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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스톤 : 사회사와 역사적 상상력
이영석 (광주대 외국어학부)
1. 생애
1999년 6월 16일 로런스 스톤(Lawrence Stone)은 50여년에 걸친 그의 학문 이력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생동안 영국 근대, 특히 사회사 연구에 진력해왔다. 튜더-스튜어트 시대 귀족사회의 위기를 통해 혁명의 원인을 찾던 초기 연구에서 더 나아가, 가족과 성 그리고 결혼의 사회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연구 대상을 끊임없이 넓혀간 보기 드문 역사가였다. 같은 해 7월 5일자 《가디언》지는 역사가로서 그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향년 79세로 사거한 로런스 스톤. 그는 에릭 홉스봄, 에드워드 톰슨과 더불어 사회사의 개념을 수정하고 다시 구성한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사회과학자들의 이론과 기법을 역사 연구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역사 연구의 영역을 넓히고 그 연구 방법을 심화시켰다. 젊은 시절 논쟁적이고 다혈질이었던 그는 세계적인 사회사가로 일가를 이룬 다음에도 끝까지 다혈질의 인물로 남아 있었다.1)
이 기사는 스톤의 여러 저술을 언급하면서, 동료 역사가들은 「귀족의 위기」(1965)나 「열린 엘리트?」(1984)를 학문적으로 높이 평가하겠지만 일반 독자의 경우 「가족, 성, 결혼」(1977) 또는 「이혼행로」(1990)를 더 좋아할 것이라고 단언한다.2) 이는 스톤이 당대에 뛰어난 일급의 전문역사가이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일반 식자층의 인기도 함께 누렸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톤의 저술연대기를 훑어보면, 그가 전통적인 역사연구 방법을 토대로 하면서도 인류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방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튜더-스튜어트 시대에서 그 이후까지 연구시기를 확대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스톤의 생애와 이력을 간략하게 살펴보자.3) 1919년 12월 4일 런던 근교의 엡섬(Epsom)에서 태어난 그는 같은 세대의 뛰어난 영국 역사가들이 그랬듯이,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교육을 받고 자랐다. 명문 사립학교 차터하우스(Charterhouse)를 거쳐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에서 역사를 공부했으며 2차대전 중에는 해군장교로 복무하기도 했다. 제대 후 다시 옥스퍼드에 돌아온 스톤은 1947년 졸업과 동시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역사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주된 연구분야는 중세 예술사였다.4) 그러나 스톤은 곧바로 튜더-스튜어트 시대사 연구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젠트리의 대두와 영국 혁명을 연결지은 리처드 토니(Ricahrd H. Tawney)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젊은 스톤이 보기에, 1540-1640년간이야말로 영국사에서 흥미롭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던 시기임에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무르익지 않은 상태인데도 그 결과를 한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시대 귀족층이 낭비가 심하고 재정적으로 파탄상태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현상이 젠트리의 대두를 촉발했다고 주장했지만,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치밀하게 해독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5)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옥스퍼드의 동료 역사가들, 특히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즉 스톤이 동일한 칭호로 불린 다양한 세대에 속한 귀족들을 한 사람으로 혼동하였고, 토지를 합산한 수치들의 상당수가 오류로 나타났으며 전반적으로 그 시대 지주제의 본질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었다. 논쟁의 결과 스톤은 자신이 매우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6) 그 후 1960년에 스톤은 옥스퍼드를 떠나 미국 프린스턴대학 고등학술원(Institute of Advanced Study)에 자리를 잡았으며 1990년 은퇴할 때까지 사학과 교수 겸 데이비스역사연구소(Shelby Cullom Davis Center for Historical Studies) 소장으로 재직하였다.
엘리자베스 시대 귀족을 둘러싼 논쟁은 그의 학문 역정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사실 스톤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가혹하리만큼 신랄했던 트레버-로퍼의 비판은 그의 일생에 걸쳐서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가 미국으로 옮긴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었다. 비록 그 논쟁이 사료비판과 학문적 엄정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었을지라도, 그 이면에는 중세사 연구자가 새로운 분야를 넘나든다는 반감이 깃들어 있었던 것 같다. 냉전 상황 아래서 이념적인 문제도 작용했을 것이다. 리처드 에번스(Richard Evans)는 1960년대 옥스퍼드대학 교수들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 실제로 지도 교수들은 미국 대학들, 심지어 스톤이 영국을 떠나 가르치러 간 프린스턴대학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스톤이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논쟁의 결과 옥스퍼드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조롱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7)
이 논쟁 이후 스톤이 10여년 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연구가 바로 「귀족의 위기」였다. 이 연구는 그 자신이 논쟁에서 훼손당한 학문적 자존심을 되찾으려는 역작이었다. 그는 이전의 경제사적 접근만을 고집하지 않고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분야의 개념들을 원용하고 있다. 스톤의 학문적 이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좌절을 겪으면서도 논쟁이 되었던 그 시대를 다시 철저하게 탐구하여 전체사적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토니의 세기라는 시간대를 뛰어넘어 18, 19세기까지 탐구의 지평을 넓혔다. 이 글은 스톤의 학문세계를 간단하게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특히 영국혁명의 사회사라고 하는 그의 초기 주제보다는 1970년대 이후 출간된 그의 주요 저술들을 개략하고 그 학문적 의의를 되새기려고 한다.8)
2. 귀족사회, 위기와 존속
스톤이 논쟁 이후 프린스턴에 자리 잡을 때까지 줄곧 몰두한 것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귀족 엘리트의 위기를 전체사적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일이었다. 영국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의 서문에 해당하는 사회사, 경제사, 지성사 연구를 동원하여 그 변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의 위기」의 서술 목적은 “귀족 엘리트의 물질적, 경제적, 이념적, 문화적, 도덕적 환경” 즉 전체 환경을 묘사한 다음에, 이 “엘리트 집단의 위기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있었다. 그 위기야말로 영국혁명의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9)
스톤은 튜더-스튜어트 시대에 기존 질서의 토대에 나타난 장기적인 변화 속에서 영국혁명의 요인들을 찾는다. 그것은 군주제와 국교회, 그리고 귀족 엘리트사회 내부의 변화이다. 군주정에 대한 존경과 복종심이 약화되고 있었고, 국교회 또한 가톨릭 이외에 다른 종파를 포용할 수 있는 개방성을 잃었으며, 귀족층도 사회경제적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는 것이다.10) 「귀족의 위기」는 이 마지막 요인을 좀더 실증적으로 탐구한다.
