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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는 정말 아프리카를 보았을까? (1)
- 아프리카 2. 잔지바르
<야만인을 기다리며>, <추락>, <왜 지구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90년대 중반 이름 있는 평론가 한 분이, 세상에 못 말리는 거짓말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해외여행 다녀온 사람의 ‘구라’라고 말했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여행자율화 이후 미지의 세상을 향한 설렘이 분출하던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게 꼭 당대만의 이야기겠는가? 근래 쓰인 책들로부터 먼 옛날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머나먼 세상을 구경하고 왔다는 사람들의 얘기 혹은 기록이란 온갖 과장과 허풍이 난무하는 픽션 이상의 픽션이기 십상이다. 따분한 일상을 벗어난 모험에 가득 찬 여행은 새로운 이야기를 공급하거나 지지부진한 시대의 상상력에 새로움을 불어넣는 발원지이기도 했으리라. 그렇듯, 여행이란 어쩌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에 다름 아닐 터. ‘젊어 여행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 할 얘기가 없다’라는 말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 도심에 도착하자마자 대기에 비린내가 진동했다. 다운타운에서 부둣가 시장이 멀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수도라는 도시가 어쩌면 이렇듯 어둡고 퀴퀴하고 음습할까?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거리를 배회하는데 그곳은 아프리카도 아시아도 그 어느 땅도 아닌 오래되어 떨어져나간 책장 속에나 있었을 법한 잊혀진 도시처럼 여겨졌다.
이튿날, 이름난 휴양지인 잔지바르 섬으로 가는 오후 페리를 예약해 두고는 오전 내내 해변 어시장을 돌아다녔다. 사람 사는 땅이면 으레 어시장이야 있게 마련이지만 그곳 어시장은 유난히 비리고 역했다. 지난 밤 도시에 처음 들어섰을 때 느껴졌던 비린내의 정체가 짐작이 갈 만했다. 처음 보는 파랗거나 붉은 빛깔 물고기들, 뾰족한 주둥이까지 포함하면 어른 키만큼이나 큰 열대어들까지, 그 어시장의 낯선 풍경은 내가 얼마나 먼 이국의 땅까지 와 버렸는지 실감하게 해주었다. 시장 곳곳에서 물고기를 손질하는 검은 손등 위로 은빛 비늘이 반짝반짝 빛나곤 하였다.
잔지바르 행 페리에 올라 마침내 존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첫 페이지를 펼쳐들었다. 아프리카 문학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나이지리아와 함께 최근 두 차례나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한 남아공의 문학은 소수의 백인 지배자들에 의한 흑인 억압정책, 즉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을 전후로 절망적이기만 한 인간 평등과 존엄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 왔다. 1988년 나딘 고디머에 이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는 권위 있는 세계 유수 문학상을 휩쓸면서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고 국내에도 활발히 소개된 바 있다. 언젠가 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프리카 여행이야말로 그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보호주의자>, <가버린 부르조아의 세계> 등의 소설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려낸 나딘 고디머와는 다르게,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뜻밖에도 남아공이 무대가 아니다. 구체적인 나라나 도시가 아닌 가상의 한 ‘제국’, 혹은 20세기 수많은 나라가 겪은 부침의 역사를 가진 상징적인 나라가 소설의 배경이다. ‘제국’이 통치하는 변방 마을에 지방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나’는 변방에 출몰하는 ‘야만인’(원주민)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파견된 제국의 관리, 군인들과 대립하며 갈등을 일으킨다. 오랜 변방 생활을 통해 야만인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며 그들에게 동정적인 ‘나’는 파견된 제국 관리들에 의해 결국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박탈당하고 마침내 감금과 고문을 당한다. 그러나 ‘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야만인을 소탕하러 들판으로 나간 관리들이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오는 걸 보며 ‘제국’의 몰락을 예감하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인위적이며 파괴적인 ‘역사’의 시간 개념에 대해 회의한다.
