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선고 받은 죄인들도 판결 승복하고 눈물 흘리게…
'사도 법관' 김홍섭 탄생 100주년·서거 50주년 추모
서울고법(원장 심상철)은 오는 16일 '사도(使徒)법관' 김홍섭 선생의 탄생 100주년 및 서거 50주년을 맞아 '어느 법관의 삶'이란 이름의 추모행사를 연다. 법원은 이날 오전 10시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1층 대회의실에서 다큐멘터리 '어느 법관의 삶-사도가 된 법관, 김홍섭'을 상영하고 최종고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가 특별 강연을 할 예정이다. 12일부터 18일까지 법원청사 1층 대회의실 앞에선 선생의 사진, 법복 등 유품 전시회도 열린다. 법률신문은 김홍섭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선생을 새롭게 조명한다.[업적]"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불행히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1961년 10월,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 선고공판이 열린 광주고법 대법정. 1960년 12월 승객들이 타고 있던 여객선 경주호의 선장을 위협해 납북을 기도한 희대의 사건은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모두가 숨죽인 조용한 법정에 재판장인 김홍섭 선생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피고인 3명에게 사형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중형을 선고한 그는 머리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묵념했다. 인생 최악의 비극을 맞은 피고인들었지만 모두들 승복의 뜻으로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재판장이 공판 내내 보여준 신뢰와 정성, 인간적인 배려 덕분이었다. 선생은 앞서 공판기일에선 "불행히 세계관이 달라서 여러분과 나는 자리를 달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 있다. 당시에도 일부 피고인들은 눈물을 흘렸고, 어느 피고인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순순히 진술했다고 한다.고 박찬일 변호사는 1965년 법률신문에 쓴 추모글에서 "많은 법정을 다녔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박 변호사는 "세상을 뒤흔들던 끔찍한 사건의 피고인들을 앞에 세워넣고 친자식에게 타이르듯 온갖 정성을 다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 했다"며 "선고날 재판장이 목메여 말문이 막히고, 30여명의 피고인들도 숙연히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조차 그의 재판을 신뢰하고 승복한 이유다.법관으로서의 김홍섭 선생은 "재판은 어떠한 근거에 의한 것인가?"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것인가?" "(재판이라는) 소중한 임무에 내가 적격한가?"라는 세가지 질문을 늘 가슴에 품고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한다. 법관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그는 법관도 사람이기 때문에 늘 오판의 위험이라는 불완전성을 벗어날 수 없다고 되새겼다. 법관은 과녁의 중심부를 명중시킬 수 없고, 다만 그 중심부를 얼마나 가깝게 맞힐 수 있을지 기대할 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글에서는 "법관은 조사와 판단이 본업무여야 할 것이지만, 그렇다 해서 예후에 대해 관심 갖고 조언할 기회를 갖는 것을 무용의 잡일로 돌려 배척해야 할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수인(囚人)들의 대부'로 불리기도 한 선생은 사형수들을 직접 찾아가거나 글을 나누며 위로하고 인간적인 교류를 맺기도 했다. 1957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재직 때는 교도소에 있던 사형수 허태영과 서신을 주고 받고 그의 대부가 되어준 일화가 대표적이다. 넉넉치 않은 생활 속에서 봉급을 떼어 형편이 어려운 사형수 가족을 돕기도 하고, 형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책을 넣어주도 했다. 평소 색이 바랜 낡은 군복바지에 장인에게서 받은 정장 윗도리를 줄곧 입고 다녔다는 그는 법관 업무 이외의 사적인 용도로는 관용봉투나 관용종이도 쓰지 않고,자기 돈으로 산 물품을 사용했을 만큼 검소하고 청렴했다.추모행사 준비위원장을 맡은 노태악(53·사법연수원 16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사도법관에게서 재판에서의 진지함과 겸손함,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의 통찰력을 느꼈다"며 "재판에서의 판단은 논리적 선택의 결론 같기도 하지만 그 선택에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가장 큰 기준이 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 판사들이 재판에서 되새기면서 잊지 말아야 할 자세"라고 강조했다. [남긴 말] 법관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세례명 바오로)인 사도법관 김홍섭 선생은 시와 자연을 사랑하는 예술가적 풍모도 지녔다. 그가 남긴 다양한 기고글과 수필, 시에는 스스로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배어 있다.
-"생은 누구에게나 대견한 것이다. 간사한 지혜를 부리다가 제 꾀에 걸려 넘어진 자에게도 밉다고만 볼 수 없는 일면이 있겠거든,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압도 유린 당한 패배자들 앞에 '좋은 법관'이기 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친절하고 성실한 인간'이어야겠다고 나는 때때로 생각해 보았다." (법률신문 기고 '한 법관의 심정' 중)-"이 꽃을 어이 버리랴, 타는 불 속, 아니면 흐르는 물 위 그도 아닌 흙을 파고 묻어보랴/ 차라리 꺾이질 말걸 바람이 유죄려냐/ 꺾이운 꽃 짓밟혔기로니 이 꽃을 차마 버리랴/ 버릴 바 없어 실에 엮어 벽에 꽂아두느라면/ 양춘 삼월 혹연 재생도 하리" (자작시 '꽃 있는 법정')-"싸리꽃에 정이 있어 뜻이 통한다면 그의 수그러진 고개는 한층 더 수그러질 것이요. 밝은 뺨은 마침내 보랏빛으로 변해져 버릴 것이다. 꽃과 민주주의, 내가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이러하다." (수필 '꽃과 민주주의' 중)-"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나'와 더불어 반목하고, 상종하고, 회의하고, 절망하고 또 다시 모색하고……어느 하루 '나'와의 대립을 의식함이 없이 지낸 날이 없었다." (수필집 '창세기초' 중)-"기본인권은 법의 위에 있고 인류의 공동운명은 민족의 그것보다 더 크다고 보는 것은 나의 법관으로서의 기본신조" (1960년 11월 일기 중) [프로필]1915년 8월 28일 전북 김제군 금산면에서 가난한 농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보통학교 졸업 뒤 전주의 변호사 사무실 등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1939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해 2년만인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귀국 이후 가인 김병로 선생과 함께 서울 안국동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했다. 광복 뒤인 1945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용됐다.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담당했다. 같은 해 말 검사직에 회의를 느낀 그는 사임하고 뚝섬에서 농사를 지었다. 당시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의 부름으로 법조계에 복귀해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전주지법원장, 대법원 판사, 대법관 직무대리, 광주고법원장, 서울고법원장을 지냈다. 1965년 3월 16일 간암 투병 끝에 서울 사직동 자택에서 만 50세를 일기로 숨졌다. 저서로는 시집 '무명', 수필집 '무상을 넘어서', '창세기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