그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에 영국 귀족의 부와 사회적 권위 및 지위에 심각한 위기가 나타났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작위귀족(peerage)의 수와 구성에서 일부 귀족의 도서관 장서수까지, 그리고 그들의 지대수입에서 식량소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통계자료를 제시한다.11)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작위귀족 전체의 총소득과 구매력을 추적한 통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총소득은 지대수입 합계에 관직수당, 국왕 하사금, 투자소득 등 다른 부대수입을 가산한 것이다.12) 그는 특히 1559년, 1602년, 1641년의 총소득 추계를 같은 연도의 물가지수(Phelps Brown-Hopkins index)를 고려한 구매력 수치로 변환하여 서로 비교하고 있다. 1559년을 기준으로 이들의 구매력은 17세기 초에 급격하게 떨어졌다가 1640대에 겨우 이전 수준을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계량화는 말 그대로 “작위귀족이 처한 전반적인 경제 상황의 모습”13)을 그려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한 것이다. 스톤은 이를 근거로 당시 귀족이 군사력은 물론 토지와 사회적 위신마저 상실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젠트리 상층에 비해 경제적으로 더 불리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은 귀족 위신의 추락과 자신감의 위기로 귀결되었고 그에 따라 군주정 자체가 곧바로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톤은 「귀족의 위기」 마지막 장에서 그 위기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요약한다.
이 같은 위신의 추락을 가져온 다양한 요인들로는 젠트리의 부에 비해 귀족의 부의 상대적 쇠퇴,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영지소유의 위축, 인원 무기 성 저항 의지 등 여러 면에서 그들 군사력의 약화, 너무 많은 인사에게 그리고 너무나 볼품없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아닌 현금을 통한 칭호 하사, 소작인들에게 인력 공급자보다는 지대 납부자로 대하는 그들의 태도의 변화, 절실한 정치적 종교적 이슈들의 대두에 따른 그들의 선거구 영향력의 잠식, 시골의 순박한 생활 대신에 도시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점차로 더 선호하는 경향, 중등학교와 대학에서 독서교육을 받은 자산계급의 증가, 신분 반열에 따른 권리를 무시하고 행정엘리트에게 분명한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국가, 개인주의 대두의 영향 전파, 영성적 위계에서 선민에 대한 칼뱅주의적 믿음, 세속사회에서 위계와 복종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친, 개인의 양심에 대한 청교도적 집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제로 있었던 것이든지 아니면 가상적인 것이든지 간에 헌정론, 과세의 방법 및 규모, 신앙형태, 미각, 금융상의 청렴도, 성도덕 등에 대한 태도 면에서 궁정과 주 사이의 심리적 단절 등이 포함된다.14)
1560-1640년의 시기에 귀족사회가 전반적으로 위신의 실추와 자신감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는 스톤의 견해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에 대한 비판은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스톤이 제시한 소득통계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족의 위기와 영국혁명의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스톤이 1559년의 총소득을 산출하면서 지대수입과 다른 부대수입 외에 누락된 소득분(casualties)을 뚜렷한 근거도 없이 지대수입과 부대수입 합계의 20%로 설정했다는 견해나,15) 당시 그가 제시한 위기의 증거들은 영국만이 아니라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따라서 영국혁명의 인과적 요인으로 과연 중요하다고 간주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비판이 이에 해당한다.16)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에서 스톤은 통계의 부분적인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그 전반적인 추세를 강조함과 동시에 귀족의 위기가 영국혁명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17)
튜더-스튜어트 시대에 귀족의 위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영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전통적 지배세력인 귀족과 젠트리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산업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혁명 이후 장기간에 걸친 헌정적 안정은 바로 이들의 역할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국혁명 이후에도 토지에 기반을 둔 세력이 여전히 굳건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가들은 귀족사회가 미들 클래스의 일부를 흡인할 수 있었던 개방성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벼락부자(mouveau riche)들의 상류사회 진입을 통하여 기존 지배세력은 탄력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에 이 같은 ‘귀족주도설’을 주장한 연구자들은 토지와 상업 사이의 부의 이동을 지주경제의 측면에서 해석한다. 이를테면 스튜어트 시대 런던 상인은 시골출신이 상당수였다. 그러나 상업에서 성공한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귀족사회에 그들의 자녀를 뿌리내리는 데 있었다.18) 또한 내란 이후 토지와 상업 사이의 부의 이동이 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인보다는 주로 지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물론 17세기에 좋은 귀족가문 출신으로 상업분야에서 부를 축적하여 다시금 토지자본으로 회귀한 사례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토지와 상업 사이의 부의 교환기회가 높아졌다는 것 자체가 귀족세력의 부의 축적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상업분야를 귀족이 주도함으로써 상인 고유의 ‘자의식적인 계급’(self-conscious class)이 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19)
이러한 ‘귀족주도설’은 16세기 이후 19세기까지 유럽 자본주의 발전을 선도한 영국의 역사적 경험과 걸맞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최초의 상업혁명, 최초의 농업혁명, 최초의 산업혁명 등 이른바 영국 근대사의 ‘최초증후군’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의 성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20) 최근 한 세대에 걸쳐 영국사의 주류가 된 역사해석은 19세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귀족지배의 성격을 강조한다. 개방귀족제(open aristocracy)론이야말로 이러한 해석의 종합판이라 할 것이다.