그 자신 사무엘 베케트 전문가이기도 한 쿳시는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에서 따온 듯한 제목(<야만인을 기다리며 waiting for the barbarians>)은 물론, 올지 안 올지, 온다면 언제 올지 모를 ‘야만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 혹은 기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베케트 전문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여기에 자신의 나라 남아공을 포함해 지난 세기 명멸했던 제국주의와 식민지 국가들, 근래 이라크 등에도 곧바로 적용될 만한 초시간적, 초공간적 스토리를 통해 잔존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몰락을 선고한다. 나딘 고디머의 소설이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일말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반면 이 소설은 상징적, 관념적인 형식을 취하면서도 결코 느슨하지 않은 미덕을 보인다. 흔히 ‘시간’이라는 관념이 ‘근대’를 형성케 한 중요한 개념이라고 본다면 이 소설은 제국주의 이전에 ‘근대’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 뒤 돌아와 읽은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추락>은 백인 정권이 종식되고 넬슨 만델라의 흑인 정권이 탄생한 뒤 이어지는 남아공의 최근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뜻밖이었다. 새로운 남아공 탄생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인종간의 해묵은 갈등과 폭력이, 여 제자를 성폭행하다 고발된 뒤 인생의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는 속물 백인 교수의 눈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 시종 불편하지만 묵직한 진실을 담고 있는 상황 설정과 심도 깊은 인물 묘사로 인해 한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부커 상의 원칙을 보기 좋게 깨버린 <추락>의 힘이 소설을 읽는 내내 느껴진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마이클 K>, <철의 시대>, <슬로우 맨> 등 아직 읽지 못한 대작가의 소설이 꽂힌 서가는 그래서 마냥 든든하기만 하다.
적도 부근의 찬란한 햇살 아래 펼쳐진 잔지바르의 아름다움에 취해 떠돌아다니다가, 스톤타운의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을 잃었는데 발길이 오래된 성당 앞에서 멈췄다. 입장료를 내는 걸 보니 예사롭지 않은 유적인 듯했다. 그 성당 건물 한 구석에서 누군가의 안내에 따라 비좁은 지하로 내려갔다.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배어있는 작은 공간. 한 외국인 가이드가 자신의 고객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무심한 척 엿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이 노예무역 시절의 지하 감옥 자리였다고 했다. 간신히 허리를 굽혀야만 일어설 수 있는 낮고 비좁은 공간에 수많은 흑인들을 몰아넣고 쇠고랑을 채운 뒤 제대로 된 식사와 취침, 용변조차 허락하지 않고는 마침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만이 건강한 노예로 인정되어 유럽 각지로 팔려 나갔다는 처참한 장소가 지금은 관광객의 값싼 동정심을 부추기기 위해 공개되고 있다. 은은히 배어있던 지하 감옥의 체취가 갑자기 역하게 끼쳐온다. 역시나 아프리카의 땅 잔지바르는 마냥 아름다울 수는 없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땅일수록 눈물이 많은 땅이 아니던가. 풍요로운 땅일수록 굶주림이 많은 땅이고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지 않던가. 아프리카가 그렇고 아시아가 그랬으며, 라틴 아메리카와 수많은 땅들이 그러했다. 신들이 만들어 놓은 축복과 풍요의 땅을 고통과 슬픔의 지옥으로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은 인간의 이 죄악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몇몇 장소를 제외한다면, 아프리카가 그토록 비참한 눈물의 땅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행자가 만난 풍경은 평온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아마도 아프리카 나라들 가운데 정치,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나라를 여행한 까닭일 터다. 케냐, 탄자니아에서 가까운 소말리아, 수단, 우간다라든가 서부 아프리카 쪽을 여행했다면 어쩌면 정반대의 아프리카를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짧은 여행에서 아프리카의 비극과 눈물을 체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긴, 모든 땅이 그러하듯이, 여행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아프리카가 있을 것이다. 누구의 여행이 잘못되고 제대로 되었다고 조롱하거나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는 만큼 보기도 하거니와 모르는 만큼 배우기도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는 오만한 문명에 늘 모종의 가르침을 주는 학교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17년간 커피 농장을 운영하며 현지인들과의 우정과 대자연의 모험을 경험한 덴마크의 여성 작가 카렌 블릭센은 “아프리카로부터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라틴어 경구에서 따온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썼다. 피카소는 아프리카의 조각과 미술에서 자신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힌트를 얻었으며, 슈바이처와 이태석 신부는 그곳에서 사랑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흔히 야만으로 치부되는 아프리카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서구 문명에 가르침을 주고 막힌 문명의 숨통을 틔워주는 인류의 시원(始原) 역할을 해왔다.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 속에 신경 쇠약에 시달리던 창백한 문학도 앙드레 지드 역시 3년여의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지상의 양식> 같은 심오한 잠언서를 쓰기도 했다. 모든 종교적, 도덕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생명을 ‘맨발’로 맞닥뜨릴 것을 권유하는 지드는 이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에서)
