진공전을 계획해, 서울진공전은 3단계로 계획되었다.
1단계는 수원 부근의 의병들이 수원을 점령하고, 2단계는 수원 의병진과 남한산성 의병진이 남한산성 주변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고, 3단계는 삼남 지역의 의병들이 연합해 서울로 진격, 일본군을 구축하고 러시아공사관에 체류 중인 고종을 환궁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서울진공전은 1단계까지는 잘 추진되었으나, 2단계 계획의 추진과정에서 좌군장 김귀성(金貴星)의 배반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되어 서울진공전은 중단되었다. 남한산성에서의 패전으로 이천의병은 큰 손상을 입었으나, 이후 영남으로 이동해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성황현전투(청송군 안덕면)는 이천의병이 영남으로 이동해 벌인 전투로 1896년 5월 14일에 있었다. 이때는 이천의병 외에 의성의병진과 청송의병진이 연합해 관군 170여 명과 전투를 벌여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비봉산(飛鳳山)전투(의성군)는 5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있었다. 관군 100여 명과 대적했으나 패퇴했고 의병진은 곧 경주로 이동하였다. 의병진은 경주에서 경주유림 김병문(金炳文)·이시민(李時敏)·서두표(徐斗杓)·박승교(朴承敎) 등 과 협의해 의병진을 재정비하였다.
경주에서의 지도부는 이천부터 활동해 온 인물(김하락·안옥희·안재학·이상태·조성학), 의성에서 합세한 인물(김두병·홍병태) 외에 경주에서 새로이 합세한 인물로 구성되었다. 의병진은 조직 정비 후 1896년 6월 17일 경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896 년 6월 23일 일본군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의병진은 영덕방면으로 이동하였다. 7월 14일영덕에서 또 다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영덕전투에서 수의 열세로 의병진은 크게 패해 큰 타격을 입었고 김하락도 중상을 입었다.
이때 김하락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울분을 토하고 오십천(五十川)에 투신해 순국하였다. 의병장 김하락도 전사했지만 의병 활동이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았다.
잔여 병사들은 지도자를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산발적이나마 한 달 이상 의병활동을 지속했고, 또 중기(을사)·후기(정미) 의병 시기에는 의병활동과 계몽운동을 재개해 끈질긴 우리 민족의 저항력을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 「집의당유고(集義堂遺稿)」(김태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독립운동사자료총서(獨立運動史資料叢書)』3, 1989)
-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의 의병활동(義兵活動)」(유한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 「김하락진중일기(金河洛陣中日記)」(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