해럴드 퍼킨(Harold Perkin)은 전산업시대 영국을 토지재산과 후견(patronage)에 토대를 둔 개방귀족제 사회로 규정한다. 재산과 후견이야말로 전산업사회를 지탱한 기본원리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신분이 토지소유의 정도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토지소유가 그 사람의 지위를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미들 클래스가 토지귀족으로 상승하는 사례가 많았고 이 개방성이 토지귀족의 적응력과 지속력을 강화하는 주된 동인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사회이동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기 때문에 사회갈등은 다만 잠재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21)
귀족사회에 대한 스톤의 학문적 관심은 「귀족의 위기」 출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는 특히 16세기 이래 수세기에 걸쳐 영지 구입을 통하여 상업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상류계급으로 흡수될 수 있었다는 전통적인 해석을 다시 검토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는데, 그 연구결과는 「열린 엘리트?」에 농축되어 있다. 이 책은 벼락부자들이 통설처럼 귀족사회에 대거 편입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해 1540-1880년간의 시기에 토지 엘리트 구성의 변화 여부를 탐사한다. 1873년 이전에는 토지소유와 관련하여 적절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연구는 방법상으로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톤 부부가 제시한 우회적인 방법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시골 저택 소유자와 귀족 엘리트를 동일시한다는 전제 아래 그 저택들의 소유변화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귀족 영지의 넓이와 수를 추적하는 데 따른 난점을 비켜가면서도 저택 소유자의 변화를 통해 벼락부자들의 귀족 사회 진입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
스톤 부부는 헛퍼드셔(hertfordshire), 노샘턴셔(Northamtonshire), 노섬버랜드(Northumberland) 등 3개주를 대상으로 저택 소유자의 변화를 추적한다. 그들은 340년간 총 362채의 저택을 소유한 적이 있는 2,246명의 인사를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해당 기간의 저택 소유자 2,246명 가운데 그 저택을 새로 사들인 사람은 480명(20%)이었다. 구입한 사람의 3분의 2는 관료, 법률가, 사업가로 부를 추적한 사람이었고, 그 나머지는 다른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더욱이 런던에서 가장 가까운 헛퍼드셔에서조차 새로 저택을 사들인 사람들 가운데 사업가 출신은 1760년 이후에도 10%를 넘지 못했다. 결국 토리 엘리트의 개방성이라는 개념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며 “새로운 상업적 또는 산업적 부가 대규모로 쉽게 상향이동한” 현상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22)
결국 「열린 엘리트?」는 영국 근대사에서 토지엘리트층의 개방성에 관한 신화를 논파하려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귀족사회가 생각보다 개방적이지 않았다는 것과 토지귀족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는가. 스톤 부부는 “영국 사회정치사의 특수성에 관한 열쇠”는 “토지 엘리트와 가문들의 위계구조 아래서 미들 클래스를 심리적으로 그들보다 더 아래 반열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을 거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리와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금전적 이해관계를 가진 상인과 제조업자들이 영국혁명 이후 꾸준하게 증가했지만, 그럴수록 가문의 위신을 추구하는 경향은 더 짙어졌으며, 미들 클래스 가운데 소수만이 토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심리적 분위기는 미들 클래스 사이에 귀족적 가치와 생활을 모방하고 그것에 동화하는 경향을 초래했다. 귀족 엘리트와 젠트리, 부유한 상인과 은행가, 제조업자와 일부 전문직 인사들 사이에 문화적 가치와 행동이 동질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토지귀족의 지속성의 비밀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심리적 분위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23)
스톤 부부의 「열린 엘리트?」는 분명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여 귀족사회를 추적한 노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산출한 통계치가 과연 귀족사회의 폐쇄성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3개 주에 산재한 일정 수준 이상의 저택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회위계의 최상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0%라는 비율이 토지소유계급의 폐쇄성을 입증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라고 할 수 없다. 만일 귀족과 젠트리를 포함한 좀더 광범한 범주에 대해 조사할 경우 그 비율은 좀더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또 10%의 비율만 하더라도 사회 최상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닐 수도 있다.24)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 수치의 해석 문제보다는 영국 혁명 이후에서 수 세기동안 귀족지배구조와 헌정상의 안정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미들 클래스 일부의 충원을 넘어서 귀족사회가 사회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16세기 이래 귀족과 젠트리의 시장지향적 태도와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바탕을 둔 경제활동을 영국 근대사의 특성으로 파악하는 ‘신사적 자본주의’(gentlemanly capitalism) 개념이 스톤 부부의 연구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25)
3. 감성적 개인주의와 가족의 변화