아프리카 53개국 중 37개국이 거의 순수한 농업국가다. 그들의 농업은 유럽연합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희망은 서서히 변화하는 공공의식에 있다. /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 이희인 (카피라이터/사진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쿠나마타타! (1)
- 케냐, 탄자니아 1.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중의 지도자>, <킬리만자로의 눈>
다소 상기된 얼굴의 가수 라이오넬 리치가 처음 마이크 앞으로 다가선다. “어떤 소리들에 귀 기울여야 할 때에요.” 라이오넬 리치 쪽으로 다가와 그의 노래를 이어받는 흑인, 스티비 원더다. “세상이 하나가 되어야만 할 때가 온 거에요.”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잇는 이들은 두 명의 백인 가수, 닐 사이먼과 케니 로저스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생명을 위한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에요. 가장 위대한 선물을 말이에요.” 그 뒤로 이어지는 티나 터너, 빌리 조엘, 다이애나 로스, 흰 장갑을 끼고 광택 나는 구두를 신은 한창 잘 나갈 때의 마이클 잭슨. 그리고 하얀 우윳빛 피부가 유난히 빛나는 브루스 스프링스턴과 신디 로퍼, 기타 등등의 가수들, 아니 나의 영웅들.
기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Norwegian Woods’를 들으며 어지러워졌다는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이 느낀 현기증이 이런 것이었을까?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어지러웠다. 어쩌다가 좌석 앞에 부착된 스크린을 검색하다가 ‘올드 팝’ 쯤 되는 항목을 선택하게 되었고 거기서 그 뮤직비디오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 시절 내가 믿었던 휴머니즘의 전부. 한 시절 내 가치관의 푯대. 워크맨에 노래를 넣고 귀가 먹먹하도록 들었던 그 노래의 제목은 ‘We are the world’ 였고, 노래를 부른 실현 불가능한 가수들의 모임을 ‘USA for Africa’라 불렀었지. 아프리카를 위해 모인 미국인들. 그런데 묘한 느낌이 든다. 정작, 이 노래가 굶주린 ‘아프리카’를 위한 노래였다는 사실이 이제 와서 낯설게 느껴질까? 대중의 슈퍼맨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렇게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는데 왜 아프리카는 아직도 이럴까? 아프리카가 왜 아직 이럴까, 라고 내뱉는 나의 푸념은 옳은 것일까?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의 기원? 타잔과 동물의 왕국? 무더위와 갈증과 기아와 질병? 분쟁과 학살? 눈물과 눈물과 눈물?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20여년 만에 만난 오래 전 노래에 나는 어지러웠다. 그러는 사이 비행기는 천천히 나이로비로 하강을 준비하고 있다.
아프리카 여행을 염두에 두고 아프리카가 빚어낸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들을 찾아보니 서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들의 활약이 압도적이다. 86년 아프리카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레 소잉카가 나이지리아 작가이며, 참담한 아프리카 현실을 담은 단편집 <한편이라고 말해>의 우웸 아크판, <태양은 노랗게 타 오른다>의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 등 생경한 이름의 작가들이 모두 나이지리아 출신이다. 그러나 정작 나이지리아, 아니 아프리카 문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작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이름은 치누아 아체베다. 나이지리아 동부의 한 부족에서 태어나 영국계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학의 고전들을 속속 발표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소설가. 불안한 치안 탓에 나이지리아 쪽으로 여행하지 못하고 대신 동아프리카의 케냐, 탄자니아로 향하면서 나는 치누아 아체베의 책들을 꺼내 들었다. 그의 작품은 아프리카가 겪은 보편적 역사와 현실을 틀림없이 담고 있으리라. 지금은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낡은 문학전집 속의 <민중의 지도자>와 최근 번역 출판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와 <더 이상 평안은 없다>. 그 중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모든 것>, <더 이상>과 함께 아프리카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신의 화살>은 서울의 많은 도서관들을 뒤져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번역 출판되었던 책인데 이제는 도서관에서조차 잊혀진 슬프고 가여운 책. 마치 아프리카의 현재, 아프리카의 어제를 은유하는 것 같다.
