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시대 이후 독일 민족주의의 발흥 : 우리는 당당한 집을 지었다>
‘우리는 당당한 집을 지었다 Wir hatten gebauet ein stattliches Haus’ 이 노래는 대표적인 독일 학생 노래이며, 브람스의 ‘대학 축전 서곡(Akademische Festouvertüre)’에 삽입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다.
이 노래는 독일 통일과 자유의 염원을 담고 있다. 나폴레옹 유럽 제국이 해체된 후 독일인들은 국가 재건의 과제에 직면하였다. 독일 민족 국가 형성의 구체적인 행동은 대학생들 조직인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에서 시작되었다. 이 노래는 예나(Jena) 대학 부르셴샤프트의 노래였다.
1. 역사적 배경
나폴레옹 시대 이후 유럽의 새로운 체제(소위 ‘빈(Wien) 체제)는 정통성과 복고를 원칙으로 하였다. 군주제와 귀족제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은 부활하지 않았고, 새로운 독일 연방(Deutscher Bund; German Confederation; 일종의 국가연합)이 구성되었다. 이는 독일 지역의 39개의 영방 국가들(분방; Gliedstaaten)의 연합체였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나폴레옹의 혁명은 독일에도 자유의 평등의 희망을 전파하였다. 반면 나폴레옹의 프랑스 패권주의는 독일에 민족주의와 단결을 분발시켰다. 독일은 이렇게 자유의 헌정질서와 민족 국가 형성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두 과제는 분리되지 않았다. 자유롭고 명예로운 독일 민족국가는 하나의 열망이었다.
이러한 열망은 대학에서 선도되었다. 대학 교수들은 시민의 자유와 독일의 통합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고양되었다. 독일 ‘체육의 아버지’ 얀(Friedrich Ludwig Jahn)은 당시 베를린 대학 총장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에게 ‘학생 조합(Burschenschaft)’의 조직을 제안하였다. 그 청원은 수용되지 않았지만, 얀의 제안은 대학생 사회에 호응을 얻었다. 특히 예나(Jena) 대학의 학생들은 스스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1813년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해방전쟁에 참여했던 ‘자유군단’ 출신이었다.
부르셴샤프트 대학생들은 예전 결투, 소동, 음주의 대학문화와 결별하였다. 애국심으로 충만했고, 도덕적 책임감으로 고양되었다. 예나 대학 부르셴샤프트의 모토는 ‘명예, 자유, 조국’이었다. 학생들은 1817년 나폴레옹을 물리친 라이프치히(Leibzig) 전투를 기념하여 바르트부르크(Wartburg)에서 학생 조합 총회를 소집하였다. 바르트부르크 성(城)은 독일 민족을 일깨웠던 루터가 기거하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던 곳이었다.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를 위해 행진해 가는 학생들
(저자 미상, 출처 : 독일 위키 백과, https://de.wikipedia.org/wiki/Wartburg)
학생들은 민족의 결속을 위해 전독일 부르셴샤프트 결성을 결의하였다. 예나 대학생들의 상징이었던 흑-적-황을 독일 전체 대학생의 상징 색으로 채택하였다. 이 흑-적-황 깃발은 후에 독일의 국기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윌리엄 카, 이민호/강철구 역, 독일근대사, 개정증보판, 탐구당, 1996, 28쪽). 또한 학생들은 루터가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듯이, 반독일적인 문서들을 불태우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학생들의 민족주의는 과격하게 발전해 갔다. 예나 대학 부르셴샤프트 회원이었던 잔트(Karl Ludwig Sand)는 문필가 코제부에(August von Kotzebues)를 살해하였다. 코제부에는 독일 민족통일에 회의적이었으며 러시아 황제와 가까웠던 인물이었다. 이후 정치테러가 이어졌다. 독일 연방 빈(Wien) 체제를 주도했던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는 주요 분방국 대표들을 카알스바트(Karlsbad)에 소집하여 포고령을 발하였다. 대학을 감시하고 교수들을 해임하고 기숙사를 폐쇄하고 학문의 자유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학생조합 부르셴샤프트의 해체를 명하였다. 예나대학 부르셴샤프트도 사태가 여의치 않음을 인식하고 자발적 해체를 선언하였다.