원래 사회경제사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한 스톤은 1970년대 이후 경제적 분석을 넘어 일상적인 삶의 세계로 탐구의 눈길을 돌렸다. 「가족, 성, 결혼」은 이러한 작업의 중간결산서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가족과 결혼에 대한 관심은 이전의 저술인 「귀족의 위기」에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11장에서 1560-1640년 시기 귀족 가족의 실태를 묘사한다. 그가 그린 귀족 가족은 가솔과 식객을 포함하는 대집단이었다. 남편 또는 아내의 사망으로 재혼하는 사례가 많았다. 부부간의 결혼기간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가족원들은 별거하는 경우가 잦았다. 달리 말하면 가족의 와해가 거의 일상적이었다. 자식들 또한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기간이 길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유모에 의해 양육되었고 소년시절 이후에는 교육 때문에 집을 떠나기가 일쑤였다. 요컨대 이 시기 귀족 가족은 정감과 애정이 아니라 법과 관습과 편의성으로 결합되었다는 것이다.26)
「가족, 성, 결혼」은 그의 초기 관심사였던 귀족층뿐만 아니라 더 광범한 계층을 대상으로 16-18세기에 걸친 장기간의 가족 변화를 살피려는 시도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문화변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배치(arrangement), 구조, 관행, 권력, 애정, 성 등의 맥락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의 변화로 표현된다. 스톤이 주로 되묻는 것은 “개인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취급하고 이용했는가, 신과 관련하여 그리고 핵가족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의 사회조직들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그가 가장 중시하는 문화변동은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소원한 관계(distance)와 복종(deference)과 가부장제 등으로부터 이른바 ‘감성적 개인주의’(affective individualism)로의 변화이다. 실제로 그는 감성적 개인주의의 출현이야말로 “수천년 서구역사의 정신세계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로 간주한다.27)
그는 3세기에 걸쳐 진행된 가족 형태의 변화를 다루면서도, 그 변화를 전체사적 서술을 통해 재구성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 차원의 풍부한 내용들을 기술한다. 우선 생물학적 차원이 있다. 그것은 출생과 사망 또는 결혼과 같이 가족의 구조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가족생활의 감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들로 구성된다. 사회적 차원은 가족과 다른 사회조직, 특히 친족, 이웃, 학교, 국교회와의 관계가 주된 내용을 이룬다. 정치적 사실들도 무시할 수 없다. 가족 성원 사이의 권력분배, 어른과 연소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 존재하는 권위와 복종의 패턴이 핵심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차원으로는 재산 이전방식으로서의 결혼, 생산단위로서의 역할, 소비, 가족원 내부의 분업 등을 들 수 있다. 심리적 고려사항으로는 개인의 삶에서 가족이 미치는 영향,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심리적 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등 다양한 심리적 관계망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성적 차원은 배우자의 선택, 성생활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28) 그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항의 변화를 중심으로 가족 형태의 변화를 기술한다.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가족, 성, 결혼」에서 스톤이 내세우는 논지는 비교적 단순하다. 1500-1800년의 시기에 영국의 가족은 개방적인 친족가족(open lineage family)에서 가부장적 핵가족(restricted patriarchal nuclear family)을 거쳐 폐쇄적인 가정중심의 핵가족(closed domesticated nuclear family)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29) 물론 이러한 변화가 시기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개방적인 혈통가족은 1450-1630년의 시기에, 가부장적 핵가족은 1550-1700년간에, 그리고 폐쇄적인 가정중심 핵가족은 1640-1800년의 시기에 발전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영국 근대 사회에서 가족이 이와 같은 단선적인 변화의 추세를 보여준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이 세 가지 가족형태를 개략하면 이렇다. 먼저 개방적인 친족가족은 매우 애매한 표현인데, 스톤 자신도 좀더 적절한 용어가 없어서 이러한 표현을 썼다고 실토한다. 그가 이렇게 부른 것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 즉 “외부의 영향에 취약하다는 점”과 “그 가족원들이 죽은 선조와 살아 있는 친족에 대해 충성심을 가졌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 가족을 구분하는 주된 경계는 바로 친족이었다. 이것은 “개인의 자율성이나 사생활”이 바람직할 정도로 존중받지는 못한 단계였다.30) 더욱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 가족형태를 살펴볼 경우 놀라운 사실은 가족원 상호간에 정서적 유대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톤은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사회적 수준에서 16세기와 17세기 초의 정서적 관계에 관해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냉랭함, 조종, 복종과 같은 심리적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 높은 사망률이 깊은 가족관계를 쓸모없게 만들었다는 것, 결혼은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부모와 친족이 맺어주며 아이들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만 가질 뿐이라는 것, 부모와 자식간의 긴밀한 유대를 입증하는 전거를 찾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렵다는 것, 남편과 아내 사이의 친밀한 애정의 증거도 애매하고 드물다는 것 등이다. 더욱이 영혼의 불멸과 구원의 희구에 대한 믿음은 아이나 배우자 또는 부모를 잃었을 때 솟구쳐 오르는 그 같은 슬픔을 완화시켰던 것이다.31)
다음으로, 1530-1700년의 시기에 지속된 가부장적 핵가족은 시기적으로 첫째 형태와 겹치면서도 이전에 가족의 경계 안에 포함되던 구성원들, 이를테면 친척과 친족, 후견인이나 이웃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점차 쇠퇴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스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종래의 애착은 “특정한 종파나 국교회에 대한 좀더 보편적인 충성심”으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가족의 경계에 대한 인식(boundary awareness)이 핵가족으로만 한정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제 가족은 친족이나 이웃사람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좀더 폐쇄적인 특징을 띄게 되었다.
