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화창한 5월의 어느 봄날!
조촐하게 시작한 생일 잔치가 벌써 18주년이 되었습니다.
어엿한 고등학생이 된 셈이네요.
5월은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석가탄신일 등 뜻깊은 날이 참 많은데
그 속에 발족식인 우리의 생일이 있어서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듯 합니다.
오징어 삼행시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 전하려 합니다.
오! 래토록
징! 그럽게
어! 울리자 !!!
1. 답사일 : 2026년 5월 10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정각 출발
3. 답사지
1) 발족식과 스승의 날 행사 (왕성목공원 : 원주시 반곡동 2049-5)
18번째 생일 잔치와 스승의 날 행사를 멋지게 하고 답사를 시작하겠습니다.
2) 운곡 원천석 선생 묘 (원주시 행구동 산 37)~~기룡혈의 진수를 볼 수 있음
운곡 원천석(1330~) 선생의 묘이다.
원천석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밝아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기도 하였다.
고려말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조선왕조가 들어서 선생에게 벼슬이 주어지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묘역 내에는 봉분 앞에 묘비와 제사음식을 차려 놓을 수 있는 상석(床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있는 소박한 형태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3) 국형사 동악단 (강원도 원주시 고문골길 155)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순왕 때 무착(無着)이 창건하여 고문암(古文庵)이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고문암이 아니라 관음보살을 보신 보문암(普門庵)이었다고도 한다.
조선 초 태조는 이 절에 동악신(東岳神)을 봉안하고 동악단을 쌓았으며, 매년 원주 · 횡성 · 영월 · 평창 · 정선 고을의 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 관계로 국형사라 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조선시대 정종의 둘째 딸인 희희공주가 늘 몸이 약해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어떤 약을 써도 치료되지 않자, 이 절에 보내어 백일기도를 드렸다.
하루는 공주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병을 고쳐 주리라고 한 뒤 완쾌되었으므로 정종이 기뻐하여 절을 크게 확장하고 절이름도 고문암을 국형사로 고쳤다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치악산 국형사 [雉岳山 國亨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4) 조엄 선생 묘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산69-12번지)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이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 조중운(趙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도보(趙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합격, 음보로 내시교관(內侍敎官) ·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내고, 1752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지평 · 수찬 · 교리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 · 충청도암행어사를 거쳤다.
1758년에 이례적인 승진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도내(道內) 사노비(寺奴婢) 1만 여명의 노비공(奴婢貢)을 견감(蠲減)시켜 그 불만을 가라앉히고 한전(旱田)에 대한 감세(減稅) 비율을 적용, 전세 부담을 줄이는 한편,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치적을 쌓았다. 중앙으로 진출한 뒤 대사헌 · 부제학 · 승지 ·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 · 한성부우윤, 예조 · 공조의 참판 및 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로 서용되었지만,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벽파(僻派)인 홍인한(洪麟漢) · 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했다는 홍국영(洪國榮)의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어 일단 벗겨졌던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의 부정 혐의가 새삼 문제가 되어 탐재학민(貪財虐民)한 부패관리(贓吏)의 대표적 인물로 지목,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귀양이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다. 민생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다.
특히 경상도관찰사 재임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던 점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1794년(정조 18) 좌의정 김이소(金履素) · 평안도안핵어사(平安道按覈御史) 이상황(李相璜)의 노력으로 신원되고, 1814년(순조 14)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통신사로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海槎日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이 영기 (010 - 9001 - 4561)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