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의 시인을 만나다 | 시집속 대표시 - 박완호
도산검림 刀山劍林 外 4편
박완호
내 언어의 행간 사이에 숨어 있던
자객들은 다 어디로 떠나갔을까?
살짝 닿기만 해도
뻘겋게 핏물이 배어날 것 같은
날 선 말들, 한 번 칼질로
두꺼운 어둠을 동강 내려던
정신은 표적을 놓쳐버리고
지금은 어디쯤 고꾸라져 있나?
허무를 꿰뚫으려는 시의 언어에는
치명적인 독 하나쯤은 묻어나야 하는데
나는 무슨 말의 독을 차고
세상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려는가?
떨어져 나간 자객들을 다시 불러들이려면
언어의 행간마다 독 오른 칼날을 꽂아두고
서슬 푸른 눈빛을 안으로 갈무리해 가며
표적을 노리는 자객의 숨결 같은
적막 가운데 버티고 서 있어야 한다.
비수를 감춘 자객이 숨기 좋은
시인의 정신은
어디나 도산검림刀山劍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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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 가난한
간밤 오락가락하는 빗소리를 따라 어디까지 걸어갔던 걸까?
진공에 갇힌 새처럼
어느 순간 빗소리 끊기고 양팔을 세게 휘저어도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어둡고 낯선 데까지 날 데려간 이는 누구였을까?
박제된 꿈의 뼈 사이를 비껴가는 바람 같은
어떤 훗날도 기약할 수 없는 이곳에서의 나날들,
지녔던 것을 모조리 탕진하고 머릿속을 스치는 실낱같은 꿈의 곁가지들까지 죄다 꺾어버리고도 나는
아직 더 가야 할 곳이 남았다고 생각한 걸까? 아득한 서쪽 하늘을 더듬어대는 눈먼 새처럼
온몸의 혈관을 한꺼번에 터트려가며 펼쳐 보이는 허공의 속내, 신조차도 아픔 없이는 아무 꽃도 피워내지 못하는 것을
어찌 모를까마는, 걷고 걸어도 고통의 뿌리 쪽으로 가는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어떤 글자로도 꽃 피우지 못할 한마디를 꿈꾸는
시인의 맨발, 상처 난 발길이 가닿고자 하는
어느 먼 곳에서 눈먼 그대는
가난한 황홀을 마주하고 계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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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어둠이 닳아서 새하얀 빛이 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투명한 그물이 촘촘하게 날 에워쌀 때까지
시를 쓰다가
시가 되지 않는 말들과 함께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어느 먼 곳을 꿈꾸는 시간
닳다 만 어둠 같은,
더는 깊어지지 않는 절망 같은,
꽃 피지 않을 생각이
되지도 않게 시가 되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가며 어떻게든
어둠이 다 닳을 때까지
절망이 더는 깊어지지 않을
바닥에 누울 때까지
어떤 꿈도 더는 나를 가두지 못할
눈물의 바탕에 기어이 다다를 때까지
단 하나, 시인이라는
휑하니 빛나는 이름을 갖게 될 때까지
그것마저 죄다 떨쳐낼 때까지
안간힘을 다해 버텨보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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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무반주를 듣다
- 울산 십리대숲
가도 가도 끝없는 대숲 십리 길, 빼곡한
근육질의 그리움이 푸르른 공명을 끌어당긴다.
두드릴수록 파래지는 나무의
텅 빈 마디는 누구의 속내인가. 겨울의
언 행간을 가로질러 온 사람이
땅속 뿌리를 건드리는 봄의 무반주를 듣는다.
더 두드려다오,
풋내 서린 대나무의 숨결이
차가운 허공을 흔들어 깨울 때까지, 슬픔의
뼈대를 짚으며 솟구치는 새들의
날갯죽지가 투명하게 젖어 들 때까지.
대나무 마디마다 깃드는 소리, 창백한
공중에 새파랗고 질긴 힘줄을 풀어놓는
무반주의 음악들. 봄은
첫 마디부터 이미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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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집 찾기
그녀의 거처는 달동네 어디쯤이다.
달의 주소록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
희미한 반점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어둠의 줄기를 따라 늘어선
밤의 뒷골목 어딘가에 그녀가 머물고 있다.
선산 중턱에 걸린 반달 빈자리,
아카시아 뿌리를 움켜쥐고는
한사코 거기 머물고 싶어 하던
그녀는 언제부터 저곳에 집을 짓고 있었을까?
툭하면 번지수를 놓치는 무허가 판자촌 같은
달의 모서리 어딘가에 있을 집을 찾아 나선다.
어둠 속을 서성이는 어린 별을 만나면
아직 그녀의 집을 찾고 있느냐고
너무 슬프지 않은 얼굴로 물어다오.
달동네의 옆구리가 시큰거릴 때마다
번지수 없는 집이 조금씩 기울어간다.
더는 그녀의 주소지를 물을 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