이 변화는 16, 17세기에 주로 중간계급과 상류계급의 가족에서 먼저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스톤에 따르면, 가족 경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돋보이는 현상은 가장의 영향력 증대이다. 가족 안에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가장의 권위를 신장시킨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권위주의적 국가가 가족 안에서 가장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통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가들 또한 가정을 교회 못지않게 중요한 “도덕적 종교적인 통제기구”로 간주하였다. 더 나아가 칼뱅주의의 원죄론이 전파되면서 “악마를 물리치고 사악함을 응징하기 위해 어린이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할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다.32)
스톤에 따르면, 이 핵가족의 기능은 이제 갈수록 “유아와 어린이의 양육 및 사회화”에,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경제적 정서적・성적・충족”에 국한되기 시작했다. 좀더 제한되고 특화된 기능을 가진 이 핵가족 안에서는 아내에 비해 남편에게, 그리고 자식들에 비해 아버지에게 권한이 점차로 집중되었다. 가장은 이제 친족의 간섭도, 그 자신의 속박이나 아내의 간섭도 덜 받게 되었다. 그는 자녀의 교육에 좀더 많은 관심을 쏟았고 그에 따라 자녀들에 대해 이른 나이부터 더 심하게 간섭하기 시작했다.33) 이 과정에서 가부장의 권위가 다시 강화되는 일종의 순환 고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 변화의 세 번째 단계는 가정중심의 핵가족 출현이다. 이 형태는 대체로 1640-1800년 사이에 점진적으로 나타났다. 이 형태가 두 번째 단계의 가족 특징과 다른 것은 핵가족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가족 안에 새로운 정감과 애정을 매개로 밀접한 유대감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스톤은 이러한 정서를 ‘감성적 개인주의’(affective individualism)라고 부른다. 이 단계에 이르러 친족에 대한 유대감은 완전히 사라지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어린 자녀 사이의 정서적 유대가 강화되면서 그와 동시에 가족들의 자율성이 신장되고 있다. 감성적 개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가부장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약화되기 마련이었다. 배우자 선택에서 자유연애의 풍조가 나타났고 지참금보다 사랑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으며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도 이전보다 한층 더 높아졌다. 스톤은 셋째 단계의 전반적인 변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 셋째 단계야말로] 아주 중요한 변화였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가족 형태는 감성적 개인주의 대두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 자율의 원리를 기반으로 조성된 가족이었고 강한 애정적 결합으로 묶여져 있었다. 남편과 아내는 부모의 바램을 지키기보다는 스스로 배우자를 골랐으며, 그 주된 동기는 대체로 친족을 위한 경제적 또는 신분적 편익보다는 오히려 이제는 오래 지속되는 개인적 감정이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에 갈수록 시간과 정력과 돈과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더 쏟게 되었고, 더 이상 어린 나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의사를 강제로 무시할 필요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34)
결국 스톤의 연구에서 핵심은 개방적 친족가족과 가정중심의 핵가족을 거의 이분법적으로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간 유대감이 없는 전근대적 가족에서 애정에 바탕을 둔 근대적 가족으로의 이행이라는 단선적인 진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톤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근대화 모델에 토대를 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가족 안에 애정의 감정이 전혀 없이 소원함과 거리감만이 퍼져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스톤은 두 가지 요인을 거론한다. 하나는 가족의 경계가 불분명했다는 점이다. 분명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가족은 “외부나 이웃 또는 친족의 지원, 충고, 감시, 간섭”을 받기가 쉬웠으며 가족 구성원 간의 사생활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35) 다른 하나는 인구학적 요인에 따른 가족관계의 불안정이다. 당시에는 부부가 함께 사는 기간도 양측 가운데 어느 한 쪽의 조기사망에 따라 20년을 넘지 못했고 자녀들이 15세 이전에 사망하는 비율도 거의 30-40%에 이르렀다.36) 가족관계가 쉽게 깨어졌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간에 깊은 애정을 쏟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결혼은 “일시적이고도 잠깐 동안의 결합”이었으므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 깊은 애정이 없었다. 높은 유아사망률 때문에 부모는 “그들의 정신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아이들과의 심리적 관계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7) 특히 자녀에 대한 부모의 냉담함과 무관심은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것이었다. 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설사 어린이들이 진짜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기대수명이 아주 짧은 아이들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었다.”38) 사실 전산업시대 가족 안에서 아동의 위치가 불안정했고 냉담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가혹하게 취급받았다는 것은 이미 필립 아리에스(Philip Ariès)가 주장한 바 있다.39) 스톤은 대체로 아리에스 견해의 연장선에서 16, 17세기 잉글랜드 귀족의 사례를 좀더 세밀하게 투사한 셈이다.