1958년 출간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서구 제국주의가 침략하기 전 튼실하고 질서 있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던 아프리카 한 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무오피아란 이름의 이 부족에서 매력적인 주인공 오콩고의 영광과 몰락, 저항과 죽음의 드라마가 아프리카 3부작의 첫 작품인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내용을 이룬다. 불같은 성격에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오콩고는 전쟁에도 탁월한 공을 세우며 부족 안에서 이름을 날리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추방당해 7년이 지난 뒤에야 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고향 마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백인들이 세운 교회와 백인들에 의해 차츰 점령당해가는 부족의 모습이다. 오콩고는 부족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해가는 백인들의 통치에 반감을 품고 마침내 그들과 맞서 싸울 결심을 하게 된다.
여행에 앞서 읽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일그러진 영웅 오콩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반부는 아프리카 한 부족의 원시적인 풍습과 문화가 차분하면서도 아름답게 서술된다. 결혼과 가족, 전쟁과 축제, 농사와 주술 등 한 부족, 하나의 공동체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아름다운 자연의 묘사와 인물들의 행동 가운데 서술되면서 훌륭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를 이룬다. 후반부에서 교회를 앞세운 백인들이 어떻게 이 행복했던 부족을 파괴하고 종속시켜 가는지 역시 생생하고 박진감 있게 서술된다. 오콩고의 영웅적, 혹은 반영웅적 캐릭터는 이런 서술에 꽤 맞춤해 보인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이어지는 <더 이상 평안은 없다>는 오콩고의 후손으로 설정된 주인공이 영국 유학에 돌아와 발견한 무기력한 아프리카의 현실과 이에 갈등하는 주인공의 몰락을 담고 있다고 하며,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신의 화살>은 그 뒤 이야기로 이어진다 했다.
정작 아프리카에 도착해 읽기 시작한 소설은 3부작 뒤에 나온 작품이자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인 <민중의 지도자>다.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 이후 100여년이 훨씬 지난 1960년대 중반의 나이지리아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부패한 정치 지도자들과 이를 타파하려는 지식인들 간의 첨예한 갈등과 투쟁을 담고 있다. 고위급 장관이자 베테랑 국회의원인 ‘낭가’ 나리와 그에 맞서 선거에 출마한 주인공 오딜리 간의 정치적 대결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회유와 협박, 폭력, 테러, 살인이 자행되는 국면은 비단 나이지리아, 아프리카만이 아닌 지난 세월 제3세계라 일컬어졌던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야 했던 혼돈의 양상을 그리고 있다. 결국 젊은 오딜리와 그의 혁신 정당은 낭가를 비롯한 정치세력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굴복당하지만 그렇게 정권을 잡은 부패한 정치집단 역시 군부에 의해 축출되어 몰락하기에 이른다. 치누아 아체베의 연작은 자칫 딱딱하고 관념적이며 선동적이기 쉬운 현실과 역사의 고발을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사건을 통해 펼쳐가는 긴 호흡의 작품들이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이웃 나라 탄자니아의 국경은 지척이었다. 국경을 넘자 나부끼는 깃발과 정치지도자의 사진만 다를 뿐 자연과 마을의 풍광은 다를 바가 없다. 그 부근은 유명한 마사이 족이 오래 전부터 터전을 이루고 살던 곳이라 독특한 옷차림의 마사이 사람들을 무시로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사진도 간간히 눈에 띤다. 그의 부친 쪽이 이곳 케냐 출신이라고 했던가. 1998년 나이로비 한복판에서 벌어진 미 대사관 폭발사건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게 엊그제인데 이제 그 땅에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가 만연하다. 정치와 역사에서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이.
