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하나둘씩 깨우쳐 갈 때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옵니다."
단신으로 유학을 떠나 스페인 국립대학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해 한국어 강좌를 열고 있는 김혜정 교수(47)는 `투우와 정열의 나라`에서 한국어 씨앗을 뿌린 후 이제 수확에 들어가고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최근 한국에 온 김 교수는 애당초 스페인과 인연이 깊었다. 외국어대에서 서반아어를 전공했고 스페인 국비 장학생으로 마드리드 콤플르텐세 국립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마드리드에서 내륙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살라망카는 인구 15만명인 자그마한 도시다. 그러나 도시 곳곳에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교육도시다. 살라망카대학은 1218년에 세워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꼽힌다.
돈키호테에 심취해 있던 김 교수는 당초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마드리드국립대 박사학위과정 입학허가서를 받은 그가 살라망카대학으로 방향을 튼 것도 이 대학의 어문학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다.
2001년 공채시험을 거쳐 살라망카대학 전임교수가 된 그는 `유럽대학의 한국인 교수`로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스페인 최고 수준의 살라망카 어문대에 한국어 과정을 개설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축구를 통해 스페인을 조금 알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황영조 선수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금방 기억에서 지워졌지요."
최근 들어서야 김기덕 감독이 영화제에서 상을 탄 게 약간 화제가 되고, 길거리에 현대차와 기아차가 돌아다녀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스페인 전체에서 극동아시아학이 정규과목으로 돼 있는 대학이 세 곳밖에 안 된다"며 "그 중에서도 학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은 살라망카대학뿐"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에서 10년 넘게 생활하면서 가장 속상했던 게 바로 `한국과 한국어에 대한 무지`였다고 한다. 한국어 강좌 개설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극동의 머나먼 나라 말을 가르치는 강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 교수는 결국 대학 최고책임자와의 담판을 통해 해결했다. "살라망카대학에는 이미 6~7년 전부터 일본어 강좌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중국어 강좌를 개설하려던 참이었죠." 어렵게 총장을 설득해 한국어 강좌를 열었을 때는 설렘으로 며칠 동안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씨뿐, 더 큰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부총장과 함께 신문ㆍ방송에 홍보하며 대대적으로 알렸는데, 수강 신청을 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다시 한번 부닥쳐 보자는 심정으로 각 학부를 돌며 `고객 모시기`에 나섰고 그제서야 하나둘씩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어 강좌가 지금은 초급에서 최상급까지 4단계까지로 발전했다. 스페인 학생들이 한국어 문장을 척척 번역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에서 뜨거운 느낌이 올라오곤 한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을까. 한국어는 전공선택과목으로 6학점이 인정되는 중요한 과정이 됐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한국어 교과서 개발에 착수해 지난해 스페인에서 최초로 한국어 교과서를 출간하게 됐다.
[황국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