한편, 스톤은 이 같이 냉담한 가족관계가 애정에 바탕을 둔 관계로 바뀌게 된 요인도 경제적 측면에서 찾는다. 우선 부부의 결혼기간이 이전보다 길어지면서 동반자로서의 부부관계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미 17세기 전반에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같은 설교자들이 부부의 동료관계를 강조하였다.40) 수입과 지위에 대한 야심보다도 애정적 만족이라는 관점에서 미래의 배우자를 선택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자녀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관해서도 스톤은 경제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아동지향적인 사회가 발전하는 데에는 어린이의 갑작스러운 조기 사망이 더 감소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경제학자들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아동의 가치는 그들의 생존가능성이 개선될 때 높아진다. 비록 그들의 양육비도 아울러 높아지기는 하지만 말이다.41)
아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고조되던 시대에 귀족과 젠트리 가족의 자녀수가 감소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스톤이 지적한 대로, 양육비 상승과 자녀수 감소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스톤은 그가 수합한 자료를 토대로 평균 자녀수의 변화를 검토한다. 16세기에 귀족 및 젠트리 가족의 자녀수는 평균 5명이었다. 그 숫자는 17세기 전반에 오히려 증가하다가 1660년을 정점으로 다시 감소추세로 반전된다. 1700년경에 그 숫자는 5명 이하로 떨어졌고 같은 세기 중엽에는 4명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42) 자녀수가 감소할수록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정도가 너 짙어졌으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요컨대 17세기 이후 감성적 개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가족관계가 널리 퍼진 것이다.
스톤의 연구는 출간 이후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이러한 논란은 상당 부분 너무나 단정적으로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스톤의 어조 때문에 증폭된 것이다. 우선 그가 설명하는 가족 변화가 단선적인 진화모델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물론 스톤도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에서 게젤샤프트(Gesellschaft)로의 추세를 정확하게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적이고 단선적인 운동은 아니다”라고 스스로 경고하고 있지만,43) 그럼에도 그의 전반적인 논조는 단선적인 진화모델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더 나아가 가족원 사이의 냉담함과 애정을 사망률의 변동에서 찾는 경제결정론적 시각이나 또는 소수의 귀족 및 젠트리 가문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성급함에 대한 비판도 있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전근대사회에서도 부부간 또는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과 애정에 관한 증거나, 가족 구성원의 사망을 애통해하고 비판에 잠기는 증거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그냥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44)
설사 17-18세기 이후 가정중심의 핵가족 출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을 스톤과 다른 시각에서 설명할 수도 있다. 스톤은 귀족과 젠트리 가문의 사례를 통해 정감과 애정으로 연결된 가족의 출현을 언급하지만, 이와 같은 경향은 특히 상인가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 변화를 주도했다는 견해가 있다.45) 18세기 런던 도심에는 전람회・박물관・인형극・서커스 등 어린이의 흥미를 자아내는 시설물과 행사가 곳곳에서 세워지거나 열렸는데, 이 또한 당시의 새로운 변화를 반영하며 그 시설의 주요 고객은 런던 상인층이었을 것이다. 18세기 복음운동(evangelicalism) 또한 ‘폐쇄적인 가정’의 출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운동은 가정의 평화와 구원을 연결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애정과 유대야말로 기독교인이 받는 축복의 징표였다. 구원의 적은 가족 사이의 증오와 질시,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바깥의 온갖 유혹이었다. 복음운동가들은 외부의 유혹에서 멀리 떨어진 가정, 그리고 애정이 충만한 그 가정의 수호자로서 아내의 모습을 내세웠다는 것이다.46)
4. 역사 속의 결혼과 이혼
스톤은 가족사 연구와 함께 결혼제도의 변천과 혼인의 사회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가족, 성, 결혼」에서도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근대 초기 결혼제도와 그 변화과정을 설명하고 있다.47) 그러나 스톤이 이 주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은 캔터베리대주교 재판소(Court of Arches)의 재판기록집(Process Books)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사하는 작업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48) 산업혁명 이전에 캔터베리대주교 관구는 지도상으로 머시(Mersey)강에서 험버(Humber)강까지 대각선으로 이은 선 아래부분에 위치한 모든 교회를 관할했다. 그 당시로는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2가 이 관구에 거주했을 것이다. 대주교 재판소는 관구에 속한 모든 교회법정의 재판에 대한 항소법정이었다. 스톤은 8년여에 걸쳐 이 재판소 기록뿐만 아니라 노리치, 체스터, 코번트리 및 리치필드, 우스터, 글로스터, 엑시터 등지의 교구법정(provincial consistory court) 기록과 런던교구법정(London consistory court) 기록들을 수합하였다.49) 스톤의 「이혼행로」는 이들 기록 중에서 결혼, 성, 도덕 등과 관련된 소송사건을 세밀히 검토하여 16세기 이래 오늘날까지 결혼제도의 변화와 그리고 특히 이혼의 제도화 및 관행화를 추적한 저술이다.50) 이혼의 만연이야말로 근대적 가족이 사실상 해체되고 있다는 유력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800년 전만 하더라도 전에 서구 기독교세계에서는 중세 교회법의 아주 제약이 많은 도덕률 때문에 이혼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오직 로비와 뇌물을 통해 로마교회로부터 결혼 취소 허가를 받을 수 있는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들만이 예외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몇 년 전에 미국의 한 법관이 11동안에 한 부인에게 16회나 이혼 판결을 내렸다. 오늘날 잉글랜드에서 이혼은 사실상 사법적 절차라기보다는 오히려 행정절차가 되었으며, 이혼하는 부부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컨베이어벨트와 같이 빠르게 그리고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결혼한 부부 3쌍에 1쌍의 비율로(미국에서는 2쌍에 1쌍) 법정 이혼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51)