탄자니아로 넘어와서야 여행은 제 궤도에 올랐다. 국경에서 멀지 않은 마을 아루샤는 사파리와 캠핑, 야생의 여행을 위한 베이스캠프로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잠깐 등장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아루샤에 짐을 부려놓은 이튿날 아침, 지붕이 열리게 되어있는 튼튼한 사파리 차량들이 숙소 앞에 시동을 켜고 대기해 있다. 마을 한가운데 대형 마트에서 야생에서 보내게 될 사흘 치 물과 식량, 생필품을 구입한 뒤 지프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더 깊숙한 아프리카 초원을 향해 달렸다. 첫날 사파리 투어를 한 곳은 동서 20km, 남북 16km의 거대한 화산 분화구 안에 생긴 ‘동물의 왕국’, 응고롱고로 국립공원. 분화구 안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에는 동물의 왕 사자를 비롯해 코뿔소, 코끼리, 하마, 얼룩말, 하이에나, 가젤 등 수많은 동물들이 나름의 질서에 순응하며 공존해 살고 있다. 분화구 안에서 태어난 동물들은 평생 분화구 밖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곳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생을 마감한다고 했다. 지프의 행렬이 지정된 외길로 지나가다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얼룩말 근처를 지나는데 다른 얼룩말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곁을 지키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날것의 삶들이 그처럼 뭉클했다. 하지만 하이에나는 시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야행성의 사자는 지프가 옆에 와 있어도 동물원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없이 굼떴다.
그 밤엔 분화구 고갯마루에 마련된 캠핑장에서 야영을 했다. 저녁을 먹자 어둠은 곧바로 내려앉았다. 발전기로 밝히던 불빛조차 꺼지자 사위는 잠시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가 별빛에 차츰 다시 환해졌다. 잊지 못할 야생의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여행자들이 모닥불을 밝혔는데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씨들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그리곤 이내 여행자와 운전수 간의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너무 쉽게 객창감에 빠져버린 듯 고향의 옛 노래들이 여행자들 입에서 흥얼거려졌다. 아프리카 운전수들의 차례가 되자, 귀에 익은 익살스런 노래가 그들 입에서 터져 나온다. 꽤 경쾌하고 낙천적인 노랜데, 그 후렴구는 여지없이 ‘하쿠나 마타타!’였다. 하쿠타 마타타. 인도에서 인사말처럼 듣곤 하던 ‘노 프라블럼(No Problem)!’쯤 되는 말이라 했다. 스와힐리어로 된 노래를 배워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대신 ‘하쿠나 마타타’ 부분이 오면 누구나 큰 소리로 분명하게 그 구절을 거들었다. 하쿠나 마타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쾌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들렸다. 가장 핍박받고 눈물 많았을 아프리카 대륙에 ‘걱정일랑 붙들어 매!’하는 가사가 가장 인기 있는 노래라니.
술이 떨어져 배낭 안의 팩소주를 꺼내러 텐트로 다가가다가 나는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손에 카메라가 들려있지 않은 걸 그때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텐트 부근을 어슬렁거리는 커다란 그림자. 얼룩말의 무리였다!
아아, 밤하늘보다 커다랗던 얼룩말의 맵시 있는 엉덩이들이 먹이를 찾아 텐트 부근을 뒤뚱뒤뚱 서성였다. 모닥불이 꺼져갈 즈음엔 운전사들이 남은 음식을 모두 차 안에 두고 문을 잠그라 했다. 밤새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가 올라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분화구의 안쪽을 향해 은하수의 맑고 시린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킬리만자로는 높이가 1만 9천 7백 10피트나 되는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킬리만자로의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 어로 ‘누가예 누가이’, 즉 신의 집으로 불리고 있다. 서쪽 봉우리 가까운 곳에는 말라붙은 한 마리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런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 아무도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킬리만자로의 눈>은 이런 매력적인 도입부에도 불구하고 조금 심심하게 읽히는 소설이다. 한 평생 여행과 모험의 삶을 살았던 사내 해리. 결혼에도 실패하고 인생에도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해리는 애인과 함께 아프리카의 초원을 누비다가 경미한 실수로 병독에 감염되어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죽음이 바로 곁에 다가온 걸 느낀 해리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환영 속에 천천히 눈을 감는다. 실천하는 작가, 여행과 사냥, 모험을 즐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삶이 그대로 그 위로 포개지는 자전적인 캐릭터의 모습이다.
완만한 산길을 오르고 내려오는 중에 문득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집에서 이렇듯 멀리 떨어져 거친 자연을 여행하는데 나는 지금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프리카는 태초부터 ‘하쿠나 마타타!’가 잘 어울리는 땅이었다는 듯이.
이희인 (카피라이터/사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