2. 노래 설명
이 노래의 작사자는 폰 빈처(August Daniel von Binzer)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앞서 본 예나 대학 부르셴샤프트 회원이었으며, 바르트부르크 성 축제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예나가 있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은 대학에 관용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칼 아우구스트(Karl 혹은 Carl August) 대공은 바르트부르크 축제를 승인하였다. 나아가 예나 대학의 학문적 위상을 위하여 그 축제에 재정 지원까지 하였다. 예나 대학 학생들을 필두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바르트부르크 축제에 모인 전체 인원은 500명이었고, 대학생들은 468명이었다(이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당시 독일 연방 전체 대학생 수는 8,718명이었다. 김장수,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푸른 사상, 2006, 68-69쪽).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부르셴샤프트 운동은 과격하게 진행되어 비인체제의 반동을 불러왔다. 메테르니히는 ‘카알스바트 포고령’으로 대학 통제와 대학생 탄압에 나섰다. 예나 대학 학생들은 자신들을 후원해 주었던 칼 아우구스트 대공의 처지를 우려하며 부르셴샤프트를 자체 해체하기로 결의하였다(김장수, 앞의 책, 99쪽). 그 해체의 시간에 학생들은 경건하고 결연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앞서 보았듯이 이 노래는 브람스의 ‘대학축전 서곡(Akademische Festouvertüre)’에 삽입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어여쁜 장미야 참 아름답다’는 동요로 많이 불려졌다.
아래 독일 학생들 노래 버전과 가사를 올린다.
https://youtu.be/Xhuc5k470kE
<우리는 당당한 집을 지었다. Wir hatten gebauet ein stattliches Haus>
독일 전래 학생 노래, 작사 August Daniel von Binzer, 번역 정태욱
1. Wir hatten gebauet ein stattliches Haus, und drin auf Gott vertrauet trotz Wetter, Sturm und Graus.
2. Wir lebten so traulich, so innig, so frei, den Schlechten ward es graulich, wir lebten gar zu treu.
3. Sie lugten, sie suchten nach Trug und Verrath, verleumdeten, verfluchten die junge, grüne Saat.
4. Was Gott in uns legte, die Welt hat’s veracht’t, die Einigkeit erregte bei Guten selbst Verdacht.
5. Man schalt es Verbrechen, man täuschte sich sehr; die Form kann man zerbrechen, die Liebe nimmermehr.
6. Das Band ist zerschnitten, war schwarz, rot und gold, und Gott hat es gelitten, wer weiß, was er gewollt.
7. Das Haus mag zerfallen. Was hat’s dann für Noth? der Geist lebt in uns Allen, und unsre Burg ist Gott! | 1. 우리는 당당한 집을 지었습니다. 그 안에서 궂은 날씨, 폭풍, 공포에도 신을 믿습니다.
2.우리는 그렇게 친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자유롭게 우리는 너무나도 신실하게 살아와서, 악인들은 괴로워했습니다.
3.악인들은 염탐하고 속임수와 배신을 시도하였습니다. 푸른 어린 씨앗을 헐뜯고 저주하였습니다.
4.신이 우리 안에 놓으신 것을 세상은 경멸하였습니다. 심지어 좋은 사람들도 우리의 하나됨을 의심하였습니다.
5.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라고 비난했지만, 그들은 틀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양은 깨뜨릴 수 있지만, 사랑은 결코 해칠 수 없습니다.
6.흑, 적, 황 깃발은 찢겨졌습니다. 그러나 신의 역사입니다. 신의 뜻을 누가 알겠습니까?
7.집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대수겠습니까? 신은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하고, 우리의 성은 바로 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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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래에 대하여는 일찍이 여기 게시판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이 노래가 삽입된 브람스 대학 축전 서곡, 또 이 노래의 우리나라 동요 버전도 링크 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epistle/IfQN/100?svc=cafeapi
3. 이후의 전개
독일 연방의 빈(Wien) 체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은 독일인들을 다시 고무시켰다. 1832년 함바흐 축제(Hambacher Fest)에 수 만 명이 운집하였다. 흑-적-황의 3색기가 휘날렸다. 독일인의 자유와 민족 통일의 열망은 대학을 넘어 전체 사회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자유와 민족의 목표는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라인 위기(Rheinkrise)가 분기점이 되었다. 프랑스 수상 티에르(Adolphe Thiers)가 라인 강 국경을 재차 주장하며 라인 강 좌안의 무력 점령을 시도하였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고, 독일인들은 프랑스의 자유에 대하여 환멸하였다. 민족주의 열망이 혁명적 자유주의를 흡수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시민혁명은 좌절하고 대신 민족혁명(통일제국 수립)은 성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