스톤에 따르면, 이제 이혼은 죽음이나 세금 못지않게 우리 문화와 삶의 경험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이혼을 절대 금지하던 중세적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고 언제 이와 같은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는가. 간통의 경우에만 이혼을 정당화하던 것이 어떻게 양측의 단순한 성격차이를 비롯하여 결혼생활의 갖가지 결함만으로도 가능하게 되었는가. 공식적인 파경이 어떻게 스캔들에서 알쏭달쏭한 일상사로 변했는가.”52)
「이혼행로」 1부는 16세기 이래 결혼의 변화를 다룬다. 1563년 트렌트(Trent) 공의회 이래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혼인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다양하게 치러진 결혼을 교회의 통제 아래 통합하려는 조치였다. 즉 사제 및 2-3인의 증인 앞에서 거행된 공식적인 교회결혼식을 거쳐 교구대장에 혼인신고를 한 경우만을 정당한 결혼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영국에서는 중세 혼인법이 그대로 이어졌다. 1753년 이전만 하더라도 결혼은 상당수가 국가나 교회의 통제 밖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상적인 결혼 또한 다양한 절차가 있었다. 상류층의 결혼에서 첫째 단계는 양측 부모들 간의 계약서 작성, 둘째 단계는 증인 앞에서 두 사람의 결혼 서약(즉 약혼), 셋째 단계는 3회에 걸친 교회 결혼식 예고, 마지막 단계에서 교회 결혼식을 올린 후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당연히 결혼식을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나, 법률가들은 오히려 약혼을 더 중시했다.53)
그러나 세 번에 걸쳐 결혼을 서약하는 약혼의 경우에도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있었다. 당시 교회법은 현재형시제(per verba de presenti) 서약과 미래형시제(per verba de futuro) 서약을 구분하였다. 두 사람의 서약을 지켜본 증인들의 확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대를 나의 아내/남편으로 맞습니다”라는 서약은 완전한 구속력을 가진 반면에, “나는 그대를 나의 아내/남편으로 맞이할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이후 잠자리를 함께 갖지 않는 한 구속력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두 남녀의 성관계가 현재형서약과 같은 효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조건부 서약, 즉 “나는 그대의 부친이 동의한다면 그대와의 혼인을 서약합니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 경우 부모나 또른 서약에서 거론된 당사자가 거절하면 구속력이 없었다.54) 당시 지배엘리트는 약혼을 거쳐 공식적인 교회 결혼식을 올렸지만, 서민들의 상당수는 약혼, 즉 서약결혼(contract marriage)으로 끝냈다. 교회가 약혼을 인정한 것은 놀라운 일이나, 이와 같이 복잡한 관행들이 병존했기 때문에 소송사건이 일어났을 때 법적 해석을 놓고 이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스톤에 따르면, 14-18세기까지 영국의 혼인법은 혼란 상태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교회가 결혼서약의 법적 효력을 인정한 반면에, 관습법상으로는 공식적인 교회결혼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 결혼서약만으로 재산이전에 관련된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재산이전 문제를 둘러싼 분쟁을 다루면서 교회법정은 점차로 서약을 입증하는 일 외에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한 판결을 회피하기에 이르렀다.55) 물론 교회는 공식적인 교회결혼식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상류층이 아닌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결혼서약을 거친 후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혼인식을 거행하는, 이른바 비밀결혼(clandestine marriage)이 성행했다.56) 1696-1712년간 의회는 비밀결혼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비밀결혼의 성행에 따른 혼인세, 인지세 수입 감소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일련의 입법은 효력을 거두지 못했다. 특히 런던 시민들 가운데 교회가 아니라 옛날 플릿 교도소(Fleet Prison) 건물터에서 비밀결혼을 거행하는 관행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57)
스톤은 1660-1753년간 비밀결혼의 폭발적인 증가를 특히 주목한다. 국가와 교회의 끊임없는 권유와 강요가 있었음에도 서민층 가운데 이런 식의 결혼이 성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현상은 법과 법의 집행 그리고 공공여론 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결국 이 시대는 사생활에 대한 요구가 모든 사회계층에게서 점증하고 있었다. 스톤에 따르면, 이러한 분위기가 “법과 교회법정의 기소와 징벌이라는 방파제”를 무너뜨린 것이다.58)
1753년 대법관 하드위크 백작(Lord Hardwicke)59)은 비밀결혼을 근절할 법안을 상정했다. 법안은 교회결혼예고장(bann)을 돌리지 않고 교회의 공식 허가를 받지 않거나, 또는 미리 정한 시간에 교회에서 성직자의 집전으로 의식을 거행하지 않은 모든 결혼을 무효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밖에도 플릿 교도소에서 돈벌이하는 성직자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부모의 동의 없는 21세 미만 남녀의 결혼이나 단순한 서약만을 거친 약혼이나 교구기록에 등재하지 않은 결혼을 모두 무효화하는 내용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었다.60) 스톤은 1753년 법이 사실상 효력이 없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사적 자유와 사생활에 대한 요구가 법적 통제를 무력화한 좋은 보기이다.
다음으로 「이혼행로」 2부는 16세기 이래 별거와 이혼의 사례들을 다룬다. 스톤의 설명에 의하면, 근대 초 영국에서 이혼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였고, 그 가운데 둘은 법정소송을 포함하였다. 첫째 방법은 교회법정에 별거 소송을 내는 것이었다. 이 경우 간통의 증거나 생명의 위협의 증가가 있으면 즉시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은 의회법에 의거하여 재혼을 서약하는 것을 조건으로 완전히 이혼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1690년 이후에 가능했지만, 이 법을 통해 이혼을 얻어낸 경우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세 번째 방법은 사적인 별거였다. 이것은 두 배우자 간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잉글랜드에서는 아내 매매의 사례도 가끔 볼 수 있었다.61)
그러나 공식적인 절차 없이 부부가 갈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18세기에 그와 같은 절차 없이 성행한 것은 사적 별거였다. 사적 별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은 감성적 개인주의의 성장과 사생활의 확대와 같은 사회 분위기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기존의 혼인관련법이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62) 당시 국가와 교회가 그 변화를 수용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공적 담론의 주제로 다시 등장하였다. 스톤은 별거한 부부들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부부 가운데 아내 쪽에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도 한다.
사실 스톤의 혼인과 이혼의 사회사 프로젝트는 「이혼행로」 출간으로 완결되지 않았다. 그는 그 이후에도 결혼, 간통 등에 관련된 소송사건 기록들을 치밀하게 들춰내어 과거 개인들의 삶의 생생한 연대기를 재구성하였다. 1992년과 93년에 연이어 펴낸 두 권의 저술, 「불확실한 혼인」과 「파경의 삶」이 바로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앞의 저술은 주로 1753년 이전의 혼인 사례들을, 그리고 뒤의 것은 1857년 이전의 이혼 사례를 소개한다. 스톤은 교회법정기록을 치밀하게 읽으면서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침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이러한 독법을 ‘훔쳐보기’(voyeurism)라고 불렀다. 사실 훔쳐보기는 소설쓰기의 전제조건의 하나다. 역사가들 또한 작가가 그러하듯이, 죽은 사람의 사생활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스톤은 훔쳐보기야말로 사회사 서술의 필수적인 기법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찍이 내러티브 역사의 부활을 예견했던 그는 문학적 역사쓰기를 몸소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톤은 「이혼행로」에서 앞으로 펴낼 두 저술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계획을 은밀하게 알려준다.
[이들 두 책의] 사례연구들에서 망자는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들 자신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들 자료를 읽는 독자들은 사실상 역사적인 엿보기꾼이 되어서, 열쇠구멍이나 밀실의 갈라진 틈 또는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훔쳐보든지, 아니면 벽에 귀를 바싹 들이대고 엿듣는 것이다.63)
5. 스톤이 보여준 것
로런스 스톤. 그는 분명히 20세기 역사학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역사가였다. 그는 유행을 선도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인접 사회과학 분야의 새로운 사조와 학문적 축적에 관심을 기울였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말이라고 기억된다. 모름지기 훌륭한 역사가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의(義) 또는 분별력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를 모으고 부단히 매진할 수 있는 근면함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뛰어난 문장이라는 것이다. 스톤이야말로 이러한 조건을 갖추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역사가로 보인다. 「귀족의 위기」에서 「파경의 삶」에 이르는 그의 일련의 저작들은 그의 분별력과 근면과 뛰어난 문장을 여실히 입증한다고 할 것이다.
우선 스톤은 전형적인 전문역사가였다. 방대한 사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해독하는 지루한 작업을 거쳐 연구대상으로 삼은 사회를 형상화하고 재구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실증적인 역사가는 먼지 쌓인 문서고에서 밤을 지새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트리벨리언(G. M. Trevelyan)이 말했듯이, “역사가는 저 불타오르는 열정 때문에 마법의 거울을 응시하여 거기서 매일 새로운 인물들을 보고, 또한 그의 온 생애를 만족스럽게 소진하며, 매일 아침 연인처럼 열심히 도서관과 문서고로 다가선다.”64) 「귀족의 위기」에서 「이혼행로」에 이르기까지 그가 저술의 원재료로 이용한 사료들은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 방대한 원재료를 학문적 열정으로 녹여내어 사회사 서술의 풍요로운 내용물로 바꾼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성실한 사회사가로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다음으로, 스톤의 대부분의 연구서는 전체사 서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귀족사회나 가족사나 또는 결혼의 사회사 등 어떤 주제를 선택하더라도 그 주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과 상황을 살피고, 그 다음에 그 주제 특유의 구조와 변동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건축구조물과 같은 균형미를 느끼게 한다. 사실 전체사 서술은 전시대 역사가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젊은 역사가들에게서 전체사를 서술하려는 시도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접근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방식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서술은 궁극적으로 전체사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사회사가의 경우 더욱 더 그렇다.
마지막으로, 스톤은 새로운 방법론과 새로운 분야에 늘 호기심을 가진 개방적인 역사가였다. 그는 일찍이 통계적 방법의 도입을 선도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학의 여러 개념과 연구방법을 차용하여 역사 연구의 외연을 확대했다. 말년의 저술들은 그가 이전에 이미 예견했던 내러티브 역사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해체론적 경향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역사학의 위기를 언급하기도 했다.65)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전문역사가라면 당연히 가졌음직한 의구심이었을 뿐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방법들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방법들이 역사학의 본령을 훼손하고 급기야는 역사학과 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역사연구에 원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방법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 자신의 말대로 ‘마지막 휘그주의자’였다. 이제 스톤은 그가 몰두했던 그 과거로 사라졌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일련의 방대한 저작과 더불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 《가디언》지 기사의 한 구절을 들어 스톤을 위한 묘비명으로 기록하려고 한다.
스톤은 역동적이고 왕성한, 재기에 넘치고 부드러우면서도 짓궂은 대가였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사회사를 흥미롭고도 자극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점, 사회사 연구를 자극하고 고무하면서 새로운 탐구영역과 새로운 사료더미를 들추어냈다는 점에 있다.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